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53화 (53/126)

토끼 남작(3)

*

바로 그 시각, 캘리포니아의 비숍스플레이스.

“아마라 선생, 진짜 오랜만이야.”

랜든 비숍은 북디자이너 아마라 아체베를 맞이해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후후, 그러게요 너무 오랜만에 뵙죠? 작가님 작업실이 제 아틀리에에서 별로 멀지도 않은데···.”

“허허, 아마라 선생이 좀 바빠야 말이지. 그래, 이달 작업은 좀 마무리되었나?”

“네, 덕분에 이제야 좀 짬이 나게 됐네요.”

근 35년 전, 비숍의 초기 단편집을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된 사이.

그때만 해도 ‘촉망받는 젊은 예술가’로 불리던 두 사람은 이제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이번에 아트프레스에서 제 표지 컬렉션을 내고 싶다고 제안해와서 지난 작업물들을 쭉 둘러보는데, 여러 모로 감회가 새롭더군요.”

아마라 아체베.

나이지리아계 미국인으로, 대체불가능한 독특한 감성으로 여태 최정상의 북디자이너 자리를 지켜온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근데 지금도 여전히 근사한 책들을 만나면 가슴이 뛰는 건 어쩔 수가 없다고 할까요, 후후.”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역시 그런 케이스였다는 말에 비숍이 웃었다.

“그거야 아마라 선생이 타고난 창작자라 그렇지.”

특별한 부침도, 슬럼프도 없이 매번 뛰어난 결과물을 내놓는 그녀는 창작의 샘이 마르지 않기로 유명했는데.

‘본인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창작자로 오래 살아남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의외로 더 화려하게 반짝이는 재능도, 빛나는 영감도 아니라-

‘창작을 향한 열망이 얼마나 지속되느냐니까.’

모든 창작자는 언젠가 반드시 제 안의 무언가가 고갈되는 순간에 맞닥뜨리게 마련이다.

그럴 때 그 비어버린 내면을 새로이 채울 수 있느냐 없느냐로 길이 갈리게 마련.

“아마라, 사실은 말일세···.”

랜든 비숍은 오랜 업계 동료이자 친구 앞에서 그간의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한동안 지독한 슬럼프에 시달렸으며, 꽤 오랫동안 괴로워했지만-

“···다시, 창작의 샘이 채워지기 시작했다는 말씀이죠.”

처음에는 깜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차분하게 말을 받는 그녀를 보며 노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그 계기가 다른 사람도 아닌 에곤 K 작가라니.”

아마라는 괜스레 뿌듯한 기분으로 자신이 작업한 <피터 팬> 표지를 돌아보았다.

“참 기분 좋은 우연인걸요.”

“그러게, 나도 아마라 선생이 에곤 작가의 표지를 맡았대서 반가웠지 뭔가.”

그렇게 잠시 두 사람은 에곤 K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아마라는 마커스 스톤의 소설 <전선의 끝에서>를 읽어봤다는 말을 꺼냈다.

그때 샌포드 소속의 에이전트가 다녀간 후로 괜히 마음에 걸렸다는 것.

“근데 뭐랄까, 둘이 좀 닮은 느낌이더라고요.”

“그 두 작품이 닮았다고?”

“그러니까··· 작품 속 주인공의 성향? 아니면 메시지라고 할까요.”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과 <전선의 끝에서>.

애초 장르부터가 하나는 포스트아포칼립스이고 하나는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을 다루는데도-

“놓여 있는 배경이 다를 뿐, 그에 대처하는 주인공의 성향이나 생각이 참 비슷하다 싶었어요.”

“흐음, 흥미롭구만.”

마커스 스톤이라.

나중에 나도 기회가 되면 읽어볼까, 생각하던 그때.

지잉- 비숍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어라?”

그 알림의 내용을 확인한 비숍이 허허 웃고는, 옆에서 궁금해하는 아마라에게 보여주자.

“어머나, 비숍 팬보이?”

아마라 아베체가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두 분, 너무 사이좋은 거 아녜요?”

*

나는 절반 정도 써놓은 <토끼 남작의 모험> 1권 초고를 새어머니에게 건넨 참이었다.

‘어머, 유진. ···이런 선물이라니, 너무 감동이구나.’

