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48화 (48/126)

가족을 위한 선물(2)

창문으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햇살 아래 매끈하게 빛나는 차체.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오는 가운데, 아버지의 설명이 이어졌다.

“정비까지 깨끗하게 다 마친 거니 걱정하지 말고 타고 다녀라.”

엔진오일이나 냉각수, 연료필터도 전부 새로 갈아놨다는 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고마워요 아버지.”

“녀석, 니가 산 차인데 나한테 고맙긴.”

그 말에 하하 웃었지만.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이런 거 하나 하나 챙기는 게 얼마나 신경 쓰이는 일인지 잘 안다.

각종 교체비용이며, 세차용품, 트렁크 정리함 이런 건 아버지 선물인 듯했고.

“오, 시트 커버 넘 좋은데요?”

“후후, 그건 내 선물이야~”

고급스러워 보이는 시트 커버와 차량 방향제는 케이트의 선물.

그리고-

“오빠아.”

어느새 케이트를 따라 차고까지 온 클로이가 내 손을 꼭 쥐었다.

“클로이, 오빠가 클로이도 태워줄까?”

“응, 근데. 나도 선물 있쪄.”

“선물?”

동생이 등 뒤에 감추고 있던 것을 꺼내보였다.

그건 다름 아닌, 도화지에 직접 그린 그림.

“우리 가족 그림.”

“···.”

“엄마가, 가족끼리 축하할 일 있을 땐 션물하는 거래애~ 아, 여기 이 사람은 효니야~”

땅에는 네 명의 가족이.

하늘에는 ‘효니’, 그러니까 우리 엄마 김현희로 추정되는 예쁜 천사가 그려져 있다.

클로이가 그린 ‘가족 그림’에 나도 모르게 눈을 깜박이고 말았다.

“···그래.”

아주 조금, 목이 메어왔다.

“우리 클로이가 오빠보다 똑똑하네.”

“아닌데? 오빠가 천잰데? 우리 어린이집에서 오빠는 유명해~ 지니어스 유진이라고~~”

친구들한테 토끼 남작 얘기를 들려주자, 다들 ‘너희 오빠 지니어스야!’라고 했다는 것.

“그래? 친구들이 재밌어해?”

“웅, 어어엄청! 맨날 다음 얘기 들려달라고 하는데···.”

히잉, 소리 내는 클로이.

“자꾸 까먹어서, 기억이 안 나아.”

“오빠가 또 해줄게, 알았지?”

“웅.”

양쪽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채, 나는 네 명의 가족 중 한 명을 짚어 보였다.

머리에는 왕관, 목에는 보석 목걸이를 두르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근데 클로이, 이건 누구야?”

그러자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대꾸하는 동생.

“당욘히 클로이지.”

···공주님인 줄 알았는데 클로이였구나.

“이게 오빠, 이게 클로이.”

“···클로이가 오빠보다 더 커?”

“웅, 내가 더 커질 꼬야.”

푸흐, 귀여운 대답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키를 들고 차에 올라탔다.

“잠깐 드라이브 좀 하고 올게요!”

운전석에 앉자 시원한 시트의 감촉이 기분좋다.

부웅- 하고 걸리는 시동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나의 첫 차.’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완전히 첫 차는 아니지만.

회귀 이전, 대학 가기 전까진 한 번도 내 차를 가져본 적이 없는 걸 떠올리면 뭔가 감개무량하다고 할까.

···그것도 내 인세로 산 차이니 말이다.

‘아, 기분 죽여주네.’

운전석 위치도 조정하고, 네비게이션도 세팅을 마친 후.

나는 곧바로 왓츠앱 단톡방을 열어 사진 하나를 보냈다.

[인생첫차.jpg]

그리고 잠시 후-

-야, 이거 뭐야!

-미쳤다··· 넘 예쁘잖아···!

곧바로 화상통화를 걸어온 네드와 아델에게 물었다.

“저녁 먹었냐?”

