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자들(2)
버스의 차창 너머로 똑같은 풍경이 펼쳐지길 30분째.
처음만 해도 어느 부스에 들를지 행사장 지도에 열심히 체크하거나, 풍경을 보며 신나게 떠들던 아이들 대부분이 잠든 가운데.
“저기, 유진.”
웬일로 로완이 내 옆자리로 와서 말을 붙였다.
“너, 동생한테 동화책 만들어준다던 건 어떻게 돼가고 있어?”
“아, 그거.”
언젠가 네드와 <토끼 남작의 모험> 얘기를 할 때 로완이 듣고는 관심을 보이더니 궁금했던 모양이다.
“일단 원고는 다 마무리했고, 책 제작은 POD로 진행하려고.”
“POD? 그게 그러니까··· 맞춤형 소량 인쇄를 얘기하는 거지?”
로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출간할 생각은 아니고, 그냥 클로이 선물용으로만 제작하는 거긴 한데.”
POD란 Print On Demand의 약자로, 최소한의 부수로도 책을 제작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말한다.
‘더는 저자들이 전통적 방식의 출간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
예전은 최소 1천 부 이상은 되어야 책을 찍어낼 수 있었다면.
이제는 디지털 출력 기술의 발전으로 1~2부의 책도 얼마든 제작이 가능해진 상황.
“새어머니가 잘 아는 POD업체가 있다는데 거기에 보내서 제작하려고.”
아동서 디자이너로 일했던 만큼, 케이트가 직접 내 원고를 epub파일로 만들기로 했고 말이다.
설명을 들은 로완이 눈을 빛냈다.
“우와, 멋진걸. 나중에 완성본이 나오면 나도 한 번 보여주라.”
“왜, 책 제작 해보려고?”
“음, 그게··· 지금까지 쓴 것 중에··· 되게 마이너한 소설이 하나 있거든.”
여러 에이전시와 출판사에 투고했다가 번번이 거절당했지만, 그럼에도 작품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것.
“그럼 확실히 셀프퍼블리싱(자가출판)이 괜찮은 방법이겠네.”
셀프퍼블리싱이란 말 그대로 저자가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혼자서 책을 내는 걸 말하는데.
아마존을 비롯해 수많은 플랫폼들이 자가출판 서비스를 제공한다.
회원가입을 해서 파일만 업로드하면, 나머지는 다 플랫폼에서 제작해주는 식.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는 로완.
“근데 셀프퍼블리싱이라도 책 제작에 관해 어느 정도 알아야겠더라고. ···어차피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지만.”
“왜, 모르는 거잖아?”
실제로도 꽤 많은 책들이 셀프퍼블리싱을 통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말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이지.’
처음에는 저자가 직접 전자책을 셀프퍼블리싱했는데, 이 전자책이 생각보다 제법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대형 출판사 빈티지북스에서 이 책의 판권을 사들였지.’
그렇게 정식 단행본으로 재출간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52개 국에 번역 출간되고, 전 세계에서 1억 5천만 부가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했다.
이 같은 사례를 얘기해주자 로완의 눈이 반짝 빛났다.
물론 그렇게 대단한 기대를 걸고 있진 않지만,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것.
“그래. 나중에 하게 되면 나도 보여주라.”
“아, 어··· 알았어.”
조금 쑥스러워하고는 본인의 좌석으로 돌아간 로완.
‘무슨 작품인지 궁금해지는걸.’
그때, 지잉- 하며 미스터 케빈에게서 온 메시지.
[에이전트_케빈 : 작가님! 시카고 북콘 가시는 중이신가요]
[가서 SFF프레스도 들르실 예정?]
나는 픽 웃으며 답을 보냈다.
[에곤_K : 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빠르게 쏟아지는 메시지들.
[에이전트_케빈 : 크흐흐 이거 나중에 마크가 알면 땅을 치고 아쉬워하겠는데요]
[이러다 가서 마크랑 빅토리아 팀장님까지 다 만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크크]
···물론, 어차피 그 둘은 내 얼굴을 모르니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나중에 민망해질 상황을 피하기 위해, 슬쩍만 보고 올 생각이다.
