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36화 (36/126)

두 명의 작가?(2)

이처럼 에곤 K와 케빈 클레그 사이에 첫 대화가 이루어진 지 며칠 뒤.

“···빅토리아 첸 팀장이요?”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단행본을 담당하는 책임편집자의 이름은 조금 엉뚱한 곳에서 나온 참이었다.

“첸 팀장이라면 SFF프레스의, 에곤 K 책임편집자?”

“네 맞습니다. 이미 한참 전에 의뢰를 받아서 진행하는 중이라.”

지금 이곳은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작은 아틀리에.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온 사방이 책으로 가득하다는 것일까.

[북디자이너| 아마라 아체베]

벽에 붙은 명함 아래, 그녀가 직접 디자인한 전설적인 책 표지들이 액자 안에 전시돼 있었다.

유명한 재즈 앨범 디자이너였던 그녀는 2000년대 들어 북디자인으로 전향했고.

오늘날에는 코맥 맥카시, 조너선 프랜즌, 마거릿 애트우드 등 대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게다가, 아마라 아체베는 아무 책이나 디자인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지.’

보수를 얼마나 주느냐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원고를 직접 읽어보고 마음에 들 경우에만 표지를 디자인하는 것이 그녀의 철칙이었기 때문이다.

“에이 선생님, 그래도 일정을 조금 조정하는 건 가능하시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커스 스톤’입니다.

···오늘날 미국 문학계의 떠오르는 신성, 마커스 스톤의 에이전트가 기를 쓰고 그녀의 표지를 받아내려는 것도 바로 그 때문.

‘그 까다로운 아마라 아체베가 선택한 책이라는 프리미엄!’

중년의 에이전트는 기름진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간사하게 말했다.

“재작년에 헤밍웨이 문학상이랑, 가디언퍼스트상 받은 친구요. 아, 곧 있으면 <미첼 리베라 나이트쇼>에도 출연할 예정인데-”

“미안합니다 미스터 캠벨.”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그의 말을 중간에 자르는 아마라 아체베.

“제가 마커스 스톤 작가님의 신작원고를 읽어보지 않아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와 <사이언스앤드판타지> 지난호들로 향했다.

“저는 이미, 에곤 K 작가님의 표지를 디자인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

마커스 스톤의 에이전트, 미스터 캠벨은 입술을 깨물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약 한 시간 후, 오클랜드에 자리한 랜든 비숍의 작업실.

“어어, 잘 지내나 아마라.”

노작가는 긴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 북디자이너 아마라 아체베와 통화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아마라가 비숍의 단편집 표지를 작업한 것이 인연이 되어 가까워진 사이.

“허허, 요즘도 그렇게 바쁜가? 하긴 뭐, 우리 아마라 선생의 디자인이 좀 인기가 많아야 말이지.”

자신의 단편집 또한 그녀의 디자인 덕분에 꽤 화제가 되었던 것을 기억하며 말하자.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마커스 스톤의 에이전트라는 사람이 찾아왔었어요.

“마커스 스톤? 아, 누군지 알 것 같군.”

이라크전 참전용사 출신 작가라고 했던가.

헤밍웨이 문학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친구도 신작이 나오나 보지.

-이미 일정이 있다고 하는데도 얼마나 끈질기게 굴던지 참. 거기가··· 샌포드 에이전시랬나?

-아아, 샌포드라면 유명하지.

작가 수명에는 신경 쓰지 않는, 양아치 같은 회사인데 말이다.

‘그 재능 있는 작가가 어쩌다 그런 회사에 걸렸을까.’

쯧쯧, 비숍이 혀를 차는데 상대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에곤 K의 책을 작업하게 됐거든요. 선생님이 추천사 써주신 작가 맞죠? 작품이 너무 좋던데요. 지금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도 읽고 있는데···.

“뭐라고? 에곤 K?”

이렇게 반가울 데가 있나.

비죽 웃은 비숍의 시선이 유진과 주고받은 메시지로 향했다.

[에곤_K : 작가님 어제 산책 하셨나요]

유진은 못해도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은 꼭 연락해 안부를 묻는 건 물론.

자신이 제대로 운동은 했는지 안 했는지, 음식은 건강하게 먹고 있는지를 체크했다.

[랜든_비숍: 유진 군, 내가 블로그에 홍보도 해줬는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나]

[에곤_K : 홍보해주신 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작가님]

[에곤_K :사실 그 글 보고 감동해서 좀 울었어요 그런데]

[에곤_K :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이런 식으로 농담도 주고받고 말이다.

메시지를 다시 읽던 비숍이 크크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참, 이 늙은이 입장에선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없지.’

새하얀 수염 너머로 미소가 지어졌다.

*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2부의 공개 일정이 다가옴에 따라 SFF프레스 직원들은 바빠졌지만.

