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상실과 애도(3) - 여기까지 무료
*
직감했던 대로, 나는 의 집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애써 무시해왔던, 해묵은 감정을 직시한 덕분이라고나 할까.’
눈앞에 있는 것은 원고 파일을 띄워놓은 노트북 화면.
손볼 곳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제야 그녀를, 데이지를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집필이 거의 마무리된 원고를 보니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동시에, 크나큰 탈력감이 찾아왔다.
덕분에 하나의 산을 넘은 기분이 들었던 주말-
“요 브로!!! 기다리고 있었다고, 얼른 들어와!”
나는 에이든의 초대를 받아 에이든네 집에 놀러갔다.
뭔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뽀글거리던 머리가 폭탄 맞은 것처럼 된 에이든이 내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렸다.
“부모님은?”
“아, 우리 엄빠는 출장 갔음! 오늘은 우리뿐이니까 맘 편히 있으라고, 으흐흐.”
그렇게 집 안에 들어서자.
“오 유쥐이인—!”
“유진 왔구나!”
코믹스 공모전용 원고를 드디어 마무리했다는 네드와, 문예창작 클럽의 제이든이 반갑게 맞이했고.
“힐크레스트 지니어스!”
“아, 쟤가 그 문학 천재···.”
“어 약간 상상했던 것과 다른 느낌인데?”
모르는 얼굴도 서넛 정도 있었다.
에이든 말로는 브룩필드 다니는 애들이라고.
“어 다들 반가워.”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나자.
“흐으 좋아, 이제 다들 모였으니···.”
에이든은 우리를 둘러보며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불닭라면 챌린지 영상을 찍어보자고—!”
“이예에에에—!”
“오오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잔뜩 신이 난 아이들.
‘후회할 텐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뭐 어쩌겠나, 본인이 굳이 찍고 싶다는데.
에이든이 요즘 브이로그 컨텐츠가 다 떨어져가서 고민이다, 라고 하자.
‘어 그럼 이건 어때?’
···네드가 대뜸 불닭라면 챌린지를 제안했다는 것.
‘오 그거 괜찮네.’
유행이 조금 지난 느낌이긴 하지만, 클래식이 괜히 있는 거겠냐며 신이 난 에이든.
여하튼.
나는 딱히 이 자리에 올 생각이 없었지만.
‘유쥐이인, 마이 브로! 너의 팬들은 니가 없음 영상을 안 봐준단 말이다아아···.’
과장이 너무 심한 에이든과.
‘그래 유진! 난 그냥 니가 부럽다아···. 너, 니 팬이라는 누나들한테 진짜로 번호 안 알려줄 거?’
포인트가 조금 엇나간 네드.
저 둘이 하도 붙잡는 통에 별수 없이 온 것에 가까웠다.
‘그건 그렇고, 정신이 하나도 없네.’
누구는 소파에 앉아 과자를 온통 흘려가며 먹어대고.
누구는 벽걸이 농구골대에다가 공을 던져넣기도 하고.
누구는 다트판에 다트를 던지고···.
벌써 난장판이 되어버린 집 안을 돌아보는데, 에이든이 두 팔을 걷어부치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럼 이제 끓일 테니까 기대하라구 으흐흐흐!”
그리고 잠시 후.
주방에서 코를 찌르는 매운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으어어, 냄새만 맡아도 장난 아니다.”
“코가 뻥 뚫리는 느낌인데?”
“뻥 뚫린다고? 난 코가 따가운데?”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흥분해서 잔뜩 신이 난 녀석.
냄비 속의 시뻘건 면을 휘젓는 에이든의 뒷모습을 지켜보는데.
“흐으, 엄청 맵겠네.”
어느새 내 옆에 와서 선 우람한 제이든의 말에 옆을 돌아보았다.
“유진 넌 매운 거 잘 먹어?”
“아, 뭐 조금.”
“하긴 한국인들은 어느 정도 단련돼 있겠구나.”
문예창작만큼이나 미식축구부 활동에 열심인 제이든.
