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아임샤르
지구의 중심, 그곳은 어디일까?
그동안 나는 지표면에서 지구의 중심이라고 할만한 곳들을 모두 돌아다녔다. 적도를 비롯해 북극점과 남극점을 모두 조사했었다.
그러나 그곳이 진짜 지구의 중심일까?
진짜 지구의 중심이라고 하면 지구의 핵이 있는 곳일 것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나는 너무 상식적으로 생각했었다. 어차피 내가 찾는 것은 교주와 광검제다. 둘 다 인간적인 기준의 상식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들이다.
지구의 핵이라면 용암이 펄펄 끓는 그런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기에 그곳에 광검제가 있을 거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지상에서도 가보지 못한 지역이 많이 남아있었고 거대한 대형종들이 유유히 활보하고 있는 바다도 아직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광검제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변이체를 처치하면서 강해지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일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에베레스트산에 올라보기도 하고 유럽의 중심, 아시아의 중심, 아프리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도 탐색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것도 꽤 많았다. 지상은 남아있는 것이 없었지만, 지하시설이 잘 지어진 곳들이 남아있었고 그곳에는 아직 지구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의 이기가 남아있는 곳이 많았다.
나는 그것들을 찾는대로 스테이시에게 건네줬다. 스테이시는 그것들을 아주 비싼 가격에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팔아넘겼다.
마법사들은 지구 문명을 연구하고 개량해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나오는 신제품에 아노더스가 변하기 시작했다.
지구의 영지에서는 예전에 손에 넣었던 지구의 씨앗을 뿌려 뮤어 아이번이 본격적으로 작물을 수확하기 시작했다.
아노더스와 같은 작물도 있었고 아예 없는 것도 있었지만, 지구에서 얻었던 씨앗은 품종개량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기존에 아노더스에서 기르던 품종과 생산량이 비교도 되지 않았다.
지구의 영지에서 생산된 작물은 우선적으로 암테일 영지와 하네스 파벌의 영지로 넘겨져 대량생산이 되기 시작했다.
지구의 개량된 품종은 일단은 하네스 파벌에게만 재배가 되고 있지만 곧 라이브러쉬 전체에 공급할 예정이었다. 그후에는 제멜아크 왕국에도 넘길 생각이었다.
식량의 대량생산은 엄청난 발전을 가져온다. 이것은 지구의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비록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 발전된 힘을 마왕의 침공을 버티는것에 힘을 보태줄 것이다.
물론 광검제처럼 내가 단신으로 마왕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최악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어쩌면 광검제가 살았던 지구처럼 처음에는 밀리더라도 어떻게든 버티고 발전해서 역전에 성공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혹은 내가 죽더라도 또 다른 용사가 힘을 이어받아 반격을 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쉽게 죽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각 대륙을 돌며 지상의 변이체들을 대부분 정리한 후 나는 미지의 영역이었던 바다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상과 비교도 되지 않는 초대형 변이체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바다는 나에게도 분명 쉽지 않은 곳이었다.
처음에는 확실히 위험했다. 그러나 수중 변이체들을 처치하면서 다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흡수하고 그 능력으로 수중에서 더 강해지는 것을 반복하며 나는 수중에서도 공중이나 지상에 못지 않은 전투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거대하게만 느껴졌던 바다를 정복하는 것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나는 슬슬 또 한번 한계를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벽은 쉽게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앞에 벽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깨어나보면 다시 저 멀리 벽이 밀려나 있는 경우가 반복되고 있었다.
지구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다보니 라이브러쉬 왕국에서는 나를 도시전설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했던 일들이 입소문을 타고 번지면서 크게 과장된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빅터 하네스 전설은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탄생 신화 같은 느낌이 있었다. 누가 그렇게 이야기를 부풀렸나 조사한 적도 있었는데 범인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지금은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철권단의 친구들이 열렬한 신자가 되어 포교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과장된 소문에서 내가 했던 말도 안되는 이적들을 지금은 진짜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무도 모르는 함정이긴 했지만, 나로서는 조금 억울한 면도 있었다.
