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26화 (26/126)

열정(3)

*

빅토리아 첸 팀장이 내 원고를 담당하게 된 시점부터 꼬박 한 달이 지났다.

그 사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일단, 작가님의 원고 1교를 마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 문의드리고 싶은 부분과 확인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종이책 단행본의 교정 단계는 흔히 3단계로 나뉜다.

대부분 PC 화면상으로 진행하는 까닭에 PC교라고도 불리는 1교.

출력된 원고로 진행하는 2교와 3교.

총 3번의 교정을 거쳐 독자의 손에 들어오게 되는 셈이다.

[솔직히 말해, 작가님의 원고가 워낙 훌륭한 덕분에 제 선에서 손을 볼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말대로 1교 단계, 그러니까 전반적인 내용을 수정하는 단계.

작게는 인물의 대사를 수정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사건의 배치 순서를 바꾸는 것까지.

여하튼 큰 틀의 수정이 필요한 부분에 관해서는 그녀의 말대로-

‘전혀, 하나도 손 본 게 없네.’

그러나 우리가 2교라고 말하는 두 번째 교정 단계.

즉 중복되는 표현을 유의어로 대체한다거나, 문장의 구조를 손본다든가.

‘문장에 기름칠을 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단계이지.’

빅토리아 팀장의 손이 닿으니 내가 쓴 원고가 한층 더 반짝반짝 윤이 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과연 미래에 편집자들 사이의 전설로 회자될 만한 인물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정한 부분은 전부 표시해놓았으니, 살펴보시고 수정을 원치 않는 부분이 있으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그런 부분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여하튼, 나와 빅토리아 팀장은 주기적으로 메일을 주고받으며 교정교열의 상세한 내용을 논의했고.

마지막 3교 단계.

즉 오탈자나 미세한 문법적 실수, 혹은 인쇄 실수 등을 바로잡는 단계에 아주 빠르게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 나는 단행본에 실릴 ‘감사의 말’ 페이지(acknowledgment pages)를 따로 작성해야 했다.

‘감사의 말’이란 말 그대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수고해준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페이지.

···이걸 쓰다 보니, 고마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달까.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가족과 두 친구들은 물론이고.’

나의 원고가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해준 사람들.

그것은 바로 저자의 그림자가 되어 이 책의 모든 요소를 완성시켜준 이들이다.

‘담당편집자인 빅토리아 첸 팀장은 말할 것도 없고.’

표지부터 판형, 제목 타이포 등 모든 디자인 요소를 관장하는 북디자이너와 표지 일러스트레이터.

책의 홍보를 담당하는 마케터나 물류 담당자, 인쇄 담당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것.

그 사실을 많은 작가들, 특히 이미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 이들은 쉽게 잊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초심이란 게 결국 그런 게 아닐까?’

···이 책이 나 한 명이 아닌, 모두의 힘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는 것.

나는 그런 마음을 담아 ‘감사의 말’ 페이지를 정성스럽게 작성해 보냈다.

그렇게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본문 작업이 마무리될 즈음-

“다들 잘 지냈지?”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

한국의 친척들이 싸줬다는 온갖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온 아버지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네 덕분에 호강을 하고 왔다.”

간만에 친척들과 친구들을 만나 밀린 이야기를 나눈 것은 물론, 건강검진도 잘 받으셨단다.

해외영주권자를 대상으로 하는 의료관광 패키지였는데, 가격은 제법 있어도 그만큼 서비스가 훌륭했다고.

“결과는 2주 뒤에 보내준다더구나.”

“흐흐 잘하고 오셨네요. 근데 얼굴이 좋아지셨는데요? 살도 좀 붙은 것 같고.”

내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

“너무 대접을 잘 받아서 그런가, 몸무게가 좀 늘었어.”

워낙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인데 얼굴에 보기 좋게 살이 오르신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여기선 입에 맞는 음식을 편히 먹기 어려우니까.’

아버지의 말을 가만히 듣던 새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현희 씨에게도 인사 잘하고 왔어?”

자연스레 나온 우리 어머니의 이름에 아버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부분까지 다 이해해주는 배우자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겠지.

어른이 된 후 돌이켜보니, 우리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결혼해준 새어머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달까.

그리고-

“아빠아아아—!”

“우리 클로이, 이리 와라.”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의 품에 폭 안기는 클로이.

“하하, 그새 한 뼘은 더 자란 것 같은데?”

“웅! 나 밥 마니 먹었쪄!”

어린 동생 앞에서는 표정이 속수무책으로 풀어지는 아버지의 모습에, 나까지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 그리고 이건.”

아버지가 여행용 트렁크에서 잔뜩 꺼낸 것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산 건강식품들이었다.

