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 교류(1)
랜든 비숍.
전체적으로 둥근 외모이지만, 두 눈만은 날카롭게 빛나며 유진의 면면을 살피는 중이었다.
“헌데 10학년이면··· 고등학생?”
방금 전.
유진이 말한 사실이 지금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고등학생 맞습니다. 본명은 권유진이고요.”
얼마나 놀랐는지 딸꾹질을 할 뻔했다.
화제를 돌리고자 집이 어디냐, 여기 오는 데 얼마나 걸렸냐 물었더니.
“집이 아이오와시티이거든요, 비행기로 네 시간쯤 걸렸네요.”
“아, 아이오와시티. 좋은 곳이지. 거기서 문학 축제도 많이 열리지 않나, 유네스코 지정 문학의 도시라서.”
“잘 아시는군요, 하하.”
유진은 경험 많은 사회인처럼 웃더니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아이오와시티가 꽤 괜찮은 동네이긴 합니다. 물가도, 집값도 싸고, 치안도 나쁘지 않아서 전반적인 생활만족도가 높아요.”
“···.”
“멋모를 땐 시골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그렇게 발버둥을 쳤는데.”
멋모를 때라면 대체 몇 살 때를 말하는 걸까.
노작가가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유진은 그를 마주 보며 당차게 말했다.
“제가 이 <피터 팬>을 쓰게 된 건 다 작가님 덕분입니다.”
“음? 나···?”
“네.”
씩 웃는 유진.
“수상 특전에 ‘비숍 작가님과의 만남’, 이라고 적혀 있지 않았다면 아예 공모전에 도전할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요.”
“···어.”
비숍이 할 말을 잃은 사이.
유진은 10여분간 <스타라이트 크로니클>에 관한 감상을 한참이나 늘어놓았다.
“제가 SF에 입문하게 된 건 전적으로 <스타라이트 크로니클> 덕분인데···.”
깊이 있는 주제 의식, 매력적인 캐릭터.
광활한 세계관에서 펼쳐지는 장대한 전투, 무엇보다도-
“그 책이 제 삶을 얼마나 크게 바꿔놓았는지, 작가님은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하하.”
···작품을 향한, 진심어린 애정.
“···.”
팬들의 간증을 한두 번 접해본 것이 아니었지만, 비숍은 그럼에도 이런 찬사를 들을 때면 매번 가슴 벅찬 기분에 빠져들곤 했다.
특히나 지금.
향후 SF계를 주도할지도 모르는 거물 신인이 이렇게 두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니.
‘그래도, 헛살지는 않았구만.’
노작가의 입가에 저절로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로부터 몇 분이 더 지났을까.
뒤늦게 이야기를 멈춘 유진이 민망해하며 말했다.
“저 혼자서 너무 많이 떠들었군요.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하하.”
“아닐세. 듣는 내게도 아주 재미난 이야기였어. 게다가.”
비숍은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채로 말을 이었다.
“독자의 애정 어린 찬사를 듣는 것보다 원작자에게 기쁜 일은 있을 수 없지.”
그 말에 환하게 웃는 유진.
“그래도 오늘은 팬미팅이 아니라 작가 대 작가의 만남이니, 조금 더 그에 어울리는 대화를 나눠보는 게 어떨까.”
“하하, 좋죠.”
저런 모습은 또 정말로 순진한 고등학생 같다.
산전수전 다 겪고 절망의 구렁텅이를 헤쳐나온 인물일 거라 짐작했는데, 내 감도 다 죽어버린 걸까.
‘그래도 정체를 들키면 안 되는 거물이니 어쩌니 했던 해리슨보다는 내가 낫군.’
난리법석을 떨던 S&F 편집장을 떠올리며 비숍이 픽 웃던 그때.
유진이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작가 대 작가의 만남이라 하시니 말인데··· 사실은 제가 신작을 쓰는 중이거든요.”
“신작? 벌써? 아니지, 슬슬 그럴 시기이기도 하겠군.”
이제 막 첫 열매의 달콤함을 맛보지 않았나.
한창 글이 쓰고 싶어서 좀이 쑤실 때긴 하지.
“네. 이번엔 장편으로 쓰고 있습니다.”
“아주 좋아. 제대로 된 작가로 인정받으려면 역시 장편을 써야지.”
그나저나 신작은 무슨 내용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호기심으로 근질거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는데.
“근데, 결말 부분이 좀 마음에 안 들어서 고민이네요.”
“결말?”
유진의 말에 노작가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끔벅거렸다.
<피터 팬>이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신작을, 그것도 장편을···.
“벌써 결말 부분을 쓰고 있다는 건가?”
무심코 네, 대답하려던 유진은 상대의 놀란 얼굴에 설명을 덧붙였다.
