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200화 (200/206)

199. 어둠의 후손

“야, 너 좋은 거 가지고 있구나?”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능력이기도 하고 꽤 좋은 능력이다. 지구의 강한 변이체들을 상대하면서도 머리가 날아갈 뻔한 경험은 없었다. 그래서 탐이 났다.

할라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심해라서 입을 열기 힘든 것인지 아니면 내가 쏘아내는 공격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지구의 심해에서 벌어진 전투는 생각보다 늘 그렇듯이 주변의 지형을 바꿔놓고 있었다. 빛이 한점도 들어오지 않는 해저에서 번쩍거리며 격돌이 일어날 때마다 충격파로 바닥이 터져나가고 때로는 빗나간 공격에 작은 계곡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할라트는 몇번이나 자신의 기술을 계속 사용했으나 이미 대비하고 있었기에 처음처럼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는 상황은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언가를 발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작은 공간을 찢어내는 방식인 것 같았다. 이런 것이라면 나중에 교주와 싸울 때도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거 이제 좀 지겹다. 다른 건 없나?”

내 조롱에도 할라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투를 시작할 때와 달리 지금 할라트의 몰골은 꽤 많이 상해있었다. 재생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그때 작은 이변이 생겼다. 몇 번 빗나간 공격을 얻어맞은 지표면에서 굉음이 울리기 시작하더니 지진이 일어났다.

직접적인 타격은 아니지만, 물속에서 일어난 지진은 강력한 격류를 만들어냈다. 나는 버틸 수 있었으나 할라트는 격류에 휩쓸리는 척하면서 전장에서 이탈을 시도했다.

놔줄 생각은 없었다. 급하게 추격했지만, 상황을 이용해 도망치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거리를 내줄 수는 없었다. 할라트가 아임샤르의 부교주와 비슷한 위치라면 마음대로 차원을 건너는 통로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리라도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통로를 만들어낼 수는 있을지도 몰랐다.

할라트의 뒤를 쫓으며 수중에서도 사용가능한 원거리 공격을 퍼부었다. 할라트가 요리조리 잘 피하는 통에 지진으로 울렁거리며 뒤집히고 있는 지표면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이미 힘을 많이 소비한 할라트가 도망을 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힘을 보충할 시간을 벌기 위해 도망을 친 것 같은데 도망치며 소비한 힘도 적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급한 마음에 통로를 열기도 했지만, 곧바로 내 공격에 통로가 파괴되며 시도가 좌절되었다.

할라트가 초췌해진 얼굴로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미 승부는 정해졌다. 더 싸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할라트는 아직까지 변이체로 변이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녀석도 부교주처럼 인간으로 죽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일까? 아마 처음부터 변이를 해서 싸웠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오래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세계의 대적자는 강하군.”

“너희 세계가 약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혹시 너희 세계는 강림자도 약한가?”

“웃기는 소리! 그분은 너 같은 것 수백이 덤벼도 상대할 수 없다.”

그럴 수 있다. 나보다는 강하다고 가정하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피체둘라가 신과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힘의 한계는 분명히 있을 것 같았다.

여러 세계의 강림체들에게 똑같은 힘을 배분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강림체 사이에서도 우열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 세계의 교주보다는 저쪽 세계의 교주가 조금 더 약하지 않을까?

“정보 고맙다.”

할라트가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슈바르거트가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어주었다.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할라트는 얌전히 자신의 최후를 받아들였다. 나라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악을 했을 것이다.

할라트의 숨을 거두는 순간, 나와 할라트의 전투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더욱 규모가 커진 지진이 정점을 찍었다.

불룩하게 지표가 솟아나더니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해저화산이 터진 것이다. 이것만큼은 나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서 재빨리 할라트의 시신을 거둔 후 통로를 열어 집으로 돌아왔다.

꽤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단 일합의 여파가 워낙 컸기에 주위를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친구들이 나를 맞이했다. 다가온 친구들이 한마디씩 했다.

“수고했다.”

“고생하셨어요.”

“좀 쉬어”

긴말은 필요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하고 집사를 불러 주변의 피해를 파악하고 두둑하게 보상금을 지급하라고 명했다.

돈이야 많이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꽤 부자가 되어서 왕국 내에서 손에 꼽히는 부자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놈은 얼마나 강했던거냐?”

주변 정리가 끝난 후 슬라이트가 다가와 물었다. 할라트는 어느 정도였을까?

“초월급, 음···. 대충 엘프 여왕과 비슷한 수준?”

엘프 여왕은 강하다. 엘프의 숲 안에서 싸운다면 더욱 강할 것이다. 하지만 엘프 여왕은 순수한 엘프다. 팔을 자르고 다리를 날려도 재생하는 같은 경지의 괴물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당연히 불리할 것이다.

“대체 그런 놈들이 어디서 튀어나오는거지?”

슬라이트가 치를 떨었다.

“다른 세계에서 오는 것 같더라.”

“지구 같은?”

“그렇지. 지구 같은 마왕에게 점령당한 세계지.”

“그런 놈들이 더 많이 올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많은 수는 아닐 거야. 하지만 원래라면 너희들이 상대해야 했을 그 정도 반마들은 많이 올 수도 있어.”

“우리가 더 강해져야겠군. 오늘처럼 네 발목을 붙잡지 않으려면 말이야.”

“그래, 그래 줬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한다. 이 세계를 지키려면 친구들의 힘이 절실하다.

