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제국의 유적
가만히 생각해보니 완전히 초면은 아니었다. 제멜아크 던전을 처리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7성 기사 둘이 있었다. 그때 본 기억이 있다. 그땐 통성명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둘 중에서 지금 이 자리에는 한명만 나와 있었다.
그때 제멜아크의 고위 기사들은 여차하면 정말 나와 스승님을 죽이려고 모여있었다. 물론 그때의 일을 탓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남부의 창께서 의문이 있으신 것 같군요.”
남부의 창이라 불리는 에반트 데자트 후작이었다. 쿼런틴 공작과 다르게 내 경지를 읽을 수도 없을 정도로 낮은 경지이기에 일어난 일이다. 말 그대로 7성에 간신히 걸쳐있는 수준, 완전한 7성 기사라도 볼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6성과는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지만, 나를 제외하고 승급한 기간이 가장 짧은 스승님보다도 한참 낮은 수준이다. 에반트 후작이 승급한 것은 이미 꽤 오래전이니 어쩌면 지금의 경지가 저 사람의 끝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봐도 좋다.”
패기 있는 사람은 좋아한다. 하지만 이건 패기가 아니라 만용 수준이다. 내가 초월에 닿지 못한 9성의 경지에 머물고 있었다고 해도 7성에 겨우 걸치고 있는 자신이 나에게 할 말은 아니다.
슬쩍 눈치를 보니 나를 직접 확인한 쿼런틴 공작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 내가 초월의 경지에 올라선 것을 알지 못한 듯 하다.
하기야 라이브러쉬에서도 아주 일부만 알고 있는 사실인데 아무리 대놓고 첩자를 심어놓는 사이라고 해도 그 정보가 이렇게 빨리 전달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데자트 후작 말을 삼가시게.”
쿼런틴 공작이 먼저 나서서 겁 없는 데자트 후작을 말리려고 했다. 그런데 딱히 진심처럼 보이진 않았다. 중간에 슬쩍 내 눈치를 보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맞습니다. 하네스 백작은 어디까지나 우리를 돕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임을 명심하십시오.”
한박자 늦게 왕세자도 나섰다. 왕세자는 진심이었다. 던전 안에서 함께 고생한 사이가 아니던가. 왕세자에게 나는 은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앞으로도 계속 얼굴을 볼 사이인데 의심은 지우는 편이 좋겠지요. 폐하, 잠시 실례를 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양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한 손으로 반지를 붙잡았다. 에인프라흐 공작이 좋아하는 반지빼기 놀이를 할 기회가 또 찾아왔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제멜아크의 왕이 있으니 허락을 받아야 했다. 국왕이 쿼런틴 공작을 보았다. 그와 쿼런틴 공작은 라이브러쉬의 국왕과 에인프라흐 공작 같은 사이인 것 같았다.
쿼런틴 공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는 재미있을 것 같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나에게 저 애송이에게 한번 참교육을 시켜주게나.’
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허락하네”
제멜아크 국왕의 허락도 받았으니 거칠 것이 없지만, 그렇다고 쿼런틴 공작이 원하는 그런 극적인 광경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반지를 뺐다. 누군가가 원하는 것처럼 엄청난 압박감이 장내를 휩쓸거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내가 진심으로 힘을 개방한다면 경지가 낮은 왕세자나 국왕은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
쿼런틴 공작도 초월자의 힘을 조금 우습게 보고 있었기에 한 결정이었다.
기세를 조절하거나 특정 방향으로만 뿜어내는 것은 지금의 나에겐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흡!”
반지를 빼자마자 데자트 후작이 숨이 막히는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점점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가까스로 참아내는 모양새지만 그것도 내가 적당히 조절을 해주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흥미롭다는 듯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데자트 후작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터지기 직전처럼 보일 때 나는 기세를 거두었다.
“훅! 훅!”
기세를 거두자마자 데자트 후작이 막혔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러나 눈은 아직도 기가 죽지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것은 패기로 인정해준다. 태어나기를 저렇게 태어난 사람인 거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불이 붙은 대나무처럼 살다 가는 사람들이 있다. 대격변 이후의 세상에서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일찍 숨을 거두었다.
