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서울의 변이체
서울의 지네를 처치하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포교자를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제가 가도 되겠습니까?”
국왕의 허가는 받아야 한다. 사실 국왕이 진심으로 바랐던 것은 혈연으로 이어지는 것보다 이런 것일 것이다.
“내가 자네를 막을 수 있겠나?”
“가지 말라고 하시면 가지 않겠습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국왕의 입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가게나. 보상은 내가 두둑이 뜯어내 주지.”
“폐하께서 어련히 잘하시겠지요. 믿고 맡기겠습니다.”
“그럼 우리 부마를 위해 내가 뭘 못하겠나?”
“그건 아직 이릅니다.”
은근슬쩍 사위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바로 차단했다.
“일은 빠를수록 좋으니 내일 출발하도록 하지요.”
“연락은 우리가 해놓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사실 국왕의 도움도 필요 없었다. 나는 라이브러쉬 왕국의 귀족으로는 유일하게 제멜아크 왕국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허가를 받았으니까. 다만 그곳에 가서 높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다른 얘기인데 내 도움을 요청했으니 그것도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직접 하자면 조금 귀찮을 수도 있는 일을 국왕이 처리해준다니 고마울 뿐이다.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쉬...었으면 좋았겠지만, 하네스 파벌의 일로 마그나를 비롯한 수뇌부와 저녁 내내 긴 회의를 한 후에 새벽에 곧바로 제멜아크를 향해 떠났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라이브러쉬의 왕도에서 제멜아크의 왕도까지 쉬지 않고 날아갈 수는 없었다. 지금보다 한두단계 정도 더 경지를 올린다면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었다.
새벽에 출발하여 해가 질 때까지 날았다. 중간에 국경을 통과했고 예전에 머물렀던 제국의 던전이 있었던 곳의 상공을 통과했다.
지금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지만, 그 던전 안의 이공간에는 지금도 광검제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던전을 지나친 나는 제멜아크 왕국의 동부 어딘가의 산에 내려앉았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굳이 어딘가의 영지에 들러 소란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잠시 쉬고 난 후 통로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눈이 빠지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서울의 주인이 나를 맞이했다.
통로를 열고 들어가자마자 후끈한 화염이 덮쳐왔다. 아무래도 내가 통로에서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인간화가 되었다고 할까? 머리를 쓸 줄 아는 녀석이다.
변이체들은 어떤 부분에서는 멍청한 것 같지만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서는 또 비상하게 머리가 돌아가고는 한다.
지독한 화염이었지만, 이 정도는 오러의 방벽으로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애초에 내가 통로를 만들어 빠져나갔을 때 이런 경우를 생각해 꽤 높은 고도에서 통로를 열고 집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이렇게 불꽃축제를 벌여가며 환영을 한다는 것은 지네 녀석도 비행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그런 능력이 없는 것처럼 땅에 붙어있었는데 연기를 했던 걸까?
화염이 걷히기도 전에 전봇대만 한 다리가 창처럼 찔러 들어왔다. 수많은 지네의 다리 중 하나였지만, 그 질량만으로도 위협적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냥 맞아줄 정도로 나는 느리지 않다. 지네에게는 미안하지만 하늘에서 기동성은 내가 더 위다.
위로 상승하며 화염과 다리를 피하고 나자 녀석의 몸 전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수백미터짜리 지네가 꿈틀거리며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변이체가 아니라면 꽤 멋있게도 보였을지도 모른다. 번들거리는 검은색 갑각질의 지네가 전설에 나오는 용처럼 날아다니는 장면은 블럭버스터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멋있지만, 지금은 그저 죽여야 할 변이체일 뿐이다.
투타타타타!
실제로 저런 소리가 난 것은 아니지만, 슈바르거트에서 오러가 짧게 끊어지며 날아가는 광경은 그런 효과음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이제 광검제처럼 기관포처럼 오러를 쏘아낼 수 있다.
