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4화 (4/126)

그냥 과제라고? (2)

*

다음 날 아침.

습관처럼 꼭두새벽에 일어난 유진의 아버지 권상준은 놀라운 풍경을 마주하고 말았다.

“저 나갔다 올게요.”

지금이 분명··· 오전 6시가 아닌가.

이 시각에 아들이 깨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나가다니, 이 시간에 어딜 가려고?”

“아, 조깅 좀 하고 오려고요.”

“···조깅?”

유진이가 조깅이라니.

자신이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걸까.

평소에, 아니 바로 지난주만 하더라도 아들은 학교 갈 시간이 다 돼도 일어나길 힘들어했다.

주말이 되면 밤새도록 책을 읽다가 다음 날 한낮이 다 돼서야 깨어나기 일쑤였고.

자신은 그런 아들의 모습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말이다.

“왜요? 오늘 미세먼지 심한가? 아니다, 뉴욕도 아니고 아이오와시티가 그럴 리가-”

“갑자기, 대체 왜?”

아버지의 황급한 질문에 유진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왜긴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니까?”

“···.”

무슨 공익광고에나 나올 법한 말을 내뱉는다.

“요즘은 백세시대라잖아요?”

“음?”

“백 살까지 그냥 살면 되나, 오래 사는 거 건강하게 살아야죠. 그러려면 운동이 필수고 말이지.”

“···.”

사회생활 좀 해본 중년 같은 말에 상준이 일순 움찔했지만.

“어떻게, 아버지는 운동 좀 하고 계세요?”

“어 아니 나는 딱히···.”

“그럼 잘 됐네, 내일부턴 그냥 같이 나가서 뛰어요.”

“응?”

함께 매일 아침 조깅을 하자는 아들의 제안에, 상준의 눈이 커졌다.

‘조깅이라니 맙소사.’

근 10년간 뛰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걷기 운동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는데···.

“암튼, 다녀올게요.”

트레이닝복을 챙겨입고 상큼하게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권상준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로··· 케이트가 했던 말이 맞는 것 같군.’

이번 주 내내 그녀가 그러지 않았던가.

‘우리가 알던 예전의 유진이 아냐, 여보. 요 며칠 새에 훅 자라버린 것 같아.’

‘그 고집불통 같은 녀석이 그럴 리가.’

‘아니라니까? 그리고, 원래 사춘기 때 애들이 그렇잖아.’

부모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어느새 훌쩍 자라버려 -등을 밀어줄 필요도 없이- 혼자 앞장서서 걷고 있다는 것.

“등을, 밀어줄 필요도 없이···.”

아내가 했던 말을 입 속으로 읖조리는 가운데.

상준은 자신이 제때에 아들의 등은커녕, 꼭 필요한 시기에 손조차 잡아주지 못했음을 기억해냈다.

그의 전 아내는 유진이 10살 때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고, 상준 자신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크나큰 상실이었기에.

‘···유진이를, 제대로 보듬어주지 못했지.’

그렇게 그들 부자가 각자의 상실로 힘들어하던 그때.

상준은 케이트를 만났다.

그녀에게서 큰 위안을 받았고 자연스레 재혼 이야기가 진행될 즈음에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재혼?’

‘···.’

‘누구 맘대로··· 벌써, 벌써 엄마를 잊은 거예요?’

아들 유진은 눈에 독기를 품고서 그런 말을 하는 아이가 돼 있었다.

그래.

아마 거기서부터 부자의 엇갈림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

젊은 날부터 문학을 사랑하며, 교양과 상식이 풍부한 상준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자기 아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법은 알지 못했다.

‘그런 건··· 유진 엄마가 하곤 했으니까.’

상준이 복잡한 상념에 빠져 있던 그때.

식탁 위에 올려진, 프린트한 원고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자신이 며칠 전에 갖고 들어온 샘플 번역원고다.

권상준은 한국 작품을 미국으로 수출하는 소규모 문학 에이전시를 운영 중이었는데.

그의 회사에서 최우선으로 밀고 있는 타이틀이기도 했다.

시장이 활발할 때는 꽤 많은 작품들이 미국에 괜찮은 가격으로 팔려나갔고, 덕분에 그의 에이전시 또한 사정이 괜찮았지만.

‘최근 들어 번번이 물을 먹고 있지.’

한국에선 분명 평가가 좋은 작품인데, 어째선지 이곳 출판사들에게 소개하면 반응이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양국의 니즈와 독자 트렌드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이미, 트렌드 분석까지 완벽하게 마친 작품들인데···.”

아쉬운 기분으로 원고를 들어올린 순간.

누군가가 빨간 펜으로 여기저기에 첨삭, 혹은 교정해놓은 흔적들이 보였다.