나는 녀석의 커다란 근육질 몸을 보다가 무심코 물었다.
“제이든 넌 운동 어떻게 하냐.”
요즘 너무 글쓰기와 출간 관련 문서 작업에만 열중했더니 근육이 줄어든 기분이었기 때문.
그러자 제이든이 갑자기 두 눈을 빛낸다.
“오, 유진 너도 운동에 관심 있어? 몸 좀 만들어보려고? 평소 트레이닝은 어느 정도 해? 루틴은?”
뜨거운 반응에 조금 당황했지만.
“아, 막 전문적으로 하는 건 아니고, 적당히 건강 관리 차원에서?”
“음, 건강 관리라, 좋아 좋아. 나는 일단 미식축구부에 하는 기본 훈련루틴을 매일 지키는 편인데···.”
제이든이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사이.
나는 그의 운동 루틴을 꼼꼼히 메모해뒀다.
“아 아니다, 아예 이럴 게 아니고 언제 한 번 우리 체육관 오지 않을래?”
“체육관?”
제이든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아 그게, 사실은 우리 아빠가 체육관을 운영하시거든.”
“오, 그건 몰랐네.”
“아빠가, 음··· 너처럼 운동에 관심 많은 애들 보면 엄청 좋아하거든, 잘 가르쳐주기도 하고.”
가끔은 열정이 과할 때도 있긴 하지만- 이라고 덧붙이는 제이든.
“여유될 때 언제 한 번 놀러오라고.”
“그래, 나야 가르쳐주시면 고맙지.”
그리고 바로 그때.
“다들 와라—!”
불닭라면을 차려놓은 에이든이 우리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요에이든이에요! 오늘은 불닭라면을 먹어보려고 하는데요~~”
에이든의 촬영용 캠이 돌아가는 가운데.
“오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불닭라면!”
“근데 부우울··· 닥크? Buldak이 무슨 뜻이야?”
“Fire chicken!”
“흐흐, 내가 매운 건 좀 먹지!”
멕시코 출신이라는 친구 하나가 맵부심을 부리는 가운데.
나를 포함, 총 일곱 명이 다같이 불닭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어? 생각보다 안 매운데?”
“Yum(맛있어)!”
“거봐 먹을 만하다니까?”
처음에는 반응이 나쁘지 않았지만, 잠시 후-
“크어, 너, 너무 매워···.”
“혀가, 혀가 아파 으어어.”
“흐어 물, 무울—! 아니 왜 물 마시니까 더 매워.”
“끄어어 입에 불 난다···.”
다들 얼굴이 시뻘개진 채 애타게 물을 찾는다.
···만화라면 양쪽 귓구멍에서 스팀을 뿜어낼 것 같은 반응이었다.
“물 말고, 우유 마셔.”
나는 눈물을 흘려대는 친구 놈들에게 조언했다.
“우유···?”
“에이든, 당장 우유! 우유 줘!”
그러게 몸에도 안 좋은 걸 굳이 먹겠다고.
쯧, 혀를 차며 내 몫의 불닭라면을 덤덤하게 먹자.
에이든이 내 쪽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잠깐 잠깐, 유쥐인, 넌 안 매워?”
“매워.”
“아니 근데 그 반응은 대체 뭐야? 어떻게 그렇게 덤덤하게-”
“음, 많이 먹어봤으니까.”
원래 매운 걸 먹으면 혀가 아픈 법이다, 라고 담담히 말하자.
에이든이 낄낄거렸다.
“크으, 역시 매운 맛의 나라 출신답게 강하네. 어 맞다, 어떤 유튜버 말이 한국인들은 고통을 즐긴다던데-”
“그런 건 아니고.”
“오 벌써 다 먹었네? 불닭라면 먹은 소감, 소감 한마디해봐 유진!”
나는 마지막 한 입까지 깨끗하게 먹어치우고는 카메라를 마주 보았다.
“여러분, 매운 맛이 미각이 아니고 통각을 자극한다는 건 다들 알고 계시죠?”
어쩐지 조금 조용해진 가운데.
