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남작(2)
그것을 시작으로 <토끼 남작>의 설정들을 정리해봤다.
[주인공 - 베니 르 레푸스]
[레푸스(라틴어로 토끼) 가문의 장자 겸 남작 작위계승자.]
[모험을 떠난 이유- 동생이 자꾸 생겨서 충격받음]
애초 클로이는 ‘베니’가 왕자님이었으면 했지만.
‘왕자는 너무 많아. 차별화를 위해 남작으로 하는 건 어때?’
‘차···별화가 머야? 바론(남작)? 그게 뭐야?’
하고 많은 작위 중 굳이 남작을 택한 건.
그 정도라면 영지가 별로 크지 않을 테니,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어느 정도 영지를 꾸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이야기의 배경은 동물 수인이 사는 판타지 세계.
주인공이 ‘남작’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아직 계급이 남아 있는 신분제 사회다.
‘정확히 어느 정도 발전상을 이뤘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대충 토끼 왕국이 있으면 그 옆엔 곰 왕국도 있는 식인데.
토끼 왕국이라고 토끼만 사는 건 아니고, (토끼 수인이 대부분이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수인이 섞여서 사는 사회라는 설정이다.
각 수인들은 해당 동물의 특성을 갖고 있는데, 예를 들어 베니의 친구로 등장하는 수탉 수인 ‘버터컵 경’의 경우.
‘베니! 대체 언제까지 침대에서 꾸물거릴 참인가!’
야행성 동물인 토끼와 주행성 동물 닭.
이 두 친구는 생활리듬이 맞지 않아 늘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뭐 그런 건 부차적인 부분이고.”
요는 18세기 독일소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처럼-
자신이 겪은 기상천외하고 신기한 모험을 시간이 흐른 뒤 기록해놓았다는 형식의 이야기.
일단은 그동안 클로이에게 들려준 서너 개의 이야기를 시놉시스만 정리한 뒤.
본격적으로 1권의 집필을 시작했다.
[베니 르 레푸스에겐 누나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애니 르 레푸스.
누나는 오래전에 결혼해서 이 성을 떠났다.
누나는 하나였지만, 동생은 아주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한 번에 셋씩, 아니면 넷씩 태어나···]
타다다닥.
머릿속에서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가 문장의 형태로 펼쳐진다.
[동생이 너무 많아서 이름 붙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는데.
“여보, 우리 이러면 어떨까요?”
베니의 엄마 아빠는 아주 쉽고 편한 방법을 썼다.
그러니까, 알파벳 순으로 이름을 짓는 것.]
집필하는 내내 어쩐지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가운데.
[첫째는 애니(Annie).
둘째는 베니(Bennie).
그 아래 셋째는 세니(Cennie).
대니, 이니, 패니, 개니, 케니···.
그러다 마지막 글자인 Z까지 다 써버렸는데도.
“또··· 동생이라고?”
또 태어나고 만 것이다···]
한창을 집중해 쓰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난 상황.
1권에 들어갈 이야기의 약 절반가량을 쓴 참이었다.
조금 고민되는 점이 있다면-
“음, 애들이 책으로 읽기에 어떨지 모르겠네.”
저 문장이 7~8세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을지, 플롯의 구조가 아이들이 이해하기 무리가 없을지 고민된다.
하지만-
‘우리 집에 전문가가 있는데 굳이 혼자서 머리 싸매고 고민할 필요는 없지.’
조금 손을 본 다음 새어머니에게 보여드리고 조언을 구해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원고 파일창을 닫으려는데.
지이잉- 핸드폰이 진동했다.
[막성스_라미 : 에곤 작가님!!! 시나리오 완성했습니다!!!!]
···막성스 감독에게서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각색 시나리오 완성본이 도착했다.
*
아이오와시티에서 유진이 막성스 감독의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던 그때.
‘···이거, 압도적인걸.’
어느 중년의 여성 또한 그와 비슷한 감상을 느끼는 중이었다.
LA에 위치한 어느 중견 영화제작사 썬웨이필름스의 대표, 리사 터메인.
썬웨이필름스는 작지만 견고한 영화들을 지원하는 것을 모토로 하는 곳.
이곳에서 제작된 <신발 속의 모래>, <이 세상이 멸망할 수 없는 50가지 이유>, <비독> 등은 유수의 영화제 수상 경력을 자랑했는데, 여기에는 터메인 대표의 뛰어난 작품 선구안이 한몫했다.
애초,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가 화제가 됐을 때부터 그녀는 원작의 영상화 판권에 관심을 두었는데-
‘뭐, 자비에 산도발 감독이 나섰다고?’
자비에 산도발.
영화업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거장급은 아니라 해도 검증된 성공작을 만드는 감독이 등장했고.
