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57화 (57/126)

팬보이(2)

*

독자와의 만남.

말 그대로 작가와 독자가 한자리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행사로, 제일 흔히는 QNA부터 시작해-

‘이렇게, 독자와 번갈아가며 낭독을 하기도 하지.’

테이블에 펼쳐놓은 <사이언스앤드판타지> 5월호에 시선을 향한 채.

랜든 비숍 작가님이 자신의 단편소설 <어둠 속의 방문자 : 귀환자들의 시간>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새하얀 벽이 갈라져 있었다. 토드 칼슨이 평생을 지내온 이 방의 한쪽 벽에, 거대한 균열이 나 있었다···.”

이 코너의 핵심은 작가와 독자가 번갈아 소설을 낭독하는 것.

나는 호흡에 신경쓰며 그다음 문장을 읽어나갔다.

“갈라진 틈새로 푸른 빛이 번쩍이는 가운데, 균열은 스스로 맥동하고 있었다.

토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방문자가, 가까이 있다는 것.”

내가 다시 옆을 돌아보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비숍 작가님의 낭독이 이어진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 정확한 딕션.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에 고개를 들자, 균열 너머의 어둠에서 희미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거대한 공포가 토드의 목을 죄어왔다···.”

그 덕분일까.

청중석에 정적이 내려앉은 가운데, 우리 두 사람의 목소리만이 공간을 울린다.

짝짝짝—

그로부터 5분 후.

낭독이 끝나자 관객석에서 기분 좋은 박수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나는 비숍 작가님과 가볍게 포옹하고는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관객석으로 내려갔다.

주변의 시선을 느끼며 원래 자리로 돌아가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다.

‘···비숍 작가님도 참, 장난기 하고는.’

그렇게 ‘독자와의 만남’ 행사가 완전히 끝나고 난 뒤.

비숍 작가님께 사인을 받으려는 줄이 길게 이어진 가운데.

[에곤_K : 작가님, 아까 말씀하신 장소로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는 먼저 행사구역을 떠나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방금 전, 아버지를 보러 갔다가 문학마을 담당자를 마주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해외 도서전 출장은 대부분 해외문학 담당자들의 일이고, 문학마을은 아버지의 주요 고객사 중 하나이니까.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한국어판이 잘되고 있다니 다행인걸.’

작가 입장에선 책이 잘되든 안 되든 선인세만 받으면 끝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긴 하지만.

번역까지 해서 출간하는 수고를 들이는데 기왕이면 잘되면 좋겠다 싶으니 말이다.

“···한국어판, 얼른 받아서 읽어보고 싶은걸.”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해놨을지 기대된다.

한국 측 에이전시가 책을 전달받아 미국의 라이터스홈에 보내고, 다시 라이터스홈에서 나한테 보내줄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생각에 잠긴 채 걷다 보니 어느새 비숍 작가님이 얘기해준 장소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작가님이 묵고 있다는 메리어트마키스 호텔 말이다.

“오셨군요, 이쪽으로.”

최고급 호텔 로비에서 대기 중이던 비서 팀이 나를 데리고 올라갔다.

비숍 작가님이 묵고 있다는 스위트룸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은 지 30분쯤 지났을까.

“둘이 뭘 그렇게 신나서 얘기하고 있어.”

삐익-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온 비숍 작가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작가님,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갑자기 무대 위로···.”

“하하하, 내 팬보이를 무대 위로 불러냈을 뿐인데 그게 뭔 상관인가.”

팬보이.

앞서 에곤 K의 인스타에도 적었던 단어에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주에 두세 번은 연락을 하고 지내는 만큼, 서로의 근황은 빠삭하게 알지만.

그럼에도 밀린 얘기가 많아 한참이나 소소한 대화를 나누다가.

“···잠깐만요, 방금 그러니까.”

“허허, 이 사람 보게.”

눈이 튀어나올 듯 놀라는 날 보며 껄껄 웃는 비숍 작가님.

“소설가가 소설을 쓰겠다는 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그건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오랜 ‘비숍 팬보이’로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비숍 작가님의 신작 장편이라니···!’

방금 전, 랜든 비숍은 내게 이렇게 말한 참이었다.

‘유진, 전에 자네가 그러지 않았던가. <어둠 속의 방문자>의 세계관을 단편만 쓰고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고.’

‘그리고 나도, 이번에 새 단편을 써보니 정말 그런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그냥 장편도 아니었다.

어둠 속의 방문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무려 3부작 장편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는 것.

‘머릿속에 번뜩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뭔가, 허허.’

이미 시놉시스 작성은 물론 초고 집필을 시작했다는 말에-

“아 작가님, 저 심장이.”

“응? 심장이 왜?”

“너무 두근거려서, 심장이 아픕니다···.”

“허허, 이 친구 보게나.”

자네가 이렇게 호들갑 떠는 건 처음 본다 하면서도.

비숍 작가는 무척이나 기쁜 기색이었다.

*

유진이 랜든 비숍과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낼 무렵.