‘영어로 번역된 문장을··· 하나 하나 고쳐놨잖아.’

어떤 것은 단어 단위로, 어떤 것은 아예 문장을 통으로 바꿔놨다.

대체 누가 해놓은 걸까. 케이트가?

하지만 여태 -동네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그녀가 원고를 교정해준 적은 없는데, 라고 생각하던 그때.

‘잠깐만.’

원고 중간, grenade(수류탄)이라고 적힌 글씨.

정확히 말하자면 꼬리를 기이하게 빼서 쓴 소문자 g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건 아무리 봐도···.

‘유진이 글씨 같은데.’

아들이 g를 아주 독특하게 쓰는 버릇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는 터.

설마 그 사이에 남의 원고를 교정할 정도로 영어가 늘었단 말인가.

아무리 애들의 실력이 느는 게 한순간이라고는 하지만.

유진이 영어로 쓴 습작 단편을 본 것이 불과 몇 달 전이다.

‘그때만 해도 함량 미달의 실력이었어.’

···그래도 그렇게 심한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상준은 뒤늦은 후회에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이 어릴 적부터 소설가를 꿈꿔왔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인 자신이 잘 안다.

그 또한 출판계 종사자이자 한때 작가의 꿈을 꿨던 만큼 아들의 열망을 너무도 잘 이해했지만-

‘네가 쓴 이건, 남한테 보여줄 만한 글이 아니다.’

재능이 부족한 소설가.

혹은 운이 따르지 않는 작가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너무도 잘 알았기에.

‘아무나 소설가가 되는 게 아니야, 권유진.’

‘···.’

‘웬만한 재능으로는 꿈도 꿔서는 안 되는 세계라고.’

아들이 용기를 내 습작을 들고 왔을 때 일부러 더 매몰차게 말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반 년 전의 일.

그 후로, 그러니까 10학년이 된 후로 유진이는 마음의 문을 더 꽉 닫은 듯했다.

‘그러니 그 아이가 내 원고를 위해 이렇게 애써줬을 리가···.’

그럼에도.

상준은 빨간색투성이의 원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디.”

원고는 첫 문장부터 한층 정갈해져 있었다.

한 문장, 두 문장 읽어나감에 따라 절로 몰입이 되었고-

‘···.’

그렇게 정신 없이, 고쳐진 문장들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고 나자.

“완전히··· 새로운 원고가 됐잖아?”

원래 버전보다 훨씬 더 매끄럽게 읽히는 것은 물론.

작가의 메시지가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남과 동시에 생동감이 넘친다.

‘이건 일개 고등학생이 영어 좀 잘한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의 교정이 아니야.’

최소한 전문 편집자, 그것도 날고 긴다는 뉴욕의 유명 에디터들이나 해낼 수 있는 수준의 교정교열이 아닐까.

그런 결론을 내린 순간, 문득 떠오르는 생각.

‘설마, 샘플 번역의 질이 좋지 않아서였나?’

이 분야에 오래 종사한 만큼 권상준은 영어 원고를 자유로이 읽는 수준은 되었지만.

원어민들에게도 자연스러운 수준인지, 아니면 어색하고 아쉬운 번역인지를 분간할 실력은 되지 못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쩌면···.”

여태 번번이 계약이 불발되었던 것이 어쩌면 번역 퀄리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원고를 쥐고 있던 손에 저도 모르게 꽉 힘이 들어가던 그때-

“흐, 다녀왔습니다.”

딸랑.

문이 열리며 땀으로 흠뻑 젖은 유진이 들어왔다.

어째선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모르게 원고더미를 확 식탁 아래로 숨겨버린 상준이 아무렇잖은 기색으로 아들을 돌아봤다.

“운동은, 잘 하고 왔냐.”

“네, 간만에 뛰니까 너무 좋네요.”

“···그래?”

“역시, 운동해서 땀을 흘려야 기분이 좋단 말이죠. 이래야 노폐물이 제대로 빠지고···.”

자신만큼이나 운동과는 담 쌓고 지내던 아들이 아니던가.

땀에 젖은 모습으로 건강의 가치를 설파하는 유진이의 모습이 너무도 낯선 가운데.

“내일부턴 진짜 같이 나가시는 거예요, 알았죠?”

“어, 그게···.”

아들 놈과 단둘이 조깅이라니.

그 어색함을 어떻게 견뎌야 하나.

벌써부터 그런 생각이 앞서는 탓에, 탁자 한구석에 처박아둔 담뱃갑에 -습관처럼- 손을 올린 순간.

“잠깐만.”

유진의 손이 번개처럼 아버지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

“지금··· 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어, 아니 이게 그냥.”

