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23화 (23/126)

긍정적 교류(2)

노작가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형형한 눈빛을 한 채, 후배 작가에게 양해를 구하길-

“잠시만, 나도··· 메모를 좀 해둬야 할 것 같네.”

“···.”

그 모습을 유진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랜든 비숍은 펜을 들어 노트에 끼적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 차원의 틈새로 빠져나온 무법자들··· 눈에 보여서는 안 되는···]

사각사각, 사각사각.

종이 위에서 펜촉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한참을 울리고 나서야 비숍은 고개를 들었다.

후우, 후-

얼마나 집중했는지 심장 박동이 빨라져 있었다.

···영감, 혹은 아이디어가 주는 격정에 사로잡혀본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저, 유진 군. 이제··· 다시 얘기해볼까.”

비숍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작가님.”

“응?”

“방금 보여주신 그 모습.”

말 없이 저의 우상을 지켜보던 유진의 입가에도 비로소 미소가 깃들었다.

“평생 못 잊을 것 같습니다.”

“···.”

순간, 비숍은 목이 살짝 메이는 기분이 들었고.

한 박자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뭐든 말씀하시죠.”

“방금 자네가 내게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해줬잖나.”

“···.”

유진의 동그래진 눈을 보며 노작가가 주름진 미소를 지었다.

“<어둠 속의 방문자>. 그걸 가지고 뭐든 새로 써볼까 해.”

“저, 정말로-”

“그래서, 어느 정도 글의 형태가 잡히고 나면.”

노작가의 살짝 긴장된 목소리.

“자네가 그 글을 한 번 봐주지 않겠나?”

“···네?”

생각지도 않은 말에 유진은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물론 나도 자네의 글을 언제든 봐주는 조건으로 말일세.”

“아, 아니! 그거야 물론 어마어마한 영광이지만, 제가 어떻게 작가님 글을···.”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는 젊은 작가를 보며 비숍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시야가 좁아지기 십상이지,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쉽고. 그런 의미에서.”

자네 같은 젊은 작가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될 거다- 라는 말에 유진은 침을 꼴깍 삼켰고.

“···네, 좋습니다 작가님.”

조금 상기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감동적인 침묵이 잠시 사무실 안을 지배하는 가운데.

“아 작가님, 저···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뭐든 얘기해보게.”

이번에도 작품에 관련된 요청이려나.

랜든 비숍이 열린 마음으로 상대의 말을 기다리던 그때.

쿵-! 유진이 자신의 거대한 여행용 트렁크를 열어젖혔다.

그 안에서 꺼낸 것은 비숍 자신의 책들.

‘···!’

<스타라이트 크로니클> 전권은 물론, 그 외의 다양한 소설들.

오래전에 절판된 단편집, 심지어는 기고문이 실린 잡지까지 빠짐없이 챙겨온 것이 아닌가.

“이거 전부, 사인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아, 어··· 물론이네.”

“그리고.”

유진이 재킷을 벗더니, 입고 있던 티셔츠의 등판을 내보였다.

···거기에는 랜든 비숍 자신의 캐리커처와 함께, <스타라이트 크로니클>에 등장하는 명문장이 적혀 있었으니.

[공포는 비열한 자들의 무기요, 용기는 옳은 자들의 방패일지어니.]

“등에도, 꼭 좀 부탁드립니다.”

“···.”

순간.

비숍은 SF컨벤션장에서 마주했던 자신의 팬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

S&F 편집부의 해리슨 편집장이 비숍의 사무실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어떠셨습니까, 작가님.”

주어가 생략되었지만, 무엇에 관한 질문인지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에곤 K. ···여러모로 놀라운 인물이었네.”

“오오.”

“아 그리고 신작 원고도 읽어봤지.”

“···!”

에곤 K가 신작에 관해 조언을 구했다는 말에, 해리슨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말도 안 돼!’

마크에게서 원고 입고 일정에 관해 얘기를 듣긴 했지만, 정말로 완성 단계일 거라고는 믿지 않았던 탓이다.