“···후우, 쉴 틈이 없네.”

케빈 클레그.

명문 출판 에이전시 라이터스홈 소속이자 최근 업계인들의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에이전트는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오전엔 제작사 관련인원 미팅에, 점심엔 피칭 이벤트, 그담엔 네트워킹 행사까지···.’

안 그래도 에곤 작가님이 북콘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아 얼굴이라도 한 번 봐야 하지 않을까 했지만-

‘에이, 미스터 케빈도 바쁘잖아요. 저도 저대로 이래저래 일정이 많으니···.’

나중에 북콘 끝나고 나서 여유 있게 동네에서 보자는 것.

‘하하, 그럼 미팅 결과 보고서 완벽하게 준비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하하. 적당히, 적당히 해주셔도 돼요. 중요한 건 내용이지 형식이 아니잖습니까.’

‘···작가님은 참.’

정말 열일곱 살이 맞긴 한 걸까.

두 눈으로 수없이 확인한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혀가 내둘러지는 가운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체를 숨긴 게 천만다행이라고 할까.’

글에서 묻어나오는 사유도 그렇지만, 작가 본인을 마주하고 있을 때도 종종 믿기지 않을 때가 있으니···.

‘그래. 적어도 작가님이 대학에 가서 정체를 공개하면 그나마 충격이 덜할 거야.’

물론, 일각에서는 에곤 K를 손녀가 있는 할아버지 작가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건 내 손을 떠난 일이고.”

어쨌든 지금 케빈 클레그에게는 아주 중요한 임무가 있다.

···다름 아닌 에곤 K의 몸값을 가파르게 끌어올리는 것!

그리고 방금 전.

영화제작사들 다섯 곳의 담당자를 앞에 두고 진행한 영화 판권 미팅에서 그 점을 확실히 했다.

‘글쎄요,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때와 같은 조건으로는 많이 어렵지 않을까요.’

‘그때야 데뷔작이었고, 검증이 부족했던 시기라 친다면··· 지금은 상황이 달라도 한참 다르지 않습니까?’

출간작 두 개가 모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해외 판권, 영화화 판권 모두 빠르게 계약되었으며.

‘막성스 라미 감독, 들어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재기 넘치는 신인감독의 지휘 아래 영화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말에, 앞서와 비슷한 조건으로 딜을 제시했던 제작사들이 입을 다물었으니.

그리고 지금은 다름 아닌-

“반갑습니다, 출판사 담당자 여러분.”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의 해외 번역 판권.

그에 관련해 지금까지 총 10개국에서 문의가 들어왔고 이 중 6개국에서는 이미 입찰이 여러 건 들어왔다.

지금 이 자리에는 그 가운데 북콘을 방문한, 세계 여러 나라의 출판사 혹은 에이전시 담당자들이 앉아 있었는데.

‘에곤 K 작가님의 에이전트가··· 엄청 무섭게 생기셨네.’

그중에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문학마을의 정연희 팀장도 끼어 있었다.

“이 자리에 와주신 분들은 다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사항부터 소개드리자면···.”

에이전트는 에곤 K의 지난 행보를 차분하게 설명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본론은 지금부터였으니까.

“작가님의 위상이 지난번 작품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만큼.”

케빈 클레그.

평소 웃는 낯이던 그가 웃음기를 싹 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에 걸맞은 의지를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의지.

···저작권 거래의 세계에서, 그것은 보통 선인세의 금액으로 치환되기 마련이고 말이다.

“···.”

거구의 에이전트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위압감에, 세계 각국의 출판사 담당자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

나는 토요일 밤이 다 돼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1박2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비숍 작가님과 저녁 식사를 같이 했고, 친구들이 있는 숙소로 돌아와서는···.

‘어 설마 유진, 지금 잠을 자겠다는 건 아니지?’

‘···응?’

‘이런 기회는 흔히 오지 않는다고!’

제이든과 미아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 새벽까지 놀았고.

그다음 날에도 온종일 북콘 행사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저녁이 다 돼서야 출발한 것.

“그나마 버스에서 눈을 붙여서 다행이었지.”

그래. 나뿐이 아니고 애들 모두가 정신없이 자면서 왔다.

제이든이 코 골던 소리가 지금도 머릿속을 울리는 기분.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몸을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유진! 왔구나.”

케이트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겼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벌써 자긴, 아직 11시밖에 안 됐는데.”

자연스레 내 짐을 받아든 그녀가 말을 이었다.

“클로이도 오빠 기다리겠다고 고집을 부리더니, 10시쯤에 곯아떨어졌어.”

“푸흐, 다행이네요. 아 맞다, 네드가 그림 완성한 거 보내줬는데-”

“안 그래도.”

나를 돌아본 새어머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보여주려고 했지.”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서재에 들어선 나는 이내 탄성을 내고 말았다.

“우와아아—!”

32인치의 모니터 화면 속.