“아, 아예 새로 쓰는 건 아니고요. 전에 써놨던 습작들 중 하나를 수정해서 쓴 거라.”
그래서 빠르게 일이 진행됐다.
-라는 유진의 말에, 비숍은 조금 다른 포인트로 놀라고 말았다.
‘···습작?’
이제 겨우 고등학교 2학년인데 써놓은 습작이, 그것도 여러 개가 있다고?
그때, 유진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저, 작가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가볍게, 신작을 한 번 읽어봐주실 수 있을까요?”
“···!”
랜든 비숍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꼴깍 삼켰다.
*
한편 그 시각 라이터스홈 본부.
분주하게 일하는 이들 가운데, 곰처럼 커다란 체격을 자랑하는 직원 한 명이 눈에 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케빈 클레그.
‘이거, 영 안 되려나 보네.’
케빈은 자신의 모니터 화면을 뚫어져라 주시하는 중이었다.
그가 보는 것은 ‘요에이든’이라는 어느 고등학생의 채널 영상.
[@cute_bookish: 저 혹시··· 유진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_< 왓츠앱 아이디도 좋구요!!!!]
유진의 정체에 관한 생각지도 못한 실마리를 얻은 뒤, 케빈은 유진의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댓글을 남긴 터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넘게 지난 오늘 드디어 답글이 달렸는데.
[└@yo_aiden: 유진한테 물어봤는데 절대 안된다하네요 ㅠㅠ 죄성···]
쩝, 입맛을 다신 케빈이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이미 소득은 상당했다.
유진이 힐크레스트 고등학교 10학년생이라는 걸 알아내지 않았나.
‘설마, 고등학생이었다니 상상도 못 했지만.’
힐크레스트 고등학교의 교내잡지라는 <스쿨씬>도 직접 찾아보았다.
거기에 실린 <로렌스 수사의 고백>이 <6인의 고백>에 포함된 제1장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그 유진이 이 ‘유진 권’임을 확신했던 것.
‘세상에는 생각보다 천재가 많다니까.’
특히나 이 문학계는 더더욱 그렇다.
다만, 그 재능이 제대로 피어나느냐는 조금 다른 문제였지만.
그리고 바로 그러한 면에서-
‘그런 작가들의 길잡이가 되어주고 싶다.’
그것이 천상 에이전트, 즉 책을 사랑하고, 작가를 서포트하는 데서 보람을 느끼는 케빈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여하튼, 유진을 만나겠다고 힐크레스트 고등학교로 찾아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거기 고등학생들이 자주 간다는 식당이라든가, 카페라든가, 그런 데를 가보는 건 큰 문제가 안 되지 않을까?
“케빈, 에곤 K 쪽은 어떻게 됐어?”
한창 생각에 잠겨 있던 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팀장의 목소리.
“새로 알아낸 거라든가, 단서라든가 뭐 그런 거 없냔 말이야.”
“음, 팀장님. 제가 탐정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내겠습니까. ···그래도 만약에 그쪽에서 에이전트를 필요로 할 때를 대비해.”
케빈이 창을 전환해 S&F 편집부 측에 보내놓은 메일을 띄웠다.
“저희 라이터스홈 자료는 진작에 보내뒀습니다. 우리 매니지 소속 작가들 성적이랑, 그간 저희 쪽에서 성사시킨 옥션들.”
그중에서도 입찰액이 7자리가 넘어가는 슈퍼 옥션 사례 위주로 정리했으며.
영화 판권의 경우 어떤 제작사와 어떤 감독들과 진행했는지 일목요연하게 작성하여 자료를 보내놨다- 라는 것.
“에곤 K 담당자랑도 따로 통화했고요.”
“···그래?”
“네. 마크라고, 그 친구가 저랑 두어 번 거래했었거든요. 원래도 꾸준히 연락하고 지낸 사이라.”
역시,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알아서 척척 해낸다니까.
팀장은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일거리를 케빈에게 맡기게 된단 말이지, 흐흐.’
케빈은 자신의 지나친 유능함이 자꾸만 일거리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조차 못한 채-
“그럼 전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사를 나섰다.
‘새로 생긴 도넛가게가 애들 사이에 인기가 많다던데.’
···힐크레스트 고등학생들이 잘 간다는 가게를 방문하러 말이다.
*
다시, 비숍의 작업실.
유진이 비서 팀의 안내를 받으며 1층과 2층을 둘러보는 동안, 비숍은 유진의 원고를 정독했다.
‘흐음, 청소년 소설인가?’
절망스러운 환경에 놓인 소년의 일기로 시작되는 도입부.
고개를 갸웃하던 노작가는 점점 더 몰입하기 시작했고.
그대로 꼬박 두어 시간을 읽고서 마침내 마지막 장을 덮은 순간-
‘아, 이건 정말로.’
