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3화 (3/126)

그냥 과제라고? (1)

그러더니 이내 잔뜩 흥분해 말을 쏟아내는 네드.

“와 진짜, 미쳤네 미쳤어.”

“···미치긴 뭐가.”

“아니 아니, 니가 쓴 이 단편!”

잔뜩 흥분한 놈이 내 노트북 화면을 짚어 보였다.

“이거 지금, 로렌스 신부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편지글, 맞지?”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전문용어로 하자면 서간체 소설.

픽션에서 그리 흔히 보이는 양식은 아니지만.

단편의 경우 잘만 사용하면 아주 괜찮은 효과를 낸다.

“잠깐만, 이거 아마 로미오와 줄리엣 팬픽 써오라는 과제 같은데?”

“팬픽, 흐,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

“그래 그래. 그 선배가 쓴 거 읽어봤거든.”

코믹스클럽의 선배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 적대하는 세력의 히어로들이라는 설정으로 써냈다는 것.

“크으, 이런 식으로 바꿔 쓰는 건 상상도 상상도 못했는데. 소설의 화자만 바꿔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거잖아?”

코믹스뿐 아니라 장르소설이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읽는 네드답게, 핵심을 바로 캐치한다.

“그렇지. 그런 면에서 보면, 미스터 레너드가 좋은 과제를 내줬다고 봐.”

소설 쓰기란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 아니다.

태어나 지금까지 읽고 보고 들어온 이야기들.

실제로 겪어온 다양한 경험들···.

그 수많은 것 중 딱 맞는 재료를 골라 씨줄과 날줄을 엮어내듯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일이니까.

그런 면에서 패러디란 초심자들이 써보기 참으로 좋은 장르다.

‘이미 작가의 손에서 만들어진 캐릭터들을, 완벽하게 구동하는 세계관 속에서 자유로이 움직여볼 기회이니까.’

네드의 말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을 히어로물 속에 집어넣는 식으로 배경이나 장르를 바꿔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도이지만.

“최소한의 변화로도 가능하지.”

“응?”

“소설의 화자.”

즉, 사건이 진행되는 관점만 바꿔도-

“이야기는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거든.”

“···.”

문득 조용해진 기분에 옆을 돌아보니.

네드가 달라진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유진, 너 이거 보이냐.”

그러더니 대뜸 제 팔을 내 보인다.

“나 여기 팔에 소름 쫙 돋았음.”

“···내가 뭐 대단한 얘길 한 것 같진 않은데.”

“아냐, 그것도 그렇지만.”

네드의 허여멀건한 얼굴 한가운데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너, 내가 아는 그 샤이(shy)한 유진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외계인한테 납치당한 거 아냐? 유진-MK2 버전으로 교체됐다든가-”

“뭐야, 뭔 일인데?”

아까부터 배경음악처럼 들려오던 빌리 아일리쉬의 노래가 뚝 끊기더니.

아델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것 보라고.”

“···.”

이내 동그래진 눈으로 내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보는 아델.

“잠깐만, 이거···.”

이내 내 손에서 마우스를 빼앗아 미친 듯이 스크롤을 내려가며 글을 읽는다.

“다음 내용.”

“응?”

“이다음에, 다음 내용 어딨어?”

“아직 안 썼지.”

“아 그렇겠구나. 아니 잠깐만, 그게 아니라···.”

아델은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듯 고개를 젓더니 갑자기 네드를 진지하게 돌아보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네드.”

“말해.”

“네 이론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여윽시.”

“···네드의 이론이 뭔데.”

어이없어 한마디하자,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는 아델.

“뉴런 이론 말이야.”

“···.”

“아무리 봐도 유진의 뇌에 뭔가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다고 하지 않고서는 이걸 설명할 수가 없어.”

“그으렇지, 내 말이 맞다니까.”

“나, 유진이 지난주에 봐달라고 했던 작문 과제 아직도 기억하거든? 그땐 진짜로 말도 안 되는 문장들이···.”

그녀의 말에 회귀 전 나의 과제가 떠올라 머쓱해지는데.

“거 봐, 내가 말했지? 유진, 아무래도 각성한 것 같다니까.”

“그러게. 각성자 유진(Eugene The Awaken)이네.”

열정적으로 ‘유진 각성론’을 펼치는 둘을 보며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주 신났네.’

···정확히 말하자면 각성자가 아니라 회귀자겠지만 말이다.