고개를 젓는 두 사람.

“데리러 갈 테니까 밥 먹으러 가자.”

그러자 폰 화면 너머에서-

-이야호—!

-유진의 첫 차—!

네드와 아델이 환호했다.

*

그로부터 다시, 30분 전.

“끄으으, 다··· 했다아···.”

네드는 코믹콘 참가용 개인지 원고를 이제 막 마무리한 참이었다.

구부정한 자세로 내내 작업해서인지 온몸이 쑤시는 기분인데.

‘네드, 25분마다 스트레칭하는 거 잊지 말라고!’

언젠가 이 방에서 잔소리를 잔뜩 쏟아내고 갔던 유진의 목소리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목과 팔을 돌려가며 스트레칭을 했다.

뿌득뿌득 소리가 나더니 좀 시원해진다.

‘그나저나, 책은 언제쯤 나오려나.’

언젠가부터 에곤 K의 완벽한 팬이 되어버린 그는 습관처럼 SF서브레딧에 들어갔다.

[2.4k 에곤 K QNA 좋더라]

네드 자신도 팔로우한, 에곤 K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라온 QNA에 관해 이미 많은 이들이 얘기하고 있었는데.

-<호수괴물>의 영감에 관한 문항 좋더라

-그러게 뭔가 뒷이야기? 비화를 알게 된 느낌인

-낚시하다가 그런 소재를 떠올렸을 줄은 몰랐네

└대체 어느 호수에서 낚시를 하시길래ㄷㄷ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구상에 관련된 비화나, 올리비아 캐릭터에 대한 관심 등.

-나는 우리집 귀염둥이 얘기가 젤 좋더라

└나도 ㅋㅋㅋ

└세상을 등진 채 공포의 호수에서 낚시하는 노인의 곁을 지키는 귀여운 손녀라니···

└LOL(크크크)

└>_Awww(꺄 귀여워)

“푸흐, 손녀래 손녀.”

‘우리집 귀염둥이’의 진실을 아는 네드가 낄낄 웃었다.

-그나저나, 담번에는 판타지에 도전하고 싶다는데

└에곤 K가 쓰는 판타지라니ㄷㄷㄷㄷ

└상상만 해도 뽕이 찬다

└아··· 신작 얼른···

에곤 K가 쓸 판타지 소설에 대한 관심도 상당한 가운데.

-빠는 것도 정도껏이지 보기 좀 그렇네

└백 퍼 동의. 그래 봤자 아직 신인임

└ㅇㅇ 이미 다 읽은 <피터팬> 단행본은 대체 왜 사는 거냐

물론 이런 과한 인기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았지만, 에곤 K라는 거물 신인의 등장을 몹시 반기는 것이 SF팬덤의 주된 분위기.

그리고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지금 이들이 가장 기대하는 것은-

-<피터팬> 예약 주문한 사람 있냐

└나야 나

└아 못 기다리겠다

└예약구매 한정 굿즈도 기대됨 ㅋㅋ

···

당연하지만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의 정식 출간이었으니까.

거기에 -표지 이미지를 사용해- 특별 제작한 책갈피와 펜, 스티커 등의 자잘한 문구류 굿즈 또한 팬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흐, 그 맘 이해하지.”

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못 기다리겠다는 그 심정을 네드 자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그럼, 알지.’

유진이 유명해지게 된 계기이자, 자신이 제일 먼저 읽었던 중편.

그걸 책으로 얼른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컸으니까.

그렇게 히죽거리며 SF서브레딧 게시판을 뒤적이던 그때-

지잉, 하며 폰이 울리더니 BFF(찐친) 단톡방에 이미지 하나가 올라왔다.

“···어?”

그리고 그로부터 약 10분 뒤.

-나와라.

전화가 오자마자 아래로 내려가니.

“와씨, 미친.”

유진이 몰고 온 네이비색 SUV가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

옆집에 들러 아델을 태운 뒤 5킬로미터 정도 더 가서 네드를 태웠다.