“지나치게 매운 음식이 위장에 안 좋은 건 당연한 거고, 오늘날 미국인의 염분 섭취량은 세계보건기구 권장량의 두 배 이상인···.”
나는 염분 과다 섭취와 성인병의 상관 관계에 관해 잠시 설명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토마토와 브로콜리, 견과류 같은 몸에 좋은 음식 위주로 드셔보는 게 어떨까요. 특히 견과류는 심혈관 건강에 아주 효과적인-”
“그만, 야 제발 그만해!”
“악 미친, 크크크크.”
“유쥔, 저런 놈이었구나.”
“얼굴은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오늘 나를 처음 본 브룩필드 학교 애들은 미친 듯이 웃고.
나를 너무 잘 아는 네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가운데.
“유진, 이거 컨셉이지? 제발, 컨셉이라고 해줘.”
내게 카메라를 향하는 에이든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진심인데, 왜?”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3월 첫 주,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SFF프레스 사무실.
[<사이언스앤드판타지> 3월호 - 에곤 K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3부 전격 공개!]
<피터 팬> 3부가 실린 3월호가 드디어 출간된 덕분에, 직원들 모두가 분주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보도자료 돌린 거 확인해봐!”
“이메일 인터뷰 일정, 조정 완료했습니다! <데일리뉴욕> 측에서 연락이 오길···.”
“에곤 K 프로필 이미지는 전달했어? 아 그리고 아마라 아체베 디자이너한테도···.”
거기에 4월에 출간될 <피터 팬> 단행본의 예약판매 이벤트로도 정신이 없었으니.
“후우,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네.”
그중에서도 제일 바쁜 것은 에곤 K의 담당자 마크.
하지만, 본인이 담당하는 타이틀이 돌풍을 일으킨다는 데서 오는 아드레날린 덕분일까.
신기하게도 피로가 느껴지지 않았다.
‘급한 업무를 모두 처리했으니 이제는 에곤 작가님께 연락을 드려볼까.’
3월호 출간 소식도 전달해드리고, 그 외 문의 들어온 것도···.
그렇게 마크의 생각이 이어지던 찰나.
“음?”
띠링- SFF프레스 출판사 공식 계정으로 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SFWA| 제59회 네뷸러상 후보명단 공개]
발신인은 [email protected]
, 즉 SF판타지작가협회(SFWA).
그렇다는 건-
“네뷸러상 후보가 공식 발표됐군!”
올해는 어렵겠지만 내년쯤엔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메일을 클릭해 열어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
마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한편 그 시각, 나는 내 방 노트북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됐다.”
원고 파일을 문예창작클럽 전용 클라우드에 방금 막 업로드한 참.
이번 주 합평의 대상 작품이 바로 이 이니 말이다.
과연 애들 반응은 어떠려나, 생각하던 그때.
[S&F편집부_마크 : 에곤 작가니이이임— 엄청난 뉴스입니다아아아—]
마크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 <피터 팬> 3부 공개날이니까.’
하지만 그의 용건은 그쪽이 아니었다.
[S&F편집부_마크 : 네뷸러상 후보가··· 발표됐습니다!!!!]
네뷸러상 후보.
안 그래도 곧 공개되겠지 싶었는데.
[S&F편집부_마크 : 피터팬이 10월 출간이다 보니]
[솔직히 올해는 아예 기대도 안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지잉, 지이잉——
이내 연달아 오는 메시지의 내용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잠깐만, 뭐라고?”
그러니까, 지금 마크의 말대로라면-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이··· 네뷸러상 후보에 올랐다고?’
나는 곧바로 SF판타지작가협회 사이트에 접속했다.
[(D-Day) 제59회 네뷸러상 후보 명단을 발표합니다!]
——————————
[제59회 네뷸러상 후보명단]
-네뷸러상 장편 부문
<드래곤의 피>, 멜린다 스피어스(오빗보이저)
<타임키퍼의 저주>, 레오 케인(렐름프레스)
<퀀텀 미스터리>, 키이란 헐리(크로노북스)
···
——————————
부문당 대략 대여섯 개의 작품이 후보로 올라온 가운데.