*

다음 날 아침.

파란색 픽업 트럭 한 대가 완만한 언덕을 가로지르며 달렸다.

창 밖의 초록색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유진에게 케이트가 한마디했다.

“유진, 오늘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유진이 그녀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안 좋을 리가 없잖아요? 살아 있음이 곧 축복인데.”

“···뭐?”

“날씨도 좋고, 햇살도 쨍하니 딱 좋고.”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유진의 말이 이어졌다.

“이렇게 풍경을 보고 있다보면 아, 내가 정말 살아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

케이트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얘도 참.’

그 나무에서 떨어졌다가 깨어난 후로 뭔가 애늙은이처럼 변해버린 느낌이다.

잠시 후 픽업트럭이 목적지에 도착하자, 유진이 돌연 진지한 눈빛으로 케이트를 돌아보았다.

“저기, 케이트에게도 한 가지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어··· 부탁이라니?”

새삼 긴장한 그녀에게 의외의 단어가 들려왔다.

“콜라.”

콜라가··· 왜?

“콜라 말이에요, 콜라. 냉장고 안에 콜라가 박스채로 들어 있던데.”

“어, 그런데?”

유진이 미간에 인상을 썼다.

“우리 앞으론 다이어트 콜라로 바꾸는 거 어때요? 굳이 꼭 먹어야 된다면.”

“아, 그럼 그럼. 안 될 건··· 없지.”

“그리고 가능하면 콜라 말고 미네랄워터나 차를 마시죠. 케이트도 맥주 좀 줄이시고요, 알았죠?”

갑자기 얘가 왜 이런 소리를 한담.

케이트가 당황스러워하던 그때, 유진이 씩 웃자 오른쪽 뺨에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태워주셔서 고마워요 케이트. 내일부턴 스쿨버스 타고 다닐게요.”

“···그래, 이따가 보자.”

탁-

유진이 차 문을 닫고 나가는 가운데.

‘저 나름으로 걱정해주는 걸까.’

케이트는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흐뭇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때.

교정에 막 들어선 유진에게 누군가가 반갑게 뛰어왔다.

“헤이, 샤이보이! 유우쥐이인—!”

아, 샤이보이.

고등학생 시절엔 분명 그렇게 불렸지.

유진이 뒤를 돌자, 뽀글거리는 머리를 헤어밴드로 올린 히스패닉 소년이 보였다.

쟤 이름이 뭐였더라.

“···에이든, 에이든 맞지?”

“아니, 이 반응은 대체 뭐야? 우리가 무슨 십 년 만에 만난 거냐고.”

에이든이 셀카봉에 달린 폰을 유진 쪽으로 돌리며 툴툴거렸다.

‘십 년이 아니라 이십 년이 다 되는 셈이지만.’

에이든 솔러는 시도 때도 없이 브이로그를 찍는 학생으로 유명했는데, 그 꾸준함이 통했는지 결국 유명 유튜버가 되었다.

어쩐지 대견하네.

유진이 씩 웃으며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오늘자 브이로그 촬영 중?”

“어어 그렇지. 근데 브로, 오늘 대체 웬일이야? 너, 내가 카메라만 들이대면 도망치기 바빴잖아.”

“그랬나?”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딱히 카메라가 싫어서라기보단 못하는 영어를 들키는 게 싫었으니까.

“그렇게 도망다녔는데도 네 팬이 생긴 건 아냐?”

“···팬?”

“요즘 케이팝 팬들이 많아져서 그런가. 코리안 큐트보이는 언제 나오냐고, 유진 좀 보여달라는 댓글들이 은근 달리더라고.”

음, 그건 좀 민망하지만.

“그니까 유진, 자기 소개 한 번만 해주라. 어색하면 그냥 하이, 한 마디만 해줘도 돼.”

카메라가 딱히 어색한 건 아니다.

<잊혀진 성자들> 출간 후로 자주 인터뷰를 한 것은 물론.

그 전에 편집자로서도 촬영에 응할 때가 제법 있었으니까.

“한 마디 말고 여러 마디 해도 되나?”

“어? 그럼 그럼! 완전 땡큐지!”

유진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생긋 웃었다.

“안녕, 다들 반가워! 에이든의 브이로그-”

“요에이든!”

“그래, 요에이든 채널을 구독해줘서 고마워. 난 유진, 유진 권이야.”

