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자들(1)
*
갑작스럽게 생겨난 여동생의 존재.
아마도 유진에겐 크나큰 충격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동생? 웃기지 마요.”
“너 그게 무슨 말버릇-”
“나한테 동생이 어딨어. 나한테 엄마는 한 명뿐인데-”
“야 너 이 녀석 이리 나와!”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부자의 사이는 점점 더 안 좋아져갔다.
케이트가 그 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에도.
내 어머니는 단 한 명뿐이다, 라는 유진의 말은 지극히 맞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 자리를 억지로 차지하고 들어갈 마음은 없었으니까.
그저 한 명의 어른으로서, 언젠가 유진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면 손을 내밀 수 있도록-
‘그 옆에 변함없이 서 있는 사람,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데 유진의 마음을 얻기도 전, 덜컥 아이가 생겨버렸고.
그로 인해 이렇게 빨리 결혼을 추진하게 될 줄도 몰랐던 탓이었다.
그러나 배는 점점 불러왔고.
이후 병원에서 출산한 뒤 갓난아기인 클로이와 함께 집에 돌아왔을 때-
“···!”
자신을 바라보던 유진의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제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하던 그 눈빛을.
···그래서 처음에는 걱정이 깊었지만, 이내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다.
자신과는 머리색도, 피부색도 다른 동생이 조금 낯선 듯 했지만.
케이트에게는 말 한 마디 걸지 않는 유진이, 그래도 요람에 누워 있는 제 갓난쟁이 동생은 가끔씩 들여다보고 갔으니까.
그러다 그녀가 일부러 보지 않는 척을 하고 있으면-
“···.”
요람 위에서 멈춰버린 모빌을 다시 빙글빙글 돌려준다든가.
클로이가 떨어뜨린 딸랑이를 주워서 씻은 뒤 손에 다시 쥐여준다든가, 혹은-
오동통한 발바닥을 간질여주며 피식 웃곤 했다.
그렇게, 제법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잠깐만요, 아이를··· 그냥 두고 나오셨다고요? 그게 지금 말이 돼요!”
클로이의 베이비시터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그냥 아이를 두고 왔다는 것이 아닌가.
‘지금 집에 아무도 없을 텐데!’
직장에서 한창 일하던 케이트는 급하게 반차를 쓰고 나왔다.
집으로 가는 내내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던지.
‘···아무리 낮잠을 자고 있어도 그렇지, 언제 깰 줄 알고 그냥 두고 나오면 어떡해···.’
아무도 없으면 엄청 울 텐데, 라고 걱정하던 그때.
지금쯤 유진이 집에 왔을 거란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그래 봤자 유진도 아이잖아.’
오히려 자지러지게 우는 아기를 보고 유진까지 놀라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마저 들었으니.
케이트는 헐레벌떡 뛰어서 집에 도착했다.
“···얘들아! 클로이!”
헉,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외로 집 안은 평화로웠다.
{···응, 그래. 괜찮아, 오빠 여기 있어.}
한국어로 말하는 걸까.
소년이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요람 속의 제 동생을 달래주고 있었다.
{그랬구나, 혼자라서 놀랐구나···.}
살살 요람을 흔들어주는 것은 물론.
가끔씩 딸랑이를 흔들어가며 클로이를 웃게 해줬다.
까르르 까르르-
제 오빠를 보면서 활짝 웃는 클로이를 보고 있으려니.
‘···저게 바로 남매의 모습이구나.’
그런 생각에 가슴이 따스해지던 그때.
인기척을 느낀 유진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
그녀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방으로 가려는 소년에게-
“잠깐만, 유진.”
“···.”
케이트는 벅찬 심정을 감추며 말했다.
“그게··· 갑자기 베이비시터가 못 온다고 그래 가지고, 깜짝 놀라서 집으로 왔는데.”
유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중.
“···고마워, 너무 고생많았어.”
그러자.
그 말에 유진은 기분이 상하기라도 한 듯 미간을 확 좁히더니-
“Don’t say thank you(고맙다고 하지 마요).”
어색한 영어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대체 왜? 어떤 부분이 거슬렸을까 케이트가 생각하는데.
“She’s my sister(쟤는 내 동생이에요).”
그 한 마디만 덧붙이고 바로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
탁- 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케이트는 유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맙다고 하실 필요 없어요.’
‘클로이는 제 동생이잖아요.’
···그래.
표현이 서툴었을 뿐, 유진은 분명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거였다.
“···.”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결심했다.
유진의 곁을 늘 지켜주자고.
···언제든 저 아이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줄 커다란 나무 같은 어른이 되어주자고.
“···그래, 그랬었지.”
어느새 회상에서 깨어난 케이트의 입가에 그리운 미소가 걸려 있던 그때-
“다녀왔습니다!”
타이밍 좋게 도착한 유진이 그녀를 보자마자 원고 얘기를 꺼냈다.
“혹시 <토끼 남작> 원고, 읽어보셨어요?”
“당연히 다 읽었지.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출판인다운 대화를 나눠볼까?”
유진의 기대감 가득한 눈빛을 보며 케이트가 말하자.
