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해후
“지구를 지키고 있었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지구 말이야. 정상이라고 보나?”
당연히 아니다. 생명체가 사라진 행성이다. 내 영지에 그나마 다시 싹을 띄우고 있지만 지구 전체 면적에 비하면 정말 티끌만큼에 불과하다.
“아닙니다. 생명이 사라진 행성이니까요.”
“단순히 생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어차피 우주에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은 그리 많지 않잖아?”
지구 말고도 있긴 있다는건가? 나는 지구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그렇지요.”
“이것이 말로 하자니까. 조금 어렵네 이리 와봐”
광검제가 손짓으로 부르기에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숙여”
설마 나에게 해코지를 할 것 같진 않아서 시키는대로 광검제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광검제가 내 머리게 손을 올렸다.
그러자 컴퓨터에 자료가 복사되는 것처럼 많은 지식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너튜브 동영상을 수천개를 틀어놓고 그것을 빨리 돌리기를 하는데 그게 전부 머리속으로 박히는 느낌이었다.
경지가 오르면 이런 것도 할 수 있는건가? 이런 식으로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기술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술에 대한 지식을 전이하기만 하면 6성 기사 정도는 공장처럼 찍어낼 수도 있는것 아닐까?
머리속에 지식이 입력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고 부작용 같은 것도 없었다.
“대충 알겠지?”
“예”
광검제의 말대로 이것은 말로 하기 어려운 관념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신과 인과가 뒤얽힌 굉장히 복잡한 문제였다. 이것을 풀어서 글로 써놓고 이해하라고 했으면 몇십년은 머리를 싸매야 했을거다.
한마디로 이 세상을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힘을 광검제가 자신이 해결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한번도 인간을 버린 적이 없다고 했지만, 이 정도면 이미 인간이 아니다. 신의 영역에 가깝다.
“그런데 이제 그만해도 될것 같아.”
“제 영지 때문인가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하지만 네가 있잖나”
“전 아직 부족합니다. 할 일도 많고요.”
이 세계를 유지시키는 힘을 나보고 책임지라니 어떻게 하는지 방법도 모르지만, 나에게 그만한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아직 부족하긴 하지. 내가 좀 더 봐주긴 할거야. 그러니 갔다왔라.”
“어디를 말입니까? 아···.”
광검제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것 같았다. 아임샤르에 다녀오라는 말 같았다. 지금 내가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가능할까요?”
그곳에는 아임샤르의 교주 그러니까 피체둘라의 강림체가 있다. 광검제는 피식 웃으면서 답했다.
“언제는 가능한 일만 했나?”
그렇긴 하다.
나도 그렇고 광검제도 그렇다.
개뿔도 가진 것 없지만,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혹은 단신으로 세계를 구하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긴 하군요.”
“다녀와. 이곳은 내가 잠시 더 맡아주마”
“알겠습니다.”
곧바로 아임샤르로 통하는 통로를 열고 건너가려고 할 때 한가지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엘프 여왕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고 계십니까?”
광검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지, 이시리엘이라면 그럴거야.”
“지르크님을 찾는다면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나중에 하자.”
광검제는 엘프 여왕과 만나는 것이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만나지 않을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확실히 광검제는 늙었다. 이미 수백년을 살아 인간의 수명을 아득하게 초월한 상태였다.
“이시리엘은 앞으로도 몇백년은 더 살거야. 굳이 나에게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어.”
광검제의 생각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광검제에게 목례를 한 후 나는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내가 통로를 열고 나간 곳은 아임샤르가 아닌 엘프의 숲이었다.
엘프 여왕과 만났던 바로 그곳이었다. 내가 갑자기 나타나자 숲이 놀란 것처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주위에 있던 엘프들이 놀라서 허둥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숲 저 멀리에서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나타남과 동시에 여왕에게 그것이 전달된 것이다. 숲은 여왕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난 번처럼 숲에서 솟아나듯이 조용히 찾아오는 것이 아닌 폭풍처럼 숲을 가르며 나타난 엘프의 여왕은 굉장히 허둥대고 있었다.
