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96화 (196/206)

195. 거꾸로 흐르는 시간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부교주는 아주 서서히 약해져 갔다. 흉악하게 솟아있던 4개의 뿔은 모두 부러지거나 꺾여있었고 무엇이라도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흉악하게 생긴 주둥이의 이빨도 뭉텅이로 빠져 입에서 검은색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온몸에 회를 떠 놓은 듯 생긴 수백개의 검상에서도 마찬가지로 출혈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강한 변이체라는 것을 감안해도 마지막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변이체이기에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상이었다면 저런 상처쯤은 재생했을 것이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나는 잠시 전투를 멈췄다. 조금만 더 몰아친다면 끝이다. 그것을 나도 알고 부교주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전투를 멈췄다.

부교주만큼은 아니었지만, 나 역시도 정상은 아니었다. 이제 원거리 공격이나 수십미터짜리 오러는 뿜어낼 엄두도 내지 못한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슈바르거트를 겨우 감쌀 정도의 오러만이 만들 수 있을 뿐이었다.

“인제 와서 무승 할 마리 있는가?”

괴물 주제에 인간의 말을 잘도 나불거리게 했던 혀는 반쯤은 잘려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재생하지 못하고 있었다.

“교주는 어디에 있지?”

가뜩이나 흉측했던 괴물의 얼굴이지만, 지금은 수많은 상처로 뒤덮여 더욱 기괴한 부교주의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

“냉가 그거슬 마할거 같응가?”

“그래 그럴것 같았어.”

사실 크게 기대하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남길 말은 없나?”

“자음시 시가늘 주 수 있겡나?”

뭘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도 부교주도 싸우면서 쓸 수 있는 수단은 이미 모두 사용했다. 이 판을 뒤집을 그런 수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교주가 변이를 시작했다. 더욱 괴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작아지며 인간의 몸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무슨 짓이지?”

인간의 몸으로 돌아오면 약해진다. 변이체인 상태에서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인간으로 돌아오면 버티는 것도 힘들 것이다.

예상대로 인간의 몸으로 돌아온 부교주의 몸은 버티지 못했다. 부교주의 몸이 허물어지고 바닥에 쓰러졌다. 변이체 상태일 때 입었던 온몸의 상처는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그 피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칠공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부교주의 생명이 빠르게 사그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에 누워 초점 없는 멍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부교주는 옹알이처럼 중얼거렸다.

“인간처럼 살고 싶어서 악마가 되었다. 나는 악마가 되었지만, 인간이 인간처럼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궤변이었지만,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았다. 내가 듣는 것은 상관없다는듯이 부교주는 계속 중얼거렸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가 틀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악마니까 악마의 삶을 살아야 했지.”

그래도 알고 있었구나? 광신도라서 말이 안 통하는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다.

“염치없는 줄은 알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인간으로 죽고 싶었다.”

그 말을 끝으로 부교주는 눈을 감았다.

궤변이었고 가증스러운 면도 있었지만, 의외로 화가 나거나 부교주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큰 고비를 넘겼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나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영양 보급을 하며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디야?”

주변을 둘러봐도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가뜩이나 사막지대였지만 전투 때문에 지형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잠시 쉬며 에너지를 채운 뒤에 가장 먼저 부교주의 시신을 확인했다. 소지품이나 옷은 남아있지 않았다. 나 역시 아스트로퍼와 몇가지 물건을 제외한다면 전투의 여파로 모두 망가지거나 사라져 있었다.

부교주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능력을 사용했었다. 가짓수로만 보자면 나보다 훨씬 많았다. 그중에 무엇이 걸리느냐가 중요했다.

부교주의 능력 중에서 가장 특이한 능력이라면 당연히 통로를 이용한 이동 능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중요한 능력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통로를 이용한 이동 능력의 기동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는 이미 고속기동을 가지고 있다.

통로를 이용한 이동 능력은 적이 가지고 있을 땐 상당히 위협적인 능력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을 때는 애매한 능력인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거나 걸려라.”

어차피 내 의지대로 가지고 싶은 능력을 빼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잠시 생각하던 것을 그만두고 곧바로 부교주에게 손을 댔다.

“음?”

운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개의 능력이 진화했다. 하나는 통로 능력이었다. 아직 사용해 본 것은 아니지만, 이제 나도 부교주처럼 통로를 이동시킬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두 번째로는 ‘성장’이었다. 딱히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성장은 그동안 열심히 일했다. 한국의 변이체들을 상대할 때도 그렇고 부교주와 전투할 때도 성장 능력은 쉴새 없이 작용하고 있었다.

다만 게임에서도 레벨이 높아지다 보면 레벨업이 힘들듯이 내가 이미 꽤 높은 경지에 있기에 성장하는 것이 눈에 잘 띄지 않았을 뿐이었다.

부교주에게서 능력을 얻은 후에 힘을 어느 정도 회복한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하기 위해 하늘 위로 올라갔다.

전투의 여파로 운석이 수십 개가 떨어진 것 같은 사막지대의 저 멀리 바위산 같은 것이 보였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진 광활한 대지를 보니 일단 한국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단순히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으니 일단 보류하고 진화한 통로를 열어보기로 했다.

순간 열리는 곳의 이미지가 머릿속으로 전해져온다. 전과 달라진 것이다. 통로 저편에 어느새 대군을 다시 만들어놓은 포교자의 모습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제멜아크의 초인들과 조우하진 못한 것 같았다. 제멜아크쪽에서 도착하기 전에 저놈도 처리를 해야 한다.

통로를 열자 녀석이 안색이 밝아져서 앞으로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포교자 놈은 통로가 보이는 건가?

