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21화 (21/126)

반향(3)

공항에서 작업실로 향하는 택시 안.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잘 정돈된 도시의 풍경이 사뭇 근사했다.

‘날씨도 아이오와보다 훨씬 따뜻하고 말이지.’

새벽 비행기를 타고 온 내게 힐링이 되어주는 기분이다.

왜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캘리포니아 하는지 알 것 같달까.

‘3박4일, 아주 제대로 놀고 가야지 흐흐.’

그건 그렇고, 말로만 듣던 SF팬들의 성지에 가게 되다니.

그것도 무려 비숍 작가 본인을 만나러!

[에곤 K 작가님에게 작업실의 임시 출입증과 초대장을 보냅니다.]

비숍 작가가 친히 보내준 우편물을 볼 때마다 두근거렸다.

‘그래도 너무 팬미팅 같은 마음으로 가면 안 되는데.’

하지만 팬이 좋아하는 작가를 만나는 자리가 팬미팅이 아니면 뭐겠는가.

그렇게 약 30분가량 달리고 난 뒤.

“다 왔습니다.”

택시에서 내리자 통유리창이 근사한 현대식 건물이 서 있었다.

‘여기가 바로 비숍스플레이스!’

1층과 2층은 SF팬들을 위해 가끔씩 개방하는 전시관.

3층은 비숍 작가가 개인작업실로 쓰는 공간이라고 들었다.

“안녕하세요.”

로비에 들어서자 경비원이 고개를 갸웃한다.

“어, 오늘은 팬들에게 개방하지 않는 날로 알고 있는데-”

“제가 팬이 맞기는 한데···.”

나는 웃으며 비숍 작가에게 받은 임시 출입증과 초대장을 내 보였다.

“에곤 K라고 합니다.”

“···!”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경비원이 어디론가 바로 연락을 했고.

그로부터 5분도 채 되지 않아 젊은 남성 한 명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에곤 K 작가님이 오셨다고 들었는데-”

“여깁니다.”

“···네?”

그가 나를 돌아보더니 일순 눈빛이 멍해졌고.

나는 -비숍 작가의 비서로 보이는- 젊은 남성에게 초대장을 다시 한 번 내보였다.

“에곤 K라고 합니다.”

“···!”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다시, 그로부터 5분 전.

랜든 비숍은 자신의 비서 팀과 함께 3층 작업실에 앉아 있었다.

톡, 톡톡.

살집 많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자꾸만 두드려가며.

권유진이 오늘의 만남을 진성 팬의 마음으로 몹시 기대했다면.

비숍은 내심 조금 긴장했다고 할까.

평소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물론, 대외적인 활동을 자주 하는 만큼 이런 자리가 어색한 건 절대 아닌데.

‘이건 긴장이 아니라··· 기대감에 가까우려나.’

얼굴도 모르는 이 신인 작가를 만난다는 사실에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아마, 그만큼 에곤 K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기대?”

비서 팀의 말에 비숍은 고개를 들었다.

“···작가님 말씀대로, 오늘날의 SF씬은 그들만의 리그 같은 경향이 강하지 않습니까.”

SF&판타지의 황금기라 불렸던 시절이 지나가버렸기 때문일까.

대중이 아는 SF작가란 옛날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세대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대중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

“맞습니다. 물론 지금의 흐름도 나쁘지는 않다고 봅니다만.”

“아니, 난 나쁘다고 보네.”

저희들만의 리그.

소설 자체에서 오는 서사적 재미보다, 메시지와 사상을 담는 것을 우선시하다보니-

“대중의 외면을 받는 게 당연하지.”

“···.”

“대체 언제부터 판타지와 SF장르판이 문학 권력을 쫓았다고 말이야, 안 그래?”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에곤 K가, 이 고착돼버린 SF 장르에 새로운 부흥을 가져다주리라 기대하시는 거지요.”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건 그저 자신의 개인적 바람일 뿐이다.

오늘은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에곤 K라는 사람을 드디어 만나본다는 것에 대한 기대가 더 큰 상황.’

단 한 편의 작품으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가를 만난다는 사실에 고무돼 있는 것 같다.

에곤 K.

대체 어떠한 인생을 살아왔기에 이런 지독한 외로움과 통찰을 첫 소설에 담아낼 수 있었던 걸까.

내심 비숍은 은연 중에 이런 결론을 내린 터였다.

‘비록 이 에곤 K가 소설가로서는 신인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이가 어느 정도 있고 인생 경험이 풍부하며.’