[아 아무튼! 일단 이 파일부터 확인해주시죠]
[2024년5월_현황보고.pdf]
곧바로 보고서 파일을 클릭해 열자, 생각지도 못한 문구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
안 그래도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이 베스트셀러 리스트에서 순위가 떨어지기는커녕, 계속 경신 중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1.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
-5월 1주의 가장 많이 팔린 책 20위]
···설마 그 정도로 매출이 폭발적일 줄이야.
그러나 좋은 소식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마존, 반스앤노블, 인디바운드 선정 2024년 4월 최고의 책]
‘최고의 책’.
이거야말로 각 서점 사이트에 존재하는 최상위 프로모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터 팬>이 받았던 ‘에디터픽’ 이상의 홍보 효과라고 해야 할까.
···아마존 이달의 책만 골라서 토론하는 북클럽이 미국 전역에 수없이 많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 외에 <호수괴물>의 영화화 또한 착착 진행되는 중.
[2.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시나리오 완성, 제작사 및 투자사 검토 완료
-현재 주연 배우 캐스팅 조율 중
···]
‘벌써 배우 캐스팅까지 들어갔네.’
나는 미스터 케빈에게 고맙다는 답장을 보낸 뒤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워낙 알아서 잘해주니 마음이 편하다고 할까.
···그렇게 10분을 더 달렸을까.
“다 왔다!”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인 맥코믹플레이스 호텔에 도착했다.
*
그로부터 잠시 후, BEA가 열리는 초대형 컨벤션 센터 맥코믹 플레이스.
“다 내려왔구나. 좋아, 이제부터 저녁 9시까지 자유활동을 하되···.”
우리가 투숙하는 호텔은 바로 이 맥코믹 센터와 연결돼 있는 곳으로, 객실에다 짐만 풀고 로비에 집합한 참이었다.
미스터 레너드가 짧은 당부를 마치자, 아이들은 몇 개 그룹으로 나뉘어 행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SFF프레스부터 가자고.”
샬롯과 제이든, 미아, 그리고 나까지 총 네 명은 아까 얘기했던 대로 SFF프레스 부스로 향했다.
그렇게 걸어가던 중-
[아버지 : 오고 있냐?]
아버지에게서 온 메시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막 도착해서 호텔에 짐 풀고 나옴요]
[출장 다녀오면 제이든네 체육관 가기로 한 거 기억하시죠]
제이든의 아버지, 짐 관장님이 운영하는 체육관에 같이 가자는 말에 아버지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으니까.
[아버지 : 그래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이미 어제 아침에 출장을 떠나신 참.
‘하하, 이번엔 출장지에서 유진이 널 다 보게 되겠구나.’
아버지가 운영하는 KMA 에이전시 또한 이번 북콘에 참가하기 때문.
물론 출판사들처럼 부스를 세우는 건 아니고, 지정된 관계사 전용 공간에서 한국 출판사들과 미팅을 주로 할 예정이다.
‘여유될 때 잠깐 아빠 테이블에도 들르고, 저녁엔 비숍 작가님을 만나는 게 나의 계획.’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하던 그때, SFF프레스라는 로고를 걸어놓은 부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라.’
저 멀리서부터 길게 이어진 줄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뒤편에 보이는 것은 [에곤 K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사인본 판매]라는 문구가 적힌 판넬.
“잠깐만, 지금 이거··· 사인본 판매 줄 선 거 맞지?”
“와, 엄청나다···.”
“우리도 줄부터 서야지!”
미아의 손에 이끌려 다같이 줄을 선 가운데.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두 눈만 깜박였다.
‘정말로, 이 많은 사람이 내 사인본을 사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사인회가 아닌데도, 옆구리에 초록색 <피터 팬>을 한 권씩 끼고 있는 사람들.
나이도, 외모도, 옷차림도 각양각색인 독자들이 줄을 길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이 기분을···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내가 쓴 글을 이토록 좋아해주는 사람들.
그런 ‘독자’들이 살아 숨 쉬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슴 뭉클한 일이었다.
“유진? 왜 그래? 갬동~했으?”
···그런 내 반응을 친구들은 조금 다른 쪽으로 오해한 듯하지만.
“유진, 너··· 에곤 K를, 보기보다 많이 좋아했구나···.”
