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16화 (16/126)

고등학생? (3)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주제로 하는 연극, 단편영화, 뮤지컬, 콘서트 등 각종 형태의 공연이 캠퍼스 곳곳에서 펼쳐졌다.

[<한 여름 밤의 꿈> 대강당 공연]

[뮤지컬 <십오야> 관람 안내]

[기악극 <셰익스피어 여관>]

···

도서관 주변에 세워진 여러 개 부스에서는 책 판매와 홍보가 동시에 이뤄지는 중.

“오늘 밤 <문학클럽>에서 셰익스피어 낭독회를 합니다!”

“로사 페링턴 작가의 팬사인회가···.”

올해도 분위기가 괜찮네.

아이오와 대학 출판부의 셜리 맥그로우는 흐뭇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서 판매 부스에 꽤 많은 인파가 들락거리는 와중.

그 한가운데에는 <셰익스피어 패러디 앤솔로지> 홍보용 배너가 세워져 있다.

“후후, 색깔이 아주 잘 나왔단 말이지.”

···그나저나 작가님은 어디쯤 오고 있으려나.

셜리는 살짝 긴장한 채로 저 앞을 내다보았다.

그래. 오늘은 다름 아닌 유진 권 작가가 대학 출판부를 방문하기로 한 날.

‘그때 친구들과 같이 들러도 괜찮을까요? 다같이 셰익스피어 축제를 구경하기로 해서.’

양해를 구하는 유진의 말에 셜리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는데.

‘그럼요 물론이죠!’

···도무지 고등학생 같이 느껴지지 않는 유진이, 대체 어떤 친구들과 알고 지낼지 궁금했기 때문.

‘친구들도 애어른 같은 타입이려나?’

프렙스쿨(명문 사립학교)의 엘리트 이미지를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지. 작가님이 말한 그 친구들이 꼭 고등학생이란 법은 없잖아?’

그녀가 아는 유진 권은 보통 인물이 아니지 않은가.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의 문학 평론가를 절친이라며 데려와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한창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중 그녀의 스마트폰이 진동했고.

-담당자님, 저 도착했는데요.

“오셨군요! 지금 어디쯤이세요?”

-파란색 도서판매 부스 근처에 서 있습니다.

그 말에 셜리가 뒤를 돌아본 순간.

이 동네에서는 흔치 않은 아시아인 학생 하나가 -다른 두 명의 고등학생과 함께-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유진 권’을 처음 본 셜리가 두 눈을 껌벅거렸다.

180 정도 돼 보이는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

깨끗한 피부에 앳된 인상, 훤칠한 얼굴이-

‘진짜로··· 고등학생 맞잖아?’

철두철미한 전문가라기보단 누가 봐도 순진하기 그지없는 고등학생의 외모.

예상과는 다른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셜리가 스마트폰을 귓가에 붙인 채 어버버하던 그때.

“혹시 셜리 맥그로우 담당자님?”

유진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거침없이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유진 권이라 합니다.”

입가에 걸린 미소와 자신감 넘치는 태도.

손을 척 내밀며 자연스레 악수를 청하는 모습이 꼭-

‘거물··· 정치인 같아.’

묘한 결론을 내린 셜리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유진 일행을 출판사 사무실로 데려왔다.

“여러분, 이쪽은 유진 권 작가님이세요.”

“아 안녕하세요. 어···?”

“유진 작가님···?”

생각보다 훨씬 앳된 작가의 정체에 출판사 직원들이 깜짝 깜짝 놀라는 가운데.

유진과 그 친구들을 안쪽 미팅룸으로 안내한 셜리는 그들 일행을 힐긋거렸다.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유진에게서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닳고 닳은 사회인 느낌이 나는 것은 어째선지 그리 놀랍지 않았지만.

“와, 나 출판사 와본 거 첨이야. 여기서 니 책을 만들었다 이거지?”

“흐으 아무리 봐도 신기하네.”