명단을 주욱 읽어내려가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췄다.
“···!”
——————————
[-네뷸러상 중편 부문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에곤 K(SFF프레스)
<검은 달>, S.T. 우즈(뉴북)
<내가 알지 못했던 진실들>, 탈라비 왈코(TK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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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편집부_마크 : 네뷸러상 후보라니! 그것도 10월 발표작이! 이건 진짜 어마어마한 거죠!!]
[저희 편집부는 지금 완전 파티 분위기···]
···
지잉, 지잉, 지이잉-
메시지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가운데, 달콤한 성취감이 머릿속을 강타한다.
“···와, 이건 진짜 생각도 못 했는데.”
마크의 말대로이긴 했다.
애초 후보작부터가 회원들의 투표로 선정되는 형식이다 보니.
하반기 출간작들은 보통 그다음 해의 수상 후보가 되곤 한다.
그러니 10월에 발표된 <피터 팬>이 이 후보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일 뿐더러.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매출이 확 뛰는 만큼 SF편집부가 축제 분위기라는 것도 이해가 가는 것.
[에곤_K : 정말,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반갑고 기쁜 소식이군요]
[에곤_K : 늘 애써주시는 담당자님께도, 편집부 분들께도 늘 감사드립니다]
흥분을 애써 억누르며 답을 보내자, 잠시 ‘···’이라는 표시가 떴고.
[S&F_편집부 마크 : 으흐흐 작가님이 이렇게 알아주시니 참 보람차군요!]
그렇게 마크와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나자.
우다다다, 거칠게 계단을 걸어올라 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유진아-!”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아버지?”
“그, 피, 피터 팬이! 네뷸러상 후보에-!”
네뷸러상 후보 명단을 보고 너무 놀란 탓에, 숨도 쉬지 못하며 외친 우리 아버지였다.
그거 저예요 - 여기부터 유료
가족 중에 동종업계 사람이 있어서 좋은 점.
지금 이 소식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알아준다는 점이다.
“자, 맛있게 먹자꾸나.”
“유진, 다시 한 번 축하해!”
“오빠아 대다네~~”
덕분에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외식을 하러 갔는데.
아버지와 서로 내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내가 지고 말았다.
“잘 먹겠습니다, 아버지.”
멕시코 음식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는 날 보고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조금 놀란 듯했는데.
“하하, 잘 먹으니 보기 좋구나.”
“그러게, 그래서 그런가? 요즘 유진 키가 부쩍 큰 것 같아~”
“오빠 더 커졌쪄? 지금도 엄청 큰데···.”
클로이 기준으로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큰 사람인 듯하지만.
그렇게 우리 가족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올 무렵.
지잉, 지이잉—
내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려댔다.
[S&F편집부_마크 : 에곤 작가님 후보 명단 공개된 거 보셨죠?]
[에이전트_케빈 : 에곤 작가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번 노미네이트 관련해서 라이터스홈으로도 수많은 문의가 쏟아져서···]
[랜든_비숍 : 축하하네. 근데 난 사실 별로 놀라지 않았어. 자네가 언젠가 3관왕 정도 되어준다면 그때는 좀 놀랄 것 같군 하하.]
···
[BFF(찐친)| 그룹, 3명, 새 메시지 13개]
네드와 아델이 있는 단톡방에서도 난리가 난 상황.
‘···무슨 내용인지 안 봐도 알 것 같은걸.’
나는 웃으며 메시지를 차례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
한동안 잠잠하던 SF서브레딧은 새로운 소식으로 들끓어오르는 중이었다.
SF장르의 3대상 중 하나로 불리는 네뷸러상.
그 중편부문 후보목록 첫 줄에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이 있다는 사실에 팬덤은 열렬히 환호했다.
[81.9k. 속보 - <피터 팬> 네뷸러상 후보에 오름!!!!]
-흐어 미쳤다 진짜
-아니 잠깐만 헷갈리는데··· 피터팬 분명 지난 10월에 발표된 거 아니었나?
