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작가?(1)
*
다음 날 아침, 라이터스홈 본부.
타다다닥, 탁. 달칵달칵.
케빈 클레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밀려있던 업무를 빠르게 쳐냈다.
출판 에이전트들의 업무는 보통 다음의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잔뜩 밀려 있는 투고원고를 살펴보고 그에 답장을 보내고.
둘째, 담당작가의 원고 집필을 체크해 피드백을 주거나, 이미 -출판사나 영화제작사나 그 외 판권구매자와- 협상 중인 작품이 있다면 진행상황을 체크하거나.
셋째, 각종 출판사와 에이전시와의 미팅, 그 외 컨퍼런스 등에 참석하며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것.
그리고 여기 이 케빈은-
“다 했습니다.”
이 중 첫 번째 임무인 투고원고의 절반 이상을 혼자서 처리해내는 능력자였다.
“여기, 따로 폴더에 옮겨놓은 원고들만 살펴보심 될 것 같아요.”
원고를 엄청난 속도로 읽으면서도, 가능성 있는 작품을 놓치지 않는 안목 덕분에-
“···벌써? 훌륭한걸.”
“역시 믿음직스럽단 말이지이~”
노련한 에이전트들로 가득한 이 라이터스홈에서 선배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상황.
‘후우, 이제야 좀 짬이 나겠네.’
그렇게 급한 불부터 끈 그는 스크랩해둔 에곤 K의 <가디언>지 인터뷰를 다시 읽어보았다.
[에곤 K와의 대화 : ‘내 안의 괴물과 마주하여 살아남는 법’]
[···무력감을 잘 극복하고 내 안에서 엿본 희망에 관해···]
[···‘내면의 괴물’인지, 아니면 실재하는 괴물인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 여러분의 몫···]
‘작품도 작품이지만, 인터뷰 문구 하나 하나까지 마음에 든다니까.’
최근 그는 하루 하루가 즐거웠다.
그건 아마도 에곤 K와 유진이라는 두 명의 신인작가 덕분이 아닐까.
‘이렇게 가슴을 뛰게 하는 신인이 비슷한 시기에 두 명이나 나타나다니!’
출판 에이전트에게 그런 작가의 존재는 마치-
‘···아이돌 덕후에게 영감을 주는 신인 아이돌 같은 존재이려나?’
한때 잠깐 케이팝 아이돌의 세계에 빠지기도 했던 케빈이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
“네, 라이터스홈의 케빈 클레그입니다. ···네?”
S&F 편집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케빈은 저도 모르게 새된 소리를 냈다.
“제가, 아니지, 그니까··· 에곤 K 작가님이··· 저와 계약하시겠다고 했다고요?”
‘에곤 K’라는 이름에 순간 사무실 안에 정적이 찾아온 가운데.
“네, 맞습니다. 전에 제시드린 그 조건대로··· 아, 네. 그럼 전달해주신 연락처로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짧은 통화를 마친 뒤.
케빈 클레그는 사무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우와아아아아——!!!”
흉포한 곰처럼, 그러나 기쁘게 아우성치는 그의 모습에-
‘진짜 잘됐네 흐흐.’
‘조금 무섭지만 보기 좋은걸.’
‘케빈이 고생하더니 좋은 소식이 있어 다행이야.’
내심 그에게 이래저래 고마워하던 라이터스홈 직원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그리고 그 시각, SFF프레스.
“···히야 케빈 저 인간, 완전 신이 났네.”
전화 끊을 때 환호성이 들리더라- 라며 통화를 마친 마크가 덧붙이자.
옆자리의 동료가 낄낄 웃었다.
“당연한 거 아냐? 호박이 넝굴째 굴러들어 왔는데.”
“근데 라이터스홈의 케빈 클레그면, 젊은데 꽤 유능한 친구 아닌가?”
연차가 꽤 되는 편집자의 말을 누군가가 받았다.
“어, 실력도 그렇지만 인간적인 스타일이야. 사람이 괜찮더라고.”
“그래도 마크, 내심 에곤 K 작가님이 그 친구를 선택해서 안심한 거 아니었어?”
선배 하나의 말에 마크가 고개를 끄덕이는 마크.
