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56화 (56/126)

팬보이(1)

북엑스포아메리카, 줄여서 BEA의 2일차인 금요일 오후.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 강세 출판사 중 하나인 ‘문학마을’ 의 정연희 팀장은 테이블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문객 수가 엄청나네.’

오랫동안 해외문학을 담당해온 만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나 런던 도서전은 가봤지만, BEA에 오는 것은 그녀도 처음.

해외 유수 도서전을 다양하게 경험해본 입장에서 이곳만의 특징을 꼽아자면-

‘여기선 좀 더 독자들 위주의 행사가 많이 진행된다는 거?’

전 세계 최대 도서박람회로 불리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경우, 독자들보다는 출판인들을 위한 행사에 가깝다.

전 세계의 다양한 출판업계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자리라고 할까.

그런 곳에서 진행되는 고급스러운 리셉션 행사나 비즈니스 파티도 나쁘지 않지만···.

‘저런 것도 좋은걸.’

좋아하는 저자에게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서 있거나.

백팩이 가득 찰 정도로 책을 잔뜩 쓸어담거나.

저자 좌담회를 보겠다고 관객석이 미어터지도록 앉아 있거나···.

독자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북콘 현장이 그녀의 취향엔 좀 더 맞는 듯했다.

한편 정연희 팀장이 앉은 이곳은 비즈니스 전용 구역으로, 에이전시나 출판사간의 미팅에 활용되는 공간이다.

[KMA 에이전시| 대표 권상준]

[대한민국 ‘문학마을’ 미팅]

테이블에 놓인 네임카드의 내용처럼, 지금은 KMA의 권상준 대표와의 미팅을 기다리는 중이었으니.

‘너무 일찍 왔나 보네.’

미팅 시각까지 아직 30분 정도 남은 터.

정연희는 이전의 미팅에서 받은 라이츠가이드 몇 개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라이츠가이드(rights guide)란 각 에이전시에서 보유한 저작물을 소개하는 자료를 말한다.

출판사 카탈로그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그와 가장 큰 차이점을 따져보자면-

“···한국어 판권은 이미 팔렸잖아, 아쉽네.”

각 언어별 번역 판권, 혹은 영상화 판권의 권리가 유효한지 아닌지가 명시돼 있다는 것.

카탈로그가 단지 출판인뿐 아니라 일반 독자층을 위한 거라면, 라이츠가이드는 어디까지나 ‘저작권 판매’를 위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자료를 한참 뒤적이던 그녀의 눈길이 라이터스홈에서 받은 라이츠가이드로 향했다.

[라이터스홈| 2024년 상반기]

표지와 목차 페이지를 지나 제일 첫 페이지에 소개된 작품은-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에곤 K

SFF프레스, 2024년 4월 출간

번역판권 : 라이터스홈 문의

2024년 4월 아마존, 반스앤노블, 인디바운드 선정 최고의 책

사이언스앤드판타지 문학상 수상, 2024년 네뷸러상 후보작

“스토리텔링이 지닌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증거.” - 뉴욕타임스]

···

역시, 에곤 K를 올해 BEA의 메인 작가로 밀고 있구나.

그럴 만하지, 고개를 끄덕인 정연희가 한국 출판계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처음만 해도 에곤 K가 누군데- 하는 반응이었지.’

그러다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이후로 꾸준히 관심이 증가하더니.

<피터 팬>이 네뷸러상 후보에 오르고, 단행본의 대박 이후로 한국의 에이전시들이 다시금 에곤 K를 주목하던 가운데-

“어디, 순위 좀 확인해볼까.”

정연희 자신이 책임편집을 맡은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한국어판이 불과 1주 전에 출간되었다.

“···와, 그새 또 판매지수가 올랐네?”

책은 예상보다 훨씬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상황.

그래선지 지난주부터 그녀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다.

‘큰맘 먹고 1만 달러를 지르길 잘했어.’

한 10년 전만 해도 한국 출판계에선 선인세 경쟁이 엄청났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이미 국내에 팬이 많은 작가야 말할 것도 없고, 해외에서 좀만 잘된다 싶은 작품이면 무조건 기를 쓰고 가져오려다가 몇 천, 억 단위로 금액이 올라가곤 했는데.

그중 대부분이 투자한 선인세를 회수하는 데 실패했고.

심지어는 부도 위기에 몰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확실히 과열된 감이 있긴 했지.’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부터 자연스레 몸을 사리게 되었고.

국내에 새로이 알려야 하는 신인작가의 경우, 더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런 와중, 에곤 K라는 신인 작가의 데뷔작을 -서너 곳이 입찰에 참여한 탓에- 1만 달러로 입찰하겠다 하니 윗선에서는 불안해했지만.

‘편집장님, 이건 됩니다. ···제 경력을 걸고 약속드릴게요.’

지금 보면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고집을 부리길 잘했잖아?’

