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결전의 시작
“조건이 뭔가?”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잠시 말이 없다가 그게 무슨 뜻인지 눈치챈 국왕이 눈이 크게 떴다. 그것은 같은 나라가 되라는 뜻이었으니까. 국왕이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완전히 제멜아크 왕국을 없앤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영원히 속국이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마신교주의 침공을 막을 때까지만 같은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한시적이지만 공국 형태가 되겠지요. 침공이 끝나는 즉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은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문서로 남겨도 좋습니다.”
“답은 언제까지 주면 되겠는가?”
“지금 당장입니다.”
다소 강압적인 느낌이 있었지만, 이 또한 제멜아크가 자초한 일이다. 국왕은 고뇌했고 쿼런틴 공작을 비롯한 신하들 그 누구도 국왕의 고뇌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알겠네.”
국왕이 결정을 내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내가 손을 따로 쓰지 않더라도 제멜아크에는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교주는 대륙 어딘가에 통로를 열고 부하들과 함께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것이 라이브러쉬의 영토라면 상관없겠지만, 만약 제멜아크의 영토라면? 내가 막아주지 않는다면 제멜아크가 쑥대밭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라이브러쉬 왕국에서 전달할 겁니다.”
나는 기세를 거두고 몇 가지 대화를 나눈 뒤 곧바로 본국으로 되돌아가 왕실을 방문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그것을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것까지 예전 광검제와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라이브러쉬 국왕을 비롯한 수뇌부들이 긴급하게 모인 회의에서 나는 제멜아크 왕국에서 벌인 일에 대하여 설명했고 마지막으로 마신교주의 침공이 1년밖에 남지 않았음을 설명했다.
“광검제님이 오셔서 도와주시면 안 되는 것인가?”
“오지 않으실 겁니다. 아마 오실 수도 없을 거고요.”
광검제는 이제 지구를 벗어날 수 없다. 광검제가 인간이 아닌 듯한 느낌을 줄 때부터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광검제는 필멸의 굴레를 버리는 대신 지구를 벗어날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나도 이제 그와 근접한 영역에 도달했기에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불멸에 가까운 영원한 삶을 꿈꾼 적은 있지만, 막상 그것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정도가 되자 그러고 싶진 않았다. 나는 인간인 것이 좋다. 인간으로서 죽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반쯤은 인간이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불멸은 아니다.
긴 회의 끝에 라이브러쉬 왕국을 비롯한 제멜아크 공국은 운명의 날을 1년 남겨두고 전시 체제에 들어갔다. 모든 귀족이 자신의 힘이 닿는 한 모병을 하여 훈련을 시키기 시작했고 국가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무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년은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몇번이나 광검제를 찾아가 다른 자세한 정보를 원했지만, 광검제는 자신도 잘 모른다고 대답하며 행복한 신혼생활을 방해하는 존재인 나를 내쳤다.
대신 7성 이상의 기사들을 불러들여 지도를 해주었다. 그 어떤 기사도 그것을 거부하지 못했다. 무인에게는 전설이자 꿈과 같은 존재인 광검제에게 지도를 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한 사람당 며칠 이상을 할애하지 않는 짧은 지도이긴 했지만 격렬한 지도방식은 보는 것만으로도 나름 배울 것이 많았고 재미도 있었다.
8성 기사인 라이브러쉬의 국왕도 당연히 지도의 대상이었는데 한 나라의 국왕이 개처럼 두드려맞으며 바닥을 구르는 모습은 상당히 즐거운 볼거리였다. 그것을 보며 가장 즐거워한 사람은 에인프라흐 공작이었는데 며칠 후에 본인도 똑같은 꼴이 되어 바닥을 굴렀고 국왕은 자신의 지도 기간이 끝났는데도 아노더스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그것을 지켜보며 똑같이 즐거워했다.
지도를 받은 기사들은 크고 작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놀랍게도 큰 성과를 보인 기사 중에 스승님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성장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었지만, 스승님은 내 예측을 뛰어넘어 광검제의 지도받는 동안 승급을 이루어내셨다.
비슷한 성향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7성의 끝자락에 머물러 있던 제멜아크 왕국의 고든 바이런 후작도 승급을 했다. 예상외의 승급은 또 있었다. 자칼의 아버지인 올라프 에르하트 후작도 8성 기사가 되었다. 덕분에 평생의 라이벌인 지글러 후작이 이를 갈아댔지만 아쉽게도 지글러 후작은 승급하지 못했다.
이미 초월의 영역에 발을 들인 슬라이트와 자칼도 본인들의 희망으로 광검제의 지도를 받았는데 초월급이 되고서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귀한 체험을 해서인지 각자 유의미한 성장을 거뒀다.
밖에서는 전 대륙이 전쟁 준비에 한참이었다. 백성들의 불만이 없을 수 없었지만, 어둠에서 암암리에 퍼트리는 소문 덕분에 그것은 최소화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중앙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겁 없는 지방 귀족들이 있었는데 그런 정보도 어둠에서 전달해주는 덕분에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꽤 많은 지방 귀족들이 그 과정에서 숙청되었고 새로운 귀족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부패 귀족이 물갈이되는 효과도 있었다.
엘프 여왕도 엘프의 숲에 한 번 돌아가 앞으로 있을 일을 현재 엘프의 왕에게 전달했다. 밖에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엘프들도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상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준비하고 6개월쯤 되었을 때 평소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기만 하던 광검제가 지나가듯이 새로운 정보를 툭 던져주었다.
“놈은 크리스티 백작령 인근에서 문을 열고 나올 것이다. 시간이 좀 더 당겨졌다. 얼마 남지 않았다.”
크리스티 백작령은 아버지가 봉신기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이다.