‘압도적(overwhelming)’이라는, 그 한 단어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걸 써놓고··· 마음에 안 든다고?”
어떤 부분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자신에게는 그저 완벽하게만 느껴지는 이 소설의 대체 무엇이···.
가슴속을 울려대는 강렬한 충격에 비숍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 마침 잘 왔네.”
근처 카페에서 팀과 함께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왔다는 유진을 비숍은 반갑게 맞이했다.
“다 읽어보셨어요?”
“그래, 방금 다 읽은 참이네. 이건 그야말로···.”
카라멜 마키아또를 한 입 홀짝거리고는 말을 이으려던 순간.
잔뜩 긴장한 유진의 얼굴이 노작가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천재도, 독자의 감상을 들을 때는 긴장되는 법인가 보지.
“엄청나던데. 압도적이야.”
“···아.”
“‘러브크래프트적 공포(lovecraftian horror)’라는 표현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군.”
새로운 신화 체계를 만들어낸 공포문학의 거장.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이름이 등장하자 유진의 눈이 커졌다.
“그야말로 거대하고도, 어마어마한 공포. ···인간의 인지로는 절대 헤아릴 수 없는, 알아서는 안 될 것과 마주친 기분이 들었으니까.”
“···.”
“읽는 내내 이 호수 괴물의 입 속에 있는 듯했네. 숨이 막히는 줄 알았어, 허허.”
유진의 얼굴에 여러 감정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안도감, 자랑스러움, 기쁨, 행복감···.
비숍 자신마저도 미소가 지어지는데.
“근데, 그··· 결말은 어떠셨습니까.”
“아.”
결말. 이렇게 감상을 말하다 보니,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자네가 결말이 좀 마음에 안 든다 했지.”
“네.”
조언을 간절히 구하는 유진의 눈빛 앞에서 비숍은 잠시 고민했다.
‘괴물, 호수 속의 괴물이 곧···.’
내 안의 괴물이다.
무언가가 떠오를 듯 말 듯한데.
흐음, 테이블에 놓인 초콜릿을 무심코 집어먹던 비숍이 입을 열었다.
“형사의 믿음이 틀렸다면?”
“···.”
“그러니까, 작가가 꼭 명확한 해답을 줘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기왕 이런 식의, 그러니까 이성과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공포를 메인으로 내세우는 작품이라면.
“조금 더 뒤로 물러나는 결말을 보여줘도-”
“아!”
유진이 벌떡 일어섰다.
“잠깐, 잠시만요.”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그것으로 미친 듯이 메모를 시작한다.
그 모습에 비숍은 눈을 크게 떴다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 요즘 젊은 친구들은 참.’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론, 자신 또한 저렇게 글을 다시 쓰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5분 정도 걸려 메모를 마친 유진이 후련해진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작가님, 진짜 감사합니다.”
“···내가 뭘 했다고.”
솔직히 말하면, 하고 싶은 말의 반의 반도 하지 못했다.
“아니에요. 진짜로, 작가님이 큰 힌트를 주셨습니다.”
“허허.”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작품은 그 탄생부터 작가님에게 빚을 진 거라.”
“빚을 졌다고?”
의아해하며 되묻자 유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전에 왜, 작가님의 초기 단편 중에 <어둠 속의 방문자>라는 작품이 있었잖습니까. SF 고전 단편 컬렉션에 실렸던.”
그게··· 언제 쓴 거였더라.
비숍이 제 기억을 헤집는 동안, 유진은 그것이 <스타라이트 크로니클> 다음으로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걸 쓰는 내내 그 작품을 떠올렸어요. 말하자면, 제 소년 시절을 함께해준 작품에 대한··· 일종의 헌정이라고 할까.”
“···.”
아, 이제야 기억났다.
<어둠 속의 방문자>.
1980년대에 데뷔했을 당시, 여전히 가난한 작가였던 자신에게 첫 상의 영광을 안겨다준 작품.
‘그래, 그런··· 단편이 있었지.’
비숍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유진이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근데 작가님, 혹시 그 작품을 개작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아니다, 개작이라기보단 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신작.”
“아···.”
“전 당연히 그 세계관을 공유하는 후속작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서 너무 너무 아쉬웠다는 것.
유진이 애정 가득한 말을 이어나가는 가운데, 비숍은 입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 안의 괴물이라.’
그리고 어둠 속에 홀연히 나타나는··· 미지의 방문자들.
몇 십 년 전, 그러니까 한창 글을 쓰고 싶은 열망에 시달리던 신인 시절.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 이미지들이 총천연색으로 되살아나는 듯하더니-
“···.”
일순 감전된 듯한 감각이 그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이거다.’
···꽤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았던 영감이 비숍의 머릿속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