당연히 그쪽으로 판권이 가겠구나 싶어 발을 뺐던 것.
그런데 어떻게 일이 된 것인지, 막성스 라미 감독이 이 작품의 각색을 맡게 됐다는 것이다.
‘막성스 라미. 세자르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탄 후로 쭉 주목받았지.’
꽤 많은 제작자들의 물망에 오르내리던 젊은 감독의 이름까지 나오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든 것.
···그리고 지금은 <호수>의 영향력과 라미 감독에 대한 기대감으로 상당한 규모의 투자까지 확보해놓은 상태였다.
‘그건 그렇고.’
팔락, 팔락.
리사 터메인은 시나리오를 다시 한 번 들춰보았다.
막성스 감독이 2주 전에 보내줬던 시나리오 초안도 절대 나쁘지 않았는데···.
“지금 이건, 그때보다 훠얼씬 좋아졌는걸.”
대사는 줄어들고 전반적인 흐름이 간결해졌다.
오히려 그것이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훨씬 명확하게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리사의 시선이 책상 위 구석에 올려져 있던 책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로 향했다.
···언뜻 보면 평온한 호수처럼 보이지만,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괴물의 형체가 홀연히 떠오르는-
‘표지에서부터 느껴지는 그 인상이, 이 시나리오 속에서도 생생히 살아나지.’
더불어 이 시나리오에 존재하는 여백이, 감독의 연출 기법으로 어떻게 채워질지가 머릿속에 훤하게 그려진다.
“아마, 첫 번째 씬에서는 핸드헬드 기법을 극대화해서···.”
보여지는 것은 괴물의 그림자뿐.
아주 잠깐 분위기만을 풍기고, 형체의 끝자락만 살짝 살짝 보여주면서-
‘아주 서서히.’
관객들의 내면에 공포를 스며들게 해서···.
똑똑-
그 순간, 유난히 큰 노크 소리에 리사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아, 어, 들어와.”
“···대표님 왜 그러세요?”
“응? 내가 뭐.”
리사가 어깨를 으쓱하자 대꾸하는 부하직원.
“아니, 무슨 유령이라도 본 사람 같아서.”
“아아. 여기에 너무 빠져 있었나 봐.”
부하직원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들린 시나리오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로 향했다.
“이거, 막성스 라미 감독이 메가폰 잡는 거 맞죠? 기대되던데.”
“자넨 지난번 버전으로 읽었지? 이거, 수정본이야.”
“어··· 수정본이요? 원래도 좋았는데 왜 괜히-”
“괜히가 아냐. 훨씬, 두 배 이상으로 좋아졌어.”
좀처럼 그런 말을 하는 법이 없는 대표의 말에, 부하직원의 눈이 커졌다.
“그럼 저도 한 번만.”
곧바로 손을 뻗어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을까.
“···.”
말 한마디 없이 홀린 듯이 읽는 그를 보며, 리사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저럴 줄 알았지.’
지금쯤 그의 머릿속에서 한 편의 영화가 자동으로 펼쳐지고 있을 거다.
색채와 소리, 더 나아가 상영관 안을 가득 채울 공포의 냄새까지.
그 모든 것이 지난번 버전보다 한층 더 강렬하게 살아나는 가운데, 리사 대표 또한 모르는 것이 있다면-
‘감독님이 그리신 스토리보드에는··· 괴물의 형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더군요.’
이 모든 것이 에곤 K와의 미팅을 통해 감독이 완벽한 확신을 갖게 된 덕분에 생겨난, 긍정적인 변화라는 것.
“···자네는 계속 읽어봐.”
“네? 대표님?”
리사 터메인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캐스팅 디렉터를 만나러 가야겠어.”
“어···.”
그녀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그림.
그것을 실현시켜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
라미 감독이 보내준 시나리오는 당연히 좋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보다도 훠얼씬 좋았다.
[에곤_K : 감독님, 정말로 좋군요. 그야말로···.]
그때 미팅했을 때 보여준 것보다 훨씬 더 완성도가 올라갔을 뿐 아니라-
‘영화에서만 가능한 연출을 십분 활용해, 공포와 긴장감이 배가 된 느낌.’
원작에 충실하되, 소설과 영화라는 매체의 차이를 완벽하게 인지하며 실현한 각색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라고 내 감상을 전하자.
[막성스_라미 : OMG!!!! 에곤 작가님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XD]
[으어어어 완전 감동입니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
훈훈한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지적이고도 세련된 시나리오를 썼다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모티콘 쓰는 걸··· 의외로 좋아하시는걸.’
팬심이 느껴지는 메시지를 보고 있으면, 꼭 비숍 작가님을 대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조금 민망해지기도 하지만.
