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43화 (43/126)

경험에서 우러나온(1)

*

문예창작 클럽의 ‘주제글쓰기’ 합평일 전날 저녁.

‘내일은 유진의 를 합평하기로 했지.’

레너드 하인스는 본인의 서재에서 클럽 학생들의 작품을 다시금 살펴보는 중이었다.

[제이든 쿤츠 <꿈을 꾸는 안드로이드>]

“제이든 녀석, 이번 단편은 꽤 괜찮단 말이지.”

본인한테 잘 맞는 주제라서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걸 차치하고서라도-

‘전에는 좀 뭐라고 해야 하나,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감이 안 잡히는 경우가 태반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제법 완성도를 갖춘 소설이었다.

문단과 문단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좀 더 몰입감이 커지는 것은 물론.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호응을 이루도록 특별히 신경쓴 것이 보였다.

‘이것도 어쩌면··· 지난번에 유진이 합평 때 얘기해준 부분들 덕분이려나.’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자, 샬롯이 제출한 작품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인공지능이 우리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방식>이라···.’

샬롯이야 원래도 잘 쓰는 학생이었지만, 이번에 처음 써봤다는 논픽션을 보고는 정말 감탄했다.

오히려 이 논픽션 장르야말로 샬롯에게 잘 맞는 옷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정도 실력이라면 학생용 컨테스트가 아닌, 일반 평론지에 기고를 해봐도 충분한 것 같은걸.’

언제 한 번 그런 조언을 해줘야겠다.

그리고 그다음이 바로-

“···유진이 쓴 거로구나.”

내일 합평 대상작품인 였다.

이미 서너 번은 족히 읽은 작품을 레너드는 다시 펼쳐서 읽어보았다.

[···데이지의 어머니, 엘라 모건의 마음속에선 죄책감이라는 괴물이 혀를 날름거리곤 했다.

‘봐봐, 저 아래로 자유롭게. 좋아 보이지 않아?’

창밖을 볼 때마다 괴물은 달콤하게 속삭였고···]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마음의 상처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그것은 짓물러서 깊은 흉터가 되어버리고 만다.

‘주인공 엘라 또한 그러한 케이스였지.’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딸 데이지를 AI 속에 구현하는 데 성공한 엘라.

그녀는 가상현실 속의 딸과 그간 못 나눈 대화를 수없이 나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는 사라지지 않아, 엄마.

“아냐, 가지 마, 제발, 데이지···.”

-나는 엄마와 아빠의 마음속에 살아 있어. ···서버에도, 살아 있고.]

엄마가 원한다면 언제든 나를 만나볼 수 있다, 라는 말과 함께 사라지는 데이지.

딸의 얼굴이 사라진 텅 빈 화면을 손으로 쓸며, 눈물 젖은 얼굴로 미소를 짓는 엘라의 모습으로 끝이 나는가 싶지만-

‘그 텅 빈 화면 너머로, 소설의 무대가 전환되지.’

[“엄마. 나는 늘··· 엄마의 마음속에 살아 있어. 아니···.”

흐느끼던 엘라가 제 어머니, ‘데이지’를 보며 중얼거린다.

“엄마는 단 한 번도, 내 마음속을 떠난 적이 없어.”]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드러나는 진실.

···그것은 사실, ‘데이지’는 딸이 아니라 어머니의 이름이었다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 ‘데이지’는 내가 열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버스에서 내리다 사고를 당한 어머니 데이지.

너무도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녀의 남편과 딸은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낸다.

[그 후로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데이지’라는 이름을 입에 담은 적이 없다.]

어느덧 이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딸 엘라가 어머니 데이지의 나이가 되었을 때-

[‘기억 속의 누군가를··· 랜덤으로 되살리는 기술이라고?’]

개개인의 기억을 랜덤으로 재구성하여 가상현실 속에 재현해내는 AI 기술이 개발되고, 엘라는 그 프로젝트에 베타테스터로 지원한다.

[나의 기억을 자료 삼아 만들어진 나의 어머니 ‘데이지’는 어째서인지-

‘스쿨버스에서 내리다··· 사고를 당했다고요?’

열 살짜리 딸 ‘데이지’를 잃고 좌절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화면 너머에서 자유의지를 지닌 듯 움직이는 AI 어머니에게 처음에는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지만.

자신이 엄마의 부재를 힘겨워한 만큼이나, 딸의 부재로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네, 엄마.]

···그리하여 AI 챗봇을 가장해 어머니와 소통하는 딸 엘라.

그간 하고 싶었던 수많은 말들을 가상현실 속 데이지와 나눈 뒤-

[“나는 사라지지 않아, 엄마.”]

엘라는 화면 너머 AI 캐릭터 ‘데이지’를 놓아주기로 결심한다.

[난 어디에도 가지 않아, 엄마.