유진과 함께 온 두 친구는 딱 봐도 고등학생 티가 팍팍 난달까.

‘귀여워라.’

출판사에 와본 게 처음인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호들갑스럽게 말한다.

“야야, 유진, 저거 봐 저거! 저기 니 이름도 써 있음!”

“오 진짜네?”

업무 진행상황을 기록하는 보드판.

거기에 ‘유진 권 <6인의 고백> - 출간 완료’라고 적힌 문구를 보고는 친구들이 흥분하자.

“···얘들아, 그만 좀 두리번거리지?”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민망해하는 것이 아닌가.

‘진짜로 고등학생이 맞긴 맞네.’

게다가 레너드 선생님 말대로 외롭게 글만 쓰는 타입인 줄 알았더니.

저렇게 밝은 친구들이 있는 걸 보면 그렇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에, 셜리가 빙그레 웃었다.

*

아이오와 대학교 출판부와의 미팅을 기분 좋게 마치고 나왔다.

‘작가님 오늘 만나뵈어서 너무 좋았어요! 훌륭한 원고를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근사한 책으로 탄생시켜주셔서 감사하죠.’

사무실 건물을 나와 야외의 도서판매 부스로 향하던 그때.

“크으, 이런 게 바로 뽕이 차는 기분이라는 거구나.”

“···대체 어디서 그런 기분을 느낀 건데?”

“지금 몰라서 묻는 거야?”

어이없다는 듯 나를 돌아보는 네드.

“다 널 작가님 작가님 하며 모시고, 응? 커피랑 디저트도 미리 준비해놓고-”

“라즈베리 컵케이크 맛있더라.”

눈을 반짝이며 한마디하는 아델.

“어어, 초코퍼지도 존맛.”

“어디서 산 걸까? ‘빌리스베이커리’? 포장도 되게 예쁘던데···.”

방금 전 셜리가 우리에게 대접했던 컵케이크가 대체 어느 가게의 것이냐를 두고 둘은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런 거 보면 영락없는 어린애들이라니까.’

하긴, 고딩이 어린애가 아니면 뭐겠나.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오던 그때, 손에 들고 있던 <셰익스피어 앤솔로지>에 시선이 갔다.

‘사실은 이게 제일 기분 좋기는 하지.’

<로미오와 줄리엣>을 고전명화풍으로 그려놓은 표지.

장장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의 목차를 펼쳐보면···.

‘여깄네.’

[6인의 고백(유진 권) ······ 23페이지]

서문 바로 뒤에 실려 있다.

표지가 로미오와 줄리엣인 것도 그렇고, 앤솔로지의 첫 작품으로 실린 것도 그렇고.

표제작으로 뽑힌 느낌이 들어서 영광인걸, 이라고 생각하는데.

“···어? 무엇보다.”

“응?”

아델과 뭐라 뭐라 한참 얘기하던 네드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야, 고딩이 이런 책을 낸다는 거 자체가 쩌는 거 아니냐?”

“어어, 그건 나도 네드 말에 동의.”

“···.”

그래.

그 말대로 이 <셰익스피어 앤솔로지>는 고등학생 권유진으로서 처음 낸 책이 맞다.

‘물론 나 혼자만의 책도 아니고, 작품 모음집이긴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나름의 의미가 있는 법.

그런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깃들던 그때.

‘어.’

<셰익스피어 앤솔로지> 홍보배너가 있는 부스 쪽으로 걸어오는 여학생의 모습이 익숙했다.

긴 갈색머리에 안경, 새초롬한 인상.

“샬롯!”

그러자 샬롯이 멈춰서 이쪽을 돌아보았다.

“···.”

나를 본 게 분명한데도 말 한 마디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응수하는 모습에-

“너 쟤랑 같은 클럽이랬지? 천재 문학소녀 샬롯 데인스. 성격 안 좋다고 유명하다던데.”

