189. 해외여행
던전에서 광검제가 보여줬던 마왕과의 전투는 초월급에 올라선 지금에도 따라 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차원이 다른 전투였다.
그조차도 모든 힘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고 했었다. 광검제를 제외하고는 살아있는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되었는데도 아직 한참 모자란 것 같다.
인천의 변이체들은 생김새가 바다와 육지를 오가며 살아가는 놈들 같았다. 망둑어를 매우 고약한 모습으로 진화시키면 이런 모습일까? 예전에 책에서 보면 심해어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오마하 해변 상륙작전처럼 바다에서 버스 크기의 중형 변이체 수십마리가 바다에서 기어 올라와 원거리 공격을 대공포처럼 쏘아대는 것을 보고 있으니 문득 광검제가 마왕과 대련을 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오러를 마치 기관총처럼 쏘아대던 그것을 나도 어느 정도는 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광검제는 검을 사용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힘들 것 같아서 슈바르거트를 이용해야만 했다.
변이체 수십마리가 원거리 공격은 분명 위력적이었다. 이 정도 화력이면 어떤 군대나 생존자 집단도 감히 대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확도나 속도가 그렇게 정확하고 빠른 것은 아니어서 공중에 있는 나에겐 크게 위협적이진 않았다. 간혹 대공포처럼 근처에서 폭발하며 크레모아처럼 파편을 날리는 것들이 있긴 했지만, 그 정도는 방벽으로 충분히 방어가 되었다.
검에 깃든 오러를 매우 짧게 끊어서 지상을 향해 날려보았다. 광검제가 했던 것과는 매우 다르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광검제와 마왕의 그것은 마치 기관포처럼 1초에 수십발이 쏟아냈었다. 나도 그렇게 수십 개의 오러를 날렸지만, 광검제의 그것과는 속도와 위력에서 천양지차였다.
그러나 내가 쏘아낸 오러들도 위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초월급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몇 명 올라서지 못한 영역이다. 광검제라는 비교 대상이 잘못된 것이다. 물론 그 비교 대상이 다른 세상의 나라는 것이 조금 신경 쓰이지만, 그쪽은 지구에서부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고 나는 이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콰콰쾅!
변이체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떨어진 오러들이 대폭발을 일으키며 미처 그것을 피하지 못한 변이체들이 조각나 사방으로 비산했다.
“쓰읍, 이게 아닌데”
어떻게 개량해야 잘 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을 하며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기 시작했다. 야구의 변화구 던지듯이 오러의 궤적을 바꿔보기도 하고 위력은 줄이고 연사 능력을 올려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지상에 있던 변이체들이 전멸해버렸다. 확실히 나는 강해졌다. 분명 며칠 전만 하더라도 이렇게 쉽게 처리하지 못할 상대였다.
지상으로 내려가 녀석들의 능력을 흡수하고 다시 탐색을 시작했다. 그렇게 인천을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다른 변이체나 특이한 사항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곳은 하나다. 정확히는 대한민국에서 남은 곳은 단 한 곳 서울뿐이었다.
서울 방향으로 이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서울 안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비행하는 나로서는 인천에서 서울이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서울 역시 문명의 흔적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다른 곳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막대한 잔해들은 이곳이 예전에 가장 많은 인간이 살았음을 증명해주었다.
속도를 조금 늦추어 최대한 살펴 가면서 진행하는데 조금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변이체가 없었다. 천만이 살았던 도시에 남아있는 변이체가 없다는 것이 조금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랜드마크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던전에서 경험했던 서울의 지형을 생각해볼 때 강남구쯤으로 생각되는 곳에 변이체가 한 마리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그 어떤 변이체보다 거대하고 강해 보이는 녀석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와 녀석의 거리는 아직도 상당히 남아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느끼고 있었다.