“이번에 큰아버지네에서 나온 신제품이라던데, 꽤 잘 나가나 보더라.”

한국에서 건강보조식품 사업을 하시는 큰아버지가 준 선물들 중 하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인삼환 건강보조식품]

노인들에게 특히나 좋다는 홍보문구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아버지.”

“응?”

“이거, 제가 하나 가져도 될까요?”

“아 그럼, 물론이지.”

···문득 떠오르는 사람에게, 보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며칠 뒤 어느 오후.

“음.”

“어어···.”

나와 네드는 방금 전, 매우 신선하기 그지없는 노래를 듣고서 잠시 말문이 막힌 터였다.

“···어때? 괜찮아?”

긴장했는지 발개진 얼굴로 나와 네드를 돌아보는 아델.

그렇다.

방금 우리는 아델이 직접 작곡 작사했다는 노래를 들은 참이었는데.

“어, 이거··· 뭐라고 해야 하지.”

“아 뭔데 뭔데, 빨리 얘기해 봐!”

“일단, 좋아. 엄청 좋아.”

“나도 동감.”

네드의 말에 빠르게 맞장구쳤다.

“아델 니 음색이랑 되게 잘 어울려. 약간, 노라 존스 느낌?”

“어어. 노래 자체도··· 되게 분위기 있달까?”

재즈팝 느낌의, 마이너한 곡조가 인상적인 곡.

거기에 살짝 허스키하면서도 매혹적인 아델의 목소리가 더해지자 환상적이면서도 기묘한 분위기가 살아난다.

‘이걸··· 아델이 직접 썼다고?’

그 자체로도 매우 놀라웠지만, 그보다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었다.

“근데 말야.”

“으응.”

“이거,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를 읽고서 영감이 떠올라서 썼다고 하지 않았나?”

“어 맞아 맞아!! 다 유진 니 덕분임, 히히.”

아니 신나하니까 보기 좋긴 한데···.

대체 어느 부분에서 이런 영감을 받은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델이 쓴 노래는-

“근데 이거··· 사랑 노래, 인 거지?”

일단 제목부터가 이니 말이다.

대체 누가 누구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거냐, 라고 묻자 아델이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모르겠어?”

“뭐가.”

“그러니까, 그 호수 괴물.”

“···뭐?”

멍하니 되묻자, 아델은 본인이 더 황당하다는 듯 두 눈을 껌벅인다.

“어? 니가 의도해서 쓴 거 아니었어? 난 약간··· 일라이저가 그 괴물에 대해서 일종의 애증? 같은 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음.”

나 역시 그런 양가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던 건 맞지만.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안 그래? 증오와 사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위험한 감정.”

“···.”

“흐으, 괴물과 사람 사이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니.”

절대, 단 한 번도, 맹세코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는데···.

“야, 이번에 공포소설이라고 하지 않았어?”

고개를 갸웃하며 끼어든 네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호러 맞는데.”

“근데 사랑 노래는 무슨-”

“아 진짜라니까! 네드 니가 읽어보면 알아!”

아델의 외침에 네드가 으, 소리를 냈다.

“아 안 그래도 읽어보긴 해야 하는데··· 아 나 넘 무서운데. 아니다, 그래도.”

밤에 불을 켜고 자는 한이 있어도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를 읽고 말겠다는 네드의 말에, 픽 웃고 말았다.

“그건 그렇고. 이 노래, 어떻게 할 거야?”

“어? 어떻게··· 하다니?”

나는 아델을 설득했다.

는 누가 들어도 꽤 괜찮은 노래이고, 이렇게 우리끼리 듣고 말아버리기엔 너무 아쉬우니-

“사운드 클라우드 알지?”

“당연히 알지.”

아델은 많이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올렸다가, 아무도 안 들으면?”

“그래도 조회수 3은 되겠지. 나랑 네드, 너까지 해서-”

“야아.”

그녀의 마음이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회귀 전,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신은 이렇게 말씀하셨지. 일단 질러라, 그러면 길이 열릴 것이다.’

망설이던 나에게 네드가 준 교훈.

···그것 덕분에 나는 <잊혀진 성자들>을 세상에 내 보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유진, 밑져야 본전이잖아?’

고등학생 때부터 열심히 만화를 그리며 여기저기 투고한 것은 물론.

대학 가서는 본격적으로 동인 활동을 하며 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네드.

수없이 부딪히며 깨지길 거듭하다가, 결국 촉망 받는 그래픽노블 작가 중 한 명으로 우뚝 선 친구는 내게 그런 조언을 해줬다.

‘처음엔 부족한 게 당연한 거 아냐? 근데 거기서 일단 해보느냐, 하지 않느냐.’

···바로 여기서 모든 게 갈리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하긴 뭐, 딱히 잃을 것도 없으니까.”