작게 속삭이는 네드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냐, 그리고.”

나는 곧바로 샬롯에게 다가가 <셰익스피어 앤솔로지> 한 권을 내밀었다.

안 그래도 따로 밥이라도 살까 하던 참에 이렇게 만나서 잘됐다 싶달까.

“이거 받아.”

“···?”

살짝 당황한 듯한 샬롯이 곧바로 폰을 꺼내 메시지를 작성하려 했지만.

“출판사에서 준 증정본이야. 방금 여기서 사려고 했던 거 아냐?”

“어··· 아니 괜찮은데···.”

여전히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의 손에 강제로 증정본을 쥐여주었다.

“샬롯 니 아이디어 덕분에 완성한 거니까 받아.”

“···.”

여전히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 속.

희미한 기쁨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고마워.”

샬롯은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쌩하니 등을 돌렸다.

그 모습에 네드가 혀를 차려던 그때-

“어? 저기 저기, 유진 아냐?”

“유진! 이거 니 소설 맞지?”

유난히 높은 톤의 목소리에 앞을 돌아보자.

앰버와 그 친구들이 우리를 보고 꺅꺅거리는 중이었다.

“크억, 애, 애애앰버다!”

“···.”

눈이 돌아가려는 네드와, 그런 네드의 반응을 쪽팔려하는 아델.

그리고 저 아이들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나에게-

“그렇게 된 거야!”

앰버 일행은 내 소설 <로렌스 수사의 고백>이 개작되어 셰익스피어 앤솔로지에 실린다는 소문이 교내에 쭉 퍼져 있음을 알려주었다.

“아.”

···미스터 레너드와 문예창작 클럽원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건 그렇고, 완전 멋져 유진!”

“대체 언제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거야?”

호들갑을 떠는 친구들 사이로, 앰버가 조금 수줍어하며 입을 열었다.

“···음, 혹시 사인 좀 해줄 수 있어?”

방금 산 것으로 보이는 <셰익스피어 앤솔로지>와 펜을 내게 내밀며.

“크흐흐 대박이네, 사인 요청을 다 받고-”

“사인이야 뭐.”

나는 앰버에게 펜을 건네받은 뒤 책의 표지를 펼쳤다.

이른바 면지라고 불리는, 표지 안쪽 지면에다가-

[앰버에게, 감사를 담아

-유진 권]

휘리릭, 익숙하게 사인을 하고 나자.

“···.”

유려한 필기체로 쓰인 Eugene Kwon을 멍하니 내려다보는 앰버.

···왜 그러지 싶던 그때.

“유진, 너 설마··· 미리 사인 연습한 거야?”

“이히힉, 대작가님의 사인···.”

아델과 네드가 낄낄 웃어댔다.

아차.

회귀 전 습관대로 무심코 사인해버린다는 것이···.

“아, 그런 거 아니라고.”

“키힉힉, 왜, 연습하는 게 뭐 어때서.”

“푸훗, 그럼 그럼, 뭐든 연습해두면 두고 두고 쓸모가 있다고.”

이것들이 진짜, 입안으로 혀를 차던 그때.

“저.”

···아직 안 가고 있었어?

샬롯마저 내게 다가와 스마트폰을 들어 보였다.

[나도 사인해줘 유진 (/>_<)/]

뺨이 화끈거리는 기분으로 샬롯의 책에 사인해주고 나자.

“저어, 우리도 좀···.”

“완전 멋지다 유진!”

대체 언제 왔는지, 로완과 제이든을 위시한 문예창작클럽 부원들까지 서 있었다.

그것을 본 네드와 아델은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푸흐흐, 이러다가 내일 학교 가면 우리 학교 애들 다 줄서서 받는 거 아님?”

“우왕, 내 친구가 힐크레스트의 슈퍼스타라니.”

“둘 다 닥쳐.”

“너어무해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해줬던 소중한 절친들에게, 드물게 살의를 느낀 순간이었다.