지구에서 오래 머물렀다는 것이지 아노더스에서 활동도 아예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통로 능력이 진화하면서 기동성이 오르며 전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활동을 했다.
하네스 파벌의 중요 회의도 가능하면 빼먹지 않고 나와서 참석했었고 왕실에도 종종 찾아가 중요 안건에 의견을 보태기도 했다.
오히려 전보다 훨씬 활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에도 일반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 사실 빅터 하네스는 허상이 아니냐는 말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와서 보니 전에 우리 집에서 공작과 후작들이 모여 위력 시범을 보였던 것이 이해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비슷한 일을 준비했다. 지난 몇년간은 조용히 보냈던 행사였지만, 이번에는 조금 크게 일을 키운 것이다.
철권단을 비롯한 슬라이트와 자칼 그리고 스테이시까지 우리 집에서 머물렀던 친구들은 1년에 한번씩 한자리에 모여서 그동안 살며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래서 이번엔 그것의 규모를 조금 키우기로 했다. 철권단은 몰라도 슬라이트와 자칼이 나태해지지 않았는지 점검해볼 생각이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나태하게 살았는지 않았는지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진짜 실력을 드러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오랜만이야.”
“너도 신수가 훤한데 요즘 너무 편한거 아니냐?”
오랜만에 우리 집에 모이게 된 친구들이 서로 인사를 나눴다. 선물도 바리바리 싸왔다.
“마사, 이것은 북부에서만 나기로 유명한 향신료에요.”
“폴켄 너에게 주려고 가문의 창고를 열심히 뒤져서 찾은 검이다.”
“교관님, 관절에 좋은 약이라고 해서 가져왔습니다”
어째서인지 나에게 주는 선물은 하나도 없고 스승님과 사용인들에게 주는 선물만 한가득이었지만, 그것은 조금 후에 몸으로 풀면 되는 문제다.
이 천재놈들은 각자 가문에 돌아가서도 쉬지 않고 노력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난 1년간 스테이시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오랜만에 본 슬라이트와 자칼도 그에 못지 않았다.
평소대로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며 축제를 벌인 우리들은 저녁무렵이 되어 이번에 완전히 개조한 연무장으로 나섰다.
철권단에서 검에 재능이 있다고 했던 오스마르 바르트나 크리스 힝켈도 이제 4성 기사가 되어 제대로 된 기사가 되었지만, 천재들의 벽이 너무 높았기에 참관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대련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될 것이다.
“슬슬 시작해볼까? 누가 먼저 할래?”
슬라이트와 자칼 그리고 스테이시가 연무장 한가운데 모였다. 스승님도 지켜보고 계셨지만, 심판 역할은 내가 맡았다.
“그럼 나와 자칼이 먼저 붙어보는걸로 하지”
슬라이트가 자신만만하게 먼저 나섰다.
“좋아.”
가문으로 돌아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제법 소심했던 모습을 많이 벗어던진 자칼이 전의를 불태웠다.
둘 다 경지는 비슷하다. 여전히 스타일은 반대에 가까웠지만, 형을 벗어나는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차이는 별로 없다고 할 수도 있었다.
둘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슬라이트와 자칼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7성 기사가 마음 놓고 힘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게 된다. 지구 문명을 개량하여 최첨단 공법으로 시공된 연무장의 바닥은 7성 기사의 오러가 직격하더라도 부숴지지 않을만큼 단단했으며 대련의 여파는 나 혼자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형을 벗어났다고 해도 슬라이트는 여전히 기술적이고 공격적이었고 자칼은 방어적이었다. 둘 다 어느새 7성의 끝자락에 닿아있었다.
조만간 8성 기사 둘이 등장할 것이다. 나이를 생각하면 경이적인 수준이다. 잘하면 남은 시간이 다하기 전에 초월급의 기사 둘이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예전 용사들의 시대와 얼추 비슷하게 멤버가 구성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큰 힘이 될 것이다.
