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7화 (7/126)

아포칼립스의 필요성 (2)

우리가 잘 아는 <피터 팬> 속의 피터.

그가 몸도 마음도 영원한 어린 아이라면···.

‘이 멸망한 세계의 피터는 조금 다르지.’

피터 팬딧.

그의 몸은 14세에 모든 성장이 멈춘 터였다.

‘왜냐면 피터는··· 하이랜더 증후군을 앓고 있거든.’

하이랜더 증후군.

알 수 없는 이유로 성장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아 어린 아이의 외모로 지내야 하는 희귀병.

그래서 내내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그는, 35세임에도 소년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다.

‘그런 와중, 성인이 걸릴 경우 높은 치사율을 자랑하는 원인 불명의 전염병이 전 세계를 초토화시킨 것.’

입원 중이라 이 상황을 몰랐던 피터는 병원의 기능이 마비되고 나서야 밖으로 나오고.

세상이 하루 아침에 변해버렸음을 깨닫는다.

‘근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

소설 속 주인공, 피터가 나와 퍽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소년의 외모에 어른의 알맹이란 말이지.”

달라져버린 주변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피터와 나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점이 있다.

피터는 멸망해가는 세상 속에서 힘겹게 희망을 찾아야 한다면.

내가 있는 이 평화로운 시골 동네는 희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또 한 번 이 놀라운 현실에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가운데-

“그러니 더, 최선을 다해 써보자.”

두 손을 가볍게 키보드 위에 올려놓았다.

탁, 타다닥-

손이 리듬을 타듯 머릿속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쏟아낸다.

‘플롯은 전부 다 구상을 마친 상황이니까.’

중간 중간, 아쉬운 문장을 몇 번 지웠다가 다시 쓰는 것 외에는 대체로 물 흐르듯 써나가는 중.

마우스 커서는 금세 다음 페이지, 그다음 페이지로 넘어갔고.

이제 소설은 ‘절정’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피터의 ‘비밀’이 밝혀진 순간.

피터가 아이가 아니라, 이 세계의 단 한 명뿐인 어른임을 웬디가 알게 된 순간 말이다.

[“지금까지··· 우릴 속인 거야?”

“웬디, 그런 거-”

“날 웬디라고 부르지 마!”

웬디, 아니 그웬돌린이 붉어진 눈으로 외쳤다.

마치 이 모든 게 피터의 배신 때문이라는 듯.

물자가 바닥날 위기에 처한 것도.

그 얼마 없는 것조차 약탈당해버린 것도.

아니 애초에 이 세상이 이 지경이 돼버린 것이 그의 잘못이라는 듯.

“일부러, 일부러 속인 게 아냐. 나는···.”

“그럼, 일부러 그런 게 아니면 뭔데.”

진실을 애타게 바라는 웬디를 마주하고서도 피터는 입술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진실.

그 자신뿐 아니라 부모를 비롯, 주변 사람 모두가 쉬쉬하며 숨겨왔던 그의 희귀병을···.

‘말하고 싶지 않다고.’

피터 팬딧.

지금까지 그는 이 빌어먹을 세상의 완벽한 리더였다.

황폐와 절망의 세계 어딘가에 네버랜드의 약속을 믿는 아이들에게 그는-

‘마지막 희망의 등불.’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Peter Pan in Doomed Land)이었으니까.

그저 희미한 속삭임, 찰나의 가능성일지도 모르는데도.

아이들은 피터가 언젠가 네버랜드로 자신들을 인도해주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피터가 자신의 병을 고백한다면, 그는 완전무결한 리더에서 한순간에 희귀병을 앓는 불쌍한 환자가 되어버림은 물론···.

‘두렵단 말이야.’

더는 우리들(us) 중 하나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는, 본능에 가까운 두려움.

그 강렬한 공포가 차디찬 오한처럼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고조되는 피터의 감정을 묘사하던 그때.

똑똑, 소심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화면에서 시선을 떼자.

밤 9시가 넘어간 시각이었다.

두 시간 내내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노트북 앞에 앉아 타이핑만 하고 있었던 셈.

목 뒤가 뻐근한 느낌에 가볍게 목을 돌리자 뚜뚜둑 소리가 난다.

“나갈게요, 케이트.”

새어머니가 이 시간에 문을 두드릴 리는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자.

예상 외의 손님이 있었다.

“오빠아, 유진 오빠.”

“···클로이.”

만 세 살. 우리나라 나이로는 네다섯 살 정도인 여동생이 토끼 인형과 그림책을 안고 서 있었다.

‘뭐랄까, 회귀 전의 클로이가 자꾸 생각나서 그런가.’

이런 아기 같은 모습을 볼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만다.

“너 아직 안 자고 있었어?”

“그으냥, 잠이 안 왔쪄···. 이거, 읽어주면 안 돼? 오빠아.”

어색한 한국어로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클로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당연히 되지. 오빠가 니 방으로 가서 읽어줄게.”

“히히 신난다.”

번쩍 안아들자 까르르 웃으며 좋아하는 클로이.