자신을 마주 보며 한 마디, 한 마디 끊어 말하는 아들.

“설마··· 그으렇게, 얘기했는데, 아직도 안 버리신 거?”

그에 대꾸하는 상준 자신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떨렸다.

“버, 버리려고 했다만.”

“그렇죠? 설마··· 또, 피우실 생각은, 아니셨겠죠?”

먹이를 잡기 직전의 독수리를 연상케 하는 그 매서운 눈빛이-

‘···현희랑 똑같잖아.’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유진의 엄마를 똑 닮아 있었다.

*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또 아침부터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쏟아내고 말았다.

그 후 여유롭게 1교시의 영문학 수업 교실에 도착했을 때.

‘어? 이건.’

책상 위에 올려진 프린트물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로렌스 수사의 고백>]

그러고 보니 제일 잘한 과제를 뽑아서 수업시간에 토론하겠다고 했던가.

나 말고도 모든 학생의 책상 위에 올려진 프린트물.

거기에 인쇄된 건 다름 아닌, 내가 쓴 패러디 소설이었으니까.

‘마감을 넘겨서 보낸 거라 기대도 안 했는데.’

그래 봤자 학생들 과제 중 하나로 뽑힌 거긴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에 입꼬리가 올라가던 그때.

“와, 이번에 뽑힌 과제인가 보네?”

“오, 첫 줄부터 뭔가 느낌이 온다.”

다른 학생들 또한 그 글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거 진심 대박이야, 나 방금 다 읽었는데 완전 숨도 못 쉬고···.”

“와, 이걸 이렇게 바꿀 생각을 했다고?”

“완전 쩐다. 이거 누가 쓴 거야?”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감탄성.

당연히, 프린트에 내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뭔가 좀 민망하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데, 정시에 맞춰 미스터 레너드가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창작론을 심층적으로 다룬다는 말에 고집을 부려 수강하게 된 AP 영문학 수업.

회귀 전의 내게는 상당히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주에 공지했던 대로, 오늘 수업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 패러디 과제 중 하나를 선정하여···.”

교사의 간단한 설명이 끝난 후.

학생들이 자유로이 제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로렌스 수사가 베로나의 대공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고백록이라고 볼 수 있는데···.”

“소설의 화자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효과가 날 수 있다니, 생각도 못 했어요.”

“아 그리고 서간체라는 것도 너무 좋지 않아요?”

“맞아요, 독자의 상상이 끼어들 만한 여지가 있다고 해야 할까.”

그야말로 뜨거운 분위기 속.

얼마나 흥분했는지 뺨에 홍조까지 띠고 열성적으로 토론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젊구나, 젊어.’

나는 가슴 앞에서 팔짱을 낀 채 흐뭇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이야기를 향한 열정은 언제 봐도 보기 좋은 법.

“마지막 페이지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비밀이랑 반전이 나오는데, 이게 엄청 충격이었어요.”

“맞아, 읽다가 헉 소리 낼 뻔.”

“이 작품의 장르가 한순간에 로맨스에서 스릴러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하고.”

“솔직히, 진심 놀랐어요. 수업과제로 이 정도의 완성도를 가진 소설이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해서···.”

···.

토론이 얼마나 진행되었을까.

아까보다 교실 안의 온도가 1도는 올라간 듯한 기분이 들던 그때.

‘···.’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지켜보고 있던 미스터 레너드와 눈이 마주쳤다.

턱수염 너머로 그가 미소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순간-

“유진 군도 한마디 해볼까요?”

“어··· 네.”

내게 쏟아지는 시선을 의식하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작품 전반의 분석이나 평가는 이미 충분하고도 상세하게 이뤄졌다고 봅니다.”

이 수업에서 이 정도로 말을 많이 한 적이 없어서 그런가.

나를 보던 학생들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떠오르던 그때.

“그래서 그 부분에 관해서는 딱히 보탤 말이 없고요, 다만.”

한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중간에 오타가 하나 있네요. ···3페이지 중간, ‘사랑의 증거(proof of love)’라는 부분에서 proof가 proov로 적혀 있습니다.”

“···.”

잠시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어, 정말이네?”

“그러게 왜 못 봤지.”

“푸흐···.”

치열하게 타오르던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며 여기저기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미스터 레너드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대미를 장식하기에 딱 좋은 리뷰로군요.”

그 말에 한층 더 웃음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지던 중.

“게다가, 본인이 쓴 글에서 오타를 발견하기란 의외로 쉽지 않은 법인데 잘 찾았습니다.”

‘본인’.

그 단어에 클래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일순 고요해지더니.

“···!”

주변 학생들의 고개가 천천히 나를 향해 돌려졌다.

마치-

‘방금 그 말이, 대체 무슨 말이야?’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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