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에서 우러나온(3)
*
한편 권상준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유진이 를 완전히 탈고한 지도 1주가 넘어가는 시점.
권상준은 이제야 드디어 아들의 단편소설을 손에 쥐게 된 참이었다.
“이걸 그렇게 안 보여주려고 하더니, 이제서야···.”
원고 겉장에 쓰인 라는 제목을 보며 그는 잠시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은 유진이에게서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원고를 읽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지만.
‘음···. 지금 말고 나중에요, 아버지.’
아들은 어째서인지 다 완성하고 나서도 그다지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지나가듯 그 얘기를 꺼냈더니 케이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도 참,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어?’
‘뭐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 그걸 읽는다 생각하면 많이 쑥스러울 거 아니야.’
‘···그런가, 하긴.’
다른 사람들은 이 가 유진이 제 엄마를 생각하며 쓴 글이라는 걸 모를 테니까.
헌데 그 같은 쑥스러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아버지, 이거 한 번 읽어보세요.’
아들은 상준이 이 작품을 단념한 후에야 원고를 가지고 왔다.
그러면서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를 스콜라스틱 문학대회에 내보내보려고요.’
‘···스콜라스틱 대회?’
여태 그런 쪽에 관심이 없던 녀석이 공모전에 도전한다는 말에 의아해 이유를 물어보자-
‘아, 레너드 선생님이랑 따로 대학 진학 상담을 해봤거든요.’
조기 진학이라고?
11학년만 마치고 대학에 조기입학하겠다는 말에 상준은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 사이에 우리 아들이 참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깨달음이 들어서.
사실.
예전의 유진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고뭉치에 가까운 아들이었다.
‘뭘 봐요.’
자신을 볼 때마다 늘 얼굴을 구긴 채 사납게 말하기 일쑤였고.
아버지인 자신 또한 먼저 다가서려 했다가도, 그 날카롭게 세운 가시에 찔려 괜한 말을 뱉곤 했다.
‘유진이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요즘 태도가 아주···.’
그러다 보니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면서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는 상태가 꽤 오래 이어졌는데.
그때 그 나무에서 떨어진 이후로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듯, 유진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던 아들이 대학에 조기 진학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히다니.
자식의 긍정적인 변화만큼 부모에게 뿌듯한 일도 없는 법이다.
“그럼 어디.”
얼마 전 아들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권상준은 의 겉장을 넘겼다.
[데이지.
D-A-I-S-Y.
매일 같이 불러보지만, 공기 중에서 공허하게 흩어지는 소리···]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종이 원고를 쥔 손이 조금씩 떨려왔고.
[“나는 사라지지 않아, 엄마.”]
중반을 넘어서자 언젠가부터 꽉 다물고 있던 입술이 부르르 떨리더니-
[이제야 그녀를, 데이지를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서야 참았던 오열이 터져 나왔다.
흡사 짐승소리처럼 들리는 울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현희야, 현희야···.”
꽤 오랫동안 부르지 않았던 아내의 이름을 수차례 부르며 상준은 젖은 눈을 거칠게 비볐다.
어쩌면, 유진이가 제게 이 소설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 것은 단순히 쑥스러워서가 아니라-
‘제 아버지를 덮쳐올, 어마어마한 감정의 풍랑을 예상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 같은 깨달음이 머릿속을 울리는 가운데.
아내의 이름을 입에 담은 것을 계기로, 상준은 묘 앞에서조차 하지 못한 말들을 입 밖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
다시,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아마존 미팅을 마치고 S&F 사무실로 돌아온 마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완전 대박이에요 대박!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이···.”
···그리고 그가 전한 소식에 SFF프레스 직원들 모두 탄성을 터뜨렸다.
“에디터픽이라고? 맙소사!”
“엄청나군!”
“That’s sick!”
“이거 이거, 지난번이랑은 아예 스타트 지점 자체가 달라지겠는데?”
반갑다 못해 놀라운 소식에 사무실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 상황.
아마존에는 가장 노출도가 높은 ‘이달 최고의 책’부터 시작해 여러 종류의 프로모션이 존재한다.