“후와, 이거 엄청난걸요. 그래서, 읽어보니 어떠셨습니까.”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비숍.

“기대해도 좋을걸세.”

“기대···라면?”

“충격적일 정도로 훌륭해.”

“···!”

저 깐깐하기로 유명한 양반이 저렇게 말할 정도라니.

해리슨이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던 그때, 노작가의 말이 이어졌다.

“그건 그렇고, 해리슨.”

“네?”

“이번 내기, 내가 이겼네.”

“···예? 그게 무슨.”

“배틀스타 갤럭티카 피규어는 이제 내 거라는 말일세.”

씩 웃은 노작가가 책상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그것은 꽤 유려한 필체로 쓰인 문장이었는데.

[나, 에곤 K는 이제 갓 첫 소설을 잡지에 실은 완벽한 신인임을, <스타라이트 크로니클> 소언 맥킨지 중령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P.S: 편집장님의 피규어는 1층 전시관 B-31구역에 놓으면 잘 어울릴 것 같군요.]

정말로··· 신인 작가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이 메모를 보는 와중에도 여전히 믿기지 않았지만, 본인이 그렇게 주장하는데 어쩌겠는가.

“하아···.”

메모를 다 읽은 해리슨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대체 누구냐, 에곤 K.’

비록 신주단지처럼 모셔온 피규어를 넘기게 되었지만, 아쉬움보다는 흥분감이 더 컸다.

“작가님,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이 에곤 K.”

“자네 설마, 나한테 이 신인 작가의 비밀을 발설하는 배신자가 되라고 하는 겐가.”

에곤 K의 실물을 본 경비원, 그리고 자신의 비서 팀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시켜놨다고 덧붙이는 랜든 비숍.

“그런 건 아닙니다, 그래도 그냥 힌트만이라도.”

편집장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비숍이 입을 열었다.

“잔소리.”

“···예?”

“내가 단 걸 너무 많이 먹는다고, 설탕을 줄이라고 말이지.”

그의 통통한 손가락이 테이블에 놓인 커피잔을 가리켰다.

“카라멜 마키아토를 마실 때도, 시럽 대신 액상 스테비아를 쓰기로 했어.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던데?”

“아.”

“매일 아침, 조깅이 어려우면 산책이라도 가라고. 팀한테 신신당부를 하길, 같이 산책하고 나면 자신한테 메신저로 보고해달라 하더군.”

“크크, 임자를 만나셨군요.”

낄낄거리던 해리슨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말을 돌렸다.

“잠깐만, 이런 것들 말고요. ···아니 다 떠나서, 대체 정체를 왜 숨기는 거랍니까?”

“···.”

사실.

비숍은 유진이 떠나기 직전, 그와 비슷한 질문을 던진 터였다.

그리고 이에 유진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길.

‘천재 고등학생 작가라고 불리기 싫어서, 라면 대답이 될까요?’

자신감이 넘치지만, 전혀 건방지게 느껴지지 않는 태도로.

···비숍은 유진의 앳된 얼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글쎄. 아마 사람들이 얼굴만 봐도 놀라지 않을까 싶어서 숨기는 듯한데.”

하지만 해리슨은, 조금 다른 포인트로 그 말을 받아들인 터였다.

“얼굴만··· 봐도요?”

역시, 누구나 다 아는 유명인이었군!

편집장은 씰룩이는 입가를 주체하기 어려웠다.

*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꼬박 이틀을 묵고 돌아왔다.

···간만에 가본 4성급 호텔이 얼마나 좋던지.

여하튼, 그렇게 꿈 같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

‘에곤, 나는 자네의 재능이 안타까워.’

잠깐 눈을 붙였다가 아주 기이하고도 의미심장한 꿈을 꾼 터였다.

‘신은 어째서 자네에게 이런 비정한 운명을 안배하신 걸까.’

에곤 언윅.

