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남작(1)
*
그로부터 다시 10분 전, 아이오와시티의 우리 집.
“···되게 신이 나셨는걸.”
노트북 앞에 앉아 인스타 디엠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애써 점잖은 척하는 마커스의 메시지를 보며 픽 웃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예전에 미스터 케빈이 내게 ‘마커스 스톤’의 이름을 꺼낼 때만 해도 그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잘 몰랐었다.
그러다 이번에 마커스가 디엠을 보냈다는 소식을 전해주면서, 케빈은 샌포드 에이전시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해주었고.
‘···그런 곳이라면 슬럼프가 찾아오는 것도 놀랍지 않지.’
화려하게 데뷔했던, 재능 많은 작가가 어째서 그런 지독한 실의에 빠졌는지 이해하게 되었으니.
마커스 스톤의 대략적인 미래를 알고 있다 보니 도저히 모른 척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라이터스홈의 에이전트 케빈 클레그 @kevin_cleg에게 연락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훌륭한 편집자로 오래 남기 위해서는 ‘선의의 오지랖’이 필요하다고.
‘지금 나는 누군가의 편집자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런 훌륭한 재능을 가진 작가가 누군가의 돈벌이 도구로서 이용되는 모습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으니까.”
당연하지만, 이 부분에 관해 미리 미스터 케빈에게도 양해를 구해놓은 상황이었다.
‘아 그럼요! 얼마든 편하게 연락주시라고 해주세요.’
에이전시와 계약 기간 중에도 다른 에이전시를 알아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작가의 권리이며-
‘마커스 스톤 작가님이 저희 쪽에 오신다면야 그것만큼 기쁜 일도 없죠 하하!’
···물론 그 과정이 조금 복잡하고 지난할 수는 있지만, 샌포드 에이전시가 워낙 쌓아온 업보가 많아서 문제 없을 거라고 시원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편집자로 일할 때 ‘샌포드’란 이름을 거의 못 들어봤다는 걸 고려하면, 얼마 못 가서 망하는 에이전시일 확률이 높았다.
여하튼 그 같은 나의 제안에-
[감사합니다.]
마커스는 그런 대답을 남겼다.
···남은 건 그가 이 손길을 붙잡아 일어서길 바라는 수밖에.
*
최근 케빈 클레그에겐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흠흠, 흠흠~”
다름 아닌, 아마존 베스트셀러 페이지를 매일처럼 방문하는 것.
“케빈, 뭘 그렇게 맨날 신이 났어?”
“아, 당연히 신이 안 나겠어? 담당작가가 저렇게 잘 나가는데···.”
그 말대로였다.
출간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던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은 그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엄청난 기세로 치고 올라갔고-
“우아아아—! 과학소설 부문 1위!”
“와, 이게 무슨···.”
“이거 엄청난걸!”
에곤 K와 계약한 라이터스홈 또한 내내 축제 분위기였던 것.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10위로 진입한 것을 기점으로-
USA투데이, 월스트리트저널, 포트랜드프레스헤럴드 등···.
각 언론에서 집계 발표하는 자체적인 베스트셀러 리스트 대부분에서 상위권에 랭크되는 기염을 토했으니.
게다가 바로 어제, SFF프레스의 담당자 마크와 미팅을 하고 온 바에 따르면.
“자, 잠깐만요, 2주 만에 5만··· 부요?”
“흐흐, 장난 아니죠? 저도 눈을 의심했는데···.”
직원들이 다같이 모여서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판매수치를 구경하는데 다들 믿기지가 않아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단다.
하드커버와 페이퍼백 합쳐서 총 5만 부.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흘 전부터 킨들 프로모션 페이지에도 노출이 됐는데.”
···거기서도 이미 1만 부 이상 팔렸다는 것.
“그래선가, 킨들 팀에서 추가 프로모션을 진행할 거라 하더군요.”
즉, 에곤 K의 작품이 종이책뿐 아니라 이북 플랫폼에서도 먹힌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의미였다.
‘이건 아주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지.’
이미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출판시장의 판도가 바뀌고 있다.
한국이나 중국처럼 이미 전자책 혹은 웹소설 플랫폼이 빠르게 발전해 자리잡은 곳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역시, 이제는 이북 시장이 전체 출판시장 규모의 1/4 정도를 차지하는 상황.’
이 전체 이북 시장 중 70퍼센트를 아마존의 킨들이 점유하고 있다.
‘그리고 아마, 이 이북 시장의 파이는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커지겠지.’
과거와는 달리 오로지 전자책만 출간하는 작가들, 혹은 자가출판(셀프 퍼블리싱)을 진행하는 작가들이 늘어난 것도 이 같은 이북 시장의 약진 덕분.
···그렇게 반갑기 그지없는 소식들을 잔뜩 듣고 온 후.
에이전트 케빈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온 유진과 카페 미팅룸에 앉아 있는 중.
“유진 작가님! 사인본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흐흐, 안 그래도 팔이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네요.”
주말 내내 1천 부에 달하는 책에 일일이 사인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는 것.