그리고 ‘아마존 에디터픽’은 아예 여기에 선정된 책만 읽는 독자들이 있을 정도로 파급력과 공신력을 모두 갖춘 프로모션.
‘무엇보다도, 에디터픽 카테고리 첫 페이지에 선정작들 표지가 꾸준히 노출된다는 것!’
아무런 노출 없이 아마존 차트 100위로 진입했던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그때와는 에곤 K의 위상과 인지도 자체가 달라졌을 뿐더러, 네뷸러상 후보 소식까지 알려진 지금 이 시점에 아마존 에디터픽까지 확정이라니.
청소년 SF 부문 1위를 기록했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어쩌면···
“아예 SF 부문을 통틀어 1위 찍어보는 거 아냐?”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마크의 시선이 책상 위에 있는 프로젝트 보고서로 향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북엑스포아메리카 2024 -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홍보 이벤트 계획서]
매년 5월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 개최되는 ‘북엑스포 오브 아메리카(BookExpo America).
줄여서 BEA, 혹은 ‘북콘’이라 부르는 미국 최대 도서박람회에서 SFF프레스는 <피터 팬>의 대대적인 홍보 이벤트를 개최할 계획이다.
수십 만 명의 독서 인구가 모이는 자리이니만큼, 독서 애호가들이 새로운 책과 작가를 발견하는 기회이기도 했는데.
‘그러니 이번 북콘에서 <피터 팬>을 대대적으로 홍보해야 한다!’
이 같은 SFF프레스의 방침에 따라,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북콘 행사는 다음과 같이 진행될 예정이다.
첫째, 출판계 네임드를 초청해 <피터 팬>에 관해 좌담회를 나누게 하고.
둘째, -어찌 보면 이게 핵심인데- 현장 독자 한정으로 에곤 K의 친필 사인본을 판매하는 것.
‘이거, 벌써부터 대성공의 예감이 드는걸.’
사무실 직원들 모두가 잔뜩 신이 나 있는 가운데.
보고서를 보며 으흐흐 웃던 마크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대표님께 보고해야지!”
*
아이오와 대학 캠퍼스 안에 위치한 라이터스홈 협력 사무실.
“라미 감독이신가요? 이쪽으로 오시죠.”
그 안의 미팅룸으로 안내받은 훈훈한 외모의 청년은 손바닥에 자꾸만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아, 엄청 긴장되네···.”
막성스 라미.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각색을 맡게 된 신인 감독은 오늘의 미팅을 위해 뉴욕에서 아이오와까지 날아온 참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 오는 것은 에곤 작가 본인이 아닌, 그의 에이전트뿐이긴 하지만.
‘대신 에곤 작가님은 음성 채팅으로 미팅에 참석하길 원하시는데, 괜찮으실까요?’
에곤 K와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그런 황금 같은 제안을 자신이 거절할 리가 있겠는가.
‘그럼요! 물론, 아니 대환영입니다!’
비록 음성 채팅이긴 하지만, 에곤 K 작가와 직접 논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얼마나 들떴는지 모른다.
기대감과 긴장감이 반반 뒤섞인 채, 애꿎은 손바닥만 바지에 문질러 닦는 중.
‘미팅 준비도 차고 넘칠 정도로 해왔는데 말이지.’
거적떼기 같은 평소의 차림 대신 비즈니스 캐주얼을 차려입은 모습이 꽤 근사한 가운데.
막성스는 테이블에 올려둔 자신의 자료들을 하나 하나 다시 살폈다.
‘스토리보드도 완성해왔고, 시나리오 초안도 가져왔고, 영화제작사 후보 관련 자료들도···.’
그래도 약속시각까지 시간이 좀 남은 탓에 커피를 들이켜며 타는 속을 달랬다.
그로부터 한 10분 정도 지났을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막성스가 얼른 외쳤다.
“들어오시죠!”
···너무 긴장했던 탓에, 목소리가 갈라진 채로 튀어 나왔다.
이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곰처럼 큰 덩치에 다소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
“안녕하십니까, 에곤 K 작가님의 에이전트 케빈 클레그입니다.”