“찾은 것이냐?”
“예”
“어머니 나무시여!”
엘프 여왕은 눈물을 흘렸다. 이 사람 아니 엘프가 광검제가 늙었다고 해서 곧 죽는다고 해서 싫어할까?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광검제께서 만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왜! 어째서?”
나는 광검제의 현재 모습과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런 것은 내가 그이를 좋아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당연히 받아들인 일이었다! 당장 나를 그이에게 데려가주게!”
역시 그랬다. 엘프의 사고방식은 잘 모르겠지만, 그냥 엘프도 아닌 천년을 살아가야 하는 하이엘프다. 짧은 생을 살아가는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모두 감수한 일이었던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안됩니다. 지금 광검제가 계신 곳은 여왕께서 가실 수 없는 곳이니까요. 다만 저쪽 세상에도 이제 여왕께서 머무실 수 있는 곳이 생겼습니다. 그곳에서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런가? 그럼 삼일만 기다려주게!”
여왕은 두말 않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냥 내 마음대로 광검제의 말을 어기고 둘을 만나게 해주려는 것이지만 내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본 광검제는 너무 외롭고 힘들어보였다. 두개의 세상에서 피체둘라의 침공을 세번이나 막아낸 영웅의 마지막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해보였다.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엘프 여왕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왕도 세상을 구한 용사 중 한명이었으며 사랑했던 광검제를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에게 양보하고도 몇백년동안 그 사랑을 잊지 않고 지켜온 사람이다. 그 보상을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지 않을까?
정말로 광검제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그 짧은 시간이라도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엘프의 숲에서 나온 후 근처의 자칼에게 들렀다. 예상대로 내가 만들어서 건네준 검술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조하고 있었다. 역시 천재라고 해야할까. 슬라이트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칼과 대련도 해보니 8성 초입의 기사라고 할 수 없는 정도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에인프라흐 공작이나 제멜아크의 검제에는 미치지 못해도 국왕보다는 나아보였다.
자칼의 실력을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약속대로 3일 후에 만난 여왕은 뒤에 수십명의 엘프를 데리고 나와있었다.
“혼자 가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 필요가 없어졌음이야. 나는 이제 돌아오지 않을테니까. 이들은 끝까지 나를 따르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데려가는 것이지.”
“돌아오지 않는다고요?”
“왕을 그만뒀다. 조카에게 넘겼지 나에 비하면 아직 부족하지만 일족을 이끄는데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야.”
이 여자는 진심이었다. 인간과 권력 구조가 다르긴 하지만 사랑을 위해 왕의 자리도 내던질 수 있다는 것이 진심이 아니면 무엇일까?
지구의 영지에 뮤어 아이번 뿐만 아니라 엘프들 수십명이 가세한다면 더욱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엘프의 숲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곳에 이미 거주하고 있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혹시 마찰이 있진 않겠습니까?”
“그것은 걱정하지 말라. 아주 오래전에는 인간과 엘프는 한 곳에 모여 살기도 했었다. 처음에는 다름에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인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투닥거리는 작은 마찰이 아니라 스테이시의 눈이 확 돌아가서 대마법이라도 날리는 일이 일어나면 어쩌나 걱정이 될 뿐이었다. 하기야 그것도 여왕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여왕과 따르는 엘프들을 지구의 영지로 옮겨주고 나는 다시 광검제를 찾아갔다.
“너 간 것 아니었나?”
“가기 전에 할일이 있어서 말이죠. 꼭 여기 계셔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긴 하지.”
“그럼 잠시 저와 함께 가시죠.”
내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광검제가 눈치를 챘는지 눈을 부라렸다. 이래서 눈치 빠른 노인은 싫다니까? 아니 광검제는 곧 나이니 생각이 비슷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슨 짓이냐?”
“이미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왕 자리도 물려주셨다고 하더군요.”
“후우”
광검제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너는 두고보자.”
깊은 한숨을 쉰 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광검제가 나를 노려봤다. 나중에 두고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지만 광검제가 그러니까 사실 조금 무서웠다.
