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2화 (2/126)

다시, 열일곱 살(2)

*

그로부터 한 시간 후.

“괜찮아요, 괜찮아.”

동생 클로이의 연을 꺼내주겠다며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졌다는 나를 두고.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며 몹시 걱정했지만.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툭툭 털고는 집을 나섰다.

근처 공터를 거니는 한편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내가 정말··· 열일곱 살로 되돌아왔다고?’

사실은 그냥 미쳐버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환상을 현실로 착각하고 있다든가···.

잠시 고민하다가 얼굴을 꼬집어봤다.

“아야.”

얼굴을··· 꼬집을 수가 있단 거지.

의지대로 자유로이 움직이는 손가락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멀쩡하다 못해 힘이 흘러넘치는 두 팔과 다리도.

벅차오르는 기분에 고개를 들자 옆집 유리창 속에 비친 열일곱 살의 앳된 내가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하지 않은 구석이 없는 나의 육체 또한.

“···.”

잠시 울컥하는 기분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1년 넘게 누워만 있던 병실의 알코올 냄새가 날 것 같은데.

“후우.”

죽음의 순간, 전신을 내리누르던 그 어마어마한 중압감.

그 고통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기분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대로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정말로 기적이 일어난 건가.’

오래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

북받치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히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천천히, 이내 속도를 높였고.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거침없이 뛰었다.

“헉, 허억···.”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신선한 공기를 폐 한가득 들이마신 덕분인지, 산소를 공급받은 두뇌가 빠르게 돌아가는 게 느껴진다.

이 모든 상황을 차근차근 파악한 나의 두뇌가 단순한 결론을 도출했다.

‘다시는 그런 미래가 반복되지 않게 해야 한다.’

내게 동맥류라는 가족력이 있기는 하지만, 평소에 조심만 한다면 충분히 예방이 가능하니까.

금연, 금주, 운동.

이 세 가지를 꾸준히 지켜서 30대 중반이라는 한창 나이에 육체의 감옥에 갇히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물론.

“···아버지도.”

나를 보며 어색하게 머뭇거리던 아버지와, 나의 작은 변화에 몹시 기뻐하던 새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지난 삶에서 얼마나 후회했던가.

내가 대학에 다닐 적 돌아가신 아버지.

그와 나는 끝끝내 틀어진 사이를 회복하지 못했다.

뒤늦게서야, 케이트와 클로이의 진심에 보답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떠오르는 가운데.

‘아버지도 나와··· 비슷한 증상이었던 걸로 기억해.’

그러니 아버지의 건강을 챙기는 게 첫 번째이고.

새어머니와 동생에게도 잘하자.

어쩌면 이건, 다시는 그런 후회를 하지 말라고 하늘이 내게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아.”

그런 결론을 내리며 안심한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두 뺨에 와 닿는 고온다습한 공기, 상쾌한 나무 냄새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따스한 태양빛까지.

전신의 오감이 지금 내가 이곳에 있음을 명명백백하게 말해주던 그 순간.

‘···!’

병상에 누워 있던 그때처럼.

어두운 시야 속에서 글자가 떠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소설]

[비소설]

[장르별 분류]

[시대별 분류]

[작가별 분류]

···

나만의 기준에 따라 정리해둔 레퍼런스들뿐 아니라.

병상에 누운 채 썼던 습작들도, 구상해둔 아이디어들도 전부 고스란히 머릿속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이 아닌가.

두근, 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두 눈을 떴다.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시골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우는 가운데.

‘이제는··· 글을 쓸 수가 있구나.’

뒤늦은 깨달음에 가슴이 희망으로 부풀었다.

지금이라도 얼른, 무엇이든 쓰고 싶다는 생각에 손가락이 근질거리는 동시에-

‘그래도, 절대 급하게 가지는 말자.’

소설로 성공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향후 업계 사정이나 트렌드에는 누구보다 빠삭할 뿐더러.

‘자신이 있잖아?’

···그때보다 훨씬 더 좋은 글을 쓸 자신이.

지금의 나는 미숙한 영어 실력으로 좌절하던 과거의 권유진이 아니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가장 고급 영어를 구사한다는 출판계에서 십 년 가까이 근무한 것은 물론.

‘지금은 웬만한 네이티브보다 훨씬 더 잘한다고 자부하니까.’

그러니 수많은 글을, 다양한 이야기를 쓰되-

“오래 오래, 행복하게 써야지.”

이번 생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다.

근거 없지만 확신 가득한 자신감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이제 가볼까.”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우리 유진이 달라졌다.

그것이 권유진의 새엄마, 케이트 권이 일요일 아침에 문득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냥 달라진 게 아니라, 아예 딴 사람 같단 말이지.’

한국인 남편의 사별한 전처가 낳은 한국인 소년.

권유진은 같이 산 지 1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소포모어(10학년, 고2)가 되고 나서는 더 심해져 눈이 마주쳐도 인사도 안 했고.