└ㅇㅇ 맞음
└그러니까 더 이례적이라는 것
-와 여기서 수상까지 해버리면 진짜 역대급이겠네
덕분에 <사이언스앤드판타지> 3월호의 판매 부수가 확 치솟았지만, 3만 5천 부, 즉 평소의 다섯 배로 초판 부수를 늘려놓은 덕분에 무리 없이 대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3부작은 마지막 편을 선보이게 되었고.
-드디어ㅠㅠ 한달을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벌써 다 읽은 사람 있냐
└나!!!
└나도. 머릿속에서 헐리우드 영화가 펼쳐지더라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랑은 장르가 아예 다른 느낌
└근데 이쪽이 좀 더 대중픽··· 내 취향이라는 뜻
-잠깐!! 다들 스포하지 마
···모든 뒷얘기가 완전히 드러난 이 <피터 팬> 3부작의 최종편을 읽은 독자들은 저마다의 감상에 젖어 있었다.
그중에는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각색 방향을 열심히 고민 중인 신예 감독, 막성스 라미도 있었고.
‘와, 이건 정말로··· 눈앞에서 영상이 펼쳐지는 기분인걸.’
고작 네뷸러상 후보에 오른 것 가지고 무슨 난리냐며, 자신은 에곤 K가 3관왕의 영예를 안아도 하나도 놀라지 않겠다던 랜든 비숍 또한-
“하아, 역시 기대했던 대로군.”
<피터 팬> 3부를 매우 만족스럽게 읽었다.
마지막으로,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에곤 K’라는 이름을 언급했다가-
‘지금 제정신이야?’
에이전트 캠벨과 대판 싸운, 작가 마커스 스톤 또한 <피터 팬> 3부를 매우 감명 깊게 읽은 상황.
좋았던 점을 꼽으려면 한두 개가 아니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그대로 투영한 듯한 주인공 피터가-
‘행복해져서··· 참 다행이야.’
그래서일까.
마커스는 그날 밤, 정말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숙면을 취했다.
*
에곤 K의 네뷸러상 후보 선정 소식으로 한동안 SF팬덤이 뜨거웠지만.
힐크레스트 고등학교의 문예창작 클럽 학생들은 조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주제글쓰기’ 활동의 마감에 맞춰 각자 쓴 단편소설을 공용 클라우드에 올렸고, 그중 한 작품을 골라 매주 합평하는 중인데-
‘이번 주가··· 드디어 유진의 합평 차례구나.’
샬롯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파일을 다운받아서 프린트했다.
갓 출력되어 따끈한 종이더미를 마주한 순간, 라는 제목 아래에 적힌 첫 문장을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데이지. D-A-I-S-Y. 매일 같이 불러보지만, 입 속에서 공허하게 사라지는 소리···.”
그것을 시작으로 샬롯은 소설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교통사고로 어린 딸을 잃은 엄마.
그녀가 느끼는 좌절과 공허감.
그리고-
[엘라 모건의 가슴속은 나오지 못한 말들로 가득했다.
딸이 너무도 그립다든가.
그녀가 애지중지하던 장난감을 버릴 수 없지만, 그렇다고 꺼내볼 용기도 나지 않는다든가.
그 외에도 한숨처럼 쌓인 말들이 많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데이지를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
···그리하여 엘라는 새로이 개발된 최신 모델의 AI에게 ‘데이지’의 모든 것을 학습시키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전의 작품들과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네.’
<로렌스 수사의 고백> 혹은 <6인의 고백>이 서술 트릭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독자에게 놀라움을 안겨다주었다면.
[“데이지.”
그녀는 모니터 속 음성인식 AI를 향해 제 딸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내 딸이 되어주렴.”]
이번 소설은 보다 정석적이면서도 문장 하나 하나가 가슴 속 여린 부분을 건드렸다.
[음성을 인식한 AI가 평소보다 느리게 반응했다.
커서가 깜박, 깜박하는 가운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인격이 없는 AI모델로서···.
-···사용자의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으나···.