꿈속의 나는 분명 그렇게 불렸다.

‘이것 때문인가.’

비행기 안에서 읽던 에곤 언윅의 <이루지 못한 꿈>.

나는 절반 정도 읽은 책에 책갈피를 꽂은 뒤 책장을 덮었다.

“···인상 깊게 읽어서 그런가, 꿈까지 다 꿨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결론을 내린 뒤.

노트북을 켜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원고 파일을 열었다.

비숍 작가와의 대화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덕분에, 영 마음에 들지 않던 결말을 수정했다.

그러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쭉 읽어보니-

‘이거야.’

강렬한 확신이 드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기분 좋게 돌아오고 난 바로 다음 날.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내가 여행에서 돌아오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한국에 갈 타이밍이 되었다.

“잘 다녀와 여보.”

“아빠 잘 다녀오세용~~”

새어머니와 클로이, 모두가 공항으로 배웅을 나간 터.

알겠다며 무뚝뚝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에게 클로이가 도도도 달려가 폭 안겼다.

“아빠 뽀뽀!”

쪽, 하고 뺨에 입을 맞추자 늘 무표정한 아버지의 얼굴에도 함박미소가 떠오른다.

“그래, 클로이. 엄마랑 오빠 말 잘 듣고.”

“걱정 마 아빠! 오빠, 오빠도 아빠한테 뽀뽀해줘.”

그 말에 새어머니가 풋 웃음을 터뜨리자, 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오빠는 그런 걸 하기엔 너무 커버렸거든 클로이.”

“그래? 히잉. 난 오빠한테 뽀뽀해줄 건데.”

아버지의 품에 안긴 클로이가 내 뺨에도 쪽, 뽀뽀를 해준다.

‘귀여워라.’

이렇게 귀엽던 녀석이 다 크고 나서는 날 볼 때마다 잔소리를 해댔지만.

지난 추억에 미소짓는데, 클로이를 내려놓은 아버지가 나를 어색하게 살짝 안았다가 놔주었다.

“유진이 니 덕분이다. ···잘 다녀오마.”

“네, 다녀오세요.”

여전히 딱딱하기 짝이 없는 부자의 대화에 새어머니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아버지가 출국 게이트 밖으로 사라진 뒤.

우리는 주차장으로 이동해 차에 올라탔다.

“아, 케이트.”

“응?”

“이거 받으세요.”

작은 쇼핑백에 담긴 향수병을 본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이건···”

“전에 다 같이 아웃렛 갔을 때, 기억나세요? 거기서 시향해보고 향이 너무 좋다 하셨잖아요.”

그러고는 가격 택을 확인하더니 이건 내 취향이 아닌 것 같다- 라며 물건을 내려놓긴 했지만.

케이트는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거, 엄청 비쌀 텐데 어떻게-”

“인세 받은 걸로 샀어요. 셰익스피어 앤솔로지 있잖아요.”

그게 3쇄까지 찍었더라, 라는 설명에도 새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목이 메어서 입을 열 엄두가 안 나는 사람처럼.

···그냥 추측이지만, 그간의 고충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젊을 때만 해도 촉망받는 아동서 디자이너로 활발하게 일하던 그녀는, 도서전 출장차 미국에 온 우리 아버지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클로이의 외할머니, 그러니까 케이트의 친정 어머니가 꽤 오랫동안 이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든가.

‘꼭 이렇게까지 결혼을 해야 했니? 아내랑 사별하고 다 큰 애까지 있는 남자랑?’

반대의 가장 큰 원인이 다름 아닌 나였다는 것을-

‘남의 애 데려다 키우는 거 아니다, 케이트.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원망만 듣는 법이야. 그리고 한국인 아이라고? 말도 안 통하는 애와···.’

···나는 꽤 나중에야 알게 된 터였다.

“···.”

새어머니가 두 눈을 깜박이며 눈물을 참는 모습에, 나 또한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졌지만.

“이건 클로이 거.”