아이의 보드라운 갈색 머리카락이 내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가운데, 고사리 같은 손이 꼬물거리며 나를 꼭 껴안는다.

‘하마터면 또 잊을 뻔했네.’

17살로 돌아온 그 첫날에 다짐하지 않았던가.

글을 쓰는 것도, 조금 욕심을 부리는 것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건강하게,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자고.’

클로이의 방 안.

나는 동생과 함께 침대에 앉아 그림책을 읽어줬다.

“그래서 공주님은 용을 물리치고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높은 성에는···.”

후아암.

이야기의 결말에 거의 다다르자 하품을 쩍 하는 클로이.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채 읽기도 전-

“후우웅···.”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클로이가 내 어깨에 기댄 채 잠이 들어 버렸다.

‘귀여워라.’

나는 동생이 깨지 않게 조심 조심 침대에 눕혀놓았다.

늘 안고 자는 토끼 인형도 품에 안겨주고, 이불을 배까지 끌어올려 덮어준 뒤 방에서 나오자.

“어머, 유진. 고맙구나.”

그런 나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는 새어머니가 보였다.

“고맙긴요, 좋은 밤 되세요 케이트.”

“너도 좋은 밤 되렴.”

그렇게 클로이를 재우고 2층으로 올라오며 깨달았다.

···애초 방에 틀어박혀 글만 쓰는 나를 걱정해 클로이를 올려보낸 건, 다름 아닌 새어머니라는 걸.

*

월요일 아침.

아이오와 대학 출판부의 셜리 맥그로우는 조금 복잡한 기분으로 출근한 터였다.

“셜리, 표정이 왜 그래?”

동료의 걱정 섞인 물음에 그녀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앤솔로지에 실을 만한 아주 근사한 원고를 발견했지만-

“작가한테 계약할 마음이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겠고, 제일 큰 문제는 분량이야 분량.”

앤솔로지에 필요한 것은 단편 이상의 분량.

그러나 레너드 선생이 소개해준 원고는 6페이지분량에 불과한 마이크로픽션이다.

‘이런 경우, 작가에게 개작을 요구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베테랑 작가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지, 이제 막 첫 작품을 내 보인 신인 작가에게는 아주 어려운 작업이 아닌가.

‘심지어 고등학생이라는데, 이게 되겠냐고.’

그녀의 고민을 다 들은 동료가 입을 열었다.

“사실, 개작은 책 한두 권 내본 작가들한테도 어려운 일이긴 하잖아? 게다가.”

그의 시선이 책상 위 탁상용 달력으로 향했다.

“지금 우리, 마감이 꽤 빡빡하지 않나?”

그것도 맞다.

그 안에 개작을 마친 원고를 교정한 뒤 제작까지 하려면···.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스케줄이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안다고.’

그럼에도 좋은 원고를 향한 편집자 특유의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던 그때.

동료가 조심스레 말했다.

“게다가··· 이건 마이크로픽션이잖아. 초단편을 괜히 단편으로 늘렸다가-”

“원래의 매력이 반감될 수도 있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래.”

후우.

자신이 우려했던 지적이 나오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그래도 넌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은데? 그럴 땐 일단 질러봐야지 뭐.”

그래. 질러봐야지 뭐 어쩌겠어.

동료의 말에 용기를 얻은 셜리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유진 권 작가님]

레너드 교수를 조르고 졸라서 받은 번호.

‘후우.’

셜리 맥그로우는 숨을 흡 들이마시고는 통화 버튼에 손을 가져갔다.

*

주말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토요일은 어느 정도 자제하며 글을 썼다면.

일요일은 온종일 글에만 매진했던 것 같다.

‘무리하지 말자고 다짐한 게 바로 전날 밤인데.’

뭐라고 해야 할까.

어느 순간부터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내 손에서 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채로 글을 써나가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문장에 이르렀고.

거칠기 그지없는 초고를 마무리한 뒤에는-

‘일단은 잠시 묵혀두자.’

맑은 정신으로 다시 봐야 고칠 부분이 보일 테니까.

그러고 난 다음에는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 그러니까-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 펼쳐지는 이 폴더 같은 것들.’

그 안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노트북 속에 옮겨오는 작업을 했다.

어쩌면 지금 이대로도 충분할지 모르지만···.

‘병상에 누워 연마했던 암기 능력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는 거니까.’

그래서 틈날 때마다 머릿속의 습작들, 소재와 아이디어들을 옮겨 적고 있다.

지금은 전체의 30퍼센트 정도 진행된 상황.

‘또 한편으로는.’

회귀 전, 전 세계 1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잊혀진 성자들>.

700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소설을 기억나는 대로 처음부터 다시 써보고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기록 및 보관을 위한 작업일 뿐, 그대로 낼 생각은 없다.

병상에 누워 있는 1년간.

<성자들>의 아쉬운 부분, 부족한 점들이 계속 내 마음을 괴롭혔던 탓이다.

‘아무래도 데뷔작이다 보니 미숙한 점이 있을 수밖에 없지.’