씩 웃으며 유진이 대꾸했다.
“···그거야 바라던 바죠.”
*
이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책 제작 논의를 시작했을 무렵.
“···네, 감사합니다. 그럼 곧 북콘 현장에서 뵙길 기대하겠습니다!”
SFF프레스의 마크는 방금 막 평론가 댄 에이브러햄과의 통화를 마친 참.
‘후우, 정신이 하나도 없네.’
북엑스포아메리카(BEA), 통칭 북콘.
수십만 명이 방문할 미국 최대의 도서전이 다음 주에 개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북콘, 목금토일 맞지?”
옆자리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마크.
그 말은 곧 시카고 북콘 현장 근처의 호텔에서 4일간 숙식해야 한다는 의미였는데.
“아오, 엄청 빡세겠네···.”
“그래도 재밌지 않아? 난 북콘 갈 때마다 재밌던데.”
마크의 말에 옆자리 직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젊네, 젊어. 난 다녀오고 나면 몸살이 나더라.”
그 말대로 4박5일간의 북콘 출장을 마치고 오면 엄청 피곤하긴 했지만.
‘독자들을 코앞에서 만날 기회가 흔치 않으니까!’
초대형 규모의 컨벤션 행사장에서 진행되곤 하는 북콘.
이곳에 각 출판사는 부스를 세워 자사의 책을 판매 및 홍보한다.
대부분은 이 시기를 노려 대대적인 할인 행사를 하며, SFF프레스에선 에곤 K의 신작 홍보를 메인으로 하는 좌담회가-
“토요일이랬지?”
“어어. 사인본 판매는 첫날부터.”
좌담회와 사인본 판매를 필두로 하는 이벤트.
이 중 사인본은 첫날 부스 오픈시부터 쭉 판매될 예정인데, 마크는 내심 이 1천 부의 사인본이 너무 빨리 품절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인터넷 반응을 보면 충분히 그럴 법하니 말이다.
“아, 에곤 작가님도 오시면 좋을텐데.”
마크의 중얼거림에 대꾸하는 옆자리 직원.
“뭐, 얼굴도 안 드러내시는 분이 이런 자리에 오실 리가.”
“그거야 잘 알지만, 그냥 아쉽다는 거지.”
단지 책 홍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이 보고 싶어서다- 라는 마크의 말에 픽 웃는 옆자리 직원.
“아, 근데 그 맘은 나도 이해가 가긴 해. 에곤 작가님 말이야, 뭔가 되게··· 온갖 풍파를 다 겪고서 꿋꿋이 일어나신 느낌?”
SFF프레스 안에서 에곤 K의 이미지란-
‘중병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병마를 이겨내고 인생 2막에 시도한 새로운 도전에서 승승장구하는’ 작가였으니까.
“어어, 딱 그런 느낌이지! 인생의 멘토로 삼고 싶은···.”
작가 본인이 들으면 아주 복잡한 표정을 지을 법한 이야기를 하는 두 직원이었다.
*
다음 날, 학교에서 마주친 네드는 나를 몹시 원망했지만.
‘어떻게, 어? 유진, 너 어떻게 날 그 무서운 곳에 끌고 갈 수가 있냐···.’
애가 간만에 운동을 해서 그런지, 혈색이 확 좋아진 게 보였다.
‘미안 미안.’
‘야, 진심이 안 느껴지는데?’
‘아니 진심이야,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네드의 어깨를 붙잡고 씩 웃어 보였다.
‘오늘 한 번 더 가자.’
‘···!’
끝까지 옆에서 같이 운동할 테니 걱정말아라, 라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나, 나 이만 먼저 갈게!’
네드가 도망쳐버린 것이 아닌가.
···여하튼, 그건 그렇고.
지금 나는 문예창작 클럽활동을 하러 온 참.
“자, 다들 잘 지냈지?”
미스터 레너드가 평소보다 훨씬 밝은 얼굴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앞서, 너희들에게 전할 좋은 소식이 있다!”
학생들이 뭐냐며 궁금해하자, 레너드 선생님의 목소리가 한 톤은 더 올라갔다.
“북콘 교통비 이벤트 말이다, 거기에 우리 힐크레스트 문예클럽이 당첨됐어!”
“우와아아—”
덕분에 학교 측에서 숙박비도 일부 지원해주기로 했다는 말을 기쁘게 덧붙이는 미스터 레너드.
“우와 우와, 그럼 우리 다같이 시카고 가는 거야?”
“미스터 레너드! 1박2일로 가는 건가요?”
“넘 좋아!”
다들 잔뜩 흥분한 가운데.
‘잠깐만 그럼··· 애들이랑 다같이 북콘에 간다고?’
나만이 멍하니 속으로 되묻던 그때.
지잉- 핸드폰이 진동하며 비숍 작가님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랜든_비숍 : 혹시 이번에 북콘에 올 생각은 없나]
[보아하니 시카고가 자네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던데···]
···
[다름이 아니고, 내가 이번에 북콘에서 좌담회 패널로 참가하게 돼서 말이야···]
비숍 작가님이 참가하는 좌담회라니!