손에 착 감겨오는 핸들의 감촉을 느끼며 시내를 향해 차를 모는 중.

“유진 너 의외로 운전 잘한다···?”

“그러게, 무사고 10년 운전자 느낌이네.”

신이 난 둘을 슥 돌아보며 물었다.

“니들 벨트는 잘 멨지?”

“···누가 건강광인 아니랄까 봐.”

창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교외 풍경이 저녁 노을 아래 붉게 물든다.

‘언제였더라, 케이트의 차를 타고 이 길을 달릴 때만 해도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이 모든 것들이 정말 현실이구나, 라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차가 거의 없는 한가한 도로를 달리다가.

“안녕하세요, 미스터 톰슨.”

“오! 유진, 차 샀구나! 축하한다 하하.”

아는 얼굴을 마주치면 잠깐 인사도 해가면서 5분 정도 더 달린 뒤.

“자.”

우리는 식당에 도착해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두 친구에게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증정본을 하나씩 건네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녀석들.

“완전··· 죽여준다···!”

“꺄아, 표지 왜 이렇게 예뻐?”

아마라 아체베 디자이너의 디자인이 근사하긴 한가 보다.

아델이 너무 예쁘다며 호들갑을 떠는 가운데, 네드는 전공자스러운 감상을 늘어놓았다.

“와, 이거 신기하네. 수채화 물감을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찍어낸 느낌인데···.”

가만히 보면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

그것도 언뜻 소년 같지만, 보면 볼수록 어른처럼 보이는 것이 신기하단다.

“피터 팬딧이란 캐릭터의 특징을 잘 살려낸 표지라는 거네?”

“그으렇지!”

아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네드.

‘아마라 아체베.’

지금도 그렇지만, 회귀하기 전 그녀는 북디자이너계의 셀러브리티였다.

···그녀가 디자인한 책 표지들만 따로 모아서 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나중에 나도 내 책이 그녀의 디자인 리스트에 있었다- 라고 자랑할 수 있는 작가가 된 건가, 하하.’

빅토리아 첸 팀장의 수완 덕분에 이런 영광도 누려보는구나 싶다.

‘이번 책은 특별히 더 표지에 공을 들였습니다. 아무래도 이미 잡지에 게재된 것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거다 보니···.’

기존에 읽은 독자들을 생각해서라도, ‘소장용 가치’가 확실한 책을 목표로 했다는 것이 빅토리아 팀장의 설명.

정식 출간일은 1주 뒤.

지난번보다 모든 준비가 한참 전부터 이뤄진 덕에 완성본이 빠르게 나온 터였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버거와 감자튀김, 콜라를 먹으며.

“아 그리고.”

나는 두 친구에게는 약간 폭탄선언처럼 느껴질 얘기를 꺼냈다.

“나, 대학 조기진학하려고.”

“아하. ···뭐라고?”

“조오기진하악?”

역시나 눈이 튀어나올 듯 놀라는 아델과 네드에게-

“···그렇게 된 거야.”

미스터 레너드와 상담했던 얘기들을 쭉 들려줬다.

“흐어, 뭔가 되게 갑작스럽네.”

“근데 레너드 샘 말대로, 기회가 된다면 하는 게 무조건 좋지이!”

나는 상담하며 메모해온 내용을 다시 눈으로 훑어보았다.

-서류라든가 본격적인 지원 준비는 내년 1월부터

-지원자격을 갖추는 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함

조기 진학.

그것도 벅스바움 스콜라십처럼, 전액 장학금 지원 자격을 갖추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스콜라스틱 공모전?”

“아, 나도 들어봤어! 그거 문예창작 말고 예술 쪽도 있을걸?"

무려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는, 가장 권위 있는 청소년 대상 공모전에서 지역상 이상을 수상하는 것.