침대에 누운 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고쳐보았는지 모른다.

여하튼.

이 소설은 시간을 들여 다시 집필할 생각이다.

특유의 세계관 또한 틈날 때마다 조금씩 살을 붙여가는 중.

···그리고 지금은 월요일 점심 시간.

나는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두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유진! 우리 왔으!”

“일찍 끝났나봐?”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네드와 아델.

날 보자마자 아델이 두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유진, 너 며칠 사이에 엄청 유명해진 거 알아?”

그게 무슨.

아델의 뜬금 없는 얘기는 다름 아닌 ‘AP 영문학’ 수업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 같이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을 시작으로, 내가 쓴 <로렌스 수사의 고백> 원고가 여기저기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것.

문예창작 전공 지망생들이 많은 학교라 그런가.

과제 하나의 여파가 생각보다 크긴 하지만···.

“뭐, 금방 사그라들겠지.”

그러자 한 마디 거드는 네드.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니까? 코믹스 클럽 애들도 니 원고 읽고 있더라고.”

“거 봐 유진. 오죽하면 앰버, 앰버 브라운 알지? 치어리더부의.”

그게··· 누구였더라.

두 눈만 끔뻑거리자 네드가 잽싸게 설명했다.

“몸매는 포이즌 아이비에 얼굴은 파워걸 닮은 10학년.”

“그게 무슨 뜻?”

“금발 글래머 미녀란 거지.”

네드의 말에 아델이 혀를 찼다.

“···남자들이란. 암튼, 한 문장이 넘어가는 글은 못 읽는 그 앰버가 니 소설 너어무 감명 깊게 읽었다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다니까?”

“푸흐, 조만간 틱톡에 올라오는 거 아냐? ···오, 진짜 올라왔는데?”

“네일아트 영상이랑, ‘오늘의 룩북’ 바로 뒤에 있네.”

앰버의 틱톡 계정을 보며 시시덕거리는 두 사람.

“휘유, 이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유진 너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다.”

“뭔 각오.”

“앰버 브라운이 데이트하자고 덤벼들 경우의 각오.”

“···그럴 일 없거든.”

아델의 말에 어이없어하는데 네드가 한술 더 떴다.

“크으, 미래의 프롬퀸과 데이트라니 상상만 해도 부럽드아~”

“···.”

그럴 일 없다니까···.

속으로 혀를 차던 그때.

스마트폰이 진동하며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별 생각 없이 전화를 받자.

-저, 그러니까. 여보···세요.

이상할 정도로 말을 더듬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저는, 아이오와 대학 출판부 편집부의 셜리 맥그로우라고 합니다.

아이오와 대학 출판부에서 왜 나한테 전화를··· 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레너드 하인스 교수님 소개로 연락을 드렸는데요.

그녀의 용건이 이어졌다.

-유진 권 작가님이 쓰신 <로렌스 수사의 고백>을 저희 셰익스피어 특집 학생 앤솔로지에 싣고 싶어서요. 기한은 다음 달 셰익스피어 축제일까지···.

‘셰익스피어 특집 앤솔로지라고?’

예상 외의 내용에 살짝 당황한 그때, 더더욱 망설임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아주 어려운 요청을 하나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네, 말씀해보세요.”

대체 얼마나 어려운 요구를 하려고 그러는 걸까.

-그게 그러니까, 저희 앤솔로지에··· 분량 규정이 있거든요. 최소 단편 이상은 돼야 하고, 중편이면 더 좋고요. 근데 작가님의 작품은-

“6페이지짜리 초단편이죠.”

-네 맞아요. 그래서, 굉장히 어려운 부탁을 드리자면···.

상대의 수고를 덜어주고자 내 쪽에서 말했다.

“초단편을 단편 정도 길이로 개작해달라는 말씀이실까요?”

-···네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뛸 듯이 기뻐하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거야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죠.”

실제로 이는, 내가 편집자로 일할 당시에 작가들에게 늘상 하던 요구이기도 했다.

이미 완성된 단편을 중편으로, 중편을 장편으로 개작하기도 하고.

세계관을 공유하는 중편 3개를 모으고 수정해 한 권의 장편으로 만드는 일종의 픽스업(fix-up) 소설을 출간하기도 했다.

-어렵지··· 않다고요?

“네. 초단편을 단편으로 개작하는 거야 흔한 일이잖아요?”

기한이 한 달이라면 넉넉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고 말이다.

“근데 그 얘길 뭐 그렇게 힘들게 꺼내셨어요, 하하.”

무슨 충격적인 얘기를 하려고 그러나 싶어 괜히 긴장했다, 라고 농담을 덧붙이자.

-···.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저, 담당자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는 듯했다.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메일로 얘기하자.

그렇게 통화를 끊자.

“···.”

네드와 아델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뭐야.”

“아니 아니, 너야말로 방금 그 전화는 대체 뭔데?”

아델의 물음에 통화내용을 설명하자.

“뭐? 미친-”

“What the f···.”

두 사람의 입에서 거친 감탄사가 튀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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