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92화 (192/206)

191. 청와대의 비밀 벙커

슈바르거트에서 길게 오러가 뿜어졌다. 수십미터의 길이로 늘어난 오러는 채찍처럼 흔들리며 움직였고 그것을 그대로 휘둘렀다.

대형종을 상대하기 어려운 것은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대형의 병기를 운용하기 어렵기 때문인 것도 있다. 그것을 간단히 해결되었다. 다음은 파괴력이다. 오러로 만들어진 채찍은 보통 채찍과 다르다. 채찍처럼 휘감기는 것이 아니다. 채찍에 닿는 모든 것이 잘려 나간다.

아무리 단단한 껍질을 가지고 있는 지네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원래 수백개의 마디로 된 몸을 가지고 있는 지네지만 순식간에 몇 배로 그 수가 늘어났다.

꼬리 부분을 처치하고 땅속으로 도망친 머리 부분을 추적했다. 워낙 덩치가 큰 녀석이라서 땅을 파고 들어가자 탱크도 지나갈 만한 땅굴이 생겨 있었다.

이런 큰 구멍을 내놓고 내가 추격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땅속 구멍에 머리만 넣어놓고 숨었다고 생각하는 어떤 동물이 생각났다.

함정일지도 모르지만 주저 없이 땅굴로 몸을 던졌다. 추격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빨리 땅을 판다고 해도 음속으로 날아다니는 나보다 빠를 수는 없다.

땅속에서 녀석을 마주했을 때 역시 지네를 닮은 녀석이라 그런지 독을 뿜어냈다. 지금의 나에겐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채찍처럼 길어진 오러가 춤을 추고 녀석이 팠던 깊은 땅굴은 그대로 놈의 무덤이 되었다.

조금 싱거운 전투였다고 해야 할까. 한국에서 가장 강했던 변이체라고 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런 괴물을 과연 누가 이길 수 있었을까?

군대나 생존자 그룹으로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서울을 두고 영역 다툼을 벌였을 다른 변이체들도 모두 꺾었을 것이다. 그렇게 강했던 녀석이 지금의 나에겐 위협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나도 지금 교주를 만난다면 마찬가지 신세가 될 것이다. 더 강해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조금 전의 전투에서 채찍처럼 휘두르던 오러의 사용법도 예전에 광검제의 기억에서 본 것을 따라 한 것이다. 스승님에게 배웠던 것들에서 나는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스승님의 오러 운용법은 충분히 대단한 수준이지만, 초월급의 영역에서 그런 자잘한 기술은 비슷한 급의 상대를 제압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나는 그래서 광검제를 따라 하고 있었고 그와 닮아가고 있었다. 광검제는 다른 세상의 나이니 내가 나를 닮아간다고 해야 할까.

서울의 지네까지 처치했으니 일단 대한민국에는 변이체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휴전선 근처는 아직 돌아보지 못했지만,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던 곳이니 그곳에 변이체가 남아있을 확률은 낮았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서울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지상이다. 나는 전생부터 꼭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던전에서도 방문했었던 청와대를 찾아갔다. 아무래도 건물의 잔해만으로는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없어서 그 부분은 아스트로퍼의 도움을 받았다. 지금은 그야말로 청와대였던 것의 흔적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감각을 주변을 수색하니 역시 그곳이 남아있었다.

청와대 잔해의 밑에 지하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었다. 최고 VIP들만 피신했다고 알려졌던 청와대의 지하 벙커다.

광검제의 지구에서 대통령도 이곳으로 가장 먼저 도망을 쳤다고 했다. 내 지구의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건물 잔해가 꽤 두껍게 지하 벙커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을 막고 있었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런 것은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잔해를 치우고 벙커의 통로였던 곳을 타고 내려갔다. 깊이는 꽤 깊었다. 예전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던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지금까지 남아있을 리는 없었다.

수십미터를 내려가자 그곳에는 은행 금고의 문짝처럼 두꺼운 금속제의 문이 있었다. 이미 문으로서 기능은 상실한 지 오래다.

두께가 수십센티는 될 것 같은 철문은 반으로 접혀있었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그렇게 되었을 리는 없을 테니 변이체의 짓으로 보였다.