일단 불만이 가득했던 데자트 후작의 기를 죽여놨으니 일을 시작해도 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포교자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 겁니까?”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면 이곳에 제멜아크의 실력자들이 이렇게 모두 모여있는 것은 단 하나다. 포교자의 세력이 생각보다 훨씬 강한 것이다.
남부의 고트 백작 가에서도 포교자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전력이 붙어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부라고 했지만, 마신교에서 그런 자들을 또 얼마나 만들어놓았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없었다.
“그것은 내가 얘기하도록 하지. 포교자가 혼자가 아니네.”
그 이상한 능력으로 사람들을 조종하는 놈이니 혼자는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것이야 놈의 특기이니 그렇겠지요.”
“폭검이 놈의 곁에 있다네”
폭검, 고트린 사이벡스 후작. 제멜아크 왕국의 또 다른 7성 기사다. 어쩐지 한명이 빈다 했다.
그래서 다들 여기 모여계셨던 모양이다.
“고트린 사이벡스 후작의 영지가 놈에게 넘어간 겁니까?”
“그것은 아니라네”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런 대영주의 영지가 넘어갔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포교자의 지배를 받고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나머지 전력은 얼마나 됩니까?”
지배당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변절을 한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포교자가 그것 하나를 믿고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을 것이다. 지난번과 같이 상당한 반마들을 데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에게는 별것 아니지만, 반마들의 전력도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수백의 반마가 뒤를 따르고 있다는 정보가 있네”
예상한 대로다. 설령 지난번처럼 8성의 경지에 있는 과거의 망령이 몇 명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에겐 위협이 되지 못한다.
오직 위협이 되는 것은 교주와 부교주 정도인데 교주는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 것이고 부교주가 포교자를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포교자의 현재 위치는요?”
“그것이 문제라네. 갑자기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지는데 추적이 불가능하다네.”
“이동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는 거군요? 이동방식도 추적이 안될 것이고요.”
“바로 그렇다네.”
역시 부교주가 개입되어있는 듯 하다. 그런데 이것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놈들이 나타나는 장소에 대한 연관성은 없습니까?”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가 있지.”
“뭡니까?”
“제국의 유적지라네.”
제국의 유산을 모두 찾아낸 것이 아니었나?
“비밀던전 같은 거라도 남아있습니까?”
“아니 그런 것은 절대 아니라네. 분명히 뭔가 있으니 그러는 것일 텐데 단서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네.”
“놈들이 앞으로 나타날 곳을 예상해서 기다려야겠군요.”
대군이 기다리고 있다면 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기다리는 곳에 나타나 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소수정예로 잠복하기엔 놈들의 전력이 너무 강하다. 그래서 나를 부른 모양이다.
“몇 군데 예상되는 지점은 있다네”
“그중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요?”
“바로 여기네”
왕세자가 앞에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던 지도의 한 곳에 표시를 해서 나에게 밀어주었다.
제멜아크의 군사지도였다. 이렇게 나에게 쉽게 보여줘서는 안되는 물건이다.
“저에게 보여주셔도 되는 겁니까?”
“내가 허락하겠네. 그런 사소한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지.”
국왕이 끼어들어 허락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의외로 호탕한 구석이 있는 제멜아크의 국왕이었다. 그런데 옆을 보니 쿼런틴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이 사람이 뭔가를 한 것 같다.
허락받고 지도에 붉은색 표시가 되어있는 곳을 확인했다. 표시된 곳은 세 곳 그중에 강조되어 표시된 곳이 하나다.
강조된 곳의 지명은 아우쿠스다. 이곳은 나도 알고 있다. 이곳에는 아직도 남아있는 제국의 거대건축물이 있었다. 지금은 그저 관광지에 불과하지만, 제국 시절에는 꽤 험악한 곳이었다.