전에는 기술이 부족해서 흉내 내기 힘들었지만, 그것을 인천의 변이체들이 보완해주었다. 원거리 공격을 퍼붓던 인천의 변이체에서 흡수한 능력이다.
이 녀석들은 특이하게도 원거리 공격에 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딱히 종류를 가리지 않는 듯 했다. 덕분에 기술과 경지가 부족한 것을 이능으로 보완했다.
콰콰쾅!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쏟아낸 오러의 다발은 워낙 덩치가 큰 탓에 대부분 지네의 몸에 적중했다.
키에에엑!
꽤 큰 폭발이 일어나 지네가 휘청거렸지만, 놀랍게도 녀석의 단단한 갑각질은 뚫리지 않았다. 아무리 짧게 끊어내 쏘았기 때문에 위력이 약해졌다고는 해도 이것을 맞고도 멀쩡한 변이체는 처음이었다.
역시 서울을 차지했던 변이체라고 해야 할까? 천만 도시를 통째로 집어삼킨 녀석이면 이 정도는 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다른 것은 어떨까? 맷집이 좋은 녀석을 만났으니 그동안 실제 위력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던 여러 가지 능력을 모두 사용해볼 기회였다.
오러가 통하지 않는다면 이번엔 레이저다. 손에서 뿜어진 빛의 기둥이 녀석의 미간에 정확히 꽂혔다.
갑각이 녹아내리며 내부에도 큰 피해를 입었는지 이번에 전보다 훨씬 큰 비명과 함께 녀석이 격렬하게 몸을 꿈틀거렸다. 동시에 거대한 몸의 꼬리 부분을 휘둘러 나를 후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역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녀석의 공중전 능력은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일단 지네가 날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다. 녀석의 홈그라운드는 지상일 것이다. 녀석은 기습을 위해 하늘을 전장으로 선택했지만, 영 잘못된 선택이었다.
레이저의 위력은 대단했다. 적어도 오러를 짧게 끊어서 쏘는 것보다는 훨씬 강한 위력임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 아쉬웠다.
미간의 갑각이 녹아서 뚫렸지만, 공격의 특성 때문에 상처를 태워서 자동으로 지혈이 된 것인지 출혈도 없었다.
이번엔 능력을 얻은 후 아직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한 것을 시험해볼 차례다. 지네는 발악이라도 하듯이 거대한 몸을 앞세워 거대한 다리와 몸으로 공격했지만, 나는 그것을 유유히 빠져나가며 새로운 능력을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주위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처음 사용해보는 넋인데 생각보다 소모되는 마나의 양이 엄청나다. 지금이니까 이 정도지 예전이었다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소모량이었다.
바람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지네가 휘청거릴 정도의 강풍이 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지금 사용하는 능력은 두 번째로 오래 살아남았던 생존자에게서 얻은 것이다. 몇 개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에게서 얻은 능력은 기상조종이었다.
거의 한 달 동안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그 엄청난 폭풍은 바로 그 사람이 만든 작품이었다. 아마도 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술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소지품의 기억을 시간이 나는 대로 계속 읽었지만 알아낸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한가지는 알아낼 수 있었다.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그런 엄청난 기술을 사용해야만 했던 이유다. 그것은 생존자가 지구에 와서 만났던 적 때문이었다.
나는 당연히 그것을 부교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한라산에서 회수했던 소지품에서 읽어낸 기억에는 예상외의 인물이 튀어나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누군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제멜아크 왕국의 검제 쿼런틴 피어스 공작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존자의 기억에선 교주가 나왔다. 쿼런틴 피어스 공작이 얘기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외모는 달랐지만, 분위기로 봐서 그것이 교주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교주는 큰 부상을 입고 있었다. 오른쪽 팔이 사라져있었고 오른쪽 눈도 시커먼 구멍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왼쪽 다리도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교주는 강했다.
생존자도 약하지 않았다. 아니 엄청나게 강했다. 광검제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을 펼쳤다. 대한민국 전체가 영역에 들어오는 거대한 폭풍을 소환한 것이다.