‘에이전트 케빈 클레그와도 곧 보기로 약속을 잡았고.’

이런 저런 급한 일들을 마무리한 나는 약간의 여유가 생긴 터였다.

덕분에 그동안 손놓고 있었던 작업에 다시금 착수했는데, 머릿속의 소재들을 노트북에 옮겨놓는 것은 물론이고-

‘이 작업은 전체의 70퍼센트 정도 마무리한 상황.’

<잊혀진 성자들> 또한 절반가량 써놓기에 이르렀다.

중세 판타지에 스팀펑크적 요소를 살짝 가미한 방대한 세계관 역시 따로 정리해두는 중.

그 내용이 점점 충실해지는 것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노트북 폴더 안을 뒤적거리며 히죽이던 그때.

지잉- 진동과 함께 에이든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왓츠업 브로? 새 영상 올라왔으니까 놓치지 말라고!! https://www.youtube.com/watch?v=-ofvG3Tt]

···그것은 바로, 에이든의 집에서 열린 파티 영상.

[요에이든| 고딩들의 미친 홈파티!!!!]

약 15분 정도 분량의 영상을 제일 먼저 장식한 것은-

[얘는 네드, 코믹스천재입니다. 그림 엄청 잘 그려요!]

[어 안녕하세요 네드입니다아··· 저어는··· 조금··· 속이, 안 좋아요 우욱···]

카페인 때문에 발개진 얼굴 위로 뿔테 안경을 쓴, 깡마른 체구의 네드와.

[아 진짜 뭐해~~ 네드 이리 와. 찍지 마 에이든!]

늘 그렇듯 후드티와 청바지 차림, 빨간색 단발머리를 대충 귀 뒤로 넘긴 아델.

[이쪽은 아델인데 성격이 쫌-]

[아 찍지 말라니까!]

그 둘이 한 차례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후.

[샬롯, 인사 좀 해줄래?]

[···.]

[음, 샬롯은 부끄러움이 많아서. 아 제이든! 미아!]

[안녕하세요 문예창작클럽의 제이든!]

[저는 미아!입니다]

카메라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샬롯과, 그런 그녀를 잘 챙기면서 다니는 제이든과 미아도 나왔다.

“은근 다들 화면빨이 괜찮은걸.”

미소 띤 얼굴로 영상을 보던 그때.

지잉- 폰이 또다시 진동하더니 비숍 작가님의 메시지가 왔다.

[랜든_비숍: 유진 군, <어둠 속의 방문자> 신작 단편 초고를 완성했네.]

“···!”

[랜든_비숍: 시간 날 때 한 번 읽어봐줄 수 있겠나]

“으어어어어어.”

비숍 작가님의··· 신작 초안이라고?

너무 기쁜 소식에 한순간 두뇌가 멈추는 기분이었지만.

‘어디, 바로 읽어볼까.’

먹이를 마주한 독수리처럼,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원고를 읽기 시작했고.

“···.”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비숍 작가님!”

곧바로 나의 우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한편 그 시각, 유진의 아버지 권상준이 일하는 KMA 에이전시 사무실.

직원이 다섯 명에 불과한 작은 회사이다 보니 상준은 혼자서 꽤 많은 일을 해야 했다.

검토할 번역원고가 책상 위에 높이 쌓여 있었고.

미국 출장을 온 한국 출판사 담당자와의 미팅이 잡혀 있는 와중에도.

‘에곤 K로서··· 에이전트 계약을 맺기로 했다고?’

권상준은 아들의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얼마 전, 유진에게서 에곤 K의 에이전트를 결정했다는 얘기를 들은 터.

‘네, 라이터스홈이라고 아버지도 아실 거예요.’

라이터스홈이라면 미국 내에서 Top 10에 드는 곳이 아닌가.

그런 곳이라면 허튼 짓은 하지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계약서는 곧바로 쓰지 말고, 사본을 받아서-’

‘이미 받아놨죠. 계약 자체는 전자계약으로 하려고요.’

안 그래도 아버지에게 검토해달라 하려고 했다, 라는 유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 그리고, 에이전트랑 곧 만나보기로 했어요.’

‘만난다고? 얼굴 보고 직접 만난단 얘기냐?’

‘네, 걱정마세요 아버지.’

‘···그래, 네가 어련히 다 알아서 잘하겠지.’

유진이 앞에서는 짐짓 쿨한 척을 했지만.

내심 걱정하던 끝에, 주변에 ‘케빈 클레그’라는 인물을 수소문까지 해보았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다들 괜찮은 에이전트라고 하는 걸 보니 안심이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아직 고등학생인데 내가 동행해야 하는 것 아닐까.

상준의 머릿속에서 아들 걱정이 떠나지 않던 그때.