모른 척 클로이를 돌아보며 선물상자를 건넸다.

“진짜? 우와아— 엄마! 엄마, 이거 오빠가 줬어!”

“···어머.”

“클로이 션물이래, 히히.”

“고맙구나 유진.”

힘겹게 말한 새어머니의 눈이 살짝 충혈돼 있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정말인지도 모르겠구나, 유진.’

회귀 전, 그녀와 언젠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너무 늦어져서 죄송해요.’

그게 아마, 그간 새어머니에게 쌀쌀맞게 대했던 것에 진심으로 사과했을 때였을 거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이라도··· 네가 내 진심을 알아주어 너무 기쁜걸.’

그래. 이제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그 순간을 앞당겨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제가 늘 고맙죠.”

웃는 낯으로 말하자, 이제야 비로소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

늦은 오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S&F 편집부 사무실.

마크는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미친, 진짜로 신작 원고가 왔잖아.”

[Egon K| 신작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완성본 보냅니다]

원고 제목부터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가운데.

‘생각해 봐, 마크. 얼굴을 괜히 가리겠어?’

해리슨 편집장에게서 들었던 것들이 떠오른다.

‘비숍 작가님이 그러시더군. 얼굴만 봐도 놀랄 거라고.

‘어 그럼 혹시-’

‘그렇지. 즉, 누구나 다 얼굴을 알만한 유명인이라는 거야.’

편집장의 말에 마크는 깜짝 놀란 동시에, 내심 납득하기도 했다.

‘하긴, 진짜 신인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겠지.’

공모전 수상작이 발표된 지 한참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온갖 팬덤 사이트에 <피터 팬> 얘기가 끊이지 않는데 말이다.

“흐, 기대되는걸.”

심장이 두근거린다.

대체 어떤 원고일까, 파일을 클릭해 열어보려는 그 순간.

[에곤_K : 담당자님 신작 원고 보내드렸습니다]

때마침 에곤에게서 온 메시지에, 마크는 ‘안 그래도 읽어보려는 참이었다’라는 답을 보냈다.

그러자.

[아 원고 보시기에 앞서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이번 작품은 YA장르로 출간해보고 싶습니다]

이어진 에곤 K의 메시지에 마크의 눈이 커졌다.

“YA···라고?”

YA란 Young Adult의 줄임말로, 10대 후반~20대 초반을 아우르는 청소년/청년층 소설 장르를 말한다.

‘한때는 사양의 길을 걷는가 싶었지만.’

<헝거게임> <트와일라잇> <메이즈 러너> 등 슈퍼 베스트셀러들의 대대적인 성공 이후, 미국 출판시장을 견인하는 대표적인 인기장르로 자리매김했으니.

‘YA장르의 폭발력은 엄청나지.’

젊은 독자층을 타깃으로 하다 보니, 문장이 쉽고 간결해 책에 익숙지 않은 독자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뿐더러.

SNS상의 영향력이 강한 10~20대가 유행의 중심이 되어, 시간이 지나면 전 세대를 아우르게 되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밀리언셀러로 자리매김하는 식이다.

‘하지만 그만큼 경쟁도 치열하지.’

모 아니면 도.

폭발적인 성공을 이루든가, 아니면···.

마른 입술을 혀로 핥은 마크가 메시지를 보냈다.

[저, 작가님. ‘에곤 K’의 데뷔작으로는 너무 새로운 도전이지 않을까요?]

즉.

이제 막 SF장르로 첫 안타를 친 작가에겐 위험 부담이 크지 않냐는 것.

그러자 곧바로 답신이 왔다.

[글쎄요, 오히려 이제 막 데뷔작을 내려는 신인이니까 가능한 것 아닐까요?]

[도전이야말로 신인의 특권이라 생각하는데, 게다가-]

잠시 ‘···’ 표시가 나더니.

에곤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저는 이 정도에 안주할 마음이 없거든요]

···와우.

작게 감탄성을 낸 마크의 한쪽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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