“아, 그 맘 나도 알지! 민망해할 거 없어! 사실, 나도 아까 좀 그랬는데~ 막 엄청 흥분되고 가슴이 빨리 뛰고-”
“제이든 넌 좀 민망해해도 돼.”
“아 진짜 너무하네에···.”
그렇게 줄을 선 지 10분쯤 됐을까.
사인회가 아니라 사인본 판매회였던 덕분에 빠르게 차례가 돌아왔다.
“우리 차례다!”
제이든이 신이 나 앞으로 나아가던 바로 그때.
“자자, 선배 이리 나오세요.”
부스 안쪽에서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 직원이 나오더니.
방금 전까지 사인본 판매 테이블을 지키고 있던 직원과 자리를 바꿨다.
그러니까-
“오, 고맙다 마크.”
“흐흐 고생하셨습니다! 자, 독자님들 이리로 오세요!”
···저 사람이 바로 내 담당자 마크라는 거지.
‘뭔가 신기한 기분이네.’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의 느낌 그대로, 장난스러운 분위기의 젊은 직원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오오, 혹시 고등학생들?”
바로 앞에 선 우리한테 천연덕스럽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그걸 또 몹시 자연스럽게 받아치는 내 친구들.
“네 맞습니다! 에곤 작가님 완전 팬이에요.”
“책··· 잘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요.”
“SFF프레스 책들 다 너무 좋아해요!”
그러자 마크의 눈이 반짝인다.
“우와아··· 너무 감동인데요. 아! 첸 팀장님, 여기 좀 보세요. 고등학생들이라는데 우리 SFF프레스 팬이래요!”
마크의 호들갑에 우리 쪽을 돌아보는 중년 여성.
‘저 사람이 바로 빅토리아 첸···!’
단아한 인상에 지적인 눈빛을 한 빅토리아 첸 팀장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반가워요, 학생들. 와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인사하고는 곧바로 현장 진행 상황을 체크했다.
“사인본 재고 상황 체크해, 조이스. 릴리는 에이브러햄 선생님께 연락해봤고?”
“아, 네! 방금 통화해서 일정 확인 마쳤습니다.”
“좋아, 비숍 작가님은? 해리슨이 직접 모시고 갔다고 했지?”
“네, SFWA 협회 행사가 곧···.”
친구들이 사인본을 구매하는 가운데, 나는 빅토리아 팀장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회귀 전,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젊은 모습이었다.
‘아 뭔가 되게 이상한 기분이네.’
매일처럼 연락을 주고받던 사람들의 얼굴을 이제야 보게 됐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막상 그쪽에선 내 얼굴을 모르겠구나- 하고 생각하던 그때.
“학생도 살 거죠?”
마크의 질문에 순간 당황했다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흐흐, 제가 이 친구한테 영업했죠! 유진, 어때? 오길 잘했지?”
“크, 아주 잘했네요!”
···제이든과 마크.
이 둘이 아주 죽이 척척 맞는 것이 아닌가.
여하튼.
나는 친구들과 줄을 서서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사인본을 구매하는 데 성공했다.
‘···.’
벌써부터 지친 기분으로 표지를 넘기자.
[Egon K]
유려한 필기체의 글자가 보였다.
···내가 얼마 전, 팔이 떨어져나가라 했던 사인이다.
‘아, 진짜.’
내가 쓰고 내가 사인한 책을 줄 서서 내 돈 주고 산,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픽 웃음이 나던 그때.
제이든이 심각한 얼굴로 우리 셋을 돌아보았다.
“잠깐만, 우리 지금 제일 중요한 걸 잊고 있었어.”
“응?”
“그게 뭔데.”
씩 웃는 제이든.
“왜, 배고픈 배는 귀가 없다(hungry belly has no ears)고 하잖아.”
배고프면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의 격언.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긴 하다.
하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았나.
*
“여기야, 여기!”
[더그레이트피자]
제이든은 미리 찾아봤다는 매우 유명한 피자 맛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피자집 안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히히, 기대되네.”
“뭘 시켜야 해, 제이든? 그것도 찾아봤어?”
기다렸다는 듯 두 눈을 빛내며 대답하는 제이든.
“여기선 무조건 하와이안 피자야.”