-재능 있는 십대에게 전시 및 출판, 장학금 기회 제공

-7학년부터 12학년까지 지원 가능, 지역상&전국상

트루먼 카포티, 조이스 캐럴 오츠, 존 업다이크 등, 역대 수상자들 명단이 매우 화려하다.

시상식도 굉장히 성대하게 진행되는데, 이쪽 전공을 꿈꾸는 학생들에겐 일종의 로망이란다.

수상작들은 작품집으로 묶여서 출간되며 무엇보다도-

‘전국상을 받을 경우, 대학 장학금 외의 추가 장학금도 받을 수 있다고 했지.’

물론 레너드 선생님은 여기서 떨어지더라도 크게 걱정할 건 없다고 했다.

‘유진 네겐 기존의 전공 관련 실적이 있으니 말이다. 셰익스피어 앤솔로지라든가, 교지에 실린 소설처럼.’

어쨌거나.

나는 원고를 한 번 더 다듬어 곧 다가올 스콜라스틱 공모전에 제출하기로 마음 먹은 터였다.

“그럼 유진, 대학 가면 기숙사 생활 하겠네?”

“흐으, 유진, 멀리 가도 우리 잊으면 안 돼···.”

벌써부터 작별할 준비를 하는 둘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멀리 가긴 뭘 멀리 가.”

“응?”

“아이오와대 지원할 건데.”

아이오와시티에 위치한, 말하자면 우리 집 코앞에 있는 대학교.

‘아이오와대’라는 이름에 네드와 아델의 얼굴이 환해졌다.

*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인 4월 15일.

에곤 K의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SF계의 떠오르는 신성, 에곤 K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전격 출간!]

[에곤 K의 <피터 팬>이 과연 팬덤 바깥의 독자도 사로잡을까?]

···이미 다수의 팬덤 독자들은 <사이언스앤드판타지>에 발표된 중편소설들을 읽은 상황이지만.

어느 기사에서 지적한 대로, SFF프레스는 이번 책을 통해 ‘팬덤 바깥’으로 독자층을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서점가의 소리 없는 전쟁: 라이징스타 작가들의 신간 경합]

[마커스 스톤, 카일리 하버, 에곤 K··· ‘거물 신인들’ 중 최후의 승자는 누구?]

4월 중순, 유명 작가들의 신간이 대거 쏟아져 나온 가운데.

어떤 작품이 가장 많은 독자의 선택을 받을지를 점치는 기사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내내 <피터 팬> 단행본 출간을 기다리던 SF커뮤니티의 반응은 뜨거웠다.

-FINALLY(드디어)!!!!!

└집에 온 실물 책 인증.jpg

└크으 표지가 쩌네

└<피터팬>은 영화화 언제 하려나

└ㅇㅇ 완전 기대됨

└근데 이건 블록버스터급으로 해야 할 듯

└<호수괴물>은 벌써 진행 중인 것 같던데

···

그리고 그 시각, 캘리포니아의 SFF프레스.

직원들의 시선은 사무실 한가운데에 놓인 대형 모니터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와우.”

“이거··· 고장난 거, 아니지?”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물류 시스템상의 ‘판매부수’ 수치를 멍하니 보는 가운데.

“···하.”

비현실적인 기분에 한숨을 내쉰 마크는 자신의 모니터 화면 속, 서브레딧 게시판을 보았다.

새로고침할 때마다 댓글이 쭉쭉 늘어나는 가운데-

[12.3k 에곤 K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출간!!!!!]

···

└BEA에서 에곤 K 행사 안 하려나

└bea가 뭐냐

└북콘, 북엑스포오브아메리카

└그러게 신간 출간 기념해서 뭐 할 만도 한데

···벌써부터 ‘북콘’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독자들의 댓글에, 마크는 잊고 있던 사실을 황급히 떠올렸다.

‘북콘에서 판매할 친필 사인본!’

손으로 일일이 각 권의 면지에 사인해야 하는 만큼, 작가에게 사전에 요청해야 한다.

