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1)
그렇게 에곤 K와 이야기를 마친 뒤.
마크가 신이 나 외쳤다.
“여러분, 에곤 작가님 새 원고 입고됐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S&F 편집부 직원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신작원고를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본인의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이, 순전히 독자의 마음으로.
“와, 진짜 이거··· 어떻게 이런 작가가 지금까지 재야에 숨어 있던 거예요?”
“재야는 무슨, 유명 작가가 분명하다니까!”
“채드 창? 아니면 새미신?”
“아니야, 두 사람 다 이런 스타일은 아닌데···.”
편집부 직원들 사이에서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는 가운데.
‘예감이 오는군.’
마찬가지로 원고 일독을 마친 해리슨 편집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편집장님? 어디 가시는-”
“대표실.”
간만에 찾아온 대박의 예감.
해리슨은 전사적 차원의 지원을 요청하러 대표실로 향했다.
*
며칠 만에 학교를 가자, 네드와 아델이 나를 보자마자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캘리포니아는 어땠어?”
“비숍 작가님은? 거장의 면모가 딱 느껴져?”
씩 웃은 나는 비숍 작가님의 작업실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줬고.
“크으, 미쳤다··· 완전 부럽다아.”
“귀여운 할아버지···.”
네드와 아델이 내 사진들을 열심히 보는 가운데, 나는 비숍 작가가 내게 해준 말들을 떠올렸다.
‘피터팬은 꼭 3부작으로 써봤으면 좋겠군. 자네가 아까 내게 그러지 않았던가? 한 편으로 끝내긴 아까운 세계관이라고. 나 역시 피터팬을 읽으며 비슷한 생각을 했거든.’
‘···아.’
‘이건 팬으로서 하는 얘기이기도 하네, 허허.’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비숍 작가에게서 그런 말을 듣다니.
나는 그와 종종 화상통화나 메신저로 소통하기로 한 터였다.
‘SF소설가 협회라고, 거기 작가들이랑은 화상채팅 모임도 곧잘 열거든? 나중에 자네가 원한다면 그 친구들도 소개해주겠네.’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여하튼.
모처럼의 수업을 즐겁게 마치고 돌아간 그날, 나는 약속했던 대로 아델에게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원고를 보내주었고.
두어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나.
-유우우쥐이인—!
아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자, 잔뜩 흥분한 하이톤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이거, 완전, 너어어무 좋아!
“그래?”
-그래, 라니.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되물을 수가 있어?
이번 작품을 아델에게 읽어달라 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컨저링>이 인생영화라는 그녀는, 공포영화 계보를 쭉 꿰고 있는 공포 장르 매니아이기 때문.
-내가 진짜, 웬만큼 무서운 건 눈 하나 깜박하지 않거든? 근데 이건 진짜···. 나, 오늘 잠은 다 잔 것 같아.
“흐흐, 니가 무서워하는 모습이라니 상상이 안 되는데.”
-나도 그렇거든? 근데 이건 진짜, 뭔가 차원이 다른 공포야. 읽는데 그냥 막 숨이 막히는···.
근데도 다음 페이지가 너무 궁금해서 고통스러운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겼다는 것.
-그리고 막 영감이 떠오르는데···.
“영감?”
-응! 방금 새 노래가 떠올라서 적어놨-
“너 노래도 써?”
-···.
순간, 스마트폰 저편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아마 얼굴이 빨개져 있지 않을까, 픽 웃으며 생각하는데.
-그, 그냥··· 심심풀이로 하는 거야.
못 들은 걸로 해달라는 말에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순 없지.”
-뭐?
“방금 떠올랐다는 그 곡, 완성하면 나한테 제일 먼저 들려줘.”
쑥스러워하는 목소리가 한 박자 뒤에 들려왔다.
-···내가 왜 너한테-
“안 그러면 나도 진짜 실망할 거거든.”
언젠가 아델이 내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주자.
-···하.
어쩐지 기분 좋은 듯한 헛웃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녀에게서 그러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말았다.
*
한편 그 시각, 권상준은 밤비행기로 한국에 도착했다.
경기도에 사는 형네 집에 도착하자마자 죽은 듯 잠을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상준아 고생 많았다.”
“그래요, 멀리 비행기 타고 오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야.”
“···잘 먹겠습니다 형님 형수님.”
주말을 맞이해 형과 형수가 직접 차려준 아침밥을 먹는 가운데.
상준은 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한국에 오는 게 참 오랜만이기도 하지만.
‘상준아, 잘 살아 있냐? 어떻게, 애들은 잘 지내고?’
평소 연락도 잘 안 하는 그에게 늘 먼저 전화해 안부를 전하는 건 형의 몫이었으니까.