[자네도 그냥 한 명의 독자로서 온다면, 잠깐 얼굴을 보면 좋을 테니···.]
징, 지잉-
비숍 작가님이 보내온 메시지에서 두 눈이 떨어지지 않던 그때.
“유진, 너도 갈 거지?”
제이든의 질문에 반쯤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와—!”
“유진도 간대!”
문예창작부 친구들과, 비숍 작가님과 함께하는 북콘이라.
···어쩐지, 꽤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았다.
*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그로부터 일주일 만에 <토끼 남작의 모험> 1권 초고를 마무리했다.
“드디어!”
새어머니는 원고 완성본을 엄청 고대하고 있었단다.
“···정말로요?”
“응, 너무 궁금한 부분에서 끊겼잖니.”
하긴 거기가 좀··· 그런 포인트이긴 했지.
어린애처럼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새어머니의 반응에 풋 웃음이 나왔다.
“재밌어하시니 좀 안심이 되네요.”
사실, 내가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에 집필을 끝낼 수 있었던 건 케이트 덕분이기도 했다.
‘두 가지 부분이 고민된다고 했지?’
첫째, 문장구조와 어휘의 수준.
둘째, 플롯의 복잡성.
‘일단 두 번째 부분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이미 클로이에게 얘기를 들려주면서 확인한 부분인 만큼, 내용적인 면에서 바꿀 건 없을 것 같다는 것.
‘그리고 첫 번째 부분은··· 지금도 충분히 괜찮기도 하고, 일단은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써보렴.’
본인이 아동서를 작업한 경험이 많은 만큼, 전문 편집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문장을 손봐줄 수 있을 거라는 것.
‘정말요?’
‘후후, 그래. 그러니 넘 걱정하지 말고 맘 놓고 써봐.’
그 말에 마음이 든든해진 덕분에, 머릿속의 이야기를 후루룩 꺼내놓을 수 있었던 것.
‘그림은 네드가 그려준다고 했지? 그것 참 고맙구나.’
네드도 곧 삽화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니, 그것만 마무리되면 곧바로 케이트가 책 제작을 시작하기로 했다.
···여하튼, 그렇게 완성된 원고 파일을 새어머니에게 넘겨놓은 금요일 아침.
“잘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여행용 옷가지를 대충 쑤셔넣은 더플백을 들고 집을 나섰다.
“여행 잘 다녀오렴!”
“오빠아, 빠빠이~ 클로이 션물도 샤와!”
“그럼 그럼.”
두 손을 열심히 흔드는 클로이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나왔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대절버스 안.
“이야야아—”
“제이든, 조용히 좀 하면 안 될까? ···설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이오와주 바깥으로 나와본 건 아니지?”
차창에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제이든에게 미아가 한마디하자.
“에이, 당연히 아니-”
“···난 처음인데.”
의외로 로완이 흥분해서 얼굴이 벌게진 채 대답했다.
“로완···? 너 그래서 얼굴이···.”
“내 얼굴이 왜, 뭐가 어때서.”
다들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잔뜩 신이 난 친구 녀석들과 함께 대절버스를 타고 시카고로 향하는 중.
‘참, 이런 걸 다 해보네.’
신기한 기분에 픽 웃는데.
“···니들은 어느 부스부터 갈 거야?”
공식사이트에서 지도까지 뽑아왔다며, 본격적인 투어를 준비하는 친구들의 말이 들렸다.
“아 글쎄, 고민되네.”
“난 저녁에 에이바 앨버튼 사인회 가야 하는데···.”
각자 의견이 갈리는 가운데 제이든의 목소리가 유난히 튀었다.
“아 무슨 소리야! 무조건 SFF프레스지-!”
···잠깐만, SFF프레스라고?
익숙한 이름에 뒤를 돌아보자.
제이든이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책을 들고 있었다.
“에곤 K 사인본 구하러 가야 한다고!”
“아, 에곤 K 사인본 끌리긴 하는데···.”
“흐, 에곤 작가님도 안 나오는데 굳이 사인본을-”
“무슨 소리야, 언제는 굿즈 때문에라도 가겠다며.”
갑자기 제이든이 날 보고 외쳤다.
“유진, 너는?”
“···뭐?”
멍하니 대꾸하자 샬롯까지 합세한다.
“그래, 유진··· 우리 같이 사인본··· 사러, 가자.”
두 사람의 제안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SFF프레스의 부스에선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행사를 하고 있을 테니까.
사실, 담당자 마크에게서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내심 궁금하기도,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작가 본인이 오지도 않는 행사에 과연 얼마나 많은 독자가 와줄지.
담당자님이 괜히 실망하진 않을지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정말 <피터 팬>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걸 현장에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까.
‘왜, 전에 마커스 작가도 그랬잖아.’
내 글을 좋아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아도, 그것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만큼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
···그건 비단 마커스 혼자만이 아니라, 작가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상이 아닐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책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니-
“···어, 같이 가보자.”
직원들과 마주치지 않고 슬쩍 둘러보고 오는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우오오오! 좋아 좋아!”
“히히.”
내 말에 제이든과 샬롯이 기뻐하는 가운데, 내 입가에도 미소가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