얄궂다고 해야 할까?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그곳에서 조용히 살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휘말릴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하지 못했다면 문이 열리는 날 그곳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죽었을지도 모른다.
공교롭게도 크리스티 백작령은 변경백으로서 국경에 위치한 곳이었다. 양쪽 나라 어느 쪽도 방심할 수가 없다. 반면에 대륙의 중앙이기에 병력을 집중시키기에는 좋다.
대륙 구석의 어딘가나 섬이었다면 막아내기가 조금 더 수월했겠지만, 저쪽도 바보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것을 세상에 알렸고 그동안 준비했던 대륙의 모든 병력이 크리스티 백작령을 포위하듯이 모이기 시작했다.
대륙의 반대편에서 이쪽까지 병력이 이동하는 것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바로 움직여야 시간에 맞출 수가 있다.
전방은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후방이었다. 모이는 병력이 엄청난 만큼 보급이 중요했고 그렇게 될 것 같진 않지만, 전쟁이 장기전으로 들어갔을 때도 대비해야 했다.
대륙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과거 두 번이나 있었던 마왕의 침공 때도 없었던 일이었다.
주력인 선발대들이 1차 방어선에 도착하고 그 뒤를 이어서 2차, 3차의 병력들이 자리를 잡고 벽을 쌓게 적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졸지에 영지를 잃고 피난을 떠나게 된 크리스티 백작은 조금 불쌍한 면이 있었지만, 영지의 백성들은 모두 주변에 새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내가 사비를 풀어 도와주었다. 아버지는 이것을 매우 기뻐하셨다.
그래서인지 암테일 영지를 새로운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도와줘서라기보다는 아버지와 행정관이 크리스티 영지에서 근무할 때 쌓은 인덕 때문이었다.
전선을 지휘하기 위해 먼저 합류한 다른 사람과 다르게 나는 마지막까지 집에 남아있었다. 대놓고 사위로 삼겠다고 공표한 국왕 때문에 아이브 공주는 의식적으로 나를 피하고 있었는데 몰래 찾아와서 직접 자수를 놓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붉은 꽃을 수놓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왠지 불을 뿜는 괴물의 형상이 되어있었지만, 손수건을 건네주고 도망치듯 달려가는 공주를 보며 가슴 속이 조금 간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기다리다 서른살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한 아이브 공주다.
어차피 내가 데려오지 않으면 평생 노처녀로 남아야 할 것이다.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어쩌면 나도 광검제처럼 가정을 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바깥은 난리가 났지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유유자적하게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뮤어 아이번이 엘프의 숲 못지 않게 잘 가꾸어놓은 정원에 앉아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드디어 왔나?”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구름이 낀 것도 아닌데 밤이 찾아온 것처럼 전 대륙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찻잔을 내려놓고 나는 통로를 열었다. 통로 저편으로 수만의 기사와 병사들이 정렬하고 있는 진영이 보였다.
그 많은 병사들의 눈빛에 가득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병사들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나도 두려웠으니까. 나라고 죽을지도 모르는 전장에 나가는데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야 한다.
통로를 저편으로 발을 내딛으려 할 때 발 밑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먕! 먕!
고양이도 아니면서 털을 잔뜩 부풀린 털뭉치가 용맹한 눈빛으로 짖고 있었다. 눈빛으로는 변이체도 단번에 찢어버릴 것 같았다.
“네가 제일 용감하구나. 똘똘아. 다녀올게.”
똘똘이에게 인사를 하고 나는 통로를 건너갔다.
건너가자마자 수많은 병사들이 내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내지르는 소리,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귀찮은 일은 다 맡겨놓고 펑펑 놀다가 이제 왔냐?”
미리 도착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던 슬라이트가 부루퉁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주인공은 원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야. 인마.”
슬라이트와 함께 도열해 있는 기사와 병사들이 만들어낸 중앙의 통로를 통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를 알아본 기사들이 예를 갖추고 병사들이 작은 용기를 얻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 멀리 이미 통로가 열린 것이 느껴진다.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괴물들이 뱉어내는 악의가 전해져오고 있었다. 아직 교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천천히 중앙을 걸어 도착한 선두에는 라이브러쉬를 대표하는 절대자들이 나란히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늦었습니다.”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승님과 국왕까지 있었으니까.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통로에서 쏟아져 나온 변이체 혹은 악마라고 불리는 것들이 병사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으로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그것들은 원래 그런 것들이다. 생명을 잡아먹고 파괴하고 그것이 존재하는 목적인 것들이다.
“따로 연설이라도 할 텐가?”
국왕이 제의를 했다. 그런 것은 원래 왕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은근슬쩍 자기 할 일을 떠넘긴다. 이러다가 부마가 아니라 국왕을 시킬 기세다.
“굳이 필요하겠습니까?”
나는 대신 오랜만에 슈바르거트를 뽑아 들었다. 새빨간 검신이 오늘 포식을 할 수 있는 것을 느꼈는지 더욱 요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요사스런 붉은빛은 곧 백색의 광채에 의해 묻혀버렸다. 끝없이 늘어나는 거대한 빛의 기둥은 빛을 잃고 어두워진 하늘을 꿰뚫었다.
인간이 만들어냈다고 믿을 수 없는 거대한 빛의 기둥은 서서히 기울어지더니 지면을 뒤덮을 정도로 새카맣게 달려오고 있는 악마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한꺼번에 수백개의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거대한 굉음을 낸 폭발이었다. 동시에 강렬한 후폭풍이 주위를 뒤덮었다.
거대한 계곡을 만들어내고 수천의 악마를 일격에 소멸시킨 일격을 지켜본 아군의 사기가 단번에 치솟았다.
우아아아아!
아군의 함성이 터져 나올 때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우리 세상을 지켜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