대략 300부만 잡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 추세로 보면, 최소 1천 부는 잡아야겠는걸.”

···한순간 에곤 작가님의 어깨 건강이 우려되었지만.

‘에이, 아냐. 연세가 좀 있으셔도 그 정도는 괜찮겠지.’

고개를 저으며 그런 생각을 애써 머리에서 밀어냈다.

두 개의 세계

*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이 정식 출간된 지 1주가 지났다.

미국 최대 서점 아마존닷컴에서는 아예 출간과 동시에 ‘에디터픽’으로 선정해 이 책을 대대적으로 노출시켰고.

‘팀장님! 굿리즈에서도 SF 분야 페이지에 노출됐습니다!’

수십 만 독자가 상주하는 서평사이트 굿리즈를 필두로 하여 북너드, 릿시, 라이브러리씽 등 대형 독서 커뮤니티 사이트들이 <피터팬>을 주목했다.

그래서인지, 지난번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를 출간했을 때와는 그 열기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으니.

“출간 직후 50위로 스타트라니, 이거 진짜 어마어마하네요.”

<피터 팬> 출간 첫날, SFF프레스에서 다같이 모여 판매현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던 직원 중 한 명이 꺼낸 말에 빅토리아 첸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이야아, 눈부시다 눈부셔.”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네.”

전체 23위.

포스트 아포칼립스 부문 1위, 과학소설 부문 1위, 과학소설&판타지 부문 1위.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서지정보에 적힌 그 어마어마한 기록을 보며 직원들이 감탄하는 가운데, 빅토리아 첸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 SFF프레스에서 출간된 책 가운데 역대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아니, 비단 SFF프레스뿐이 아니다.

출판시장의 빅파이브라 불리는 곳들에서 내놓는 수많은 신간 중에도 저런 성적을 내는 책은 애초 손에 꼽을 정도.

어디 그뿐인가.

‘···대중과 평론가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흔치 않은 작품이니까.’

여하튼, 이러한 대대적인 열풍 덕분일까.

에곤 K의 첫 작품이 SF팬덤 안에서 주로 회자되었다면, 이번 <피터 팬>의 출간 후에는-

“오, 또 북톡이 올라왔네요!”

어느 직원의 말마따나, 종류를 막론하고 다양한 매체에서 그 반응을 볼 수가 있었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사이언스앤드판타지>는커녕, SF를 처음 접해보는 독자가 대부분이라는 것.

[Happy [email protected]_lee, 10시간 전]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읽은 사람? 진심 숨도 못 쉬고 읽었어.

#피터팬#에곤K#책벌레]

└나 SF소설은 처음인데 너무 좋더라

└작가가 천재인가··· 피터팬을 아포칼립스에 넣을 생각을 어떻게 했지

└전작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도 읽어봤는데 좋았음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다양한 SNS 플랫폼에서 독자들의 감상이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다.

“흐흐, 고생한 보람이 있다니까.”

“그러게, 출간 전날만 해도 긴장돼서 잠도 잘 안 왔는데.”

“라이터스홈에서 연락왔는데, 벌써부터 영화제작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다던데요?”

“크으 어마어마하네···.”

희희낙락한 직원들의 목소리가 밝기 그지없는 가운데, 빅토리아는 생각했다.

‘사실, 이 책의 출간을 준비하며 목표한 바가 바로 그거였지.’

···에곤 K의 이름이 SF 팬덤을 넘어서서 팬덤 바깥에서도 들려오게 만드는 것.

‘그 목표가 너무도 물 흐르듯 이루어져서일까.’

조금은 탈력감이 느껴지면서도, ‘좋은 책을 편집하는 일’에 대한 보람과 자부심으로 가슴이 뿌듯해진다.

“흐흐, 이럴 때 새삼 느끼지만 참, 책을 만든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란 말이죠.”

그때, 직원 중 한 명이 꺼낸 말에 빅토리아 첸은 눈을 크게 떴고.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 말을 받았다.

