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애도(2)
*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의 2/3 지점에서 집필을 멈춘 상태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이 지금은 그냥-
“뭐 재밌는 거 없나···.”
간만에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중.
그동안은 원고 파일을 열어보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 무서울 정도로 벅찬 감정.’
평온한 내면에 거친 파문을 일으킬 감정으로부터 잠시만 도망쳐 있고 싶었다.
“···어차피 마감은 넉넉하니까.”
미스터 레너드가 정해준 기한까지는 2주 이상 남았으니, 조금 기다려보면 글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
그래서 일부러 딴짓을 좀 했다.
핸드폰으로 여기저기 독자 커뮤니티도 살펴보고, 에곤 K 관련 기사도 좀 찾아보고.
SF서브레딧에 들어가 에곤 K로 검색하던 와중-
[839 좀 있으면 네뷸러상 후보 공개 시즌 아닌가]
[3.5k 올해 네뷸러상 후보작을 예측해보자]
···
이런 게시물들이 올라온 것을 발견했다.
‘벌써 네뷸러상 후보 발표 시즌이 다 됐네.’
미국 출판시장은 규모가 큰 만큼 그 분류도 세분화돼 있다.
그 말인 즉 장르 문학시장 또한 매우 활성화돼 있다는 것.
이 장르마다 해당 분야를 대표하는 문학상이 하나씩 있는데, 에드거 앨런 포 이름을 따서 만든 ‘에드거상’은 미스터리 장르, 브램스토커상은 호러 장르에 수여되는 상.
네뷸러상, 휴고상, 로커스는 SF&판타지 장르의 3대상이라 불린다.
이런 대표적인 상들을 수상하면, 아니 후보에만 올라도 매출이 확 뛰는 것은 물론 작가에게 엄청난 영예가 되며.
‘SF팬들에게는 일종의 축제 기간이나 마찬가지이지.’
여기 후보로 올라온 책들에 관해 팬덤 내에서 다양하게 토론도 하고, SF 북클럽 같은 곳에선 아예 이달의 책으로 선정해 함께 읽기도 하니 말이다.
이 3대상은 주로 상반기에 후보를 선정하고 하반기에 최종 발표 및 시상식을 진행하는 식.
나는 SF서브레딧에 올라온 게시물을 쭉 훑어봤다.
[3.5k 올해 네뷸러상 후보작을 예측해보자]
-퀀텀 미스터리?
-글쎄··· 멜린다 스피어스는 어떨까
└드래곤의 피 재밌지
└ㅇㅇ 아마 수상도 하지 않을까 싶은데
└저 두 개가 매우 유력하다고 봄
-중편 부문은?
└올해 노벨라는 <피터팬> 말곤 그닥 눈에 띄는 게 없지 않나
└근데 에곤 K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봐야지
└어째서?
└하반기작은 보통 그다음 해에 후보에 오르는 게 보통임
댓글에 적힌 대로, 올해는 거의 가망이 없었다.
네뷸러상은 SF판타지작가협회(SFWA) 회원들이 -전년도에 출간된 작품을 대상으로- 투표해서 후보작을 선정하고, 이후 최종작도 투표로 결정하는 방식.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이 작년 10월 중순,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가 12월 초에 발표된 만큼.
‘SFWA 회원들의 표를 모으기에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
어차피 올해는 그런 유의 기대는 하지 않고 있다.
‘그래도 내년쯤엔 도전해봐도 좋지 않을까.’
저기 이름이 나온 작품들도 시간 날 때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생각하며 레딧 앱을 닫은 뒤.
SF커뮤니티까지 다 둘러봤는데도 무료함이 가시지 않아 왓츠앱을 실행시켰다.
[BFF(찐친)| 그룹, 3명]
네드와 아델, 나까지 셋이 있는 단톡방.
평소 여간해서는 먼저 말을 꺼내는 법이 없지만-
[유진_권 : 뭐하냐]
어색하게 톡을 보내자, 이내 친구 놈들의 답이 이어졌다.
[네드_밀러 : 코믹스 공모전 원고 수정 중··· 죽겠음]
[아델_애시번 : 신곡 작업하는 중!!!]