문장이 만들어졌다 지워지길 반복하더니, 이내 짤막한 문구가 산출되었다.
-네, 엄마.
그 순간.
엘라는 오열하고 말았다.]
샬롯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웬만해서는 글을 읽고 감정의 동요를 느끼는 경우가 없는데.
‘···이 감정은 대체 뭘까.’
제 안에서 요동치는 복잡한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샬롯, 샬롯!”
“···아.”
“얘가 진짜, 뭐 하길래 몇 번을 불러도 못 듣고 그러니?”
문을 노크하고 들어온 엄마를 보고 샬롯은 잠시 눈을 크게 떴고.
“네가 좋아하는 팬케이크 구워놨으니까, 얼른 와서 먹으라고.”
“···엄마.”
“응?”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저도 모르게 엄마를 꼭 껴안고 말았다.
“엄마, 사랑해.”
“어머, 얘가 웬일이래. ···너, 울었니? 어머 어머,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도 없는데.”
걱정 가득한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샬롯이 헤헤 웃었다.
‘고마워 엄마.’
···이런 별난 나를 항상 변함없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줘서.
*
‘지금쯤이면 다들 를 읽었으려나.’
이번이 바로 내 작품을 합평하는 주간인데, 친구들은 이걸 어떻게 읽었을지 좀 궁금해진다.
[문예창작 클럽| 그룹, 12명]
여전히 조용하기 그지없는 왓츠앱 단톡방을 가만히 보고 있던 그때.
문이 열리며 케빈 클레그가 들어왔다.
“오셨어요?”
“흐흐, 잘 지내셨죠 작가님?”
지난번에 만났던 대형카페의 미팅룸.
나와 미스터 케빈은 앞으로 이곳을 우리의 접선 장소로 활용하기로 했는데.
누가 물어볼 경우를 대비해, 문예창작학과 진학 상담을 받는다고 하기로 입을 맞춰놓았다.
실제로도 케빈 클레그가 아이오와대학에서 산학 협력 강의를 담당하고 있기도 하니, 제법 그럴싸한 핑계였다.
“여하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영화제작사들과의 미팅을 마쳤는데요···.”
보고를 들은 뒤, 나와 미스터 케빈은 그중 제일 괜찮은 제작사 두 곳을 후보로 추렸다.
최종 결정은 막성스 라미 감독과 논의한 후 내리기로 한 상황.
그렇게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영화화 관련 얘기를 어느 정도 마무리한 후.
“아 그리고 작가님, <피터 팬> 3부작은 아예 출간 후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판권 홍보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출간 전부터 바로 영화/드라마 판권 홍보를 진행하는 건 의외로 흔한 케이스다.
‘단, 작가가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어야 하지.’
이미 장편 데뷔작이 NYT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른 것은 물론.
<피터 팬>이 네뷸러상 후보 목록에 오른 지금이야말로 피칭을 진행하기에 최적의 시기인 것.
“···물론, 작가님이 원하신다는 전제하에 말입니다.”
내 의향을 묻는 미스터 케빈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죠.”
“그러시다면 안심입니다. 아 그리고··· 이건 조금 다른 얘기인데요.”
조금 식었지만 여전히 따뜻한 허브차를 한입 마시는데.
“에곤 K의 공식 SNS 계정을 개설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케빈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되물었다.
“그건 에이전트로서의 추천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팬으로서의 추천이기도 하죠.”
히죽 웃는 미스터 케빈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요즘은 작가들도 모두 SNS 계정을 운영하긴 하지.’
이제는 작가들도 일종의 브랜드처럼 인지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영화화와 <피터 팬>의 단행본 출간을 비롯해, 다양한 소식을 전달해야 할 경우가 셀 수 없이 많아질 거다.
“신간 소식이라든가, 뉴스레터라든가. 그런 걸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수단이긴 하겠네요 확실히.”
“맞습니다.”
···그렇게 나와 케빈은 SNS 계정 개설의 필요성 자체에는 합의를 보았지만.
“가급적 공식 계정 느낌으로, 미스터 케빈이 관리해주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아.”