‘<사라진 여름>도 정말 인상적으로 봤지만, 앞으로 이 라미 감독이 만들 영화들은 더더욱 대단하지.’
미래의 대감독이 에곤 K의 팬이라는 사실이 괜히 더 감개무량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라미 감독과 연락을 마친 뒤.
지금 나는 또다시 노트북 앞에 앉은 참이었다.
[스콜라스틱 공모전| ‘단편소설’ 부문의 원고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손을 본 최종고를 스콜라스틱 공모전 사이트에 등록한 것.
‘너무 기대하는 건 금물이지만, 그래도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는데.’
뭐, 꼭 이게 아니더라도 대학 조기진학할 방법은 다양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권유진이라는 내 이름으로 낼 작품이기도 하고.”
미스터 레너드가 알려준 정보에 따르면, 이 스콜라스틱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은 따로 작품집 형태로 모여 출간이 되는데.
‘그 자체만으로도, 앞으로 작가의 길을 걸을 학생에게는 대단한 영예가 될 거다.’
매년 이 작품집을 꾸준히 사보는 충성독자층이 있을 정도로, 그 전통과 명성이 상당하다는 것.
언젠가 클럽활동 때 레너드 선생님이 그런 말을 했더니, 친구들이 괜히 더 흥분했던 게 기억난다.
‘우와 우와, AI 데이지가 스콜라스틱 작품집에 실리면···!’
‘유진 이제 전국구로 유명해지는 거야? 힐크레스트 지니어스로?’
‘···얘들아, 제발 그만 좀.’
어쨌든.
스콜라스틱 공모전은 1차, 2차, 3차까지 심사가 진행된다.
1차는 예심으로 합격 불합격 여부가, 2차에선 수상 여부가, 3차에선 지역상인지 전국상인지가 결정된다고.
‘···북콘 끝날 때쯤이면 1차 결과가 나오겠네.’
2차와 3차는 거의 동시에 진행되는 것 같고, 라고 생각하던 때.
핸드폰이 지잉 진동하며 알림 하나가 떴다.
[S&F 뉴스레터| <사이언스앤드판타지> 5월호 전격 출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비숍 작가님의 신작 단편소설 <어둠 속의 방문자들: 귀환자의 시간>이 드디어 공개된다는 것!
그리고 제일 먼저 완성고를 읽은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저는 행동하는 독자이거든요.’
언젠가 막성스 라미 감독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곧바로 인스타그램 앱을 켰다.
*
그날 저녁, 인터넷의 SF 서브레딧.
[41.2k 랜든 비숍 신작 <귀환자들의 시간> 떴다!!!!!!]
지금 이곳은 비숍의 신작 소식으로 난리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SF씬의 거장이라 불리는 그 비숍이 몇 년 만에 내놓는 신작인 만큼 기대감이 컸던 상황.
그리하여 드디어 발표된 <어둠 속의 방문자 : 귀환자들의 시간>에 관한 리뷰가 쏟아지던 찰나-
[3.2k 비숍 신작 관련 에곤 k 인스타 게시물 캡처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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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n_k|
사이언스앤드판타지5월호.jpg
좋아요 1,513개
Egon_k 어둠 속의 방문자들 : 귀환자들의 시간.
랜든 비숍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어둠속의방문자 #사이언스앤드판타지 #랜든비숍 #비숍팬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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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올린 에곤 K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보고, 독자들은 -유진이 의도했던 바와는 거리가 먼- 하나의 부분을 지적했다.
└아니 잠깐만ㅋㅋㅋ 에곤 k가 비숍 팬보이였다고?
└팬보이라 하기엔··· 둘이 나이차 얼마 안 나지 않나
└ㄴㄴ 팬심에 나이가 뭐가 중요함
└ㅇㅇ 에곤 k QNA에도 비숍 얘기 나왔잖음
└공모전 도전 계기 = 비숍을 만나고 싶어서
└맞다 수상특전이 비숍과의 만남이었지
└아 그럼 팬보이 인정이지
└팬보이 x 팬올드맨 o
└아 ㅋㅋㅋ 뼈 좀 때리지 마라
어느새 두 작가의 관계성을 논하는 댓글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비숍 작가님은 에곤 k 얼굴 봤겠네
└오 둘이 만나서 무슨 얘기 나눴으려나
└(두 노인의) 건강 얘기
└에곤 k가 비숍작가 식습관 가지고 잔소리했을 듯
└ㅋㅋㅋㅋㅋ
└아 ㅋㅋㅋ 비숍 작가님 안 그래도 설탕 중독자로 유명하던데
└(에곤 k) 어림도 없지 작가님 식단부터 다시 짜시죠
└LOL(크크크)
포인트가 살짝 엇나가긴 했지만, 아주 날카로운 추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