[아델_애시번 : 또 영감이 왔다 이거지 이히히히히]
[네드_밀러 : 그래 너라도 행복하니 됐다···]
하필 두 친구 모두 한창 저마다의 창작에 몰두하고 있는 상황.
“···타이밍이 안 맞네.”
휴, 한숨을 내쉬고는 운동이나 할까 생각하던 그때.
똑똑-
“유진아, 간만에 산책이나 같이 갈까?”
웬일로 아버지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
아이오와시티의 2월은 꽤 매섭다.
3월이 코앞으로 다가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영하의 날씨를 자랑하는 가운데.
‘산책을 가기에는 조금 춥지만.’
우리 두 사람 다 두꺼운 트레이닝복을 갖춰 입고 가볍게 뛴 지 10분째.
몸에서 나는 열 덕분에 추위가 제법 가시는 듯했다.
“후우, 그래··· ‘AI 데이지’라니, 제목만 들어도 기대가 되는구나.”
“나중에 완성되면 보여드릴게요.”
“그래. 근데 유진아, 그래도, 흐으, 전보다 아버지 체력이 좀 붙은 것 같지 않냐.”
“하하, 그러네요 진짜.”
요즘에 꾸준히 운동을 하시더니, -얼굴은 여전히 벌겋지만- 예전만큼 숨을 헐떡이시진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발전이 아닐까.
“후우, 그래도··· 조금만, 속도를 늦출까?”
“좋아요.”
잠시 후.
조금 속도를 늦춘 덕에 호흡이 한결 편안해진 아버지가 새로운 화제를 입에 올렸다.
“맞다, 내가 그 얘기를 안 했구나.”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얼마 전에 진행했다는 한국 출판사 미팅 이야기.
“어때, 좀 괜찮은 작품 좀 건지셨어요?”
“어어, 두어 개 정도 살펴보고 있는 타이틀이 있는데···.”
그렇게 잠시 에이전시 일에 관해 이야기한 뒤.
“아 그리고, 그때 미팅했던 출판사 담당자가 에곤 K를 알고 있더구나.”
싱긋 웃은 아버지가 ‘에곤 K’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 정말요?”
“그래. 아니지,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저작권을 두고 한국 출판사들 사이에서 한동안 뜨거운 경쟁이 일었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그 사실을 아버지의 입으로 듣는 건 또 다른 느낌이랄까.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기분이다.
“흐으, 신기하네요. 근데 어쩌다 그 얘기가 나온 거예요?”
“···어 그게.”
조금 민망해하더니 어색하게 말을 잇는 아버지.
“음, 혹시나 모르고 있으면, 내가 홍보 좀 하려고 했지.”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를요?”
“그래, 아니 뭐··· 딱히 우리 아들이 써서 그런 건 아니고, 에이전트로서 보기에도 너무 좋은 작품이니까.”
···아버지에게 저런 팔불출스러운 면이 있었나.
나도 모르게 푸흐, 웃음이 나왔다.
“어쨌거나 유진아.”
“네.”
“지금 네 이런 모습을··· 엄마가 봤으면 기뻐했을 거다.’
“···.”
아버지의 입에서 ‘엄마’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 단어가 가리키는 사람이 절대 케이트가 아니라는 건 너무도 잘 알 뿐더러-
‘아버지가 엄마 얘기를 꺼내는 게 너무 오랜만이니까.’
그래서일까.
어찌 보면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말에 뭐라고 대꾸할지 몰라하던 그때.
“네 엄마 애기를 하는 게 참 오랜만이지.”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새삼 깨달았다.
‘아버지도 그렇지만.’
나야말로 내 입으로 엄마 얘기를 먼저 꺼낸 적은 -회귀 전에도, 후에도- 거의 없었다는 것.
“···그러게요 아버지.”
힘겹게 대꾸하자, 아버지가 복잡한 표정으로 내 말을 받는다.
“그래. 좀 더 자주 얘기했으면 좋았겠지만.”
슬쩍 고개를 돌려 내 옆얼굴을 살피며.
“엄마 얘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네가 힘들어하지 않을까 싶었거든. ···물론 나도 여전히, 네 엄마 이름을 입에 담는 게 절대 쉽진 않다.”
“···.”
여러 감정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가는 아버지의 얼굴.
어릴 땐 멋모르고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나도 이제는 안다.