이곳에 처음 왔을 적.

유진은 자신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소개시켜준 에이든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에이든 이 자식이 날티나 보여도 자기 채널엔 완전 진심이거든?”

“잠깐만, 나 날티나 보였냐? 응?”

“영상 찍다가 디텐션 받는 것도 감수할 정도로 열정적인 친구야. 그러니까 다들 구독과 좋아요, 알림 버튼 꼭 눌러줘.”

그 말을 끝으로 산뜻하게 물러서자, 에이든은 눈물이라도 흘려댈 기세였다.

“우와아아 유우쥐이인··· 완전 감동이야 감동!”

“감동은. 나 간다.”

잘 가라, 유진의 뒷모습을 향해 중얼거리던 에이든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유진이··· 저렇게 영어를 잘했었나?’

*

이처럼 에이든이 유진의 달라진 모습에 감탄하고 있을 때.

교사 휴게실에서도 유진의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진심 놀랐다니까요? 수업시간에 입 한 번 뻥긋하는 법이 없던 그 유진 학생이···.”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소극적인 학생으로 유명한 유진 권.

그가 손을 몇 번이나 들어가며 질문과 발표를 하는 것은 물론.

“아니, 수업 끝나고 나한테 와서 오늘 강의 중 이러저러한 부분이 좋았다, 고맙다··· 그런 말까지 하더라니까요?”

“이야,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니까.”

“그러게요, 애들은 한순간에 훅 크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교사들이 신이 나 떠드는 이야기를, 문학 담당교사 레너드는 휴게실 소파에 앉아 듣는 중이었다.

주말 사이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진 녀석 걱정을 많이 했는데 참 다행이란 말이지.’

백인 학생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중서부.

그중에서도 아시아계라고는 몇 명 없는 이 힐크레스트 고등학교에서 유진은 단 한 명뿐인 한국인 학생이다.

‘네드와··· 아델이라고 했던가? 그 둘 덕분에 학교생활엔 잘 적응한 것 같지만.’

언어적인 어려움 때문일까.

공부에 흥미도 의욕도 잃어가는 것이 뻔히 보였다.

이런 건 교사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보니 더더욱 안타까웠는데.

‘달라졌다는 말을 들으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군.’

양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던 그때, 부웅- 하고 그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새 메일··· 마감에 늦은 과제인가 본데.’

별생각 없이 메일함을 연 순간.

발신인 이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Eugene Kwon | 영문학 과제 보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패러디소설을 집필하는 것.

제일 잘 쓴 작품을 하나 뽑아 이번 주 수업에서 다 같이 살펴보기로 했다.

‘안 그래도 이미 선정을 마쳐서 학생들에게 나눠줄 프린트도 해놨는데 말이지.’

덧붙이자면.

레너드는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던 강사 출신이자, 본인부터 지역 문예지에 글을 기고하는 문인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이 고등학교에서 담당하는 문예창작 클럽은 전공을 희망하는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가입 희망자가 많은 탓에 입부 테스트를 따로 볼 정도.

AP 영문학 수업 또한 문예창작 지망생들이 많이 수강하다 보니 수준이 상당히 높았으며···.

‘특히 이번 과제는 네이티브 학생들에게도 어려운 편이었지.’

그래서 유진이 해올 거라고는 애초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마감이 지나긴 했지만 노력했다는 것 자체가 대견하다는 생각에, 레너드는 곧바로 첨부파일을 열어보았다.

[<로렌스 수사의 고백>

존경하는 에스칼루스 대공 각하께,

저는 베로나 교구를 담당하는 수사 로렌스입니다.

바야흐로 지난주, 우리 선량한 베로나의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준 사건에 관하여···.]

그런 서두로 시작된, 총 6페이지 분량의 짤막한 서간체 소설.

본문을 읽는 동안 레너드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

목마른 이가 우물을 찾듯.

그저 게걸스레 다음 문장을, 그다음 문장을 정신없이 읽어내려갔고-

“···레너드.”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미스터 레너드, 폰으로 대체 뭘 그렇게 보세요?”

동료 교사의 물음에도 아··· 하고 얼빠진 소리를 낼 뿐이었다.

“뭐 하시길래 부르는 소리도 못 들으시고-”

“프린트.”

“네?”

레너드는 소파에 앉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프린트를, 다시 해야겠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벌컥 휴게실을 나가는 그를, 동료 교사가 황당해하는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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