“···좀 놀랐네.”

“네?”

“방금 자네가 한 말이, 바로 지금 내 심정이거든.”

“···.”

누구보다도 유능하고 성실하며 후배들의 귀감이 되는 첸 팀장.

그녀의 보기 드물게 솔직한 말에 직원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피터팬의 단행본이 출간된 이후 한동안 나는 비현실적인 감각에 시달렸다.

‘뭐랄까, 내내 둥둥 떠 있는 느낌?’

그건 아마도-

[S&F편집부_마크 : 작가님 작가님! 1주째 연속 SF분야 1위 유지 중입니다! 지금 이 추세라면···]

[에이전트_케빈 : 작가님 영화 판권 문의 관련 자료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벌써 차기작에 대한 문의가 여러 출판사에서···]

[네드_밀러 : 유쥔유쥔-! 이거 봤냐? https://www.goodreads.com/notes/59815-peter-pan-in-doomed-land]

···

온 사방에서 쏟아지는 축하 메시지와 출간 성적에 대한 보고들.

무서울 정도로 뜨거운 인터넷 반응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더없는 행복에 입꼬리가 실실 올라가다가도-

‘아니, 아직 멀었어.’

그간은 SF팬덤 안에서만 기대받는 신인이었다면, 이제는 팬덤 밖에서 그 존재감을 처음 알리게 된 상황.

···어떻게 보면 이제야 겨우 출발지점에 서게 됐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에곤 K’가 아닌, 권유진으로써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칫하면 휩쓸려갈 놀라운 열풍에도, 여전히 중심을 잡을 수 있음이 다행스럽다고 느껴진다.

‘특히, <잊혀진 성자들> 때와 비교하면 여전히 멀었다는 생각이 드니까.’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지금과 달리, 단 한 작품만에 그 거대한 광풍의 한복판으로 떨어져버린 <잊혀진 성자들> 때의 나는-

“···으, 떠올리기 싫은걸.”

<위대한 개츠비> 속, 피상적인 성공에 눈이 먼 어리석은 주인공과 꽤 닮아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를 떠올리며 일부러 마음을 가라앉히려 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지금 나는 문예창작 클럽활동에 참여하는 중.

“너희도 알 거라 생각하지만, 곧 다가올 5월에 시카고에서 북콘이 열릴 예정이다.”

북엑스포아메리카, 통칭 BEA 혹은 북콘(북컨퍼런스의 줄임말).

이 미국 최대의 도서박람회에는 다양한 분야의 출판관계자뿐 아니라 수많은 독자 또한 방문한다.

각 출판사에서 세워놓은 부스를 구경하는 것은 물론, 관심 있던 책을 파격적인 할인가에 구입할 수 있을 뿐더러-

“와, 시카고면 갈 만할 것 같은데···.”

“가보고 싶다.”

“출간 행사도 많이 하지 않나?”

“사인회! 가보고 싶어!”

저자 사인회나 낭독회 같은 특별한 이벤트도 준비돼 있다.

···한마디로, 여기 있는 이 친구들 같은 독서애호가에겐 가장 기대되는 행사라는 의미.

“그래, 그래서 말인데.”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고 씩 웃으며 미스터 레너드가 덧붙였다.

이 북콘의 주최사에서 매년 전국 150개의 고등학교 문예창작클럽을 선정해 교통비를 전액 지원하는 이벤트를 하는데.

“거기에 우리 힐크레스트 문예부도 신청서를 넣었지! 물론 당첨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하하.”

만약에라도 당첨될 경우, 학교 측에서 숙박비도 일부 지원해주기로 했다는 말에 아이들이 탄성을 뱉었다.

“우와아-”

“되면 진짜 좋겠다···.”

“당첨 기원!”

신이 난 친구들과는 달리, 예전에 편집자로서 BEA에 참가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유쥐인-! 부스, 부스 오픈 준비는 다 됐어?’