“작가의 성격이 너무 드러나는 계정은 좀 그렇기도 하고, 제가 이런 걸 안 해봐서 어색할 것 같네요.”
그러면 기본적으로는 자신이 관리하되, 중요한 공지를 올리기 전 내게 확인을 받겠다는 케빈.
첫 게시물만큼은 직접 작성해달라- 라고 요청을 덧붙인 그가 말을 이었다.
“이런 건 확실히 작가님 말대로 공식적 느낌을 주는 게 낫긴 합니다.”
독자나 팬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이런 SNS 계정을 통해 작가와 사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접근하는 경우도 꽤 있다는 말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제 친구 하나가 유튜브 브이로그를 하는데, 저도 가끔 그 채널 영상에 나오거든요 근데···.”
자주 등장하지도 않는 나한테도 연락을 취하려 하는 경우가 있더라- 라고 말하자.
“오오, 유진 작가님을 만나고 싶어했다고요?”
“···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만나봤어요?”
어째 미스터 케빈은 본인이 더 신이 난 기색으로 두 눈을 빛냈다.
‘고등학생 조카의 연애 이야기에 흥분한 사회인 삼촌 같은 느낌인걸.’
회귀 전의 내 모습이 떠올라 괜히 친숙한 기분이 드는 가운데.
“만나긴요, 왓츠앱 아이디 교환도 안 했는데.”
그러자 케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니, 잠깐만요. 설마 작가님, 글 쓰신다고 연애와 담 쌓고 지내실 건 아니죠?”
“음, 당연히 그건 아니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생각이 없어서.”
수업 듣고 과제 하고 클럽활동 하고 거기에 집필까지 하려니 여유가 너무 없다- 라고 하자.
“하아, 이거 이거 아쉽네요.”
뭔가 본인이 더 안타까워하는 케빈.
“아니 아니지, 잠깐만, 저 그 영상 뭔지 알 것 같은데. 교지 홍보하는 브이로그라고 하셨죠?”
혀를 차던 케빈이 돌연 눈을 반짝이더니 본인의 스마트폰을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잠깐만, 설마 지금-”
“찾았네요 흐흐. 이거 맞죠?”
내가 말한 영상을 순식간에 찾아냈다.
‘대체 어떻게?’
한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미스터 케빈은 눈을 크게 뜨고 수많은 댓글 중 내가 말한 것을 열심히 찾기 시작했고.
“어, 이게 아닌가? 오, 이 댓글인가요? 코리안 큐트보이-”
“아니 그거 말고요.”
나는 민망한 기분에 얼른 말을 자르고는.
“아, 여깄네. 이거예요 이거.”
그의 폰 화면에 뜬 댓글 중 하나를 짚어 보였다.
[@cute_bookish: 저 혹시··· 유진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_왓츠앱 아이디도 좋구요!!!!]
“···.”
“이 cute_bookish라는 아이디.”
나는 이 아이디 소유자에 관해 에이든이 했던 얘기 또한 덧붙였다.
‘말투도 그렇고, 귀여운 누나가 확실하다니까?’
‘영상마다 니 얘기만 하는데···.’
‘댓글 보면 저기 저 아이오와대 다니는 듯?’
‘유쥐이인,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라면 진작에 연락했겠다-!’
아까부터 말이 많던 케빈이 입을 다문 가운데.
“폰 번호나 왓츠앱 아이디를 알려달라고 몇 번이나 물어봤다는데, 좀 부담스럽더라고요.”
나는 묘하게 조용해진 에이전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음···.”
잠시 고민하는 듯 보이던 케빈이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죄송합니다 작가님.”
“네? 갑자기 왜.”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 두 눈을 깜박이는데.
“이거 저예요.”
“···네?”
사뭇 진지해진 케빈의 등 뒤편으로 역광이 비쳤다.
그래서인가, 안 그래도 위협적인 외모가 한층 더 강력해 보이는 가운데.
“cute_bookish. ···이거, 제 아이디입니다.”
“···.”
순간.
우리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