식사하라고 불러도 제 방에서 안 나오기 일쑤였는데···.

“케이트, 접시만 꺼내면 되죠?”

“어? 어, 그, 그래.”

케이트 자신이 아침식사를 차리는 사이, 자연스럽게 테이블 세팅을 하더니.

“클로이는 아직 자나 봐요?”

“어, 어.”

어린 동생의 유아용 의자와 식기까지 차려놓는 것이 아닌가.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태도가 낯설었다.

설마, 어제 나무에서 떨어진 것 땜에 머리를 다친 건···.

케이트는 아들의 옆모습을 흘긋거리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유진, 오늘 따라 참 상냥하구나.”

“네?”

“같이 식사 준비해줘서 고마워.”

용기 내어 꺼낸 말에 유진은 뭔가를 뒤늦게 깨달은 듯 아- 하는 소리를 냈고.

‘이런.’

괜한 소리를 했네, 싶은 케이트가 얼른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 정말로 좋아서 그래. 우리가 앞으로도 쭉 이렇게 지내면 좋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부담 갖진 말고, 알았지?”

당황한 탓에 횡설수설하자, 소년은 말간 얼굴로 활짝 미소 지었다.

“부담은요. 제가 그동안 속을 많이 썩이긴 했나 보네요 하하.”

“···.”

그 미소가 일순 닳고닳은 사회인 같다는 생각이 들던 그때.

“유진이 네가 웬일로 일요일에 다 일찍 일어났냐.”

그녀의 남편이자 권유진의 아버지가 들어섰다.

무뚝뚝하고 권위적인 아버지와 반항적이고 성마른 아들은 사이가 좋지 않다.

케이트가 저도 모르게 긴장한 그 순간.

“잘 주무셨어요 아버지?”

“···.”

유진이 웃으며 대꾸한 말에 그녀도, 남편도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케이트가 구워주신 팬케이크가 엄청 맛있네요. 식기 전에 얼른 드시죠.”

“어, 아··· 그으래.”

늘 빈틈없는 남편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메이플 시럽을 소매에 흘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진풍경이었지만.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그보다는 유진이 생글거리며 제 아버지를 대하는 것이 더 충격이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친 유진이 의자 끄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고마워요 케이트.”

“어, 그, 그래.”

“그리고 아버지.”

“응?”

“저랑 한 가지만 꼭 약속하세요.”

“···?”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드는 제 아버지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권유진은 힘주어 말했다.

“오늘부터 담배랑 술 끊으세요.”

“뭐, 뭐라고?”

“저,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매일 운동도 하시고요.”

“···.”

“이러다 진짜 한 방에 훅 가요, 훅 가.”

농담이라고 보기엔 너무 진지한 태도에 아버지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

저녁 내내 아버지를 들들 볶고 난 다음 날, 월요일.

‘수학 수업조차 재밌을 줄 몰랐지.’

십몇 년 만에 등교라는 것을 해서 그런가.

예전엔 절반도 채 못 알아들었던 말들이 술술 이해가 가서 그런가.

두 눈을 생기로 반짝이며 경청하는 모습에 선생님들이 얼마나 당황하던지.

게다가.

‘어, 으윽, 야 숨 막혀.’

‘뭐야, 너 나무에서 떨어졌다더니 머리가 좀 이상해진···.’

‘얘들아, 사랑한다.’

‘Holy Shit! 유진, 너 진짜 미쳤구나?’

락커룸 앞에서 만난 절친 네드와 아델.

그 둘을 격렬하게 껴안고 진심을 고백하자 다들 나를 미친 놈 취급했다.

“···그래, 이런 게 진정한 행복이지.”

문득 튀어나온 중얼거림에, 신나게 면발을 들이켜던 네드가 켁 소리를 냈다.

“오늘 진짜 왜 이러냐? 아니 물론, 너네 집에서 먹는 신라면은 늘 끝내주게 맛있지만···. 주말에 뭐 심각하게 충격 먹은 일이라도 있어?”

“내가 아까 그랬잖아, 뇌진탕이 분명하다고.”

어깨를 으쓱하는 아델.

그녀가 호록 하고 라면을 먹을 때마다 빨간 단발머리가 어깨 위에서 찰랑거린다.

‘진심인데.’

음식을 입으로 씹어 삼킬 수 있다는 것.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국물의 맛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다는 것.

이 모두가 축복이자 기적이다.

기관에 삽입해둔 튜브로 유동식을 먹던 걸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돋을 정도이니까.

‘그러고 보니.’

그때 회귀 직전에 들은 말은 뭐였을까.

분명 계약이라든가, 기적이 어쩌고 했는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차.

“야, 2층 가자!”

어느새 국물까지 깨끗하게 먹어치운 네드와 아델이 자연스레 내 방으로 향했다.