‘어우 바빠 죽겠다··· 거기! 거기 고객들 몰려온다!’

‘잠깐 잠깐, 이거 어느 매대에 둬야 하는 거야? 라벨링이 안 된 게 보이는데-’

‘작가님은? 작가님 대체 어디 계셔? 좀 있으면 저자 토론 시작인데···.’

···그만 떠올리자.

생각만 해도 기가 빨리는 기분에 고개를 젓던 그때.

“유진, 만약에 당첨되면 너도 갈 거지?”

“아, 어 뭐-”

“으흐흐, 우리 다 같이 놀러가면 넘 재밌겠다아~”

“나도 나도! 시카고면 얼마나 걸리지? 차로 4시간 정도?”

마음은 이미 북콘에 가 있는 친구들의 반응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학생들, 그것도 문학이나 출판을 지향하는 학생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일지도.

‘그리고 언젠가.’

내가 바로 에곤 K요, 하고 나서서 활동할 수 있는 시기가 오면.

작가로서 이 북콘 행사에 참가하는 것도 아주 뜻깊은 시간이 되겠지.

···그렇게 클럽활동이 끝난 뒤, 학교 주차장에서 내 차에 올라탄 순간.

지이잉-

담당자 마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친필 사인본이라.”

SFF프레스에서도 북콘에 출판사 부스를 낼 예정이며,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사인회를 할 수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지금의 에곤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니 차선책을 내놓은 것.

···친필 사인본이야 뭐, 나 역시 편집자일 때 작가에게 매번 요청하지 않았던가.

나는 곧바로 폰을 들어 메시지에 답장했다.

[에곤_K : 제 책에 사인하는 거야 문제가 아니죠. 몇 부 정도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잠시 후 돌아온 대답에, 한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1천··· 부라고?’

너무 숫자를 크게 잡은 것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어지간한 유명 작가의 사인회라도 생각보다 방문객이 그리 많지가 않다.

‘500명이 넘어가면 엄청난 거지.’

특히 단독 이벤트가 아니라 BEA 이벤트용이라면 더더욱 규모를 작게 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만요 담당자님, 1천 부라고요?]

그러자 마크의 프로필 옆에 나타나는 ‘···’.

‘역시, 담당자님도 좀 고민이 되시겠지.’

기왕이면 부족한 것보다 남는 게 낫지 싶어 1천 부를 불러봤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그때 지잉, 하며 도착한 메시지.

[S&F편집부_마크 : 물론 저도 걱정은 됩니다. 작가님의 어깨 건강도 그렇고, 체력적으로 힘드실까 봐]

[S&F편집부_마크 : 그래도 조금씩 나눠서 사인하시는 거면 크게 무리가 되진 않지 않을까요?]

“···?”

···마크의 우려란, 내가 우려하는 바와 조금 다른 포인트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

그 시각, 뉴욕의 어느 작은 아파트.

‘굿리즈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지닌 유명 북리뷰어이자, 10만 명이 넘는 멤버를 자랑하는 ‘에밀리 북클럽’의 리더 에밀리 던칸은 서재의 안락의자에 푹 파묻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적당한 분량의 초록색 책.

“기다린 보람이 있는걸.”

신비로운 분위기를 발하는 표지를 가만히 보다가, 표지를 넘겼다.

이제는 제법 유명해진 ‘에곤 K’의 캐리커처가 그려진 책날개를 지나-

[세상의 모든 피터와 웬디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짤막한 헌사 페이지를 넘기자, 피터팬 1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1부는 이미 <사이언스앤드판타지>에 실린 버전으로 읽었지만.’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를 읽고서 이 작가에 대한 기대가 부쩍 커진 후.

그녀는 일부러 <사이언스앤드판타지> 잡지에 실린 2부와 3부를 읽지 않았다.

···바꿔 말하자면, 단행본이 출간되기를 내내 손꼽아 기다렸다는 뜻.

“아, 너무 예쁘게 나왔는걸.”