그런 폭풍을 지근거리에서 정통으로 맞았다. 번개가 1초에도 수십발씩 내리꽂히고 변이체조차 견딜 수 없는 강풍이 불었지만, 교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폭풍을 뚫고 걸어들어와 생존자의 심장을 뽑아냈다.
마치 어린아이의 손에 들린 과자를 뺏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교주가 아니라면 누가 교주겠는가.
그것이 교주가 아니고 하수인 중의 하나라면 이 싸움은 하나 마나였다. 10년 후에도 그 하수인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겠는데 교주를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10년을 쉬어야 하는 큰 부상을 입은 교주가 그 정도였다. 아마도 그 부상을 회복하고 나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어쨌든 생존자에게서 얻은 기상변화를 발동시켰다. 아무래도 내가 처음부터 그와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그런 거대한 폭풍을 소환할 자신도 없었다.
두 번째 생존자는 절대 약하지 않았다. 교주가 너무 강했을 뿐이다. 점점 강해지는 강풍을 맞고 있는 지네는 그 큰 덩치 때문에 오히려 바람의 영향을 더욱 크게 받고 있었다.
애초에 날개를 퍼덕여서 비행하는 것이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기상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토네이도처럼 회오리치는 강풍에 휘말려 지네가 빙글빙글 돌더니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내가 추락시킨 것이 아니다. 녀석이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비행 능력을 해제시킨 것이다.
수천톤 어쩌면 수만톤이 나갈지도 모르는 거대한 질량 덩어리가 고공에서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나는 기상변화를 해제했다. 위력과 사용 방법은 대충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능력도 제대로 사용하려면 꽤 큰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콰앙!
지네는 끝까지 비행 능력을 다시 발동시키지 않고 마치 운석처럼 폐허가 된 서울의 위로 충돌해 거대한 울림과 함께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거대한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지만, 그것으로 나의 감각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녀석은 그 엄청난 충격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인지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 변이체의 무서운 점이었다. 보통 생물 같았으면 미간이 뚫렸을 때 이미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변이체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도 지네는 완전히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 아니다. 몸이 뒤틀려 떨어지면서 그 양쪽으로 늘어선 다리 중에 많은 숫자가 부러지거나 몇 개는 아예 몸에서 떨어져나오기도 했다. 그런데도 흙먼지에 몸을 숨기고 움직인다.
인간화의 영향인지 연막을 사용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상대가 좋지 않았다. 나는 눈보다 감각이 훨씬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지네의 다음 행동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인간화의 영향인지 녀석은 계속 싸우려고 움직인 것이 아니라 굉장히 빠른 속도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땅굴을 파서 지하로 도망갈 생각을 한 것이다.
기분이 나빠졌다. 변이체는 변이체다워야 한다. 꼰대 같은 생각일 수도 있지만, 녀석들이 사람처럼 행동할 때는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다.
녀석이 파고 있는 땅굴을 향해 위력을 줄이지 않은 오러를 쏘아내기 시작했다. 일부러 위력을 줄였던 아까와는 다르다. 길게 뽑혀 쏘아진 오러는 거침없이 녀석의 두꺼운 갑각을 깨부수고 안을 헤집었다.
몇 개는 녀석의 몸을 연결하고 있는 마디 사이에 직격하며 몸의 몇군데의 연결이 매우 헐거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네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머리 쪽으로는 땅굴을 계속 파 내려갔다. 그리고 반쯤 잘린 몸통을 다리를 이용해 스스로 잘라냈다. 스스로 몸을 떼어낸 지네는 두 토막이 났다.
삼 분의 일 정도가 머리 쪽이고 오히려 잘라낸 쪽이 삼 분의 이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잘려낸 쪽에는 머리도 없는데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몸을 돌리며 나와 싸울 준비를 했다. 본체를 지키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둘 다 본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어차피 두 토막 모두 살려줄 생각은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