“유진, 이번 호 <왓치맨> 봤어? 완전 미쳤다고.”

창백한 피부에 뿔테 안경을 낀 네드는 온 학교가 다 아는 히어로물 덕후다.

“잠깐만, 나 오늘 아침부터 그놈의 왓치맨 얘기 백 번은 들은 것 같아.”

그리고 이쪽은 바로 옆집에 사는 아델 애시번.

이 둘 덕분에 나는 낯선 미국 학교에 간신히 적응할 수 있었다.

“백 번 넘게 말해도 넌 왓치맨 잘 모르잖아.”

“알 필요가 있나? 근데, 유진.”

“응?”

아델이 나를 새초롬한 얼굴로 돌아봤다.

“너, 오늘 따라 되게 말 많은 거 알아? 전엔 누가 뭘 물어보든 간에 무조건 단답형으로 대답하더니.”

때마침 끼어드는 네드의 목소리.

“오, 그거야!”

“뭐가 그거야.”

“유진이 나무에서 떨어졌다며! 머리가 지면에 닿을 때의 충격으로 뉴런이 활성화된 거지. 그래서 어떤 언어든 듣기만 하면 자동으로 습득하는-”

“너 뉴런이 뭔지는 알고 하는 얘기야?”

언제나처럼 틱틱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픽 웃고 말았다.

“근데 니들은 언제 갈 거냐.”

“좀만 더 있다가.”

“나도 오늘은 할 거 별로 없음. 그건 왜?”

딱히 할 게 없다는 이 두 사람과 달리.

나는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아주 많다.

지금 내 머릿속은 바깥으로 꺼내달라고 아우성치는 소재들로 한가득이니까.

그러나 그보다 시급한 일을 꼽아보자면.

“···과제.”

“뭐? 무슨 과제?”

고개를 갸웃하는 네드와 달리 아델이 곧바로 혀를 찼다.

“AP 영문학 말하는 거지? 내가 그거 신청하지 말라고 했잖아, 11학년들도 어려워하는 거라고.”

“아아, 그거 코믹스클럽 선배가 들었다던데. 레너드 샘 개빡빡하다고 유명하더라.”

게다가 과제 마감이 이미 지났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는데.

늦어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라고 말하자 두 친구의 눈이 촉촉해졌다.

“힘내 유진.”

“건투를 빈다 친구여.”

그 말을 끝으로 각자의 할 일에 집중하는 녀석들.

“으히히히, 으흐흐···.”

네드는 유튜브 게임 리뷰를 보며 낄낄거렸고.

“Don’t be that way···.”

아델은 케이트의 통기타를 들고 와 빌리 아일리시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배경음악처럼 흐르는 가운데.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과제의 주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 <로미오와 줄리엣>의 패러디를 A4 5~6장 분량의 초단편소설로 집필해올 것.]

‘워밍업치고 나쁘지 않은걸.’

머릿속으로야 쉴 새 없이 글을 썼지만.

눈에 보이는 형태로 쓰는 건 1년 만이니 재활연습으로 삼기엔 딱 좋다.

게다가 대학 다닐 적 셰익스피어에 관해 논문도 쓴 적 있으니, 나름 자신 있는 주제라고 할까.

그때, 내 ‘과제용’ 폴더 속에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_패러디]라는 제목의 파일이 보였다.

회귀 전의 내가 썼던 건가.

“···.”

신기한 마음에 클릭해본 순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안 되는 영어로 써서 그런가.

모든 문장이 조악해 단 하나도 써먹을 수가 없는 수준이지만.

‘아이디어 자체는 재밌네.’

회귀 전의 내가 쓴 패러디 소설의 포인트는-

이 고전 비극의 ‘화자’를 바꾸는 것이었다.

‘시점을 바꾼다라···.’

순간.

번뜩, 하고 첫 문장이 떠오름과 동시에 타이핑을 시작했다.

타다닥, 다다닥, 다다다다닥-

머릿속의 심상들이 단어의 형태를 입은 채 하나씩 펼쳐진다.

스텝을 밟듯 경쾌한 키보드 소리가 귓전을 부드럽게 울린다.

한참을 무아지경으로 쓰다 보니 어느새 이야기의 2/3 지점에 다다른 순간.

‘음?’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돌아보니 어느새 뒤에 와서 선 네드의 눈동자가 내 글을 정신없이 훑고 있었다.

“이거··· 이거 대체 뭐야?”

뭐긴 뭐겠냐.

그런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친구 놈을 돌아보자.

“설마, 너 지금 이게 작문 과제라는 거야? 영문학 수업 과제?”

목 졸린 사람 같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 네드.

“그러니까, 이미 있는 소설이 아니라··· 진짜로 지금 앉은 자리에서 방금 쓴 거란 말야?”

“어, 그게 왜.”

대수롭잖게 대꾸하자.

네드의 두 눈이 유령이라도 본 듯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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