“흐흐, 간만에 상준이 니 얼굴을 보니까 참 좋구나.”
“그러게, 참 오랜만이네 형.”
“아우, 우리도 언제 한 번 꼭 미국 가야지 가야지 하는데, 이게 참 쉽지가 않아요.”
세 사람은 잠시 서로의 근황을 나눴다.
“뭐 우리 애들이야 여전하지. 성진이는 상병 달았고, 영진이는 고3이고.”
“성진이 휴가 나올 때마다 얼굴이 쪽 빠져 있는데 얼마나 짠한지 몰라요, 휴.”
고생 중이라는 조카의 안부에 상준은 안타까워했고.
“그건 그렇고, 유진이 녀석이 공모전에서 1등상을 탔다며?”
“아, 네. SF 소설 공모전이라는데···.”
저도 모르게 활짝 웃은 상준은 신이 나 아들 자랑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녀석한테 이 정도 글재주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그의 말에 형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 정말요? 전 별로 안 놀라웠는데.”
“네?”
“유진이 말이에요, 어릴 때부터 엄청 상상력이 풍부했잖아요.”
어릴 적, 아이들끼리 같이 놀던 모습을 지켜본 바로.
“저보다 몇 살 많은 형들한테 유진이가 자기가 지은 얘기라며 들려주는데, 저희 애들이 얼마나 재밌어했는지 몰라요.”
“···.”
형수의 말에 상준은 조금 반성하고 말았다.
···그녀도 알고 있던 사실을, 정작 자신이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에.
식사가 끝난 후.
상준과 그의 형은 형제간의 속 깊은 얘기를 나눴다.
“상준이 너, 나나 너희 형수나 늘 걱정하는 거 알지? 몸은 건강하게 잘 지내는지, 외국 생활이 힘들지는 않은지···. 그러니까 너도, 속에 담아만 두지 말고 얘기를 좀 하란 말이야. 그러면 병나요 병나.”
그의 형이 그간 담아온 말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가운데.
상준은 좀 더 자주 연락할걸, 이라고 생각했다.
표현도 더 많이 해야 했는데.
아니다, 이젠 이렇게 후회하지 말고 그냥-
“형.”
“응?”
“···앞으론 좀 더 자주 연락할게. 얘기도 편하게 하고.”
“어, 진짜지? 약속한 거다. 그나저나 니가 웬일로 이런 말을 다 하냐 흐흐.”
번죽 좋게 웃는 형의 반응에, 상준은 확신했다.
나중에 후회하느니 아주 작은 것일지언정 지금 당장하는 게 낫다고.
‘아버지. 그때, 그렇게 말해줘서 참 좋았어요.’
···그걸, 지난 두 달간 유진이와의 관계에서 느끼지 않았던가.
‘그렇게라니?’
‘오픈하우스 행사 끝나고 돌아오던 날.’
힘겹게 꺼낸,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과의 말이-
‘아버지의 진심을··· 엿본 것 같아서.’
‘···.’
아들의 마음에 제대로 가닿았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마흔 중반.
새로운 자신이 되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일지 모르겠지만-
“그건 그렇고 형수님, 아까 해주신 음식들 참 맛있었습니다.”
“어머, 정말요?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네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엔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상준의 입가에도 미소가 깃들었다.
*
다음 날 오전.
<사이언스앤드판타지>를 보유한 장르전문 출판사 SFF프레스의 대표실.
“대표님, 부르셨습니까.”
SFF프레스에서 메인 단행본팀을 지휘하는 중년의 여성 팀장, 빅토리아 첸이 들어왔다.
“잘 왔네. 내 자네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고.”
대표 옆에 해리슨이 앉은 것을 본 빅토리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사이언스앤드판타지>의 떠오르는 스타, 에곤 K 알지?”
에곤 K.
SF판 전체가 그의 이름으로 시끌시끌한데 모를 리가.
빅토리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에곤 K의 신작 장편 원고가 입고됐어.”
“···벌써 신작 장편이요?”
“그래, 나도 놀라긴 했네.”
예전에 써둔 작품이려나.
그녀가 지극히 논리적인 추측을 하는 가운데.
“이 건을 자네가 맡아줬으면 하네.”
이어진 대표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해리슨이 담당하는 월간지 <사이언스앤드판타지>에 연재되는 원고가 어느 정도 모이면 그걸 한 권의 책으로 출간하는 것이 바로 단행본팀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거야 당연히 저희 팀에서-”
“아니, 자네 팀 말고.”
대표가 씩 웃자 얼굴의 주름이 한층 진해졌다.
“자네가 직접, 이 책을 담당해줬으면 좋겠네.”
“···.”
빅토리아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애초, 원고의 담당자를 지정하는 것은 단행본 팀장인 그녀의 역할이었으니까.