이제 나는 어느덧 엄마와 같은 나이가 되었지만···]

상실 그 자체로 인한 아픔보다도.

그 너머,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기억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며.

[이제야 그녀를, 데이지를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 문장을 머릿속에 새기듯 읽은 레너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엘라는 AI 데이지를 통해··· 어머니의 죽음을 온전히 애도한 셈인가.’

유진.

그 아이는 어떻게 그 나이에 이런 걸 써낼 수 있는 걸까.

글쎄, 자신이 아주 잘못 짚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정도의 절절함은-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오지 않고서는 실현 불가능한 성질의 감정이 아닐까.’

어느새 창 밖에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레너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

다음 날 오후, 문예창작 클럽룸.

쓰읍, 나는 괜스레 마른침을 삼키며 클럽원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합평이란 게 생각보다 꽤 긴장되네.’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는 거라서 그런가, 어떤 의미에서는 출간할 때보다도 긴장감이 더한 것 같다.

···음, 책이 출간될 때는 매번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쯤 미스터 케빈은 내 SNS 계정을 준비하고 있으려나.’

우리는 어떤 플랫폼으로 할지 고민하다가, 역시 인스타그램이 제일 낫겠다는 결론을 내린 터였다.

‘만들고 관리하는 건 제가 할 테니, 작가님은 인사말만 작성해주시죠.’

그래서 그것도 넘겼고, 오늘 저녁 중에 계정을 개설해 에이전시 메일로 홍보할 거란다.

‘전에 얘기했던 대로, SNS 오픈을 기념해 독자 QNA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SNS를 통해 독자들에게 받은 질문 중 몇 개를 골라 답변하는 것.

딱히 부담되는 일은 아니기에 그러자고 했다.

“다들 모였구나.”

그리고 지금, 여느 때처럼 밝고 깔끔한 클럽룸 안.

둥그렇게 붙여놓은 책상에 모두가 둘러앉은 가운데, 미스터 레너드가 입을 열었다.

“자, 오늘은 다들 알다시피 유진의 작품을 가지고 합평하는 날이다. 는 다들 읽어왔겠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클럽원들.

제일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미아였다.

“솔직히 엄청 놀랐어. ‘AI’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감성적인 작품을 써낼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

“맞아 맞아! 난 사실 유진이라면 하드SF스러운 단편을 쓰지 않았을까 기대도 했는데···. 아 맞다, 난 데이지가 자비스(아이언맨의 AI비서)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아 좀, 제이든.”

미아가 제이든의 말을 자르자 낄낄거리는 클럽원들.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 가운데, 각자의 소감이 이어졌다.

“주인공 엘라가 ‘가짜’ 데이지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과, 자꾸만 집착하게 되는··· 양가 감정 사이에서 매순간 흔들리는 모습이 너무 생생하더라.”

샬롯의 말을 받는 미아.

“아 그리고, 난 사실 ‘데이지’가 엄마의 이름일 거란 건 상상도 못 했어.”

“맞아 맞아,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라···.”

“아닌데? 난 처음부터 짐작했는데?”

제이든의 말에 미아가 그를 흘겨본다.

여하튼, 감상은 그 후로도 한참 이어졌다.

“나, 이거 읽다가 펑펑 운 거 알아?”

“난 엄마한테 가서 사랑한다 그랬어, 흐윽.”

“난 아빠 체육관에서 도구 정리하다가 울어버렸음···.”

우람한 제이든이 말하길, 웨이트머신 손잡이에 자기가 흘린 눈물이 아직도 남아 있을 거라고.

통통한 체격에 두꺼운 안경을 쓴 로완이 끼어들었다.

“야 잠깐만, 지금 이거 무슨 눈물 배틀이야? 누가 더 많이 울었나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로완 넌, 안 울었고?”

“···어?”

“너 은근 잘 울잖냐, 전에 다같이 <향수의 섬> 봤을 때도 엉엉거리면서-”

“내, 내가 언제!”

얼굴이 벌개진 채 부정하는 로완의 반응에 피식 웃음이 나는 가운데.

‘다들 감동적으로 읽은 것 같아 다행이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 기분이다.

여하튼, 아이들은 좀 더 본격적인 의견을 개진해나갔다.

속의 시대 배경이라든가, 엘라와 아버지의 관계라든가, 데이지를 향한 두 사람의 심리라든가···.

“하지만 역시 제일 좋았던 건, AI 데이지를 통해서 엘라가 정말로 제대로 된 작별을 하는 장면이겠지.”

그러다 샬롯이 그런 말을 꺼내자, 제이든이 드물게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음, 사실 난 이거 보며 재작년에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를 생각했어. 내가 어릴 때 할머니 손에 자라서 그런지, 돌아가시고 나서 너무 힘들었는데···.”