···누구보다도 아버지가 제일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걸.
그렇게 가만히 감정을 다스리던 그때.
아버지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말이다. 엄마의 묘에 들렀어.”
“아.”
“거기서 엄마에게··· 네 소설을 읽어줬다.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말이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어딘가에서 엄마가 듣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내 소설을 처음부터 정독해줬다는 말에-
“···.”
한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고.
귓가가 웅웅거려 아버지의 말들이 잘 들리지가 않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서른다섯 살에 죽음을 맞이해 과거로 돌아오기까지 했는데도-
‘아직도 나는, 상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구나.’
내 안에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엄마의 사라짐을 납득하지 못하는 열 살의 나.
···나와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던 젊은 날의 아버지.
우리 부자는 매번 이렇게 도망쳐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그런 내 머릿속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잇는 아버지.
“고통스럽다고 계속 잊은 척한다면, 그거야말로 엄마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내 기억 속에서도, 유진이 너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면···.”
조금씩 느려지던 그의 걸음이 완전히 멈췄다.
“그때는 정말로, 현희의 존재가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아, 어쩌면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현희 씨’라고 우리 엄마의 이름을 불러준 새어머니에게 새삼 감사했는지도 모르겠다.
“도망치는 건 괜찮다, 유진아.”
“···.”
“하지만 잊지는 말자꾸나.”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아침 해 덕분에 쌀쌀함이 한결 가신 가운데.
나는 한 박자 후에야 입을 열었다.
“···상실이, 제대로 된 애도로 이어져야 한다는 거죠?”
아버지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와 동시에-
. 그 작품을 집필하던 내 손이 어째서 더는 움직이지 못했는지도 이해했다.
‘진정한 애도를, 막상 나 자신도 제대로 못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나는···.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가능성에 입을 다문 순간, 아버지가 나를 돌아보았다.
“유진아, 예전에 엄마가 이 아빠에게 소개해준 책 중에 <도피 예찬>이란 책이 있어.”
“도피 예찬이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던 어머니가 감명 깊게 읽었다는 원서.
프랑스의 행동심리학자 앙리 라보리가 쓴 이 책의 핵심은, 시련을 마주한 인간은 주로 세 가지 방식의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첫째, 그에 맞서 투쟁하거나.
둘째, 그저 참고 견디거나.
셋째, 갈등을 피해 도피하거나.
라보리는 -의외로- 맞서 싸우는 대신, 도피하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대처라고 평가한다.
“···시련에 맞서 싸우는 경우, 자신이나 상대 둘 중 하나를 파괴해야만 그 싸움이 끝나기 때문이라더구나.”
그리고 이 도피에도 세 가지 양상이 존재하는데.
약물이나 술, 담배 따위를 이용하는 화학적 도피.
시련의 원인이 되는 장소나 집단을 벗어나는 물리적 도피.
마지막으로-
“예술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자신의 고통을 카타르시스로 승화시키는 방식의··· ‘예술적 도피’라는 것이 있다고 하지.”
비록 국내 출판시장엔 맞지 않아서 한국어로 번역 출간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 책에 관해 엄마가 해준 이야기들을 지금도 잊지 못했단다.
“네가 말한 그 란 작품 말이다. 유진이 넌 어쩌면, 일종의 예술적 도피를 통해서-”
과거의 상실을 극복하고, 진정한 애도로 나아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버지의 말.
“···맞네요, 아버지 말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한 가지 가능성이 더 떠올랐다.
어쩌면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여태 대면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우리 엄마.’
김현희의 존재를 소설 속 캐릭터의 형태로나마 살려내고자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데이지인 동시에 그 어머니인 엘라의 모습으로.
아버지와 나의 머릿속에서 언젠가는 휘발되어버릴 기억을, 독자들의 뇌리에 깊게 새겨 어떻게든 지켜내고자.
“그때의 상실이, 영원한 상실이 되지 않도록 말이죠.”
내 말에 아버지는 대답 대신 나를 마주 보았다.
“···.”
머리 위로 떨어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그 온기가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아버지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더니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그래. 엄마가, 어떤 형태로든 우리 곁에 남아 있도록.”
.
···이제는, 그 소설을 완성해낼 수 있을 거라는 본능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