슬라이트와 자칼은 정말 상대를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큰 기술들을 연달아 사용했다.
“힘은 적당히 써라 2차전도 해야지.”
나지막히 한 말이었지만, 두 사람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을 것이다. 어쩌면 2차전이 아니라 3차전, 4차전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그냥 멈춰라. 손님 오셨다.”
기다리던 손님들이 오셨다. 어디서 이렇게 또 잔뜩 모아왔는지 꽤 많은 손님들이 저택 주변에 모여들고 있었다.
“스승님”
나는 스승님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미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미리 얘기해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은 고개를 끄덕이시고 주변 사람들에게 바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싸울 능력이 없는 이들을 저택 안의 안전한 장소로 들여보내고 나머지는 싸울 준비를 했다.
마신교의 미래에 가장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유망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흔치 않은 기회다.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면 마신교에서 분명 나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그런데 내가 있는 곳에 섣불리 나설것 같지 않았기에 반신반의 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당연히 어중간한 준비로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몇년간 두 왕국이 전력으로 마신교를 소탕했다. 그 와중에 마신교의 숨어있던 엄청난 숫자의 반마와 마신교도들이 처단 당했음에도 여전히 왕도에 이만한 숫자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고 평소 주변을 경비하고 있던 왕실의 기사단도 철수시킨 상태였다. 7성 기사가 3명에 7서클 마법사도 있고 무엇보다 내가 있는 곳이다. 어중간한 경비를 세워서 피해를 늘릴 필요는 없었다.
“무슨 손님이 오는데 갑자기 이러는거야? 폐하께서라도 오시냐?”
아직 설명을 듣지 못하고 저택 밖에서 다가오고 있는 마신교의 무리들을 감지하지 못한 슬라이트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따졌다.
“마신교에서 너희 목을 따겠다고 오셨다. 오히려 재미있을거야.”
다가오는 마신교의 전력이 심상치 않았다. 30명 정도다. 전원 7성 이상의 경지로 보였다.
이만한 전력이 대륙 어딘가에 숨어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동안 내가 지구만 탐색한 것이 아니다. 혹시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마신교의 본부나 교주의 행방을 찾기 위해 아노더스의 대륙도 샅샅히 뒤졌다.
그런데 이런 실력자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은 아예 다른 세계에 있다가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일단 지구는 아니다. 지구에서도 이만한 전력이 숨어있었다면 내가 찾아냈을 것이다. 다른 제 3의 세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아마 교주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저택으로 다가오는 반마 중에서도 유독 강한 녀석이 있었다. 아마도 나를 상대하기 위해 파견된 녀석일 것이다.
“그럼 천천히 오도록 해라.”
내가 먼저 손님들 맞이하기 위해 먼저 몸을 날렸다.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집주인이 해야 하는 의무다.
경비를 서고 있든 왕실 기사단이 없는 것을 확인했는지 마신교도들은 가볍게 담을 뛰어넘어 왔다.
“에헤이, 담을 넘으면 쓰나.”
나는 담을 넘어오는 녀석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한소리 했다.
“네가 빅터 하네스인가?”
선두에 있던 녀석이 말을 걸어왔다. 가장 강한 놈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젊다. 내 또래로 보인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맞다. 그런데 너는 어디서 왔지?”
“아임샤르에서 온 할라트라고 한다.”
아임샤르가 어떤 세상인지는 알고 있다. 물론 제대로 본 세계는 아니지만, 제주도에서 발견했던 두번째 생존자가 왔던 세상이다. 그의 유품에서 기억을 읽었기에 세계의 이름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세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 세계도 멸망했나보군.”
“마신님의 은총을 받은 것이지.”
어디서 자꾸 반마들이 튀어나오나 했더니 그쪽 세계에서 넘어왔던 모양이다.
“그럼 넌 변절자구나?”
가벼운 도발에 할라트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녀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