하와이안 피자 전문점이다, 라는 제이든의 말에 우리 셋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뭐? 하와이안 피자?”
“난··· 좋아.”
“음.”
제이든과 샬롯이 찬성파라면, 나와 미아는 반대파.
우리 둘의 떨떠름한 얼굴을 본 제이든이 우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 니들이 진짜 맛있는 파인애플 피자를 못 먹어봐서 그렇다니까?”
구워진 파인애플의 맛.
부드럽고 촉촉한 달콤함 속에 자리한 과일향이야말로 피자의 완성도를 한 차원 끌어올리는 요소이며···.
“저기, 미아. 제이든이 저렇게까지 얘기하는데 한번 시켜볼까?”
“···뭐, 그러든가.”
그리고 잠시 후, 갓 구워진 따끈따끈한 하와이안 피자가 나왔다.
“···오?”
하와이안 피자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가, 의외로 나쁘지 않네- 라고 생각하는데.
“어? 맛있네?”
파인애플을 어떻게 피자에 올리냐며 질색하던 미아도 의외로 잘 먹는다.
그러자 너무나 기뻐하는 제이든.
“흐흐, 맛있지? 니들이 진짜 맛있는 하와이안 피자를 못 먹어봐서 그런 거라니까!”
···제이든이 그간 울분이 꽤 쌓인 모양인걸.
하긴, 사람의 입맛은 주관적인 영역이기도 하고.
‘어느 분야나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는 게 중요하잖아?’
그러고 보면 나도 예전에 한국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언제 한 번 <책벌레의 성장>이라는 라이트노벨 소설책을 학교에 들고 간 적이 있는데.
‘···뭐야, 이런 유치한 거 왜 읽냐?’
어떤 책인지 확인도 안 하고 매도하던 태도에, 기분이 팍 상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나니까.
‘내 태도가 편협했는지도 모르겠네.’
물론 지금 이 하와이안 피자도 내 입맛에 그렇게 잘 맞는 건 아니지만,그래도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라는 결론을 내리던 그때.
“맞다 유진, 한국에선 민트초콜릿을 두고 호불호가 갈린다며?”
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논쟁이 있을 정도.”
“너무··· 신기, 하네. 민트초코는··· 누구나, 좋아하는 거 아냐?”
“그치? 민트초코 존맛인데.”
샬롯과 미아의 반응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난 민초도, 파인애플 피자도 싫어하는데.’
···고수도 안 먹고 말이다.
하지만 애초에 제대로 먹으려고 시도한 적도 없으니, 입맛에 있어선 내가 정말 편협한 걸지도 모르겠다.
다음엔 민트초코를 시도해봐야지 진지하게 마음 먹던 그때.
“민트초콜릿이라니, 그런 걸 대체 어떻게 먹어?”
제이든이 미간을 좁히며 끼어들었다.
“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맞아··· 취향은, 존중해야···.”
“민트초콜릿은 취향의 영역을 넘어섰지.”
“와, 제이든 쿤츠, 진짜 이럴 거야? 선 넘네?”
“···.”
입맛 차이를 두고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 이름이었어
*
바로 그 시각, 캘리포니아의 샌포드 에이전시 사무실.
건장한 체구의 청년 작가에게 에이전트 캠벨은 열심히 뭔가를 설명하는 중이었다.
“BEA 미팅은 에이전시에서 다 알아서 할 거니까 넌 신경 쓸 거 없고··· 잠깐만 마커스,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캠벨의 물음에 마커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라니, 대체 무슨-”
“캠벨, 이거 받아.”
그가 건넨 문서를 무심코 받아든 캠벨의 눈이 커졌다.
“자, 잠깐만··· 계약 해지라고?”
제 눈이 믿어지지 않아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지만, 문서의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샌포드 에이전시와 작가 마커스 스톤이 한 계약이 불공정 계약임을 법적으로 확인하는 문서.
“지금 장난해? 말도 안 되는 농담 하지 마, 마커스!”
“농담 아냐.”
“아니 아니지, 대체 누가 이렇게 허파에 바람을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지는 불가능해! 우리 계약기간이 아직 한참은 더 남았다는 거 너도 알지? 네가, 네 손으로 직접 사인했-”
“진정해, 캠벨.”