서울을 지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녀석은 거대한 지네처럼 보였다. 수백미터는 될 것 같은 다족류의 괴물이 화난 코브라처럼 머리를 빳빳이 세우고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와 그 녀석은 서로 바라보며 한참 동안 대치 상태로 있었다. 이 녀석도 아귀처럼 인간화가 된 것인지 곧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나도 바로 전투에 들어가지 않았다. 딱히 두려운 것은 아니다. 초감각이 위험신호도 보내지 않고 있었다. 잠시 감상에 젖었을 뿐이다.
방사능 때문에 진입하지 않은 지역을 제외하면 대한민국에 남은 마지막 변이체다. 세계에서 보자면 아주 작은 지역에 불과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업적이나 마찬가지다.
“너 좀 기다리고 있어라.”
녀석을 바로 해치울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니 집에 돌아가지 않은 시간이 좀 되었다. 맛있는 것은 아껴먹고 싶은 심리라고 할까.
녀석을 바로 해치우고 싶지 않았다. 놈이 순수한 변이체였다면 이미 달려들었을 테고 전투가 벌어졌을 테지만 그러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
하늘 높은 곳으로 솟아오른 뒤 통로를 열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스승님이 깜짝 놀라 달려오셨다. 기세를 숨기는 반지를 끼고 있다고 해도 미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내가 돌아오자마자 바로 알아차리신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스승님은 턱이 빠질 것만 같았다.
“빅터야···.”
순수한 무인으로서 그 끝을 본 것이나 다름없는 제자를 본 스승님의 심정을 나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다녀왔습니다.”
나는 입꼬리가 실룩거리는 것을 참으며 최대한 별것 아닌 것처럼 인사를 올렸다.
“대단하구나.”
등을 두드려주시는 스승님의 손이 멈출 줄을 몰랐다.
하루는 그렇게 스승님에게 투자를 했다. 초월의 영역에 이르는 과정과 내가 느낀 모든 것을 스승님에게 말씀드렸다.
이것은 세상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얘기였다. 무인이라면 그것도 7성 이상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천금이 아니라 만금을 들여서라도 듣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당분간 이 이야기는 비밀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미 9성에 올라선 것도 충분히 힘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하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는 초월급이라고 하는 데 더할 것이다.
감히 질투하거나 공격하는 부류는 오히려 적어질 것이다. 질투나 시기도 적당히 급이 맞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여태까지 나에게 우호적이라고 할 수 있었던 왕실을 걱정해야 할 판국이다.
개인의 무력으로 국가를 이길 수 있다.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지만 왜 과거에 제국의 황제가 용사들에게 꼼짝도 못 했는지 이제는 공감할 수 있었다.
대륙을 통일하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최강의 국가였던 제국도 그랬는데 지금의 라이브러쉬 왕국은 이제 나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선수를 치기로 했다. 왕실에 방문 신청을 넣고 곧바로 국왕을 찾아갔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왕궁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얼마나 과정이 복잡했는가?
국왕을 만나자마자 반응은 곧바로 나왔다. 같은 자리에 있던 왕세자는 느끼지 못한 것 같지만, 국왕은 8성의 기사다. 나를 보자마자 내가 또 하나의 벽을 넘었음을 느낀 것이다.
“자네는 대체···.”
국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은 바쁜 일이 없었는지 함께 참석한 근위기사단장 지글러 후작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하하하하!”
국왕의 앞이라는 것도 잊은 듯 지글러 후작은 헛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왜들 그러십니까?”
무슨 일인지 모르는 왕세자만이 어리둥절하여 국왕과 지글러 후작을 번갈아 가며 쳐다볼 뿐이었다.
“하네스 백작이 벽을 넘은 것 같습니다. 맞나?”
설명은 지글러 후작이 해주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정말로 용사 특전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아렌 세인티아의 남겨진 힘이 없었다면 혹은 정말 우연처럼 떠오른 할아버지의 유언이 화두가 되지 못했다면 나는 벽을 넘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벽을요?”
잠시 생각하던 왕세자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한박자 늦게 놀란 것이다.
“저런 성장 속도는 전설에도 나오지 않네.”
