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99화 (199/206)

198. 세계대전

변절자들은 왜 그렇게 불리는 것을 싫어할까? 그것도 보통 변절이 아닌 인류를 배신하고 세상을 멸망시키는데 일조한 엄청난 짓을 저지른 놈들이 말이다.

할라트라는 녀석은 예상외로 도발에 제대로 걸렸는지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삭이는 것처럼 보였다.

“너는 우리 사정에 대해 모른다.”

“아니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알걸?”

사실을 말했지만, 믿어주는 것 같진 않았다. 정말로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거다.

“그런데 이게 다냐?”

“뭐가 말이냐?”

“데려온 놈들 말이다. 네가 그쪽에서 가장 강한 녀석이겠지?”

“그렇다.”

할라트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희소식이다. 눈앞에 녀석들이 저쪽 세상의 전력이라면 사정이 생각보다 여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어쩌면 또 다른 세상에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렇다. 물론 눈앞의 전력이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나를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라이브러쉬 왕국의 전력을 모아도 아임샤르에서 건너온 마신교를 막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7성급의 30명은 에인프라흐 공작이나 국왕이 어떻게든 막아낸다고 쳐도 할라트를 막아낼 사람이 없다. 결국 패배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없다는 가정에서 그렇다.

할라트는 꽤 강하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유해를 수습했던 두 번째 생존자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상상외의 능력을 쓸 가능성도 있었다.

“자리를 옮기면 안 되겠나?”

내 집이 망가지는 것도 싫지만 이곳은 왕도다. 수십명의 초인들이 맞붙어 싸운다면 그 여파만으로도 사상자가 많이 나올 것이다.

“그럴 필요가 있나? 어차피 다 죽을 텐데.”

아노더스의 멸망을 확신하는 말투다. 어쨌든 한적한 곳에서 싸워줄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잠시 대화를 하는 사이 친구들이 따라와 내 뒤에 내려섰다.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가득했다.

적의 전력이 만만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늘은 아닐 거야. 그런데 넌 피체둘라가 직접 보낸 건가?”

“피체둘라가 뭐지?”

진명조차 모르는 건가.

“교주, 마왕, 마신 뭐 그렇게 부르는 자 말이야.”

“아니다. 마신의 강림자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셨다.”

교주인가? 부교주도 통로를 여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교주라면 당연히 그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내가 갈 수 없는 세계도 갈 수 있는 것 같다. 지금 내가 가진 통로를 여는 능력을 더 진화시키면 가능할까?

다른 세계로 통로를 여는 것이 가능하다면 광검제를 찾았을 때 원래 고향 세계로 보내주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쪽 말도 그에게 배운 건가?”

엄연히 다른 세계에서 온 놈이 아노더스의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아니다. 그것은 어느 날 찾아온 또 다른 강림자가 필요할 것이라며 가르쳐주었다.”

강림자가 둘이라니 일이 복잡해졌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아노더스의 교주인 것 같았다. 아노더스의 언어를 가르쳐줬다고 하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노더스의 교주와 저쪽 세상의 교주는 다르다는 얘기다. 하나도 버거운데 둘이다. 그렇지만 저쪽 세상의 교주는 무슨 이유에서든 넘어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당장 눈앞의 할라트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할라트가 대답을 술술 잘 해주는 덕분에 꽤 많은 정보를 얻었다.

“찾아왔던 강림자는 아직도 그곳에 있나?”

“아니 그는 대적자를 찾아 떠났다.”

대적자는 아마도 두 번째 생존자일 가능성이 높다. 지구로 도망친 두 번째 생존자를 교주가 쫓아와 죽인 것이다.

“그럼 나도 대적자인가?”

“그렇다.”

저쪽 세계에서는 용사를 대적자라고 부르는가 보다. 이로써 많은 조각이 하나로 합쳐졌다.

“고맙다. 덕분에 많은 정보를 얻었다.”

“어차피 곧 죽을 상대에게 해주지 못 할 말이 뭐가 있겠나?”