천천히 읽어보고 의견을 얘기해주겠다는 케이트.

그리고 비숍 작가님의 신작 단편 <귀환자들의 시간>으로 말하자면-

[13.2k 귀환자들의 시간··· 미쳤다]

└ㅇㅇㅇㅇ 찢었다

└읽고 나서도 한참 두근거리더라

└난 잠도 제대로 못 잤음 ㅠㅠㅠㅠ

└이렇게 말하긴 뭐하지만 전성기 비숍이 돌아온 느낌

└뭐래 우리 비숍 작가님은 늘 전성기임

└슬슬 비숍 팬보이들 나올 타이밍이네

···

예상했던 대로 아주 뜨거운 반응.

‘흐, 그럴 줄 알았지.’

완성고를 제일 먼저 읽어본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나는 확신이 있었다.

‘작가님! 이건 됩니다! 완벽해요!’

그런 내 반응에 비숍 작가님은 호들갑도 심하다며 허허 웃었지만.

그건 정말로 호들갑이 아니라, 편집자로서의 확신에 가까웠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게다가 여러 모로 뿌듯하기도 하다고 해야 하나.

···평생 존경해온 작가님이 내가 낸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신작을 썼다는 것 자체가-

‘계 탔네, 계 탔어.’

이것이 바로 성공한 팬보이의 삶이 아닐까.

[에곤_K : 작가님 <귀환자들의 시간> 반응이 엄청납니다! 제가 그랬잖아요, 다들 정신이 나갈 거라고 하하하.]

흥분한 채 메시지를 보내자, 곧바로 비숍 작가에게서 답장이 왔다.

[랜든_비숍 : 허허 고맙네 안 그래도 지금 여기저기서···]

우리 둘은 잠시 <귀환자들의 시간>에 관한 대화를 나눴고.

[에곤_K : 아 그리고 이번 주엔 산책을 한 번도 안 나가셨던데요]

설마 앉아서 내리 글만 쓰시는 건 아니겠지.

내심 걱정이 되어 묻자, 비숍 작가님은 머쓱해하며 답했다.

[랜든_비숍 : 흐으 이번만 좀 넘어가주면 안 되겠나]

[에곤_K : 에이 아무리 바빠도 하루 한 번씩은 꼭 나가서 걸어주셔야죠]

그러자, 웃는 이모티콘과 함께 날아온 답장.

[랜든_비숍 : 자네가 내 팬보이라면서 :D]

···인스타에 올린 걸 보셨나 보네.

풋, 웃으면서도.

[에곤_K :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겁니다]

곧 날아온 비숍 작가님의 메시지에 고개를 갸웃했다.

[랜든_비숍 : 허허 이 친구 농담도 참.]

···농담 아닌데?

그리고 그다음 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것을 기념해-

“오오오, 유쥐인! 왔구나!”

수업이 끝나자마자 제이든네 체육관에 왔다.

“안녕, 제이든.”

“네드도 반가워!”

···내 옆에 선 네드는 뭐 씹은 표정이었지만.

“으으으, 난 대체 왜 끌고 온 거냐···.”

“너 클로이 책에다가 그림 그려준다며.”

“아니 그거야 당연한 건데, 그거랑 이게 대체 무슨 상관임?”

“상관은 없지. 그냥, 같이 운동하면 좋을 것 같아서.”

내 말에 한숨을 푹 내쉬는 네드.

녀석은 <토끼 남작의 모험>의 삽화를 그려주기로 한 터였다.

내가 클로이 생일선물로 그림책을 준비 중이라고 했더니-

‘나! 내가 그림 그릴래!’

내 쪽에서 먼저 부탁하기도 전, 본인이 그리겠다며 나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말을 옆에서 듣던 아델은-

‘노래는 필요 없어?’

그렇게 묻더니, 내가 대답하기도 전 자기가 주제가를 만들겠다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굳이-’

‘아냐 아냐, 내가 만들 거야. 토끼 남작 베니라고 했나? 주제가라든가, 뭐 그런 거 필요할 거 아냐.’

그러더니 ‘토끼 남작 베니~ 당근 검을 휘두르는 용감한 친구~’ 라며 가사를 흥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당근 검을 휘두른다라, 그거 좋은 생각인데?’

