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1)
*
6월 둘째 주.
모두가 고대하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얘들아, 나는 자유를 만끽하고 오마.’
‘올리비아의 라이브라니,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아···.’
네드는 캔자스시티에서 열리는 지역 코믹콘 행사에, 아델은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콘서트에 갔을 즈음.
‘드디어 다했다···!’
나는 간만의 여유를 활용해 머릿속 폴더의 문서들을 노트북에 전부 다 옮기는 데 성공했다.
클라우드에 백업까지 해놓고 나니 마음이 아주 든든하다.
언제 잊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달까.
그렇게 자잘한 일을 마무리한 뒤 지금은-
“잘 지내셨어요, 미스터 케빈?”
아이오와대에 위치한 라이터스홈의 산학 협력 사무실에 방문한 참.
“여기 사무실 괜찮은데요.”
“하하, 그럼요.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원래는 우리가 늘 만나는 대형 카페의 미팅룸에서 만나려고 했지만.
저녁 시간이라 그런가, 오늘 따라 예약이 전부 차버린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여기로 오게 됐다.
“오늘은 저희밖에 쓰는 인원이 없으니 맘 놓으셔도 됩니다.”
미스터 케빈은 오는 길에 사왔다며 컵케이크를 꺼내놨다.
“흐흐, 빌리스베이커리 아세요? 여기가 요즘 이 동네에서 제일 맛집으로 유명한데···.”
솔직히 단 것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그가 권하는 레드벨벳 컵케이크를 몇 입 먹어봤다.
“오, 맛있는데요.”
“그쵸 그쵸? 완전 입에서 살살 녹아서···.”
그러고 보니 전에 아델과 네드가 여기 컵케이크를 극찬했던 것 같은데.
“흐으, 설탕은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걸까요···.”
“그건 도파민 같은 화학물질이 분비돼서 일시적으로 느껴지는-”
“작가님, 지금은 그냥 제가 행복을 맘껏 만끽하게 해주세요. 오! 초코퍼지도 너무 맛있는데?”
“···.”
보면 미스터 케빈도 걱정스러울 정도로 단 음식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아주 가끔씩 잔소리를 해야겠네, 생각하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컵케이크 세 개를 단숨에 먹어치운 케빈이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에곤 작가님, 네뷸러상 수상하신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짝짝짝- 신이 나 박수까지 치며 축하해주는 것에, 조금 민망하면서도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나요.”
수상 후보에 오른 것도 이례적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심지어 수상까지 하다니.
“물론, 중요한 건 상을 탄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지만.”
내가 쓴 글이 그렇게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라고 하자.
“흐, 역시 작가님의 그런 가치관, 너무 좋습니다!”
활짝 웃으며 말을 받는 미스터 케빈.
“사실, 저는 그렇게 좀 멀리 내다보는 작가님들이 더 롱런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나 역시 저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수많은 사례를 봐온 터.
케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엔 저도 동의합니다.”
상을 탄다는 건 몹시 기쁜 일이지만, 그런 요소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는 한편.
우리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건 그렇고, 지금 네뷸러상 시상식 말인데. 작가님은 참가 안 하실 거죠?”
미스터 케빈의 말에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러실 거라 예상은 했습니다. 네뷸러상 시상식은 아무래도 SFWA 회원들 중심의 행사이다 보니, 불참하는 경우도 꽤 많고요.”
그 말은 사실이다.
SF판타지의 여왕이라 불리는 작가 코니 윌리스 또한 네뷸러 장편부문을 수상했지만 시상식에는 불참했으며.
그 외의 수많은 작가들이 에이전트나 편집자에게 대리 시상을 시킨다거나, 준비해둔 수상 소감을 읽게 하거나, 녹음본을 재생하는 식으로 해왔다.
“맞습니다. 아마 SFWA협회에서도 에곤 작가님은 당연히 그런 경우라고 생각할 것 같고요. 다만, 그 방식에 관해 논의하려고 했는데···.”
대리 시상을 어떤 식으로 할 것이냐는 물음.
“저는 미스터 케빈께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아 물론 저도 시상식 무대에 올라가는 것 자체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흠흠, 헛기침하고는 진지하게 말을 잇는 케빈.
“수상 소감을 제가 대신 읽는 것보다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고민이 돼서요.”
미스터 케빈이야 워낙 달변가이니 수상 소감도 근사하게 읽어주겠지만.
내게도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었다.
‘유쥐인-! 야 너, 그거 시상식, 시상식 어떻게 할 거야!’
<피터 팬>의 네뷸러상 수상 소식을 알자마자 대뜸 그런 질문부터 던진 네드는-
‘그래,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 근데, 시상식 불참할 거면 다른 사람한테 소감 대신 읽게 하지 말고···.’
이런 방법은 어때, 라며 내게 무언가를 보여줬던 것.
“미스터 케빈, 안 그래도 저도 그 부분을 좀 고민해봤는데.”
“오오 네!”
“친구가 준 아이디어거든요.”
네드가 내게 보내준 동영상을 재생해서 보여줬다.
“···!”
이내 휘둥그레지는 케빈의 눈.
그것은 다름 아닌 에곤 K 캐릭터로 만든 동영상이었다.
···이제는 꽤 많은 독자에게 익숙해진, 미치광이 박사 같은 느낌의 에곤 K가 뭐라고 말하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이거, 프로필 캐릭터를 그려준 친구가 만든 건데.”
“와, 이거 엄청 괜찮은데요?”
미스터 케빈은 신기한지 영상에서 계속 눈을 못 뗀다.
나는 네드가 준 아이디어를 하나 더 꺼냈다.