“대표님, 한국 출판사 분들 오셨습니다.”

부하 직원이 들어와 미팅 참석자들의 도착을 알렸다.

···그리고 잠시 후.

“어··· 이미, 알고 계시다고요?”

방금 전, 권상준은 에곤 K의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를 은근슬쩍 홍보하려던 참이었는데.

“어우 그럼요. 요즘 출판사들이 이 에곤 K 얘기로 아주 시끄럽다니까요.”

그와 꾸준히 거래해온 한국 출판사 담당자의 대답에 당황하고 말았다.

“처음에 왜, <피터 팬>이었나, 무슨 SF상인가 탔다고 했죠? 그때만 해도 다들 모르는 분위기였는데.”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대성공 이후, 한국 에이전시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뉴스레터를 쫙 뿌렸다는 것.

“에이전시들이 ‘대박 신인’의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잖아요. 그 왜, 켈리장 에이전시 아시죠? 거기 대표가 저랑 미팅할 때 이 소설을 얼마나 극찬하던지···.”

자기네도 입찰할까 고민하다가 판이 너무 커지는 것 같아 겁 먹고 발을 뺐다는 것.

“그렇···습니까.”

“말도 마세요. 어디더라, 와이즈하우스랑 문학마을이랑, 대형 출판사 몇 곳이 눈에 불을 켜고 있어서.”

조만간 옥션에 들어갈 것이며 선인세 경쟁이 상당히 치열할 거다- 라는 것.

‘···선인세 경쟁이라고?’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소식에 상준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처럼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것’은 한국 출판사들뿐이 아니었는데.

“뭐? 에곤 K가 라이터스홈이랑 계약했다고?”

“이런 젠장, 대체 뭘 제안했길래···.”

“케빈 클레그? 그 친구 아직 초짜 아닌가?”

“SFF프레스에 연락 넣어봐!”

에곤 K에게 눈독을 들이던 미국 전역의 출판 에이전시들에서는 난리 아닌 난리가 났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당장 홈페이지 메인에다가 업데이트해!”

라이터스홈 사무실은 축제 분위기나 다름없었다.

“‘화제의 신인 에곤 K, 라이터스홈과 전격 계약!’ 이 정도면 될까요?”

“아니 아니지, 좀 더 자극적인 멘트로···.”

사실, 라이터스홈에선 에곤 K를 잡으려고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신인 체급으로는 역대 최고 수준에 가까운 계약금은 물론.

다양한 형태의 작가 편의서비스.

2차 저작권 판매를 위한 특별 전용 피칭 미팅 등.

···그러나 다른 에이전시들이 제시한 조건도 절대 이에 못 미치는 수준이 아니었던 만큼.

“으흐흐 이게 웬일이냐.”

“케빈 저 친구가 아주 복덩이라니까, 복덩이.”

“대체 뭐라고 했길래 에곤 작가가 껌벅 넘어온 거지?”

그 공로의 대부분은 이번 계약을 성사시킨 케빈 클레그에게 돌아간 상황.

“···.”

막상 그 본인은, 며칠 전 에곤 작가와 나눈 메신저 대화를 복기하는 중이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뭔가가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가장 최근 메시지부터 역순으로 살펴보는 중.

[에곤_K : 26일, 아이오와시티 워싱턴 스트리트의 인카운터카페 2층 미팅룸에서 뵙죠.]

···

[에곤_K : 케빈 클레그 담당자님 본인 외에는 그 누구도···]

···

[에곤_K : 저도 반갑습니다 미스터 케빈.]

그 순간.

아무렇지 않게 스크롤을 올리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보통은 미스터 클레그라고 하지 않나?’

그를 ‘미스터 케빈’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많지 않다.

주립대 학생들, 그중에서도 자신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친구들이나 그렇게 부르는데···.

그 순간 문득 떠오르는 기억.

‘미스터 케빈, 여기 적힌 건 당신이 담당 중인 작가 리스트인가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미스터 케빈, 지금 당장은 계약할 의사가 없습니다.’

계약할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제일 먼저 연락주겠다던, 유진의 목소리가 어째서 이 순간에 떠오르는 것일까.

‘설마,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케빈 클레그는 고개를 저으며 얼토당토않은 감을 무시했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판권 문의 관련해서 설명드릴 준비나 해야지.’

에곤 K의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출간한 지 겨우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지만, 벌써 해외 5개국에서 번역 판권 문의가 들어왔고.

‘무려 네 군데에서 영상 판권 문의가 들어왔으니까!’

문의해온 해외 출판사들의 이력은 물론, 영화 제작사들의 면면을 조사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내야겠다.

할 일이 부쩍 늘어났는데도, 케빈은 콧노래를 부르며 업무에 임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