이곳에서 얼마나 버텼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꽤 버텼을 것이다. 초기의 변이체는 저런 두꺼운 철문을 반으로 휘어버릴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벙커 내부는 그래도 제법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난 만큼 쓸만한 물건이 남아있진 않았지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지막 흔적이라고 해야 할까. 벽면에 사격의 흔적도 남아있었고 희미하지만, 혈흔도 보였다. 이곳에 침입했던 변이체가 얼마나 알뜰하게 식사를 했는지 유골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벙커의 내부는 무척 넓었다. 그래서 오히려 물건들은 멀쩡하게 남아있는 편이었다. 통신기기가 가득한 방도 있었고 벙커에는 어울리지 않은 고급스러운 침대가 놓여있는 방도 있었다. 누가 사용했는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거기에 여성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방도 있었다. 사진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지만, 남아 있는 물건들의 흔적으로 볼 때 분명 젊은 여성이었다.

거실로 추정되는 공간에는 전기로 작동하는 금속제 달력이 남아있었다. 아마 종이로 된 달력을 사용하기 어려우니 미리 벙커에 준비되었던 물건인 것 같은데 달력의 날짜는 대격변으로부터 7년 후에 멈춰있었다.

사람보다 달력이 조금 더 오래 생존했다고 생각해도 이 지하 벙커에서 5년 이상은 살았을 것이다. 대격변 후 5년이면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살아남아 있을 때였다.

자기들만 살겠다고 이런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지만, 그렇게 오래 생존했다고 볼 순 없었다. 대통령이 이곳에 숨어들지 않거나 혹은 1~2년만 숨어있다가 밖으로 나와서 구심점이 되어 군이나 생존자들을 이끌어줬다면 어땠을까?

의미 없는 가정을 해본다. 그래도 최후의 결과는 그리 달라질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의미 없이 죽은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무능한 지도자가 없었기에 바깥의 사람들이 많이 살아남았을지도 모르겠다.

마법으로 먼지를 걷어내고 침구류를 꺼낸 후에 눈을 붙였다. 아주 오랜만에 꿈을 꿨다. 꿈에서 대통령이 나왔다. 대격변의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대통령은 바보 같은 명령을 자꾸만 내렸고 나는 참지 못하고 슈바르거트로 대통령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역시 대통령은 그냥 벙커에서 죽어버린 것이 나았던 것 같다.

눈을 떠보니 겨우 한 시간도 자지 못했던 것 같다. 많이 치유되었던 불면증이 되살아난 느낌이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통로를 열고 아노더스로 돌아와 곧바로 제멜아크의 수도를 향해 비행하기 시작했다.

이틀을 더 날아 제멜아크의 왕도에 도착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제멜아크 왕국의 대도시를 몇 개나 그냥 지나쳤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면 번거로운 일이 생길 것 같아 고공에서 비행했기에 자세히 살필 수는 없었다.

왕도 근처의 한적한 곳에서 착륙해 왕도의 출입문을 향했다. 바로 왕궁 근처에 착륙하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르지만, 처음이기에 나름대로 절차를 밟으려는 것이다.

왕도의 출입문을 관리하는 병사에게 다가가 예전에 왕세자에게 받았던 징표를 내밀었다.

“라이브러쉬 왕국의 빅터 하네스 백작이라고 한다. 제멜아크 왕국 왕실의 요청을 받고 왔다. 왕실에 기별을 넣어주겠나?”

내가 내민 증표를 받은 병사는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징표와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더니 대답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잠시 후 출입문의 책임자로 보이는 기사가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달려 나왔다.

“안으로 드셔서 기다리시겠습니까?”

막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아니 괜찮네. 벌써 사람이 오고 있군.”

“예?”

기사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해진 표정을 지을 때 나는 곧 사람이 나타날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반쯤은 하늘을 날아오는 노인이 보였다. 신선처럼 하얀 수염과 머리를 휘날리며 하늘을 날아온 노인은 내 앞에 가볍게 착지했다.

제멜아크 최강의 기사 쿼런틴 공작이었다. 지난번 이후로 경지가 더 오른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거의 9성에 근접한 수준이다. 슬라이트나 자칼이 현세대의 천재라면 과거의 세대에서는 이 사람이 압도적이다.

에인프라흐 공작도 같은 8성이지만, 지금 보니 쿼런틴 공작과는 꽤 많은 차이가 난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쿼런틴 피어스 공작님. 지난번에 뵈었을 때보다 경지가 더 오르셨군요.”