과연 아마라 아체베가 디자인한 표지답네- 라고 중얼거린 에밀리는 곧바로 책 표지를 조심스레 덮었다.

실물 종이책은 소장용이니만큼 책장에다 고이 잘 꽂아놓은 뒤.

“이제 본격적으로 읽어볼까.”

따로 구입한 이북을 이북리더기에서 불러냈다.

굳이 종이책으로 산 걸 또 킨들버전으로 사서 읽는, 독특한 독서 습관의 소유자이긴 했지만.

그녀가 인터넷 서평 사이트 굿리즈에서 가장 많은 팔로워를 거느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긴 했다.

[피터에게 그곳은 마치 꿈속의 고향처럼 진한 그리움을 자아냈으나 그와 동시에···]

1부를 빠르게 정독하고는, 그렇게 궁금해했던 2부에 곧바로 들어섰다.

무리를 떠난 주인공 피터가 마주하는 위기들.

그것을 모두 무사히 이겨내고, 오히려 더 성장하여 원래의 집단으로 돌아오는 그를 마주하는···.

‘웬디, 아니 그웬돌린.’

에밀리의 시선은 무릎 위에 놓인 이북 리더기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웬디.”

웬디는 수없이 원망한 동시에 몹시도 그리워했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녀에게 피터는 어떤 존재일까.

소중한 친구? 피가 섞이지 않은 오빠? 아니 어쩌면-

‘내게는 처음부터 없었던, 부모를 대신하는 존재일지도.’

콕 짚어 정확한 이름을 붙이긴 어렵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보고 싶었어, 피터.”

복잡한 심정이 담긴 십대 소녀의 눈동자 앞에서 피터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아, 이 부분.

이거야말로 에밀리 자신이 내내 기대했던 대목이었다.

‘과연, 이 둘은 어떤 식으로 재회하게 될까.’

각자 힘든 시간을 보내고서 마주한 피터와 웬디.

피터는 짧은 고민 끝, 마침내 진실을 고백한다.

이에 웬디가 느끼는 배신감과 혼란이 손에 잡히듯 묘사되지만-

‘피터의 내면에 자리한 두려움을, 불안감과 연약함을 이해하게 되지.’

그리고 웬디는 깨닫는다.

···그런 이중성을 지닌 피터야말로, 매순간 자신에게 멸망한 세계(doomed land) 대신 ‘네버랜드’를, 꿈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던 바로 그 소년이라는 걸.

한 문장 한 문장, 아껴가며 읽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거리는 가운데-

[누군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

그건 곧 난생 처음 본 세계에 자신을 내던지는 일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네게 실망한 적 없어, 피터. 그냥···.”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는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두 세계가 충돌할 때··· 빅뱅이 일어난대. 그래서,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진다고.”

두 사람이 만나는 것.

서로 다른 곳에 속해 있던 두 영혼의 경로가 얽히게 되는 것 또한-

“우리도, 새로운 우주를 만드는 과정에 있는지도.”]

···새로운 우주라.

이어지는 문장들이 그녀의 마음을 둔중하게 울린다.

‘아, 너무 좋다.’

에밀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 문장들에 -리더기 화면 위로- 주욱 밑줄을 그었고.

그러자 하이라이트 표시가 된 문장들이 실시간으로 아마존과 굿리즈에 발췌 공유된 바로 그 순간.

“···.”

꽤 오래도록 가슴속에 묻어뒀던 친구의 이름 하나가 불현듯 머릿속을 두드렸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빛바랜 추억과 복잡미묘한 감정들.

‘한 번··· 연락해볼까.’

고민하던 그녀는 이북리더기를 잠시 내려놓은 뒤, 스마트폰을 들어 연락처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 전 에밀리 던칸이 굿리즈에 발췌해 올린 문장들에-

[에밀리 던칸 외의 32명의 독자가 이 문장을 좋아합니다.]

32, 189, 441···.

‘좋아요’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