아델은 잠시 머뭇거렸을 뿐, 금세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 번엔 네드 니 차례다.”

“···음? 나?”

곧 다가올 학생 코믹스콘테스트.

거기에 제출할 원고를 준비 중이라는 네드에게 말하자, 녀석은 씩 웃었다.

“흐흐 그래, 완성되면 제일 먼저 니들한테 보여줘야지.”

그리고 잠시 후.

아델의 사운드클라우드 이름을 뭘로 짓느냐로 열을 올리던 와중.

띠링-

빅토리아 팀장의 메일이 왔다는 알림이 떴다.

[에곤 K 작가님,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표지 시안을 보내드리니 의견 부탁드리겠습니다.]

메일에 첨부된 표지시안 파일을 연 순간-

“···!”

나는 눈이 튀어나올 듯 놀라고 말았다.

“뭔데, 왜 그러는데.”

내 반응을 본 네드가 내 스마트폰에 눈을 가져갔다가.

“Holy shit! 이거 이거··· 에밀 프랭클 그림 아니야?”

에밀 프랭클.

거침없고 강렬한 선이 트레이드마크인, 코믹스계의 대부라 불리는 거장.

그의 일러스트가 내 데뷔작의 시안으로 와 있었다.

*

그로부터 한 주 뒤인 11월 마지막 주, 대형서점 반스앤노블의 캘리포니아 지점.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출간까지 앞으로 4일.’

최선을 다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면 좋을 텐데.

빅토리아가 갓 완성된 책의 표지를 만지작거리며 상념에 잠겨 있던 그때.

“오래 기다리셨죠!”

황급히 미팅룸 문을 열고 들어온 서점 MD가 SFF프레스의 팀장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이야, 진짜 오랜만에 뵙네요.”

“오랜만입니다.”

“아니, 솔직히 첸 팀장님이 직접 미팅에 오실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요.”

···이 사람이 여기 나올 짬이 아닌데 웬일로 직접 왔지.

얼굴에 그렇게 써붙인 듯한 MD의 반응에 빅토리아 첸은 헛웃음이 나왔다.

“제가 담당하는 책인데 직접 오는 게 당연하잖습니까.”

“어··· 팀장님이 직접 담당하신다고요?”

어제는 아마존 MD와도 미팅했었다, 하니 눈이 커지는 반스앤노블 담당자.

“뭐, 그쪽이야 이미 어떤 책을 메인에 노출시킬지 내정해놨겠지만.”

미국 도서시장의 ‘공룡’이라 불리는 독과점 기업 아마존.

아마존 MD의 결정 하나에 책 출간의 향방이 좌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 번 어필이라도 해보고 싶어서.”

“···하아 이거, 팀장님이 이렇게 얘기하시는 거 첨 보는데요?”

빅토리아 첸.

출판업계의 네임드가 손수 책 홍보에 나섰다는 사실에 반스앤노블 MD의 호기심이 한층 커지는 가운데, 빅토리아가 말을 이었다.

“우리 회사가 지금 이 책에 사활을 걸고 있기도 하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그냥, 한 명의 순수한 독자로서 홍보하고 싶은 마음?”

“순수한··· 독자요?”

“그래요.”

언뜻 냉랭해 보이는 중년여성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요. 너무 재밌는 책을 만나면, 아,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꼭 이 재미를 느껴봤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주변에 영업하게 되는 거.”

“···.”

베테랑 편집자의 솔직한 말에 서점MD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퇴근을 10분 앞둔 시점.

반스앤노블 MD는 SFF프레스를 비롯, 수많은 업체와 미팅을 진행한 탓에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책을 바라보았다.

책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홍보용으로 받는 책들에는 여간해서는 손이 잘 안 가는 편인데.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이건 너무 궁금하단 말이지.’

일단 SF장르판의 떠오르는 신성이라는 에곤 K의 데뷔작이 아닌가.

그것부터가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빅토리아 첸의 책임편집에, 에밀 프랭클의 표지화라니.’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반스앤노블 MD의 눈이 하드커버 표지 아래에 적힌 홍보문구로 향했다.

[근원적인 의문에서 찾아오는 거대한 공포.

이 작품은 당신을 완벽하게 ‘압도할’ 것이다 - 랜든 비숍, 우리 시대의 SF문학 거장]

이 업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랜든 비숍···.”

랜든 비숍이 단순히 출판사와의 관계 때문에 서문을 써주는 작가가 아니라는 걸.

‘비숍의 추천사를 받는 게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편집자들 사이의 농담이 있을 정도인데.’

대체 에곤 K, 이 신인작가의 무엇이 이 거장의 마음을 그토록 사로잡았을까.

···그 같은 의문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

“어디.”

서점 MD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를 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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