놈은 부교주가 승리했을 것이라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

포교자를 처리하자 포교자가 조종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쓰러졌다. 고트 백작령에서 있었던 일이 반복된 것이다.

쓰러진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대처할 수 없으니 주변에 남아 대기하고 있던 정보부 요원을 찾아 포교자를 처치했음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정보부에 승리를 알리고 왕세자가 도착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고맙네. 자네가 왕국을 구했어.”

왕세자는 나에게 달려와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틀린 말이 아니긴 하다. 포교자가 이끌고 왔던 전력이라면 제멜아크의 전력과 부딪혔을 때 제멜아크쪽이 패배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근처에 계셨던 겁니까?”

“그렇지, 뭔가 이상이 생긴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섣불리 나섰다가 오히려 일을 망칠까봐 나서지 않고 있었네.”

왕세자를 따라온 것은 쿼런틴 공작과 던전에 함께 들어간 적이 있었던 고든 바이런 후작뿐이었다. 하기야 포교자와 다른 떨거지들을 모두 처리했는데 다른 기사들까지 모두 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고트린 사이벡스 후작의 일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기절만 시키려고 했던 것인데 충격이 과했던 모양이다. 고트린 후작은 깨어나지 못했다. 제때 치료를 받았다면 모르겠지만, 내가 곧바로 부교주에게 끌려갔고 그사이에 포교자가 제대로 된 처치를 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이 어찌 자네 때문이겠나.”

왕세자는 애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나를 탓하지는 않았다. 나를 탓해서는 안 되는 일이 맞았다.

왕세자, 쿼런틴 공작, 그리고 고든 후작에게 나는 이곳에서 있었건 일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부교주까지 처치했다는 말에 안도하는 모습을 보이자 나는 경고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교주가 곧 마왕입니다. 녀석의 회복이 끝나는 날 지옥문이 열릴 겁니다. 그때까지 최대한 대항할 힘을 키워야 합니다. 막아내지 못하면 세상이 멸망합니다. 과거 첫 번째 침공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왕세자는 내 말을 진지하게 듣는 것 같았지만, 실감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다. 왕세자뿐만 아니라 같이 듣고 있는 쿼런틴 공작도 일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건방지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쿼런틴 공작께서는 저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으시겠습니까?”

“방어만 하려고 한다면 한 시간은 버틸 수 있지 않겠나?”

“아니요. 3분 안에 끝날 겁니다.”

쿼런틴 공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모욕받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런 저도 지금 교주를 만난다면 10초를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차이가 난단 말인가?”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쿼런틴 공작의 말이 맞다. 교주를 상대하는 것은 지금으로선 나 외엔 의미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시간 벌이조차도 되지 못할 것이다.

“교주만 생각했을 땐 그렇겠지요. 하지만 교주가 끌고 올지도 모르는 수많은 악마로부터 백성들을 지킬 사람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과거 마왕의 1차 침공 때도 그랬다. 마왕을 막아낸 것은 용사들이었지만, 끝없이 밀려오는 악마들을 막아낸 것은 용감하게 나선 영웅들이었다.

“부디 가벼이 생각하지 마시고 제대로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떠나려 했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끝났다.

“일단 제국의 다른 유적을 살펴봐야겠습니다.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거든요.”

그렇지 않아도 지구에서 할 일이 많은데 할 일이 더 늘어나 버렸다. 국왕에게 하는 보고라도 함께해달라는 왕세자의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마신교가 작업을 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제국의 유적들을 향했다.

*

아스트로퍼와 함께 제멜아크 왕국에서 작업당한 제국의 유적을 정리하는 것만 보름이 넘게 걸렸다. 제멜아크에서 조금 더 빨리 요청했으면 일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때는 내가 초월급이 되지 못한 때였다. 그때 요청을 받고 건너왔다면 부교주에게 잡혀 죽었을 것이다.

제국의 유적에 설치된 마법진을 마신교가 어떤 식으로 변형시켰는지 아스트로퍼가 열심히 분석한 결과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여서 모으는 방식으로 변형시킨 것을 알아내었다. 눈에 잘 띄지 않게 설치된 장치들을 부수고 다시 마법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파괴하는 작업은 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그나마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새로 얻은 통로 능력 덕분이었다. 진화된 통로 능력은 일정 이상의 장거리를 이동할 때는 확실히 고속 이동보다 빨랐다. 다만 장거리 이동을 연속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내게 큰 단점이라고 할 수 없었다.

제멜아크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좋은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성공했어요.]

이제 언령마법은 사용할 생각도 없는 것 같지만, 버릇이 되었는지 여전히 문자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스테이시가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찾아왔다.

“마나 파장 장치를 이제 사용할 수 있는 거야?”

[네]

“효과가 있는 거리는 얼마나 되는 거야?”

[대략 작은 도시 정도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지구에서도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장 하자.”

문제는 지구에 새로운 생명을 싹틔울 장소를 정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내가 예전에 머물렀던 태백 기상연구소 부근으로 정했다.

기상연구소 건물도 폭풍을 견디지 못해 무너졌기에 잔해를 치우고 그 자리에 가건물을 새로 만들었다. 그 후에 스테이시를 불러 마나 파장 조절 장치를 설치하고 나무와 씨앗을 옮겨 심었다. 꼬꼬들을 비롯한 동물들을 이동하는 것은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며칠간의 조정 기간을 거쳐 파장이 안정되기 시작하자 땅에 심었던 씨앗에서 작은 초록색의 새싹이 솟아났다.

완전한 멸망의 길을 걸어가던 지구의 시간이 아주 조금이지만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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