“허허허! 자네만 하겠는가?”

갑자기 등장한 거물의 등장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제멜아크 왕국에서 쿼런틴 피어스 공작의 존재감은 라이브러쉬 왕국의 에인프라흐 공작 이상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충!”

옆에 있던 기사가 뒤늦게 공작을 향해 경례를 올렸지만, 공작은 그쪽은 보지도 않은 채 손짓을 하여 경례를 받았다.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 나는 교주라도 나타났는 줄 알고 정신없이 뛰어왔다네”

“운이 좋았습니다.”

“왕실로 바로 가겠는가?”

“그러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럼 가세”

쿼런틴 공작이 나타났을 때처럼 뛰어올랐다. 나처럼 비행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고 아마도 오러를 사용한 기술로서 비행에 가깝게 달리는 것이었다. 무협으로 치면 경공술과 비슷한 것이라고 해야할까?

오러의 흐름을 파악해보니 그리 어려운 부분은 기술은 아니었다. 나에겐 필요 없지만, 나중에 스승님이나 친구들에게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끔 땅에 착지해서 다시 뛰어올라야 하는 공작과 달리 내가 계속 비행을 하자 나란히 달리던 쿼런틴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왕궁 앞까지 도착해서야 우리는 멈췄다. 순식간에 왕도를 가로지른 셈이었다. 함께 날아다닌 사람이 쿼런틴 공작이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큰 소란은 없었다.

그보다 이곳은 지구와 달리 날아다니는 사람이 아예 없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 클 것이다.

왕도를 가로지르며 본 제멜아크의 왕도는 라이브러쉬의 그것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애초에 같은 나라였다가 갈라진 곳이다. 언어나 문화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건축양식 같은 것들이 조금 다른 느낌일 뿐이었다. 국력도 거의 비슷하고 문명의 발전 방향이 다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차이가 나는 것이 이상하다고 해야 할까.

왕궁의 출입도 쿼런틴 공작과 함께 있으니 일사천리였다. 왕궁에서 가장 먼저 나와 우리를 맞이한 것은 가브리엘 스피노자 남작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활약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승작도 축하드립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나를 정말 반갑게 맞이했다. 활약을 들었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서로 첩보원을 대놓고 심어놓고 있는 처지인지라 소식을 듣는 것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 했다.

나는 가브리엘 남작의 소식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조금 미안한 감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드시지요. 기다리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렇게 안내 받아 들어간 곳에는 가브리엘 남작의 말대로 정말 많은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엔 구면인 사람도 있었고 초면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누군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노인에게 예를 갖추며 인사를 건넸다.

“제멜아크 왕국의 주인에게 인사를 올립니다. 라이브러쉬 왕국의 빅터 하네스 백작입니다.”

제멜아크 왕국의 국왕 레안드로 제멜아크, 보기에는 완전 노인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라이브러쉬의 호드라스 국왕보다 어리다. 호드라스 국왕은 8성 기사이기에 노화가 멈췄지만, 레안드로 국왕은 6성 기사에 머물렀기 때문에 보기에는 더 늙어 보였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 많았소.”

레안드로 국왕은 짧게 답례했다. 국왕에게 인사를 하는 동안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있었다.

지금 이 방에는 제멜아크 왕국의 최고 권력자 혹은 실력자들이 모여있었다. 나를 위해 일부러 다 모아놓은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 보니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내가 도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국왕의 옆에 있던 왕비와 왕세자에게도 따로 인사를 올리고 나서야 나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미리 말하지만, 자네를 어떻게 하기 위해 모인 것은 아닐세. 뭐 하려고 한다고 해도 오히려 우리가 당하겠지만 말일세.”

옆에 있던 쿼런틴 공작이 마치 다른 사람도 다 들으라는 듯이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이 방 안에는 지금 제멜아크 왕국의 7성 이상 기사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쿼런틴 공작의 말에 한쪽에 있던 누군가가 불편하다는 듯이 큰기침 소리를 내었다.

“크흠흠! 하네스 백작이 젊은 나이에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은 사실이나 우리가 전부 당한다고요? 공작께서 너무 과장이 심하십니다.”

지금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 7성 기사이지만, 초면인 사람이다. 하지만 이미 만난 적이 있는 고든 바이런 후작등을 제외하고 큰 특징이 있는 사람들을 소거법으로 제거한다면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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