<토끼 남작의 모험 : 레푸스 가문을 벗어난 베니>라는 제목 아래, 네드가 그린 표지화가 커다랗게 자리해 있었다.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화려한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근사한 토끼 남작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있던 토끼 남작 베니를 그대로 꺼내온 느낌인걸.’

네드의 평소 그림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도.

어린애들이 볼 것을 감안해 최대한 둥글둥글 귀엽게 그리려고 신경쓴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 위, <토끼 남작의 모험(The Adventures of the Bunny Baron)>이라는 동글동글한 타이포가 귀엽고도 근사했으니.

“표지, 너무 멋진데요?”

“그래? 다행이네.”

은근 긴장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새어머니.

나도 모르게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 마우스 휠을 달각거리며 파일을 넘겨봤다.

지금 이건, 인디자인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표지 및 본문 디자인을 마친 파일이다.

“그림이··· 이렇게 보니 진짜 멋지네.”

표지에 들어간 컬러본도 그렇지만, 본문 중간 중간 들어간 삽화도 대단했다.

네드가 그린 익살맞은 삽화 아래에는 본문 원고가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엄마, 저도 주세요.”

“그래, 우리 아기도 많이 먹어라.”

베니는 그리핀이 물어다준 거대 지렁이를 열심히 먹는 척했습니다.

‘음, 지렁이도 맛이 나쁘진 않군.’

그래도 자주는 못 먹겠다고 생각하며 도망갈 방법을···]

이 상태로 그대로 전자책을 만들 수도 있고, 파일을 인쇄소에 넘기면 종이책으로 만들어지는 것.

‘워드 파일 상태로는 뭔가 좀 아쉬운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화면 속에 조판된 상태로 읽으니 훨씬 재밌어 보인달까?

게다가 문장을 조금씩 손보았는지, 원래 버전에 비해 부드럽고 간결해져 있었다.

한참을 감탄하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와, 벌써 조판까지 다 하셨을 줄 몰랐어요.”

“조판이야 맘만 먹음 금방하지.”

삽화가 제법 있다 보니 손이 좀 가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다는 것.

“그건 그렇고. 인쇄소엔 월요일에 넘기려고 하는데, 수정할 부분 있는지 내일 중으로 봐줄 수 있니?”

“그럼요.”

내일 안으로 마무리하겠다- 라는 내 말에 케이트가 밝게 미소를 지었다.

*

5월 중순부터 4일간 진행된 시카고 BEA는 말 그대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방문객 수로 따져도 역대급이었으며 다양한 행사와 이벤트 등이 상당한 호응을 얻은 덕.

BEA가 완전히 종료된 지금도 SF판타지나 로맨스, 추리 등 장르 게시판은 물론.

출판, 문학, 북클럽 등 다양한 분야의 서브레딧에서 북콘 관련 게시물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r/lit| 1일 전]

[45.8k 시카고 북콘 후기모음(업데이트 버전)]

└이번 북콘 넘 좋았음

└bea··· 가고 싶었는데ㅠㅠ 부럽군요

└오 현장감이 물씬

└킨지 맥린 사인회 인증샷.jpg

···

수많은 출판사, 작가, 그 외 여러 이벤트에 관련된 현장 후기 중에서도 유난히 많은 조회수를 자랑하는 게시물을 꼽아보자면.

[r/scifi| 1일 전]

[57.4k 비숍 작가님 영접 후기]

···

첫째는 SF 문학의 거장 랜든 비숍 관련 게시물.

팬덤 독자들에게는 SF신이라 불리는 그가 몇 년 만에 참석한 북콘이라 더더욱 화제가 되었으며.

특히, SWFA협회에서 주최한 ‘랜든 비숍 : 독자와의 만남’은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35.8k 랜든 비숍- 독자와의 만남 사진(스압주의)]

└으아 부럽다

└전생에 무슨 공을 세웠길래

└잭팟이네 잿팍!

···

비숍과 한 무대에 올라와 사인도 받고 그와 포옹까지 하고 내려간 팬들을 부러워하는 가운데.

누군가가 ‘데님재킷 학생’ 이야기를 꺼냈다.

└맨 마지막에 뽑힌 데님재킷 학생··· 좋겠더라

└아 ㅋㅋㅋ 첨엔 당황하더니 말 잘하던데

└ㅇㅇ 낭독하는데 목소리도 좋았음

└비숍 팬보이라고 함

└(등판에 비숍 캐리커처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고등학생 사진).jpg

└아 ㅋㅋㅋㅋ 팬보이 맞네

└저거 어디서 파냐 사고 싶다

└https://www.ettsy.com>market>landon_bishop_t_shirt···

└사진 보고 빵 터졌음 ㅋㅋㅋ

└어린 친구가 취향이 아주 좋구만

···

30~40대 위주인 비숍의 팬들은 이 ‘어린 친구’의 열정에 굉장히 흐뭇해하던 그때.

“와, 이게 한국어판···.”

한국어로 번역된 자신의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를 받아본 권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감회에 사로잡혀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