창작 계통이 아닐 뿐이지 글 자체를 전문으로 다루는 직종의 종사자일 것 같다고 말이다.

교수? 아니면 저널리스트? 그 외에도 다양한 직종을 떠올려보던 그때.

“그나저나, 팀. 어쩌면 배틀스타 갤럭티카 한정판 피규어가 내 손에 들어올지도 모르겠네.”

“혹시 1978년 크롬 버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거 해리슨 편집장님이 보물처럼 여기시는 거 아닌가요.”

“흐흐, 그 해리슨이 이번 내기에 그걸 걸었거든.”

낄낄거리며 대꾸하는 비숍을 보며 비서가 진지하게 물었다.

“작가님은요?”

“나는 3부작 장편을 걸었지.”

“3부작···.”

“왜 그러나?”

“아니, 아닙니다.”

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비숍은 그가 꽤 오랫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잘 알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비단 나이나 체력 때문은 아니었다.

이제는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내기라도 한 듯, 무엇을 써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 느낌.

흔히 말하듯 영감이 고갈돼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뭐, 45년을 썼으면 이제 충분하지 않은가 싶지만.’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

그건 마치 자신이 더는 랜든 비숍이 아니게 되는 듯한 느낌이다.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몸서리치게 싫은 감각이라고 할까.

“팀. 이건 그냥, 내 허튼 예감일지도 모르겠네만.”

잠시 망설이던 노작가가 말을 이었다.

“이 친구를 만나고 나면,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다시 생길지도 모르겠어.”

“···.”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지만 말이다.

어떤 형태의 만남이 되든 자신에게는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던 그때.

책상 위의 내선전화가 울렸다.

“아, 에곤 K 작가님이 도착했다는군요. 제가 바로 가서 모셔오겠습니다.”

그로부터 약 5분 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랜든 비숍이 대꾸했다.

“들어와요.”

곧바로 문이 열렸고.

자신의 비서를 따라 들어온 인물을 보고 한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

고등학생 이상으론 보이지 않는 곱상한 외모의 아시안 소년.

비서, 혹은 보조작가라고 보기에도 너무 어리다.

혹시 동생이나 조카와 함께 온 걸까? 설령 그렇다 쳐도 본인은 어디 가고···.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한 채, 노작가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저, 에곤 K 작가는 어디에-”

“여기 있는데요.”

“···어? 그러니까, 자네가.”

당황한 노작가의 얼굴을 마주한 소년은 해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비숍 작가님, 이분이··· 에곤 K 작가님 맞습니다.”

비서 팀은 비숍의 사무실에서 발송한 초대장을 보여주며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

랜든 비숍이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그때.

“<멸망한 세상의 피터 팬>을 쓴 에곤 K라고 합니다.”

자세를 고쳐 선 소년이 여유로운 기색으로 그를 마주 보았고.

“이렇게 랜든 비숍 작가님을 만나 뵙게 되어서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앳된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회생활 좀 해본 노련한 느낌으로 손을 척 내밀었다.

“···!”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붙잡으며 악수를 한 비숍은-

‘···상상 이상이로군!’

벌써부터 감탄하고 말았다.

*

한편 그 시각.

랜든 비숍의 작업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사이언스앤드판타지> 편집부 사무실.

“지금쯤이면 두 작가님이 만나고 계시겠구만.”

통유리창으로 된 편집장실 안.

해리슨 편집장은 에곤 K의 담당편집자 마크와 독대하는 중이었다.

“흐으, 나도 그 자리에 있고 싶었는데 말이야.”

“저도 마찬가집니다 편집장님.”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는 두 사람.

“저뿐이 아니고 편집부 사람들 다 궁금해서 미치려고 한다니까요?”

“흐흐, 하긴 팬들도 난리던데 말이지.”

자신의 폰 화면을 슬쩍 내려다본 해리슨이 싱긋 웃자, 마크가 한마디했다.

“편집장님, SF서브레딧 새로고침 좀 그만하시죠.”

“하, 자넨 더한 것 같던데.”

그 말을 끝으로 실실 웃는 두 사람.

이 둘뿐이 아니고, 요즘 이 S&F 편집부 사람들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벌써 2쇄라니!’

‘2쇄가 뭐야, 곧 3쇄 들어갈 모양이던데.’

‘이러면 아예 부수를 팍 올려서 찍어도 되지 않으려나?’

‘흐흐, 간만에 신이 나는구만.’

그야말로 역대급의 반응이라는 것.

편집장과 마크의 대화는 자연스레 에곤 K에 관해 흘러갔다.