‘유진 너 설마 여기서도 아이디어를 얻은 거냐···.’

여하튼.

투덜거리는 네드를 -제이든과 내가 양옆에서- 끌고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자.

“오오, 왔구나.”

젊은 시절 더락을 떠올리게 하는, 하지만 얼굴은 제이든과 똑 닮은 건장한 남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인사하자 활짝 웃어 보이는 관장님.

“그래, 제이든 친구들이라고.”

“이쪽이 유진, 이쪽이 네드.”

제이든이 우리를 ‘운동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이라고 소개하자, 두 눈을 반짝이는 제이든의 아버지.

“그래··· 제대로 운동을 해보고 싶다, 이거지.”

“아니 저는 절대로-”

“네, 지금도 건강 관리는 꾸준히 하는데 아무래도 근육을 좀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내 말에 밝게 웃는 관장님.

“하하하, 그렇지! 근육이야말로 건강의 기본이거든 기본.”

“···.”

내 옆에 선 네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가운데.

우리는 관장님의 코치에 따라 운동을 시작했다.

10분 정도 가볍게 워밍업을 한 뒤, 본격적인 기구로 넘어가서···.

“끄어어어어···.”

“이 정도는 여성회원들도 쉽게 하는 수준인데 앓는 소릴 내면 안 되지! 오, 유진! 제법 잘하는구나!”

“자세가 이거 맞을까요?”

“그럼 그럼! 아주 훌륭해! ···네드! 숨을 쉬어, 숨을 쉬라고!”

옆에서는 제이든이 거대한 덤벨을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느낌으로- 들었다 내렸다 하는 가운데.

나 또한 운동에 매진했다.

후우, 후우.

호흡에 맞춰 기구 운동을 할 때마다 힘은 좀 들지만-

‘이게 바로 기분 좋은 고통이려나.’

실시간으로 건강해지는 느낌에 더더욱 집중해서 열심히 했다.

“후우, 네드, 어때?”

“···.”

“괜찮지, 않아? 이게, 가끔 이렇게, 운동해줘야 스트레스도 풀리고···.”

신나서 한참을 말하는데 네드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옆을 돌아보니.

“···끄으으···.”

“네드, 정말 놀라울 정도로 근육이 없구나.”

···제이든의 아버지에게 딱 붙잡혀 있는 것이 보였다.

“등이 왜 이렇게 뭉쳤을까, 흠. 혹시 책상 앞에 장시간 앉아 있는 습관이 있나?”

“어떻게 아셨-”

“그렇다면 더더욱 근육을 키워야 한다, 네드! 특히 등 근육이 중요한데···.”

끄어어어···.

관장님이 네드의 뭉친 등근육을 풀어주는 광경을 흐뭇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으려니.

“음, 우리 아빠가··· 운동에 좀 많이 진심이라서.”

제이든이 살짝 머쓱해하며 꺼내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되게 좋으시다.”

“···좋으시다고?”

“어, 완전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가르쳐주시던데?”

“흐흐, 그럼 다행이네. 아빠가 늘 말하거든, 글은 근육으로 쓰는 거라고.”

그 말에 저쪽에 있던 네드가 “무슨 말도 안 되는···”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지만.

“와, 그 말 진짜 좋은데?”

‘글은 근육으로 쓴다’.

책상 앞에 써서 붙여놔야지, 생각하는 한편.

‘유진아, 요즘 바빠서 그런지 운동을 자꾸 빼먹게 되는구나···.’

다음엔 아버지도 모시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한편 그 시각, 케이트는 유진이 쓴 <토끼 남작의 모험> 초고를 읽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모두 스물세 마리의 동생을 둔 베니는 매일이 힘들었다.

동생들은 너무 자주 싸우고 자주 울었다.

베니는 좋은 형이자 오빠가 되고 싶었지만···]

“푸훗, 동생이 스물세 명이라니.”

그녀 자신은 외동딸이라 상상이 잘 안 되면서도.

첫 문장부터 키득거리며 읽던 참이었다.

[“이제 그마아아안!”

베니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어머니를 돌아보며 말하길.

“더는 못 참겠어요, 어머니.”

베니는 마음 깊이 결심한 후였다.