“광검제께서도 저 나이 때 저만큼 강하진 못했습니다.”
국왕과 지글러 후작이 감탄사를 주고받았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광검제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스무살이 넘은 후다. 반면에 나는 아직도 17살이다.
“그래서 벽을 넘자마자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이 자리를 달라고 하면 바로 넘겨줄 생각도 있네만”
국왕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내뱉었다.
“그 반대입니다. 여전히 저는 라이브러쉬의 충성스러운 신하임을 증명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지요.”
나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봤다. 충성심 같은 것은 당연히 없다. 물론 그렇다고 역성 혁명을 꿈꾼다는 것은 아니다. 광검제와 용사들이 그랬듯이 그런 귀찮은 자리를 맡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무엇을 원하나?”
국왕은 진지한 어조로 나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나 역시 진심이다. 그저 나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두길 원한다.
“아니 원해야 할걸세. 자네 마음은 대충 알 것 같은데 세상이 그리 쉽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야. 자네는 괜찮아도 내가 괜찮지 않네.”
“그럼 작위라도 좀 올려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자네가 그걸 원한다면 대공자리는 줘야 할 텐데 그것을 바라진 않을 테니?”
대공도 결국은 공왕이 아닌가? 거기에 나를 따르기로 하는 귀족들이 전부 이주를 해올 것이다. 하네스 파벌의 귀족만 해도 숫자가 엄청나다.
“예, 저는 그저 지금과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귀찮은 것은 싫지만 실리는 얻고 싶다. 상당히 이기적인 생각 같지만, 나 정도 되면 그래도 된다.
“그럼 가장 편하고 쉬운 길은 결국 그것으로군요.”
왕세자가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과연···. 그 방법이 가장 좋겠지.”
국왕이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이 사람들 몇 번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준비한 빌드업을 쌓아 올리는 느낌이다.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이브를 데려가게나.”
잊고 있었다. 가장 확실한 아군을 만드는 방법, 바로 혼인이다. 물론 이것도 절대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다.
“전 아직 어리고 당장은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자네가 이 제안을 받지 않는다면 반역을 생각하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네.”
아니 이걸 이런 식으로 엮는다고?
반쯤은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반은 진심일 것이다. 확실히 왕실에서는 나를 그 정도로 위협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내가 초월급이 돼서 가 아니라 그 전부터 준비했던 것 같았다.
저쪽이 뻔뻔하게 나온다면 나도 그렇게 맞설 수밖에 없다. 광검제도 과거에 황제로부터 비슷한 제의를 받았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기야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와 이시리엘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 제안을 받았더라면 제국이 두 여자 초인들의 손에 의해 멸망했을 것이다.
“진짜 반역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국왕과 왕세자 그리고 근위기사단장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지만, 나도 국왕처럼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상황에 따라선 이 발언 하나만으로도 반역죄를 덮어씌울 수도 있겠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네 아니면 데려갈 사람도 없네.”
“슬라이트나 자칼이 있지 않습니까?”
급을 맞춰보자면 그렇다.
“자네가 아버지라면 공작새를 놔두고 닭에게 딸을 시집을 보내겠나?”
“그 둘이 닭까지는 아닙니다만”
나와 같은 운 좋은 범재가 아니라 진짜 천재들이다. 시간이 문제일 뿐 둘도 충분히 초월에 닿을 수 있는 인재들이다.
“그럼 정정하도록 하지. 공작새와 꿩으로 하세”
그게 그거인 것 같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몇 년 정도는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지.”
몇 년이 아니라 10년은 기다리셔야 할 텐데. 그 전에 아이브 공주가 자기 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이야기를 자네에게 전달할지 말지 고심 중이었는데 이제는 해줘도 될 것 같군.”
“무슨 이야기입니까?”
“제멜아크에서 도움을 요청했네. 정확히 자네를 콕 찍어서 말이야.”
“제가 필요할 정도의 일입니까?”
“포교자가 나타났다고 하더군.”
갑자기 해외여행을 할 일이 생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