“마크가 작가님 어깨를 엄청 걱정하던데, 괜찮으시죠?”
“하하, 당연하죠. 한창 팔팔한 나이인데 이 정도로 뭘.”
···저런 말투는 여전히 외모와 매치가 안 되지만.
“그러시다니 다행인걸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좀.”
“···어.”
그가 고이 모셔온 하드커버판 <피터 팬>을 내밀자.
유진은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웃으며 면지에다가 사인을 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능한 에이전트 케빈 클레그에게, 에곤 K]
그 유려한 필체를 보고 있으려니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가운데.
“좋습니다, 그럼 일단 보고부터···.”
흠흠,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케빈은 -이미 메일로 보내놓은 내용들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각종 베스트셀러 리스트 상위권 랭크, 아마존 과학소설 부문 2주째 연속 1위, 종이책 5만 부, 이북 1만 부 판매.
“···이 모든 것이 출간 후 2주 만에 벌어진 일입니다, 작가님.”
지난번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가 한 달 만에 5만 부를 돌파했던 것도 놀라웠지만, 지금은 더더욱 엄청난 기세.
“물론 이게 끝이 아닙니다. 전에 영화화 판권 문의가 쏟아진다고 얘기드렸는데···.”
열 곳의 제작사에서 옵션 금액을 제시했고, 해외 판권도 총 8개국에서 문의해왔다는 것.
그렇게 보고를 마친 케빈은 -괜히 입안이 마르는 기분으로- 유진을 돌아보았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평온한 얼굴.
처음에는 이 모든 성공에 너무도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건가 싶었지만-
“음, 뭐라고 해야 하나.”
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어···.”
그 말의 내용 또한 너무 의외여서, 케빈은 한 박자 후에야 말을 이었다.
“차근차근, 이요?”
···아마존을 비롯해 각종 서점의 베스트셀러 리스트를 부수면서 올라가고 있는 책을 두고, ‘차근차근’이라고?
자신이 너무 놀란 티를 낸 것일까.
그의 표정을 본 유진이 아, 소리를 냈고.
“아, 표현이 좀 그랬나요. 음, 아무튼··· 요는 이겁니다.”
이내 미소 띤 얼굴로 덧붙였다.
“조금 현실감이 없긴 하지만, 이 정도에 엄청나게 흥분한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긴장해서 벌벌 떨거나, 뭐 그럴 일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좋다는 거?”
지금 이 모든 것이, <잊혀진 성자들> 때와 비교한다면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라는 뒷말을 삼키며.
그러나 케빈 입장에서는-
‘무슨 고등학생이 이렇게 여유롭고 태평하지.’
그저 감탄이 나올 뿐이었으니.
흔들림 하나 없는 유진의 얼굴을 잠시 멍하니 보다가, 이내 말을 받았다.
“아 그리고 이 해외 판권 문의 말인데요, 사실 지난번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때···.”
선인세 액수가 조금 실망스러우셨을 수도 있을 거다- 라고 덧붙이자.
“아, 전혀요. 오히려 시장 크기를 생각하면 나라당 1만 달러의 선인세는 훌륭한 편이죠.”
유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덧붙였다.
“해당 국가에서 쓰는 언어와, 인구 규모가 곧 시장 크기를 결정하는 셈이니까요.”
···그 말에 두 눈을 껌벅이는 케빈.
‘예전에, 맨 처음 만났을 때에도 느꼈지만.’
이 고등학생 작가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이쪽 시장에 훤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꼭 경험 많은 베테랑을 상대하는 기분이랄까.
“음, 그 말이 맞습니다 작가님. 해외 선인세 금액이 얼마 안 되긴 해도, 웬만하면 계약을 진행하는 건··· 일종의 홍보 차원이죠.”
신작 원고로 옥션을 진행할 때도, 작가의 전작이 해외 몇 개국에 판매가 되었다- 라는 건 굉장히 큰 메리트로 작용한다.
‘해외는 모 아니면 도에 가까운 시장이지만.’
운 좋게 대박이 터지는 경우, 그 파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이 작가가 국내 한정이 아니라 ‘확장성’을 지닌 작가라는 점이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
“무엇보다도 외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위업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 나라에서 얼마나 인기를 누리는가와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이미 상당한 성취이다.
“하지만.”
케빈이 좀 더 진지한 눈빛으로 유진을 마주 보았다.
“저는, <피터 팬>의 해외 판권 옥션은 조금 더 여유를 두고 진행해보고 싶습니다. 영화 판권도요.”
···지난번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때와는 아예 상황이 다르니까.
제 말을 경청하는 유진을 보며 설명을 이어나간다.
“이제 곧 BEA가 시작되지 않습니까.”
이미 라이터스홈 앞으로, 그중에서도 케빈 클레그 앞으로 많은 출판사와 영화제작사들이 미팅을 요청해온 상황이라고.
“···에곤 K 관련해서요?”
“그럼요.”
“호오, 그거 기대되는데요.”