얼굴이 벌게진 채 횡설수설하는 에이전트에게 마커스가 딱 잘라 말했다.
“바로 그 점이 문제라는 거야.”
“···뭐?”
“불공정 계약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한 번 찾아봐, 캠벨.”
그의 에이전트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운데, 마커스는 법무법인 측의 확인을 마쳤다고 덧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사무실에서 걸어 나오려는 그의 등 뒤로 캠벨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대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가 그대로 물러날 것 같냐고! 어디 법정으로 가보자고! ”
그 말에 마커스는 차분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대로 폭발할 것처럼 새빨개진 에이전트에게 말하길.
“그래, 안 그래도 법정 공방을 준비하고 있었어.”
“···!”
“좀 지루한 과정이겠지만, 내 쪽의 승소가 거의 확실하다고 하더라고. 바라는 대로 곧 법정에서 보자고, 캠벨.”
그 말을 끝으로 마커스는 사무실을 걸어나왔다.
그러는 내내 뒤편에서 욕설과 폭언이 쏟아졌지만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으며.
건물을 나와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차 운전석에 앉고는 스마트폰을 꺼내 인스타그램 앱을 열었다.
무슨 말을 꺼낼까 잠시 고민하다가.
[마커스_스톤 : 에곤 작가님, 잘 지내셨어요? <피터팬> SF 부문 2주 연속 1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내, 다음 말을 쓸지 말지 잠시 고민했지만.
찰나의 망설임을 떨쳐내고 메시지 작성을 이어나갔다.
[마커스_스톤 : 저는 미스터 클레그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덕분에 에이전시 계약을 해지하기로 했고, 지금은 법무법인의 조언하에 착실히 진행 중입니다···]
샌포드 쪽에서 소송을 걸어올 상황에도 이미 대비를 마쳤다는 것.
[마커스_스톤 : 작가님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저는 저 자신을 탓하고 있었을 겁니다]
계속해서 작성을 이어가던 그때, [에곤 K]의 프로필 옆에 ‘···’라는 표시가 뜨더니.
[에곤_K :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에곤_K : 힘든 결심이었을 텐데 참 잘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제 마음을 그대로 읽어준 듯한 반응.
마커스는 입가 가득 미소를 띤 채 답장했다.
[마커스_스톤 : 다 에곤 작가님 덕입니다]
상대가 제가 뭘요- 라는 겸양의 대답을 할 틈조차 주지 않으며 곧바로 다음 말을 덧붙였다.
[마커스_스톤 :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상투적인 문구이지만 그것 외에는 제 진심을 표현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내 날아온 것은 조금 의외의 대답이었다.
[에곤_K : You don’t have to thank me(제게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니.
조금 의아해하는 가운데 에곤의 말이 이어졌다.
[에곤_K : 저는 그저 하나의 옵션을 제안했을 뿐이고, 그걸 선택해서 실행에 옮긴 것은 마커스 작가님이시잖습니까]
[에곤_K : 저야말로 어려운 용기를 내신 작가님께 찬사를 보내고 싶군요]
‘···.’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이내 농담 섞인 답장을 보냈다.
[마커스_스톤 : 하하, 감사합니다. 에곤 작가님은 제 인생 선배나 마찬가지이십니다]
그러자.
에곤 K의 답은 한 박자 후에야 왔다.
[에곤_K : 어, 음··· 그 정도 가지고 뭘 인생 선배랄 것까지야]
당황한 듯한 반응에 마커스는 소리내 웃고 말았다.
“하하, 쑥스러우신가 보네.”
그리고 그 시각, 에곤 K 아니 유진은-
‘아무리 그래도 30대 초반의 상대에게 인생 선배라는 소리를 듣는 건···.’
친구들과 하와이언 피자를 다 먹고 피자가게를 나선 참이었다.
*
가게를 나서서 다시 행사장으로 돌아가는 길.
마커스 스톤 작가에게서 온 메시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잘 해결된 것 같아 다행이네.’
중간 중간 미스터 케빈에게 상황을 전달받긴 했지만, 내심 좀 걱정이 됐다.
사실 이런 케이스는 법적으로 진행하면 당연히 작가에게 유리하지만, 막상 중요한 순간에 작가 본인이 마음을 바꾸는 경우가 많으니까.