“전 모험을 떠나겠어요.”]

셋째 세니와 충직한 신하들에게 성을 잘 돌보라는 말을 전한 후, 캐슬 오브 레푸스를 떠난 베니.

난생 처음 보는 새로운 세상에 감탄하는 한편, 말도 안 되는 위기를 겪기도 한다.

[‘저, 저건 뭐지?’

사자의 몸에 거대한 독수리의 얼굴을 한 무시무시한 괴물, 그리핀.

어미 그리핀의 발톱에 채인 베니는 꼼짝없이 잡혀서 ‘불타는 산’으로···]

잡아먹히기 직전, 베니는 그리핀 새끼인 척하는 기지를 발휘해 살아남는다.

그리핀을 속이는 데 성공할 뿐 아니라, 엄마 그리핀의 사랑을 지나칠 정도로 받다가 둥지에서 탈출하는데···.

“이게 이런 내용이었구나.”

사실, 아예 처음 보는 건 아니다.

클로이한테서 어느 정도 얘기는 들은 상태이긴 한데.

‘엄마, 엄마! 오빠가 그랬는데에, 샤자가, 엄청 큰 샤자 독수리가~~ 슈웅~ 하고.’

‘응? 사자 독수리?’

‘응, 그래셔··· 아기 섀도 있고. 지렁이, 냠냠해서~’

‘아, 음, 그렇···구나.’

클로이가 최선을 다해 전해주려 노력했지만, 정확히 어떤 이야기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는데-

‘사자독수리가 그리핀을 말하는 거였어.’

어린 딸에게서 들었던 내용과 비교해가며 읽기 시작하다, 어느샌가부터는 완전히 푹 빠져서 읽었다.

[“에이, 말도 안 돼요. 삼촌이 어딜 봐서 그리핀이야~”

“그리핀의 깃털을 온몸에 붙여서 그리핀인 척한 거지. ···이 삼촌이 내는 그리핀 울음소리 들어볼래?”

“아뇨, 이야기나 계속해주세요~”]

···그리고 이 이야기 속의 청자인 (베니의 조카) 로티는, 이런 허무맹랑한 모험담을 들을 때마다 말도 안 돼- 라고 말하는 역할이다.

“그러고 보니.”

클로이도 언젠가 이 부분을 얘기하면서 ‘히히히, 말도 안 되지? 근데 베니는 할 수 있대~’라며 깔깔거리던 것이 떠올랐다.

입가에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다음 장을 넘기다가-

“···다음 내용이 없잖아.”

한창 재밌을 부분에서 뚝 끊겨버린 미완성 원고에 허탈해하다가.

이내 하, 웃고 말았다.

‘나도 참.’

유진에게 조언을 해주긴커녕, 언젠가부터 그냥 독자의 마음으로 정신없이 읽고 있지 않았나.

···그건 그렇고.

‘동화책? 왜 갑자기?’

케이트는 유진이 이 원고를 들고 왔을 때를 회상했다.

‘네, 좀 있으면 클로이 생일이잖아요?’

‘···.’

아직 한 달이나 남지 않았나, 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선물로 <토끼 남작의 모험>을 책으로 만들어주려고요.’

한 권의 동화책을 만들기엔 확실히 빠듯한 일정이긴 했다.

‘괜찮겠니, 유진? 안 그래도 바쁜데···.’

‘바쁘긴요, 지금은 딱히 쓰는 원고도 없고.’

동화책으로 만들어놓으면 클로이가 원할 때 언제든 혼자서 읽어도 되고.

케이트나 아버지한테 읽어달라고 해도 될 것 아니냐- 라고 시원하게 말하는 유진.

‘···.’

그때 자신은 어째서 목이 살짝 메어왔는지 잘 알 수 없지만.

‘그래,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

이렇게나 동생을 생각해줄 줄 몰랐다든가, 클로이를 아껴줘서 고맙다든가···.

그런 말들은 어째선지 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상투적인 표현임은 물론-

‘꽤 오래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잖아.’

원고 겉장에 적힌 <토끼 남작의 모험>이라는 제목을 눈에 담은 채.

케이트는 클로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를 떠올렸다.

···유진이 자신에게 동생이, 그것도 배다른 동생이 생겼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던 시절의 기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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