“어··· 안녕하세요.”
괜히 위압되는 기분에 어색하게 대꾸한 것도 잠시.
“흐흐,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군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막성스 감독님!”
에이전트의 미소와 붙임성 있는 태도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자, 그럼 어디···.”
이윽고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
케빈이 화상회의용 캠을 설치하고는 노트북을 펼쳐 음성 채팅 프로그램을 시행할 준비를 하는 가운데.
“그나저나 감독님, 저희 에곤 작가님이 SNS 계정을 개설했습니다.”
가벼운 화제로 대화의 물꼬를 뜨자, 막성스가 반갑게 대꾸했다.
“아, 이미 알고 있죠!”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내 보인다.
“오, 이미 팔로우하셨네요?”
“그럼요, SF서브레딧에 올라오자마자 바로.”
“이야 감독님도 서브레딧 보시는군요, 생각도 못 했어요.”
“제가 보기보다 좀 많이 덕후라서··· 사실은 QNA 질문도 남겼는데 그건 선정 안 됐더라고요, 하하.”
감독의 말에 케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엇, 정말요? 생각도 못 했네요.”
“근데 선정된 질문들이 제 질문보다 더 좋아서 만족했네요, 특히··· 이 질문.”
막성스가 열렬한 기세로 맨 마지막 항목을 가리켜 보였다.
“캐릭터에 관한 작가님의 철학이 엿보여서 굉장히 만족스러웠습니다.”
바로 그때, 띠링- 소리가 나더니.
때마침 연결된 음성 채팅 프로그램 위로 [에곤 K]라는 프로필이 떴고.
-답변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감독님.
진중한 기계음의 목소리가 노트북에서 흘러나왔다.
“으아아아-!”
저도 모르게 깜짝 놀란 막성스 감독은 잠시 얼굴을 붉혔지만.
“우와우와, 너무 신기하네요··· 아니 이게 아니지, 에곤 작가님, 이렇게 대화하게 돼서 너무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라미 감독님과 대화 나누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실, 제가 <사라진 여름>을 아주 감명깊게 봤는데···.
“으어, 작가님이 제 영화를··· 이거 믿어지지가 않는데요.”
에곤 K 쪽에서 먼저 그렇게 나와준 덕분인지, 긴장했던 것도 까맣게 잊은 막성스는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그건 그렇고, 맞다 작가님. 그··· QNA에 나왔던 ‘저희 집의 귀염둥이’ 말인데요.”
-올리비아 캐릭터 말씀이시죠.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막성스.
“네네, 바로 그 올리비아! 현실의 인물을 모델로 하셨다고 했는데··· 그, 손녀 따님이 있으신 거죠?”
-···네?
너무 개인적인 질문을 던진 걸까.
에곤 K가 -기계음인데도 불구하고- 당황한 것을 느끼며 젊은 감독은 얼른 말을 물렀다.
“아니다, 제가 섣불렀네요! 이런 개인적인 부분은 답해주지 않으셔도 되고요.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스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기를.
“역시, 경험에서 우러나온 건 다르다- 뭐 그런 느낌이랄까요.”
-···.
그리고 그 시각, 노트북 화면 너머.
‘그런 거··· 아닌데.’
아이오와시티의 자기 집에서 음성채팅으로 미팅에 참여 중인 유진은 쓰게 웃었다.
타닥, 타다다닥.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메시지를 입력하면, 기계음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어, 음···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때.
“오빠아~~ 뭐해?”
“이따 놀아줄게 클로이.”
‘우리 집 귀염둥이’를 방 밖으로 내보낸 유진은 픽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그가 아직 모르는 것이 있다면-
-우리집 귀염둥이라는 건 누굴까
└누구겠냐 뻔하지
└에곤 K에게 귀여운 손녀가 있다는 데 내 게임용 키보드를 걸겠어
└아 뭔가 귀엽다 ㅋㅋ 외모는 미치광이 박사 같지만 어린 손녀에게는 따뜻한 할아버지
···
‘우리집 귀염둥이’를 여동생이 아닌 손녀딸로 착각하는 독자가 막성스 말고도 수없이 많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