할라트는 본인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할라트는 저쪽 세계에서 부교주와 비슷한 위치였을터다. 대적자라고 불리는 두 번째 생존자와 싸워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제외한다면 적수가 없었을 거다.

“미안하다.”

“뭐가?”

나는 뒤를 돌아 잔뜩 긴장한 채로 대화를 듣고 있던 친구들에게 사과했다.

“너희들에게 실전을 경험할 기회를 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러지 못할 것 같다.”

“그건 다음 기회에 해도 괜찮아.”

“그래요. 오늘은 좀 피곤하기도 하고요.”

친구들은 실전경험의 기회가 날아간 것을 아주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무리 강해졌다고 하나 비슷한 경지의 30명을 세 명이서 막아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죽으라는 소리와 다르지 않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우리 대화에 할라트의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내 사과하지. 손님을 밖에 세워두고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어.”

“흥! 알긴 하나 보군. 시간이 되었다. 이제 목을 내밀어라. 빅터 하네스.”

내 사과에 할라트가 콧방귀를 끼었다.

그러나 할라트는 한가지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물론 할라트는 강하다. 아임샤르에서는 강자의 구분을 어떻게 나누는지 모르겠지만, 초월급의 강자다. 하지만 적의 강함을 감지하는 기술이 떨어지는 것인지 내 경지를 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보통 초월급의 강자도 내 경지를 읽어내지 못하는 수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난 몇 년간 꽤 강해졌다. 지구의 거의 모든 변이체를 제거하며 싸우고 흡수하는 것을 반복했다.

지구에서 여태까지 살아남은 변이체들은 모두 한 지역의 주인이었던 강한 변이체들이었다. 나는 그것들과 싸우며 성장했고 그것들의 능력을 흡수했다. 지금의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잘 파악하지 못한다.

부교주도 꽤 많은 능력을 사용했지만, 나와 싸웠을 때의 부교주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능력이 훨씬 많을 것이다.

능력 몇 개가 모여 일체화를 이루며 하나로 만들어졌을 때처럼 많아진 능력들은 가끔 합쳐지며 진화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포교자에게서 얻었던 정신 조종과 관련된 능력은 여러 가지 다른 능력과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지며 몇번이나 진화했는데 바다의 심해에 자리를 잡았던 변이체들은 유독 그런 정신계 능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내가 말하는 동시에 할라트를 따라왔던 30여명의 상급 반마의 몸이 굳었다. 할라트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기 전에 반마들이 변이를 시작했다.

“#%# @%@#!”

알아들을 수 없는 아임샤르의 언어로 할라트가 반마들에게 소리쳤지만, 반마들의 변이는 멈추지 않았다.

사는 세계가 달라서 그런지 몰라도 반마들의 생김새도 내가 아는 지구의 변이체들과는 좀 다르게 느껴졌다. 이번에 지구에서 변이체 토벌을 하며 한국 안에서만 생활했던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수많은 종류의 변이체를 상대했지만, 그중에서도 저렇게 생긴 변이체들은 본적이 없었다.

저것들의 시체는 마탑에 넘겨줄까? 다른 세상의 반마라니 마탑의 마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지도 모르겠다.

변이가 끝난 반마들은 스스로 날카로운 손과 발을 사용해 가슴에 박아넣어 심장을 꺼냈다. 그리고 머리를 부쉈다. 자신이 끌고 온 부하들이 맥없이 자결하는 것을 지켜본 할라트가 나를 향해 이를 갈아붙였다.

“이런 비열한 놈!”

“인류의 변절자에게 그런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할라트에게는 정신 지배를 쓰지 않았다. 꽤 경지가 높은지라 사용한다고 걸릴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죽이기엔 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

할라트의 동의는 구하지 않았다. 염동력을 사용해 할라트를 하늘 위로 던져버렸다.

“겨우 이딴 잔기술이 나에게 통하리라 생각했는가!”

할라트가 몇미터 움직이지 않고 염동력에서 벗어나며 호통을 쳤다. 역시 나름 저쪽 세계의 부교주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와중에 아울베어가 사용했던 상대방의 능력을 봉인하는 기술을 섞어서 사용했다.