“뭐, 이 업계에 승냥이 같은 놈들이 좀 많아야죠. 케빈이 경력이 많지는 않은데, 믿을 만한 친구라는 건 확실해서.”
이쪽에서도 다들 에곤 K의 결정을 기꺼워하는 분위기이던 그때-
“마크, 지금 회의실로.”
···마크는 빅토리아 첸 팀장이 소집하는 회의에 불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교정 일정 말인데.”
<피터 팬>의 장편 출간과 잡지 게재를 동시에 진행하기로 한 만큼, 최근 들어 두 팀이 같이 모이는 기회가 부쩍 늘어난 상황.
“현재 2부 교정 진행 중이라고 했나?”
“네, 2교 중입니다. 마무리하는 대로 에곤 작가님께 저자교를 부탁드리려고요.”
“우리 단행본팀은 단행본용 원고 1교를 마쳤고, 표지 디자이너와 시안 논의하는 중.”
“오, 빠른데요.”
마크의 감탄에 빅토리아가 어깨만 으쓱하던 그때.
“아 근데 마크, <호수 괴물> 말야. 영화화 문의 들어왔다고 했지? 혹시, 작가님이 뭐라 얘기하신 거 있나?”
훅 들어온 해리슨 편집장의 말에 마크는 에곤 K의 메시지 내용을 떠올렸다.
[구체적인 사항은 라이터스홈의 케빈 클레그 에이전트와 논의할 예정이긴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 네 번째의 ‘막성스 라미’ 감독님 제안이 가장 끌리는군요.]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전달하자-
“뭐? 막성스 라미? 그게 누군데.”
“그··· 촉망 받는 독립영화 감독이라던데요.”
“뭐어어? 잠깐 잠깐, 옵션 금액을 얼마나 제시했는데? 그 감독님이 무슨 석유 재벌가 자제라도 되나?”
‘옵션’이라는 건 소설 원작자와 영화 제작사 사이에 이뤄지는 계약의 일종이다.
즉, 일정 기간 동안 소설의 영상화 판권을 독점 확보하는 계약인 셈.
‘중요한 것은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지.’
제작사는 이 기간 안에 영화화 작업을 진행해야 하며, -일반적으로 18개월에 해당하는- 기간이 지나면 추가로 수수료를 지불한다.
그리고 여기서, 제작사가 원작자에게 지불하는 비용을 바로 ‘옵션 비용’이라고 하는데.
“말도 안 돼—! 지금 이 금액을 두고, 거기에 자비에 산도발 감독을 놔두고, 독립영화 감독을 선택했다고?”
네 군데에서 각각 제시한 옵션 금액을 보여주자 해리슨은 경악했다.
“아니 아직 결정하신 건 아니니까···.”
“이유는 물어봤어?”
“안 그래도 여쭤봤는데, 그 감독분의 느낌이··· 좋다고.”
“응? 뭐가 좋아?”
잔뜩 흥분한 해리슨과 달리 빅토리아 첸은 상대적으로 차분했다.
‘에곤 K 작가님이라면, 머릿속에 어느 정도 그려놓은 그림이 있으시겠지.’
옵션 금액 차이가 상당한데도 헐리우드 중견 감독 대신 신예 독립영화 감독을 택했다면.
‘아마도 원작자로서, 이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영화화는 블록버스터보다는 작가주의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게 어울릴 거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호수 괴물을 잘못 연출하면 엄청나게 촌스러운, B급 영화가 되기 십상이니 말이다.
물론 자비에 산도발은 실력 있는 감독임이 분명하지만 -흉포한 거대 문어, 그리즐리베어, 피라니아 떼 같은- 괴물이 등장하는 재난물 전문가.
그러니 이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판권을 사려는 건 아마도-
‘또 하나의 블록버스터 재난물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러니까 제목과 컨셉만 따오고 내용은 180도 다른 작품 말이다.
실제로, 소설을 각색한 영화 중엔 그런 경우가 꽤 많다.
각색의 자유 또한 어느 정도 보장해야 좋은 작품이 탄생하는 건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원작과 아예 다른 작품이 나와버리는 건 원작의 IP에 절대로 도움이 되지 않지.’