‘가스라이팅이라는 게 참 무서운 법이지.’
좋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딱 잘라내지 못하거나.
오히려 에이전시의 말도 안 되는 협박에 겁을 먹어 소송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나는 마커스 작가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금 읽으며 생각했다.
‘···인생 선배란 말엔 좀 많이 어폐가 있지만.’
오히려 <재투성이 아래서>가 내게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그 반대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던 그때.
친구들이 내게 물었다.
“유진~ 넌 이제 어디 갈 거야? 계획 세워둔 거 있어? 난 키이란 헐리 작가 사인회 갈까 하는데.”
“나랑 샬롯은 B구역으로 갈 거고.”
“나는···.”
지잉- 진동음과 함께 메시지 여러 개가 연달아 왔다.
[아버지 : 유진아 잘 도착했냐]
[랜든_비숍 : 유진 군 어디쯤인가]
[아버지 : 좀 있으면 미팅이 시작되는데 지나가다 여유되면 잠깐 들르거라]
지잉, 지잉-
···친구들의 물음에 대답하기 앞서 다시금 진동하는 핸드폰.
[랜든_비숍 : 나는 30분 후에 도착할 예정이네. 그때 A-12구역에서 ‘작가와의 만남’ 행사가 있을 거라.]
[랜든_비숍 : 넉넉 잡아 한 시간이면 끝날 테니, 그때 가서···.]
나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난 아버지 잠깐 보고, SF판타지작가협회 행사나 갈까 싶은데.”
“아 맞다, 유진네 아버지도 북콘 참가자라고 하셨지.”
“오 멋지다···.”
일단은 아버지 얼굴 잠깐 보고, 그다음엔 A-12구역에 가면 될 것 같았다.
‘비숍 작가님이 나오시는 행사는 꼭 봐야지.’
*
이처럼 시카고가 BEA의 열기로 한창 뜨거울 때.
‘드디어 스콜라스틱 공모전 시즌인가.’
작년에 백 주년을 맞이한 유서 깊은 청소년 문학예술 공모전.
이 스콜라스틱 공모전에는 미국 전역에서 약 26만 점의 작품이 출품되며, 그중 약 4만 명이 지역상을, 2천 명이 전국상을 받는다.
총 28개의 부문이 존재하니 부문당 전국상 수상자는 70명 내외에 불과한 것.
···한마디로 엄청난 경쟁률을 자랑하는 대회다.
작품 수가 많은 만큼 심사에 동원되는 심사위원의 규모 또한 상당한데.
“자 어디, 다음 원고로 넘어가볼까.”
시카고 시내의 어느 아파트에서 본인의 컴퓨터 앞에 앉은 장년의 남성, 스탠리 미첼 교수 또한 1차 심사위원단의 한 명이었다.
그 또한 먼 옛날 이 스콜라스틱 대회의 수상자였으며, 현재는 시카고대학 영문과 교수 및 전문 평론가로 활약하는 중.
드륵, 드르륵-
주름진 손이 마우스 휠을 쭉 내리며 빠르게 원고를 읽어내렸다.
‘1차 심사에선 일단 수준 미달의 원고부터 걷어내야지.’
공모작품 수가 너무 많으니 최대한 빨리 보는 게 관건.
그리고 어차피 본격적인 심사는 2차와 3차에서 이뤄진다.
‘올해에도 어마어마한 수준의 작품들이 나올 테니.’
가장 전통 있는 공모전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이 스콜라스틱 대회에는 미국 전역의 날고 기는 실력자들이 출전한다.
나이만 고등학생일 뿐 출판 에이전트와 정식 계약을 맺었거나.
이미 작가 협회에 등록돼 있다든가, 상업 출간을 해본 정식 작가인 경우도 상당수이니까.
“···이것만 빨리 읽고 잠시 쉬어야겠구만.”
30여 분을 쉬지 않고 읽다 보니 눈이 침침해지던 가운데.
스탠리의 시야에 라는 제목이 들어왔다.
‘AI 데이지라, AI 얘기인가?’
무슨 내용이 펼쳐질지 뻔히 예상이 됐지만, 애써 한숨을 삼키며 읽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5분 정도 지났을까.
“···어?”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다른데?