광검제를 데리고 지구의 영지로 이동했다. 여왕과 광검제의 감격적인 해후가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며 축하해주고 있던 친구들은 정신이 없어보였다.
“진짜 광검제님이야.”
“난 평생 엘프의 숲 옆에서 살았지만 엘프도 처음 봐”
“이것은 정말 역사적 순간이네요.”
정말 역사적 순간이기는 했다. 책으로 써서 팔아도 될만한 이야기였다.
그러고 있을 때 노인이 되었어도 당당한 풍채의 광검제가 한팔로 여왕을 끌어안은채 나에게 눈총을 보냈다.
“안 가냐?”
“그렇지 않아도 이제 가려고 합니다.”
“저것들도 데려가려고?”
광검제가 턱짓으로 친구들을 가리켰다.
“예, 그러려고 데려 왔습니다.”
나 혼자 성장해서는 의미가 없다. 8성 기사면 그래도 이제 앞가림은 할 수 있을테니 슬라이트와 자칼을 데려가려고 미리 데려온 것이었다.
“저대로 가면 죽을거 같은데?”
광검제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친구들이 혼란에 빠졌다.
“주, 죽는다고요?”
“우리 어디 가는데?”
사실 아임샤르에 데려간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그저 광검제와 엘프 여왕을 보게 해준다고 하니 따라온 것이었다.
“너희 이리 와봐라”
광검제가 남아있는 한쪽 손을 까닥거리며 슬라이트와 자칼을 불렀다.
둘이 쭈뼛거리며 광검제 앞으로 다가서자 나에게 했던 것처럼 차례대로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무슨 지식이라도 전해주는 것일까? 마법도 아닐텐데 저건 진짜 신의 영역이 아닐까?
“와!”
“감사합니다!”
슬라이트와 자칼이 무슨 지식을 얻었는지 감탄을 터트리며 허리를 굽혀 광검제에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뭘 전해줬는지 몰라도 그렇게 좋은 것이면 나에게도 좀 전해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이제 살 확율이 1할 정도 올라갔군. 이제 가라.”
광검제가 파리를 쫓듯이 손을 휘둘러친구들을 몰아냈다.
“그럼 이번엔 진짜 다녀오겠습니다.”
광검제와 여왕에게 인사를 하며 슬라이트와 자칼을 붙잡아 통로 앞에 세웠다. 스테이시는 남는다. 아무래도 육체적으로 약하기도 하고 우리와 함께 싸우는것보다는 이곳에서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마법을 연구하는 것이 더 빠르게 강해질 것이다.
“올 때 메론 얼음”
뒤에서 들리는 광검제의 조선시대 유머를 무시하며 통로 안으로 몸을 던졌다.
통로를 건너자마자 기다렸다는듯이 쏟아지는 공격을 시작으로 우리는 아임샤르에서 지겹도록 싸웠다.
아임샤르는 지구나 아노더스만큼 큰 행성은 아니었지만 황폐화된 지구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많은 변이체가 있었고 반마가 존재했다.
일주일이 넘게 잠을 자지 못하고 싸우기도 했고 뭔가를 먹을 시간도 없어서 한손에 수저를 들고 나머지 한 손에 검을 들고 싸우기도 했다.
놀라운 점은 아임샤르는 아직 완전히 멸망한 세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마치 전생의 지구처럼 이리저리 피난을 다니며 숨어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겐 아스트로퍼가 있었고 나를 제외한 천재 둘은 빠르게 아임샤르의 말을 배우기도 했다.
우리는 생존자들을 구하고 끝없이 몰려드는 변이체와 반마들을 처치했다. 그렇게 아임샤르를 구하는 것에 3년이 걸렸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다.
슬라이트와 자칼은 3년의 시간 동안 많이 강해졌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전투는 나 혼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아임샤르의 최강자이자 피체둘라의 강림체인 에페크스라 불리던 인간은 거대한 용으로 변이했고 나는 에페크스와 한달이 넘는 시간 동안 싸웠다.
쿠웅!
거대한 용이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우리는 아임샤르를 구해냈다. 이제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