“나도 물론 예외적인 지시라는 건 아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전사적으로 밀어볼 계획이거든, 그렇다 보니 자네 이상의 적임자는 생각이 안 나서 말이지.”
“···알겠습니다.”
그래 뭐 그거야 그렇다 쳐도, 히죽거리며 웃는 해리슨의 얼굴이 영 신경에 거슬렸다.
‘에곤 K를 업고 아주 기세등등하네.’
업무 특성상 SFF프레스 내에서 잡지팀과 단행본팀은 물과 기름 같은 사이일 뿐더러, 두 팀의 리더는 개인적으로 그닥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알겠습니다.”
지금껏 여러 신인을 인기 작가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황금의 손’, 빅토리아는 언제나처럼 지시를 받아들였다.
“고마워, 빅토리아. 이번 책에선 자네의 열정을 최대한 쏟아줬으면 좋겠군.”
그 말에 미간을 좁히는 빅토리아 첸.
“열정··· 말씀이십니까?”
“자네, 입사 초기에만 해도 엄청나게 반짝반짝거리지 않았던가. 그때의 열정이 그립단 말이지. ···뭐, 언제나 결과물은 훌륭했지만 말이야.”
매번 비슷한, 잔소리나 다름없는 레퍼토리에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빅토리아는 그 길로 대표실을 나섰다.
전사적인 기대를 받는, 그야말로 메인타이틀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남들은 펄쩍 뛰며 기뻐할 일에도 그녀는 그닥 감흥이 없었다.
‘늘 그렇듯, 형편없는 원고를 그럴싸하게 만들어내라는 지시일 테니까.’
다른 에디터들에 비해 유난히 기준이 높기로 유명한 만큼.
그녀의 손에 들어가면 웬만한 원고는 몰라볼 정도의 퀄리티로 재탄생하곤 했다.
‘그래도 뭐,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은 꽤 괜찮았지만.’
이번엔 장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신인작가가 처음 쓰는 장편소설은 아쉬운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기대치를 어느 정도 내려놔야겠지.”
빅토리아는 사무실로 돌아와 앉자마자 사내 클라우드에 접속했다.
[에곤 K_호수에 무언가가 산다.doc]
원고 파일을 내려받은 뒤, 내용을 살펴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출력 버튼을 눌렀다.
일부 젊은 편집자들은 킨들이나 태블릿에 파일을 담아서 읽기도 했지만, 빅토리아 팀장은 지금도 여전히 프린트 원고를 고집했다.
종이를 넘기며 읽는 맛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잠시 후.
백 장이 넘는 A4 용지더미를 쌓아놓은 채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그러다 어느샌가부터는···.
“···.”
누군가 그녀를 부른 듯했지만, 그것조차 듣지 못한 채로 내내 집중해서 읽었다.
아니, 그뿐이 아니었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이 채광 좋은 사무실이,
한순간에 어두침침한 호숫가에 자리한 낡아빠진 오두막이 되어버렸고.
그 가운데 앉아 있는 누군가, 아니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소름끼치는 감각이—
“——!”
순간.
제 어깨를 짚는 손가락의 감촉에 빅토리아 첸은 화들짝 놀랐다.
“···팀장님? 어, 왜 그렇게 놀라세요.”
하마터면 꼴사납게 소리 지를 뻔했다.
눈이 동그래진 팀원을 돌아보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 별것··· 아니야.”
두 눈을 깜박이며 정신을 차려보니.
이마에 식은땀이 난 것은 물론, 손등의 솜털이 바짝 솟아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넋을 놓고 읽고 있었지.’
바싹 마른 입술을 멍하니 혀로 축이는데, 팀원의 말이 이어졌다.
“저, 이제 저자 미팅 나가려고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어, 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점심 시간도 지난 시각.
식사도 거른 채 원고를 계속 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 잘··· 다녀와.”
“네 다녀오겠습니다!”
그럼에도 빅토리아는 원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몇 장만 더 읽으면 이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력한 호기심, 그다음 내용을 알고 싶다는 지독한 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그래서 그녀는 카페오레를 큰 컵 가득 타 왔고.
그것으로 점심을 대신하며 원고를 읽어나갔다.
그렇게 또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회의실, 비어 있나?”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난 빅토리아가 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네. 비어 있긴 한데-”
“잘됐군. 다들 편집회의 준비해.”
“지금 당장요?”
갑작스러운 말에 팀원들이 당황한 가운데.
빅토리아 팀장의 표정은 아까와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그래. ···간만에 대형사고 한 번 제대로 쳐보자고.”
빅토리아 첸.
SFF프레스에서 가장 유능한 수석 에디터의 눈동자가 보기 드문 열정으로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