당혹스러움으로 시작된 감정 상태는 이내 집중, 몰입, 감동으로 넘어가다가-
“···!”
마지막 장의 반전.
···데이지가 열 살짜리 딸의 이름이 아닌, 딸을 남기고 젊은 나이에 죽은 어머니의 이름이라는 것에 결국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어흑, 흐윽···.”
공모전 원고를 심사하다 울어버리다니, 심사위원 자격 미달이 아닌가 싶지만서도.
한 번 터진 눈물은 좀처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생에서 겪었던 수많은 상실.
그것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무엇보다도-
‘어머니.’
돌아가신 지 십 년도 더 되었지만, 여전히 가슴속에 묻어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불현듯 되살아났기에.
“이것 참, 민망하게스리···.”
장년의 교수는 젖은 눈가를 거칠게 비벼 닦았다.
그로부터 약 10분 뒤.
이제야 좀 평정을 되찾은 스탠리는 이 의 접수 정보를 검색했다.
‘···여기 있군.’
아이오와주, 힐크레스트 고등학교 참가자.
이름은 유진 권(Eugene Kwon).
‘유진 권, 유진 권···.’
어째서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까.
입안에서 잠시 이름을 굴려보는데-
“잠깐만-!”
문득 떠오른 생각에,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향했다.
책장 맨 윗칸.
셰익스피어 관련 창작물만 꽂아두는 칸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셰익스피어 앤솔로지>를 꺼내들었다.
두꺼운 책의 목차 페이지를 펼치자.
[6인의 고백(유진 권) ······ 23페이지]
“···그래, 분명 이 이름이었어!”
저도 모르게 외치는 스탠리 미첼.
영문학 교수이자 셰익스피어 학회 정회원인 그는 아이오와대에서 발행하는 이 셰익스피어 앤솔로지를 꾸준히 사보는 독자이기도 했는데.
‘어차피 학생들이 쓰는 소설이니 퀄리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셰익스피어를 어떤 식으로 그려내는지 궁금하달까.
학자의 의무감과 셰익스피어 팬의 호기심으로 읽고는 했는데···.
‘맙소사, 이 작품은 대체.’
작년 9월.
앤솔로지에 실린 <6인의 고백>이라는 작품을 읽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정말로 학생이 쓴 작품이라고?’
독자 대부분이 이 작품의 반전과 서사적 완성도에 큰 매력을 느꼈다면.
스탠리 자신은 연구자로서 이 여섯 명의 캐릭터 해석에 깊이 탄복했던 터.
‘권유진이라.’
앤솔로지에 실렸다는 걸 보면 학생이 분명한데.
어느 대학원인지, 어느 과에서 무엇을 전공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죄송합니다. 유진 권 작가님에 대한 정보는 드릴 수가 없어요.’
대학출판부에 따로 문의까지 했으나 그런 대답밖에는 돌아오지 않았고.
따로 찾아보아도 나오는 정보가 없기에 그냥 기억 속에 묻어두었는데···.
“그 유진이, 이 를 쓴 유진이라니!”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둘 다 아이오와주에 살고 있다는 걸 보면 동일인일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여기서 그 이름을 보게 될 줄이야.”
너무도 기분 좋은 서프라이즈에 허허 웃던 그때.
모니터 화면에 뜬 문구가 뒤늦게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AI 데이지| 스콜라스틱 공모전 응모원고]
···그래, 자신은 분명 스콜라스틱 공모전 심사를 진행하고 있던 중.
그리고 스콜라스틱 공모전은-
“7학년부터 12학년까지만 응모 가능한 공모전···.”
지금껏 잊고 있던 사실이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고.
스탠리 미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고등학생이라고?”
당연히 대학원생이 쓴 거라고 생각했던 <6인의 고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독한 상실의 고통을 진정한 애도로 승화시키는 를-
‘이런 깊이의 글을··· 고등학생이 쓸 수 있단 말인가?’
애초 스콜라스틱 공모전에 응모된 글이니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것에 뒤늦게 놀란 자신이 한순간 바보처럼 느껴졌다.
“말도 안 돼···.”
그리고 동시에,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탐난다.’
···이 권유진이라는 학생을 시카고대학에 반드시 데려오고 싶다는 충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