“흠, 인터뷰 요청이 꽤 많이 들어왔단 말이지.”

SF저널, 로커스, 월드판타지북 같은 장르전문지는 물론이고.

“<가디언>지? 이건 엄청난걸.”

영국의 대표적인 언론인 <가디언>은 평소 문학계를 다방면으로 서포트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재능 있는 신인 작가의 발굴에 특히 관심이 많은데···.

“여태 가디언이 SF쪽 신인에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말이지.”

“흐흐, 안 그래도 편집부에서도 난리였습니다. 아 그리고 에곤 K 작가님 관해서 보고할 게 있는데요.”

“보고? 뭔데.”

그리고 잠시 후.

“뭐어어어어어——?!!!!!”

편집장실에서 터져 나온 외침, 아니 비명에 대체 무슨 일이냐며 바깥에서 깜짝 놀라는 가운데.

“아니, 아니지. 어우, 놀라서 너무 흥분했네.”

“하하.”

“그러니까, 마크. 그··· 에곤 작가님이 신작 원고를.”

꼴깍.

마른침을 삼킨 해리슨이 말을 이었다.

“1~2주 안에 주시겠다고 한 거지? 구상 중이다··· 뭐 이런 말이 아니고?”

고개를 끄덕인 마크가 이내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자.

“와하하하-”

잠시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던 해리슨 편집장은 부하직원의 눈빛을 보고는 이내 크흠, 헛기침을 했다.

“이거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하지만 그 순간.

언젠가 비숍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글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 참다 참다가 써낸 글이라고 하면··· 내 말이 뭔지 알겠나?’

에이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 애초에 신인이 이런 속도로 글을 써낼 수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해리슨은 에곤 K를 담당하는 마크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그건 그렇고, 자네가 보기에··· 이 에곤 작가가 어떤 사람인 것 같아?”

“아.”

“요즘 둘이 메신저로 대화도 나눈다며. 뭔가 얘기하다 보면 느낌이 오는 게 있을 거 아니야.”

잠시 생각을 정리한 마크가 이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일단 나이는 제법 있는 편 같아요.”

“그렇지, 인생 경험도 있는 것 같고.”

“네. 또 한편으로 놀랐던 건, 출판업계의 전반적인 프로세스를 빠삭하게 꿰고 있달까요?”

그 말인 즉, 한두 번 출간해본 짬밥이 아니라는 의미.

편집장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마크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반응이··· 좀 신기하다고 해야 하나.”

“반응?”

“지금 <피터 팬>이 여러모로 난리잖아요. 근데 막상 본인은 생각보다 그렇게 놀라지 않은 모양이더라고요.”

“그래?”

“시큰둥까지는 아닌데 뭐랄까, 이런 거에 익숙한 느낌?”

···호오.

편집장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가디언지 인터뷰 얘기도 꺼냈는데 그때도.”

마크는 설명 대신 에곤 K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내보였다.

[에곤_K : 아 가디언지요]

[에곤_K : 거기야 늘 신인에게 관심이 많으니]

[에곤_K : 이메일 인터뷰는 좋습니다. 가능하다면 신작 출간 이후, 사전에 질문 리스트를 받아보고 그중에서 제가 원하는 것에만 답변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걸로 하죠.]

“···와우.”

해리슨 편집장은 작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마크의 말이 이어졌다.

“이분 아무리 봐도-”

“거물이다, 그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적절하게 치고 들어온 편집장의 말에 마크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이거, 아무래도 우리 쪽에 경사가 하나 더 생길 것 같은데.”

“경사요?”

“아, 내가 비숍 작가님이랑 내기를 하나 했거든.”

“설마-”

“그래. 에곤 K의 정체에 관한 내기.”

자신은 에곤이 기성작가라는 데에, 비숍 작가는 신인이라는 데에 걸었다고 말이다.

“마크.”

“네.”

“비숍 작가님의 신작 3부작, 떡밥 뿌릴 준비 미리 미리 해두는 게 좋을 거야.”

“···!”

마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더니.

이내 양쪽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

“걱정 마시죠 편집장님.”

그러나 막상 그 시각 랜든 비숍은-

“진짜로 첫 작품이란 말인가? 이 <피터 팬>이?”

“뭐, 자세히 따지자면 좀 복잡하긴 한데.”

유진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문자 그대로(literally) 따지자면, 네 그렇죠. 첫 출간작.”

···이거 정말로, 해리슨의 보물이 내 차지가 되겠는걸?

그런 생각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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