*

셰익스피어 축제로 캠퍼스 전체가 떠들썩한 분위기를 자랑했다.

올해는 특히나 그 여파가 조금 더 컸는데, <셰익스피어 앤솔로지>가 예상 외의 인기를 -특히 문예창작 전공생들 사이에서- 끈 덕분이었다.

이 과에서 가장 인기 많은 수업 중 하나인 ‘출판 프로그램의 실제’에도 이 책을 들고 왔을 정도.

“미스터 케빈! 이거 혹시 읽어보셨어요?”

그 말에 거구의 사내, ‘미스터 케빈’의 시선이 책으로 향했다.

“제일 앞에 실린 단편, 이거 엄청나요. 자, 선물로 드릴게요.”

“음··· 고마워요, 여유될 때 읽어보겠습니다.”

다만, 케빈 본인은 영 시원찮은 반응이었지만.

‘그래 봤자 학생 수준의, 뻔하디뻔한 패러디소설이겠지.’

···늘 그랬듯 말이다.

케빈 클레그는 미국 유수의 출판 에이전시 ‘라이터스홈’에 소속된 젊은 에이전트다.

에이전트의 가장 큰 임무는 ‘뛰어난 작가’를 찾아내 그와 계약하는 것.

그런 점에서, 야망 있고 성실하며 협상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케빈, 자네의 작품 고르는 안목은 정말 최고야. 대표인 내가 인정하지.’

자타가 공인하는 작품 선구안을 지닌 케빈은 상당한 인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말이야, 이번에 주립대에서 하는 산학협력 프로젝트 말인데··· 그걸 자네에게 맡기고 싶어.’

연차가 제법 있는 에이전트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업무.

···이제 갓 글을 쓰기 시작한 애송이 대학생들 중 떡잎을 찾아내야 하는 일을 울며 겨자먹기로 맡아 하고 있었다.

“후우.”

에너지 넘치는 학생들에게 시달리다 귀가한 저녁.

케빈은 가방 안의 내용물을 습관처럼 책상에 쏟아냈다.

그 순간, 쿵- 하고 떨어지는 무거운 책.

“이건···.”

학생들이 재밌다고 난리를 쳤던 <셰익스피어 앤솔로지> 아닌가.

그래 봤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원고이겠지만.

‘대체 뭐길래 그 난리를.’

아주 살짝 호기심이 동한 나머지, 제일 앞에 실린 단편을 펼쳐보았고.

[<6인의 고백>

제1장. 로렌스 수사의 고백···]

호오, 단편 안에 챕터가 여섯 개가 있네?

조금 신기해하는 사이, 글은 순식간에 읽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익히 알던 <로미오와 줄리엣>은-

‘잠깐 이거, 스릴러···였어?’

그것도 심지어 여섯 명의 관점에서 펼쳐지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추리극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2장 패리스 백작의 고백에 이어 3장 어느 시종의 고백으로 넘어간 순간.

에이전트는 직감했다.

“No way(말도 안 돼)···.”

자신을 붙들고 꼭 읽어보라며 애원하던 학생들.

자신 또한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한 반응을 보이진 못할 것 같다고 말이다.

케빈 클레그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으며 <6인의 고백>을 계속 읽어나갔고.

“···.”

어느새 마지막 문장을 다 읽어버린 뒤.

저도 모르게 맨 뒤편에 실린 ‘저자 약력’을 뒤적거렸다.

[유진 권Eugene Kwon|

저자의 요청으로 약력은 생략합니다.]

“···지금 장난해?”

대학 출판부에 전화할까 싶었지만 모두가 퇴근했을 시각.

‘유진 권이 누구인지 반드시 찾아내겠어.’

대체 뭐 하는 인물인지.

연락처와 이메일 주소는 무엇인지 전부 찾아내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 작가, 이미 다른 곳과 계약했으면 안 되는데.’

케빈은 간만에 잠을 설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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