“그렇죠? 저도 기대됩니다, 작가님. 그리고 이번 BEA를 기점으로-”
케빈 클레그.
향후 10년 내 미국을 대표하는 명에이전트 중 한 명으로 거듭날 그가 두 눈을 빛냈다.
“에곤 K 작가님의 몸값을 제대로 한 번, 가파르게 올려보겠습니다.”
그 말에 유진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기대해볼게요.”
“맡겨주시죠.”
“하하, 그래도 넘 무리하진 마시고요.”
“아, 그리고.”
케빈은 마지막으로 남겨둔 용건을 꺼냈다.
“마커스 스톤 작가님이 제게 연락해오셨습니다.”
“···!”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미소를 짓는 유진.
“그것 참 다행이네요.”
유진이 대체 뭐라고 그를 설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작가가 먼저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다니.
케빈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먹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나머지는 절 믿고 맡겨주심 될 것 같습니다.”
그리즐리베어를 연상시키는, 190은 족히 되는 키에 거대한 체격.
웬만한 상대는 눈빛만으로도 제압할 수 있을 법한 자신의 에이전트를-
“그럼요, 물론이죠.”
유진은 지극히 신뢰하는 눈빛으로 보았다.
*
미스터 케빈과 한식당에서 삼겹살을 먹고 왔다.
‘으으음, 아주 맛있군요, 육질이 아주 쫀득쫀득한 것이···.’
다음 주에 나올 <사이언스앤드판타지> 5월호에 비숍 작가님 신작이 실릴 거란 얘기도 했는데.
‘작가님은 이미 읽어보셨다면서요! 너무··· 부럽습니다 흑흑.’
‘엄청 재밌어요 미스터 케빈. 제목이, 어둠 속의-’
‘아아악, 스포하지 마세요!’
‘···아니 저 제목밖에 말 안 했는데.’
생긴 건 무섭지만 은근히 놀리는 재미가 있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 뒤 지금은 노트북 앞에 앉은 참.
<토끼 남작의 모험> 원고를 집필하기 위해서였다.
[<토끼 남작의 모험>
제1권. 레푸스 가문을 벗어난 베니]
제목만이 전부인 텅 빈 워드파일을 마주한 채 생각을 정리하는 중.
‘클로이한테 그냥 얘기해줄 땐 상관이 없었는데.’
한 권의 책으로 만들려고 하니, 아동문학 쪽은 경험이 별로 없어서인지 괜히 고민이 많아진다.
‘클로이한테 해준 얘기만 모아서 간단히 그림책으로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그러니까, 글자 수가 얼마 안 되는 책 말이다.
하지만 그 경우 그림의 중요도가 훨씬 올라갈 뿐더러 우리 클로이는-
‘더, 더, 더 해죠! 길게 얘기해죠!’
아기일 때부터 책을 많이 접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또래에 비해 지문이 많고 기승전결이 분명한 이야기를 선호한다.
7~8세 아동 수준이라고 할까.
“···토끼 남작 얘기도 그래서 만든 거고.”
<토끼 남작의 모험>은 하나부터 열까지 -나름 까다로운 어린이 독자인- 클로이의 취향에 맞춘 이야기다.
‘오빠, 베니! 베니가 나오는 얘기 해죠!’
주인공은 동물, 그것도 우리 클로이가 좋아하는 토끼 인형 ‘베니’.
···동생의 말에 따르면 제법 나이가 있으며, 토끼 나라에서는 아주 근사한 외모에 속하는 수컷 토끼란다.
모름지기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 때는 도입부이자 ‘발단’ 부분을 생각해야 하는 법.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토끼 남작은 가문을 벗어나 모험을 떠나는데-
‘클로이, 베니가 왜 떠난 것 같아?’
-라고 언젠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더니.
양 허리에 두 손을 올린 채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클로이.
‘그건, 동생이 너무 많아서지이~’
‘응? 그래?’
‘웅, 엄마가, 토끼는 아기를 어엄청 많이 낳는대에~’
‘오.’
근데 그게 대체 왜··· 라고 생각하는데.
‘동생이 많으면, 힘들잖아.’
‘힘들다고?’
‘마리사가 그랬어.’
어린이집 같은 반 친구인 마리사의 말에 따르면.
‘동생이 또 태어나서, 집 나가고 싶대.’
‘···.’
아무리 그래도 다섯 살짜리가 집을 나가면 안 되지 생각하면서도.
“···푸흐, 그건 이해가 되지.”
갑자기 동생이 생기는 거야말로 매우 충격적인 상황이니까.
‘···뭐라고요? 동생?’
나 역시 한창 섬세하던 사춘기에, 새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동생이 태어났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지 않았던가.
어쨌든, 그 아이디어가 아주 괜찮았던 덕분에-
타다다닥, 다닥.
나는 가볍게 첫 문장을 뽑아냈다.
[제139대 레푸스 가문의 남작 베니 르 레푸스.
···매일처럼 태어나는 동생들을 돌보다 지쳐 토끼굴, 아니 ‘캐슬 오브 레푸스’를 떠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