게다가 사실, 이 소설에서 진짜로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호수 괴물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주인공 일라이저의 내면에 자리한 어둠.
‘내 안의 어둠, 괴물, 흉포한 본성, 무엇으로 부르건 간에···.’
자신의 정체성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그리하여 완벽하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야말로-
“···에곤 작가님이 의도한, 진정한 공포이니까.”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직도 영화화 관련 자료를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는 해리슨을 보며 빅토리아가 혀를 찼다.
“해리슨, 쓸데 없는 걱정 하지 말고 회의 내용에나 집중해.”
“아니 그래도, 혹시나 작가님이 잘못된 선택을 하실까 봐-”
“작가님은 너보다 훨씬 잘하실 테니 본인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너무해···.”
냉랭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말에 해리슨이 히잉, 소리를 냈다.
*
<피터 팬> 2부와 3부의 잡지 게재, 그리고 단행본 출간 준비가 잘되고 있다는 마크의 연락이 이어지는 가운데.
“으아아아, 엄청나다아···.”
“맛있겠다 히히.”
지금 나는 두 친구들과 함께 어느 고급 레스토랑에 와 있다.
에곤 K의 인세가 들어온 것을 기념한 플렉스의 일종이랄까.
‘지난 주말엔 부모님과 클로이와 함께 좋은 곳에서 외식했고.’
오늘은 이 지역에서 가장 전통 있는 스테이크하우스라는 곳에 네드와 아델을 데리고 온 참이다.
“잘 먹겠습니다!”
“흐흐, 능력자 친구를 둔 덕분에 이런 호강도 하는구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스테이크를 신이 나 먹는 두 녀석.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른 기분에 흐뭇하게 웃는데, 아델이 한마디했다.
“근데 유진, 우리가 뭘 했다고 이런 비싼 걸 사주고 그래.”
“그래, 유진. 근데 아델 말은, 맛있는 거 사줘서 좋다는 말이야, 알지?”
“푸흐, 그래. 맛있게 먹어라.”
너무 비싼 곳에 왔다는 생각에 부담스러워하면서도 행복해하는 친구들.
‘이건 말하자면.’
···회귀 전, 내 곁을 마지막까지 변함없이 지켜준 친구들에 대한 감사라고 할까.
물론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스테이크를 썰며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건 그렇고, 요즘 클로이 못 본 지도 오래 됐네.”
“그새 많이 컸을 텐데, 유진, 클로이 사진 좀.”
“자.”
통통한 뺨에 양갈래 머리,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클로이가 그네를 타는 사진을 보여주자.
“으아 넘 귀여워···.”
“완전 천사구나 천사···.”
두 친구가 앓는 소리를 냈다.
“클로이가 너한테 밤마다 이야기 들려달라고 조른다며?”
“아, 어.”
요즘 클로이는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는데.
‘오빠아, 나 자기 전에 재밌는 얘기 해죠오~~’
내가 소설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밤마다 나를 조르는 것.
그래서 나는-
‘클로이 너, <토끼 남작의 모험>이라고 알아?’
···동생이 애지중지하는 토끼 인형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매일 하루에 한 편씩, 새로운 모험을 가지고서.
‘으아아 너무 재밌쪄~~’
‘오늘은 그만. 이제 자야지.’
‘히잉 더 듣고 싶은데···. 내일 또 들려줘 오빠아!’
그 얘기를 전해주자, 네드와 아델의 얼굴이 흐물흐물해졌다.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는 클로이라니···.”
“흐으 상상만 해도 귀엽다아~~”
그리고 언제였더라.
서재에 들어갔다가, 아버지가 파일 한가득 에곤 K의 기사를 스크랩해놓은 것을 발견했는데.
‘어? 아버지 이건-’
‘그,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쑥스러워하던지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뭐, 여러모로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긴 하네.”
“그래서 그래서, 이제 작가님 본인을 위한 플렉스는 좀 하시나요?”
눈을 반짝이는 아델의 질문에 씩 웃으며 대답했다.
“차 사려고.”
“오오오오오— 진짜아아?”
“크으, 죽인다···.”