할라트의 습격 사건은 금세 멀리 퍼져나갔다. 파벌을 이용해 소문을 더욱 부풀리고 키우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귀족 중에서는 마신교를 무시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과거 용사들의 시대에서 일어났던 일이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직접 당하거나 보지 안으면 믿지 않은 인간들이 있다. 그런 인간들에게 조금이라도 경각심을 더 주기 위해서 소문을 키운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빅터 하네스가 자신의 힘과 공적을 부풀리기 위해 작업을 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생각 같아서는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 인간들을 전부 색출해서 처리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잡아내도 그런 인간들은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보다 내 관심사는 지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할라트와 나의 전투 여파 때문에 일어난 지진과 해저 화산 폭발은 내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규모였다.

지진의 여파로 일어난 쓰나미가 육지를 덮치고 화산폭발로 인해 해저부터 지표면이 솟아오르며 커다란 화산섬이 새로 생겼다.

예전이었다면 그야말로 국가 몇 개가 사라지고 생태계가 바뀔만한 천재지변이었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일어난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태백시의 영지에도 영향이 있었을 정도의 대재앙이었다.

반면에 엄청난 화산섬이 생성될 정도의 지반변화로 그만큼 깊게 들어간 곳도 있었다. 나는 지구의 중심으로 파고들 곳을 그곳으로 정했다.

이것은 나라고 해도 꽤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었다.솔직히 이렇게 지구의 핵에 도달한다고 해도 무언가가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몸보다는 정신이 힘든 작업이었다.

아임샤르라는 세계에서 마신교의 졸개들이 넘어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아노더스를 살피기 위해 자주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그렇게 지구에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쉬고 있었던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전과 달리 이번엔 손님이 오는 것을 미리 알아챌 수 있었다.

마치 깃털처럼 소리와 기척 없이 창문을 넘어와 내방으로 들어선 손님은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때와 모습은 완전히 달랐지만, 느낌이 같았고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둘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곳에 계시면 안 되는 것 아니십니까?”

내가 맞이한 손님은 라이브러쉬 왕국의 해외정보부장이었다. 제멜아크의 던전 때 본적이 있다. 하지만 해외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니만큼 국내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어차피 누구도 제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합니다.”

“그건 그렇네요.”

경지는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변이체처럼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닌데도 극한의 은신술과 역용술을 가진 사람이다. 업계의 전설로 통하는 것이 이해되었다.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있을까요?”

“하네스 백작에게 힘을 보탤까 합니다.”

“저에게요? 왕실의 명령인가요?”

“아닙니다. 이것은 왕실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분명 유능한 사람이긴 한데 개인으로서 나에게 큰 도움이 될것 같지 않았다. 정보야 어차피 왕실에게 요구하면 정보부에서 얻은 정보가 모두 나에게 넘어오는 상황이니 아쉬울 것이 없었다.

누군가를 암살하는 것도 차라리 내가 직접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개인의 능력이라면 저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데요.

“개인이 아닙니다. 혹시 ‘어둠’ 이라는 곳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전 대륙에서 활동하고 있는 단체다. 도둑, 암살, 정보 길드가 하나로 합쳐진 형태라고 보면 된다.

“저는 그곳의 후계자입니다.”

“왕실의 관료가 아니십니까?”

“그것은 일종의 위장이자 부업이지요.”

오히려 관료가 부업인가? 하긴 어둠의 후계자라면 그럴 만도 하다.

“어둠이 저를 도우려고 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갑자기요?”

“갑자기는 아닙니다. 아주 오랫동안 내부에서 의견대립이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하네스 백작을 돕는 쪽이었습니다.”

“어둠이 저를 도우려는 이유가 있을까요? 원하시는 대가라던지 말입니다.”

도둑, 암살을 하는 연합길드 같은 곳이니만큼 정의와는 거리가 아주 먼 단체다. 그런 단체가 나를 돕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둠이 태어난 배경에 대해 아십니까?”

“대충은 압니다.”

제국 시절부터 있던 대륙의 수많은 어두운 일을 하는 길드들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 ‘어둠’ 이다. 그리고 그 설립자는 물건의 기억 속에서이지만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저희 어둠의 설립자는 용사의 한 분이자 죽음의 그림자로 불렸던 조엘 에이크만님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유지가 있었습니다. 언제가 되었든 용사가 나타난다면 그를 도우라는 말씀이었죠.”

“제가 용사로 인정 받았나보군요.”

“하네스 백작이 용사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설립자의 유지라고 해도 아주 오래전의 일이고 우리가 결코 바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보니 유지를 이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의견이 많았던 것뿐이지요.”

충분히 이해가 되는 내용이었다. 다만 여전히 이 사람 혹은 어둠이라는 단체가 나를 그냥 도우려고 하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둠이 저를 돕는다고 하면 당연히 환영입니다. 다만 원하시는 것을 아직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일단 저희 아버지를 만나주시겠습니까?”

“정보부장 후계자라고 하셨으니 아버님은 어둠의 수장이시겠죠?”

“그렇습니다.”

“어려울 것 있겠습니까?”

어둠의 수장을 만나는 약속을 바로 잡았다. 무력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어둠’은 대륙 전체에서 활동하는 가장 큰 정보단체다.

숨어있는 마신교를 찾아내는 일은 왕국의 정보부보다 나을 것이고 무엇보다 여론을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며칠 후 왕도의 모처에서 만난 ‘어둠’ 의 수장은 생각보다 훨씬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조금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빅터 하네스입니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토르 에이크만입니다.”

에이크만이라는 성을 사용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용사 조엘 에이크만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실례지만 정말 용사님의 후손이십니까?”

“맞습니다. 직계는 아니지만, 피가 이어져 있기는 하지요.”

꽤 긴 세월이 흐르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조엘 에이크만의 후손이라기엔 너무 평범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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