다시 한 번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 접속해 판매지수를 확인하고는.

가방에서 한글로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라고 적힌 책을 꺼냈다.

원서와는 달리, 괴물의 실루엣을 흑백으로 스타일리시하게 그려놓은 표지 디자인이 눈에 띄는 가운데.

“작가님이 언제쯤 전달받으시려나 모르겠네.”

국내 에이전시를 통해 한국어판 증정본을 보내놨으니, 아마 일주일 안에는 도착하지 않을까.

그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자.

“혹시, 그거.”

훤칠한 외모의 아시아인 남학생이 한국말로 말을 건다.

한국 사람인가 보네 생각하는데.

“에곤 K 소설 맞나요?”

“아 네, 어 근데···.”

어색해하며 대꾸하자, 생긋 웃은 학생이 테이블의 네임카드를 가리켰다.

“사실은 아버지 잠깐 보러 온 참이거든요.”

“권상준 대표님이요?”

“네, 권유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생긋 웃은 소년이 내민 손을, 정연희는 얼떨결에 붙잡아 악수했다.

“어, 반가···워요.”

나이에 맞지 않는, 사회인스러운 태도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미소를 되찾은 정연희가 말을 이어갔다.

“어머, 이렇게 보니까 진짜 권 대표님이랑 똑 닮았네요.”

“하하, 그런가요?”

“응, 학교에서 인기 많겠어요~”

“딱히 그렇지도···.”

쑥스러운지 말을 흐린 소년의 시선이 테이블에 올려둔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한국어판으로 향했다.

“이거, 혹시 에곤 K의 데뷔작.”

“네 맞아요! 이 작가, 미국에서 엄청 핫하죠? 저희가 이 작품 잡으려고 엄청 애썼어요···.”

소년은 중간 중간 와, 정말요? 따위의 감탄사를 내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총 네 군데에서 입찰했는데, 생각보다 경쟁이 치열해져서 긴장했다는 정연희.

“솔직히 말하면, 2~3천 달러 선에서 가능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경쟁이 좀 붙어도 5천 달러 안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을 뛰어넘어 버렸군요.”

“바로 그거죠! 세상에, 1만 달러까지 오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니까요!”

거기까지 말하고는 문득-

‘어머나, 나 좀 봐. 왜 이런 얘기까지 하고 있지.’

상대가 너무 시기적절하게 맞장구를 쳐줘서일까. 저도 모르게 꽤 전문적인 얘기까지 털어놓고 있음을 깨달았는데.

“1만 달러라면, 천삼백만 원 정도네요.”

“음, 한국돈으로 그 정도라니 얼마 안 되는 것 같죠? 근데 출판사 입장에선 손해보지 않으려면 최소 1만 부는 팔아야 하거든요.”

아하,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맞은편 학생.

“1만 부는 확실히 쉽지 않겠네요.”

“네, 그래서 질러놓고도 잘한 걸까 고민이 많았는데···.”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지금 벌써 2천 5백 부가 나간 거 있죠? 1주일 만에! 바로 2쇄 들어가서 저희 편집부 완전 파티 분위기예요, 후후.”

그 말에 권유진은 잠시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내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것 참 다행이네요.”

“그쵸? 요즘 하루 하루가 너무 즐거워서-”

정연희가 거기까지 말한 순간.

“어, 유진이 왔구나. ···정연희 팀장님,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KMC 에이전시의 권상준 대표가 왔다.

그러자 곧바로 일어서는 권유진.

“두 분 이제 미팅하셔야죠. ···이따 연락드릴게요 아버지. 전 이만 비숍 작가님 행사 보러.”

“그래 그래.”

“반가웠습니다 정연희 팀장님.”

“네 잘가요~”

함께 서 있으니 더 닮았다고 생각하는 사이, 권유진은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정연희가 권상준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너무 오랜만이에요 대표님. ···아드님이 잘생겼는데요? 권 대표님 똑 닮았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참 사이 좋은 부자지간이네.

흐뭇하게 지켜보던 정연희가 문득, 아까 유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것 참 다행이네요.’

아까는 별 생각 없이 넘겼는데···.

‘보통은 참 잘됐네요, 라고 하지 않나?’

본인 책도 아닌데 왜 그게 다행인 걸까, 라고 멍하니 생각하는데.

“정 팀장님, 먼저 문학마을에서 나온 <밤하늘의 시선>에 세 군데서 판권 문의가 들어왔는데···.”

“아, 네네!”

이내 시작된 본격적인 미팅에, 머릿속의 의혹은 한구석으로 밀려나버렸다.

*

그 시각, 마크는 다른 직원에게 배턴을 넘기고 SFWA(SF판타지작가협회) 행사가 진행되는 A-12 구역으로 이동한 참이었다.

“편집장님! 저 왔습니다!”

그의 외침에 반가워하며 돌아보는 해리슨 편집장.