“근데 너 면허 있었나? 아 작년에 땄다고 했지.”
면허는 작년에 이미 따뒀지만, 가끔 부모님 차를 끌고 나갈 때 빼고는 쓸 일이 없었으며.
그마저도 언제 한 번 접촉사고가 날 뻔한 후로는 거의 운전을 안 했는데.
‘지금은 좀 다르거든.’
몸에 감각이 배어 있다고 해야 할까.
눈 감고도 운전할 자신이 있었다.
“으아 완전 멋지다. 본인 돈으로 플렉스···.”
“그래서, 무슨 차 살 건데?”
어쩐지 나보다 더 두 눈을 반짝이는 친구 놈들.
기대감 가득한 네드와 아델의 얼굴을 보다가 말했다.
“그냥, 중고 SUV?”
“응? 중고로?”
“어, 감가상각을 최대한 고려해서.”
“···.”
한순간 조용해진다 싶더니.
어째 김이 팍 식은 얼굴로 말하는 녀석들.
“야, 플렉스하려던 거 아니었어?”
“그래, 첫 인세인데 팍팍 써야 하는 거 아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투자도 하고 저축도 해야지.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잖아? 한순간에 훅 갈 수도 있다고.”
좀 더 나이 들면 괜찮은 보험도 가입해야 하고, 나중에 병원비 들어갈 거나 집 살 거 다 고려해야 한다- 라고 하자.
“아재요···.”
“니 맘대로 해라.”
그 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그때.
[안녕하세요, 라이터스홈의 케빈 클레그라고 합니다. 에곤 K 작가님께···.]
···드디어 왔네, 기다리던 연락이.
*
그 시각, 라이터스홈 본사.
‘메일을 보냈으니까··· 기다려야 하나?’
케빈 클레그는 신주단지처럼 모셔놓은 에곤 K의 이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낸 참이었다.
“아니지 아니지.”
그러다 한시라도 빨리 연락이 됐으면 좋겠단 마음에 메신저로 바로 연락했더니-
[에곤_K : 저도 반갑습니다 미스터 케빈.]
“으어어어!”
···의외로, 곧바로 답장이 오는 것이 아닌가.
[에곤_K : 정식 계약을 맺기 전이긴 하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라이터스홈_케빈 : 네 에곤 작가님. 이렇게 저희 라이터스홈, 그 가운데서도 저 케빈 클레그를 선택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거기까지 써서 보내놓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어서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작가님께서 얼굴과 신상을 철저하게 공개하지 않으신다는 걸 잘 알지만···]
사실, 비대면으로도 계약 자체는 문제될 게 없다.
최근에는 에이전트 계약 역시 전자계약으로 진행하기에 굳이 얼굴을 봐야 할 필요는 없지만.
[에이전트와 작가와의 관계에서는···]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라가며 메시지를 쓰던 그때.
에곤 K의 프로필 옆에서 ‘···’이 뜨더니 이내 그의 말이 이어졌다.
[에곤_K : 안 그래도 저도 그 얘기를 드리려고 했는데]
[에곤_K : 제 신상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게 원칙입니다만, 에이전트와의 관계에선 예외로 할 생각입니다. 다만-]
에곤 K는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자신의 담당자 ‘케빈 클레그’ 외에는 라이터스홈의 그 어떤 누구도 자신의 인적 정보를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
[에곤_K : 비밀을 엄수하는 조건으로 계약 진행이 가능하다면-]
케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라이터스홈_케빈 : 물론입니다 작가님. 이미 그런 식의 계약을 하는 작가님들이 꽤 계시기도 하고··· 아예 비밀유지서약서까지 준비해가겠습니다.]
에이전트마다 담당 작가와 별도로 계약을 맺는 형태인 만큼, 철저한 비밀 엄수가 가능하다고 설명을 덧붙이자.
만족스러워하는 기색의 에곤 K.
[에곤_K : 좋습니다 그럼···]
두 사람은 다음 주 아이오와시티 시내에서 보기로 하고서 대화를 마쳤다.
‘드디어!’
···베일에 싸인 작가, 에곤 K를 만날 수 있다니.
케빈은 들뜬 마음에 제대로 잠을 못 이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