제국 최대 최악의 감옥인 아우쿠스 뇌옥이 있던 곳이다.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으로 대죄를 지은 흉악한 범죄자들만을 가둬두는 곳이었는데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단 한명도 이곳을 살아서 빠져나간 죄수가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제국이 멸망할 때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죄수들을 당시 뇌옥의 최고 관리자가 모두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한 것은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살아서는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감옥의 이야기는 그렇게 완성된 것이다.
“그럼 제가 이곳을 맡도록 하지요.”
나는 바로 아우쿠스 뇌옥을 선택했다. 잘하면 부교주를 처치할 수 있는 기회다.
“혼자서 괜찮겠나?”
왕세자의 물음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머지 분들이 더 위험하실 겁니다. 만약 적들이 나타난다면 바로 저를 부르시고 시간을 끌어 주십시오.”
“그건 그렇지.”
조금 광오한 발언이었지만, 반론은 없었다. 나를 제외하고 가장 실력자인 쿼런틴 공작이 바로 인정을 해버렸으니까.
왕세자와 쿼런틴 공작과 몇 가지 사항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곧바로 아우쿠스 뇌옥을 향해 출발했다. 왕도에 들어올 때는 최대한 절차를 지켰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었기에 바로 왕궁에서 날아올라 목적지를 향했다.
왕도에서 북쪽으로 꽤 멀리 있는 아우쿠스 뇌옥은 내 속도로도 거의 이틀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곳에서 나는 이곳을 담당하고 있는 정보원을 찾았다.
정보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바로 관광지가 된 아우쿠스 뇌옥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 직원으로 위장을 하고 있었으니까.
왕세자가 전해준 징표를 돈 대신 내밀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아직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면 되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국의 유적지를 돌고 있다면 반드시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사람들을 대피시킬까요?”
“아니다. 그대로 두어라.”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관광지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사라진다면 놈들이 이곳에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입장권을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가 나는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왕국의 중앙에서 보자면 꽤 외진 곳이고 감옥이라는 것이 관광하기에 썩 좋은 곳은 아닌지라 관광객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우크스 뇌옥의 크기가 워낙 어마어마한 규모라서 더욱 한산해 보였다. 왕궁보다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이다. 워낙 오래되어 거의 유적처럼 보일 정도이지만, 아직까지 이런 거대한 건축물이 무너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운 수준이었다.
상황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지구의 현대식 건축물도 고작 몇십년을 버티지 못하고 잔해만이 남아있는 수준인데 이곳은 수백 년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먼저 도착한 김에 유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포교자나 부교주가 바보가 아닌 이상 뭔가 찾는 것이 있으니 제국의 유적을 헤집고 다닐 것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던전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었다.
천천히 아우크스 뇌옥의 웅장함을 감상하며 감각으로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이런 대단한 역사적 유적지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도 인간이 멸망하지 않았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지구에 남아있던 그 수많은 역사적 유적지는 이제 남아있지도 않지만, 남아있다 하더라도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 되었다.
아우크스 뇌옥을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숨겨져 있는 공간이나 그런 것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오갔던 곳이다. 뭔가 숨겨져 있는 것이 있다면 진즉에 누군가 찾아냈을 것이다.
과연 마신교는 제국의 유적지에서 무엇을 얻어가려고 하는 것일까? 성과 없이 뇌옥을 빠져나와 뇌옥 근처의 평범한 여관에 방을 잡았다.
통로를 열어 지구로 들어가서 기다릴까 생각도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부교주에게 눈에 띌까 봐 그러지 않기로 했다.
복장도 평범하게 갈아입어서 눈에 띄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몰라 신체 변형으로 얼굴도 조금 변화시켰다.
아주 오랜만에 들어오는 보통 여관방이다. 아니 생각해보면 사실 이번이 두 번째다. 길에서 호객하는 똘똘한 꼬마를 따라 들어갔던 내 인생 첫 번째 여관에서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불편한 침대에 누워 마신교가 제국의 유적에서 뭘 찾고 있을까 생각하다가 무언가 갑자기 떠오른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