“···.”

“내가 이 소설에서처럼 할머니를 가상현실에서 만난다면 어떨까, 상상을 했어.”

한결 조용해진 클럽룸 안, 제이든의 가느다란 목소리만이 이어졌다.

“그러면 좀 더··· 제대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

“···.”

제이든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고, 클럽원들 모두가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때.

“···다들, 아주 좋은 의견을 많이 내줬구나.”

어느새 시간이 다 된 것을 확인한 미스터 레너드가 -열정적으로 토론한 탓에 벌겋게 달아오른- 학생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끝내기 앞서 부족한 점이라든가, 아니면 이런 부분을 보완하면 좋겠다 싶은 건 없을까?”

그러자 다들 고개만 갸웃하며 아무 말도 안 하던 그때.

“···저기.”

로완이 조금 긴장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의 합평 스타일을 잘 아는 미아가 미간을 살짝 좁히려던 그때.

“데이지의 묘 앞에서 시를 읽어주는 부분 있잖아. 소설에선 그냥 시를 읽어줬다, 하고 넘어가는데.”

그 부분에서 실제 시를 한두 문장 정도 발췌해서 엘라의 대사로 넣어주는 게 어떻냐는 제안.

“···오, 너무 좋은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로완은 조금 민망해했다.

“그, 그렇다니 다행이고. 사실은 내가 그 부분 읽으면서 워즈워스의 시 중에 이런 게 생각나서···.”

혹시 몰라서 뽑아왔다며 시가 프린트된 종이까지 건네줬으니.

“와, 너무 고마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음, 하며 머리를 긁적이던 로완이 말했다.

“유진 네가 전에 그랬잖아, 보완할 점을 지적할 땐 해결책도 제시하는 게 좋다고.”

“···그랬지.”

그러게, 내가 그랬지.

이유 모를 뿌듯함이 느껴지던 그때.

“아 그리고··· 이 소설, 그냥 우리끼리 합평만 하고 끝내긴 아쉽다고 생각해.”

로완이 덧붙인 말에 다른 클럽원들이 동의했다.

“맞아! 이거 어딘가에 발표하면 좋을 텐데.”

“문학지에 기고해보면 어때?”

“글쎄, 어디가 제일 잘 맞으려나···.”

자기 일처럼 열띠게 얘기하는 친구 녀석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짓고 말았다.

*

그로부터 약 10여 분 후.

의 합평이 마무리됐다.

각자 자리를 정리하고는 나가던 중, 미스터 레너드가 내 어깨를 툭 치며 한마디했다.

“유진, 소설 정말 좋았다.”

“고맙습니다.”

“뭐랄까. ···경험에서 우러나온 듯한 생생함이, 읽는 이의 마음을 더 울리는 기분이더구나.”

‘경험에서 우러나온’이라는 표현에 나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다른 클럽원들과도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것 같고 말이지.”

그 말에 나는 로완의 뒷모습을 슥 돌아보며 말했다.

“네, 선생님 말씀이 맞네요. ···클럽활동, 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아,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

문예창작 클럽 고문, 레너드 하인스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 말인데, 스콜라스틱 문학대회에 내보내는 게 어떨까.”

스콜라스틱 문학대회.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장 명망 있는 청소년용 공모전의 이름에 눈을 크게 떴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아까 친구들이 말한 대로 이대로 끝내긴 아쉬운 작품이기도 하지만.”

수상하는 경우, 상금과 작품집 출간, 전시 등의 영예를 안는 것은 물론-

미스터 레너드가 벽에 붙은 게시물을 가리켜 보였다.

[문예창작 관련 장학제도가 있는 대학 명단]

···

“어떤 학교든 간에 장학생으로 선발되는 데 유리하니 말이다.”

“···.”

대학 진학.

아직은 10학년이니 내년에 본격적으로 고민하면 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진 네가 지금 10학년이지. 네 실력이라면 11학년 마치고서도 충분히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다.”

미국의 고등학교는 4년 과정이다.

12학년까지 다니고 대학에 가는 것이 일반적인 루트인데···.

“잠깐만, 지금··· 조기진학을 얘기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 말과 함께 내게 한 뭉치의 서류를 건네는 미스터 레너드.

“이건.”

“아이오와대를 비롯, 여러 대학들의 문예창작 장학 프로그램 안내 서류다. 그리고 너만 괜찮다면-”

레너드 선생님의 두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유진, 난 너를 우리 학교 대표로 아이오와대의 ‘벅스바움 스콜라십’ 프로그램에 지원시켜보고 싶구나.”

“···!”

벅스바움 스콜라십.

소수의 재능 있는 학생을 선발해 4년 전액 장학금에 매달 학업 보조금까지 지원해주는, 파격적 혜택의 장학금 제도.

레너드 하인스의 설명에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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