오늘 따라 머리에 더 힘을 준 가운데, 해리슨이 싱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얼른 오라고.”

“작가님은?”

대답 대신 무대를 턱짓해 보이는 편집장.

그와 동시에 야트막한 무대 위로 랜든 비숍 작가가 등장했다.

우와아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에 귀가 따가울 정도.

동그란 얼굴의 절반 정도가 새하얀수염으로 덮인, 산타 할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노작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흐으, 열기가 엄청나네요.”

“그럼 그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비숍 작가님인데.”

두 사람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중, 마크가 문득 이런 말을 꺼냈다.

“흐으, 에곤 K 작가님도 오시면 참 좋았을 텐데.”

“말해 뭐해, 심지어 그 두 분이 같이 무대에 선다?”

“북콘을 찢었겠죠.”

“크크, 내 말이.”

이런 행사장 특유의 아드레날린 때문일까.

마크가 상기된 얼굴로 앞의 무대를 지켜보는 가운데.

-자, 그럼 독자 중 한 분을 무대로 불러내 본격적인 ‘독자와의 만남’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사회자의 멘트에 관객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크으, 역시 비숍 작가님 지인짜 인기 많으시네.”

“당연하지, SF 팬들의 영원한 우상인걸.”

두 사람이 흐뭇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지목된 독자들이 무대에 직접 올라오는 영예를 안았다.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그중 일부는 비숍 작가에게 궁금했던 것을 질문하기도 하고, 그냥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으어으어 비숍 작가님···!”

“작가님, 20년 전부터 팬입니다···.”

“한 번만 안아주십쇼!”

모두가 감격에 겨워하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공통점.

“아, 맞다. <피터 팬> 사인본 테이블 담당할 때 보니까 학생들이 진짜 많이 오더라고요.”

마크의 말에 해리슨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학생들?”

“네, 아까도···.”

고등학생 네 명이 줄 서 있는데 너무 풋풋하고 보기 좋더라.

꼭 자기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옛날 생각도 나고···.

“자기가 친구한테 영업했다고 신이 나서 자랑하는데, 그 영업당했다는 친구는 꼭 케이팝 아이돌처럼 생겨서-”

“요점만 말해, 요점만.”

“에이 그냥 보기 좋았다- 이거죠. 우리 에곤 작가님이 어린 친구들한테도 인기가 많구나 싶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둘의 잡담이 이어지던 와중, 사회자의 멘트가 들려왔다.

-좋습니다. 이번엔 작가님과 번갈아 <귀환자들의 시간>을 낭독하는 시간을 가져볼 건데요. 마지막 행운의 주인공을 지목해주시죠, 작가님!

그러자 무대 위의 비숍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잠시 두 눈을 장난기로 반짝이는가 싶더니.

관객석 어딘가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허허, 좋습니다. 그럼 저기 저··· 데님재킷 입은 학생.

지목된 본인은 상당히 당황했는지 눈을 크게 뜨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아뇨 아뇨 본인 맞아요! 제가 보기에도 그 옷은 데님재킷이 맞거든요.

사회자의 장난스러운 멘트에 ‘데님재킷 학생’ 주변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 그렇죠, 여기 앞쪽 무대로 나와주세요.

남학생이 얼떨떨해하면서도 무대를 향해 걸어가던 그때, 마크가 중얼거렸다.

“어? 저 친구.”

“왜?”

“아까 제가 그랬잖아요, 에곤 작가님 사인본 사갔다는.”

“아아, 저 친구야? SF 마니아라는?”

“아니 아니, 영업당했다는 친구요. 케이팝 아이돌 닮은.”

“아아, 진짜 그렇네. 그런 느낌이 있어.”

흐뭇해하며 고개를 끄덕인 해리슨의 시선이 다시금 무대로 향했고.

-어··· 네.

무대에 올라오기 전만 해도 잔뜩 굳어 있던 남학생은-

-이 자리에 올라오게 되어 정말로 영광스럽습니다. 제 평생의 추억으로 남을 것 같네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마이크를 받아들고는 능숙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데님재킷을 벗어 제 등판을 내보이며 덧붙이길.

-아, 그리고··· 오늘을 위해 입고 왔습니다.

[기만은 진실을 가리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스타라이트 크로니클>에 등장하는 명문장 위, 동글동글한 랜든 비숍의 캐리커처가 그려진 티셔츠를 보고-

“오오오···.”

“멋있다아—!”

웃음기 섞인 함성이 청중 가운데서 터져 나왔고.

“푸흐, 비숍 팬보이네 팬보이.”

“크, 그러게요. 보기 좋네···.”

해리슨과 마크 또한 실실 웃으며 좋아하는 가운데.

-이야, 멋있네요! 좋아요 비숍 팬보이. 이름이 어떻게, 어디서 오셨어요?

그 말에 학생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 ···아이오와시티에서 온 권유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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