그것은 나로서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뭔가 능력 하나가 봉인되었지만, 워낙 많은 능력을 가진터라 그중에 내가 사용하려는 능력이 걸릴 확률은 매우 낮았고 실제로 그랬다. 봉인된 것은 초음파로 물체를 감지하는 능력이었는데 그런 것은 잠시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할라트는 기민하게 허리춤에서 무기를 뽑아냈다. 할라트의 무기는 허리띠처럼 허리에 감고 있었던 연검이었다. 새파란 광망을 뿜어내는 연검은 한눈에 봐도 좋은 무기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연검은 오러와 함께 길이가 늘어나며 뱀처럼 꿈틀거렸다. 하지만 잔재주일 뿐이다. 경지에 비해 힘을 사용하는 방법이 미숙해 보였다. 아니 내 눈에만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위협적인 기술이었다.

그러나 이미 나는 그런 연검의 움직임을 피해 할라트의 품 안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내 기동성이 좋다고 해도 연검의 모든 움직임을 피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캉!

오러가 둘러진 연검을 손등으로 후려쳐서 튕겨냈다.

“무슨!”

이런 것은 처음 보는지 할라트가 깜짝 놀랐다. 북경의 주인이었던 변이체를 처치하면서 얻은 능력이다. 놈은 단단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거인이었는데 얼마나 방어력이 높은 것인지 오러를 맞고도 꿈쩍도 하지 않았었다.

아주 간단한 일 합의 격돌이었지만, 그 여파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친구들 셋이 그 일 합의 격돌에서 일어난 충격파를 막아내지 못하고 뒤로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집들도 창문이 일제히 터져나가고 벽이 쩍쩍 갈라지는 집들도 있었다. 아마 안에 있던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래서 이 싸움을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는 것이었고 그래서 위험과 귀찮음을 감수하고 할라트에게 접근을 하는 중이었다.

초월급의 오러가 둘러진 무기를 맨손으로 튕겨내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지 할라트에게 살짝 빈틈이 생겼고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할라트의 품 안으로 파고 들어간 나는 할라트의 멱살을 붙잡고 몸을 날렸다.

통로를 열고 할라트와 함께 안으로 들어간 곳은 지구였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 태평양 깊은 곳에서 변이체를 사냥하고 있었기에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심해였다.

할라트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이 정도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놈도 부교주의 위치까지 올라간 괴물이다. 그렇다고 지상에서처럼 자유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힘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수많은 수중 변이체를 처치한 덕분에 수중에서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자, 숨은 능력을 보여봐라.’

나는 할라트가 두 번째 생존자의 기상변화처럼 무언가 커다란 기술을 보여주길 원했다.

할라트와 싸움은 부교주와 싸울 때처럼 꽤 오래 진행되었다. 이미 인간 기준에서 한참 멀어져 있는 초인이자 괴물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팔과 다리가 날아가는 정도는 그 자리에서 회복시킬 수 있다. 심장이 터져도 그렇다 머리는 날아가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조금 위험하게 느껴지긴 한다.

다만 부교주와 싸울 때는 내가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서서히 승기를 잡아서 승리했다면 지금은 내가 일방적으로 할라트를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기울어진 균형은 절대로 뒤집히지 않을 것이다.

할라트가 뭐라도 말하는 것이 보였지만, 물속이라 잘 전달되지 않았고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역시 할라트에게도 마지막 한 수가 있었다.

피잉!

물 속인데도 불구하고 고속의 무언가가 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 강렬한 경고를 보내온 초감각이 아니었다면 머리통이 날아갔을 것이다.

‘이건가?’

숨겨왔던 한 수가 이것인 모양이다. 확실히 방금 그것은 위험할 뻔했다.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쏘아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싸우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할라트와 나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어떻게 본다면 할라트와 나의 싸움이 아닌 아임샤르의 마왕 하수인과 아노더스 용사 간의 싸움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그리고 싸우는 곳은 지구다.

참 여러 가지 세계가 얽힌 싸움이 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