“AI 보이스라는 게 있다더라고요.”
“AI 보이스요?”
“텍스트를 입력하면,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출력이 된다고.”
일종의 TTS(Text-to-Speech, 텍스트 음성변환) 기능이지만.
어색한 기계음이 아니라 성우가 읽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읽어준다는 것.
“와, 이거 생각도 못했는데 너무 괜찮은데요?”
“그런가요?”
“네네. 사실, 요즘은 꽤 많은 작가님들이 미리 찍어둔 영상으로 수상 소감을 대체하기도 하거든요.”
아예 다른 사람에게 수상 소감을 맡기는 것보단 그쪽이 훨씬 더 반응이 좋기 마련인데.
“이런 식으로 하면, 기존의 에곤 K 이미지를 살리면서 소감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감이에요.”
심심하게 목소리만 나오거나, 아예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다- 라는 데에 우리 둘은 동의했다.
*
바로 그 시각, 유진의 집으로부터 불과 몇 블럭 떨어지지 않은 어느 2층 주택.
마리사는 갓 퇴근하고 들어온 아버지를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아빠아~ 마리사랑 놀아죠오~”
“어어, 그럼 그럼. 옷만 갈아입고 올게.”
“빨리! 빨리 빨리!”
막내가 태어난 후로, 어떻게든 엄마나 아빠를 독점하고 싶어하는 첫째가 안쓰러우면서도.
‘새로 계약할 책을 얼른 찾아야 하는데···.’
마리사 아버지의 머릿속은 회사 일로 가득했다.
이곳 아이오와시티에는 애초 회사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유일하게 강세를 보이는 업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출판업.
문학의 도시라는 별명에 걸맞게 중소 출판사가 많고, 대형 출판사의 임프린트도 제법 자리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미국의 빅파이브 중 하나인 ‘사이먼앤슈스터’의 아동서 전문 임프린트(하위 브랜드) 원더테일이었는데.
마리사의 아버지 대니얼은 이 원더테일의 수석 편집자로, 최근 슬럼프 비슷한 걸 겪는 중이었다.
‘열정도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이제는 대체 어떤 책을 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세월이 흐르며 독자들의 사고 또한 급작스럽게 변화했다.
어쩌면 종이책 출판이야말로 그 변화에 가장 뒤처지는 분야가 아닐까.
···그리고 그 많은 출판 분야 가운데서도, 아동서야말로 그 정도가 제일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지겹도록 들었던 대표의 잔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아니, 좋은 책 찾기가 그렇게 힘들어? 내용 건전하고, 교훈적이고! 적당히, 어디 권장도서목록에 올라갈 만한 책으로···.’
그래, 물론 아이들에게 좋은 책, 그러니까 의미 있는 ‘양서(良書)’를 읽혀야 한다는 데는 그도 동의한다.
‘하지만.’
아무리 의미가 있어도 재미가 없는 책은 아이들은 고사하고, 어른이라 해도 읽지 않는다.
아무리 몸에 좋은 음식이라도 맛이 없으면 도통 손이 가지 않듯이.
책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교육부에서 선정하고 교사협회에서 추천하는 책이라 해도, 아이들은 자신이 재미를 느껴야만 읽기 마련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용도 건전하고, 대단한 재미까지 갖춘 아동서 원고를 찾는 건-
‘아무리 이 거대한 미국 시장이라 해도, 때로 요원한 일처럼 느껴진단 말이지.’
후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데.
“아빠아~ 아직이야?”
“어어, 다 갈아입었어. 그래, 마리사. 오늘은 뭐 하고 놀래?”
지친 기색을 지워내고 딸 앞에서 미소를 짓자.
마리사는 생긋 웃으며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이거 읽어죠~”
···우리 집에 이런 책이 있었나?
<토끼 남작의 모험>이라는, 낯선 책을 본 그의 눈이 커졌다.
‘색감이 강렬하고도 화려한 게 아이들이 상당히 좋아할 만한 느낌인걸.’
화풍도 선이 묘하게 거친 듯하면서도, 정제되지 않은 느낌에서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작가가 누구인지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지만.
“아빠~ 얼른 얼른~”
마리사는 물론, 어느새 둘째까지 와서 앉은 것을 보고 표지를 넘겨 첫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제139대 레푸스 가문의 남작 베니 르 레푸스.
매일처럼 태어나는 동생들을 돌보다 지쳐 토끼굴, 아니 ‘캐슬 오브 레푸스’를 떠나다.”
이거 우리 마리사가 공감하겠는데- 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잉, 나도, 나도 집 나가고 싶어···.”
“마리사, 그건 안 되지. 그랬다가 무서운 아저씨가 잡아가면 어떡해.”
“그건 그렇지만···.”
히잉, 소리를 내는 마리사.
‘첫 문장부터 재밌는걸.’
대니얼은 피식 웃으며 낭독을 이어갔다.
“···첫째는 애니, 둘째는 베니, 그 아래 셋째는 세니.
대니, 이니, 패니, 개니, 케니···.”
대니 이니 패니 개니- 저절로 리듬감이 살아나는 문장에 까르르 웃어대는 아이들.
“삐익, 삐이이익.
베니가 다른 새끼들을 따라 울음소리를 내자, 엄마 그리핀이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우리 아기 목소리가···.’
‘감기, 감기 걸렸어요 엄마!’
가슴이 철렁했지만, 다행히 그리핀은 베니를 잡아먹는 대신···.”
내용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베니의 모험이 더 허무맹랑하면 허무맹랑할수록-
“키키키, 말도 안 돼.”
“히히, 베니 너무 웃겨.”
“이로케 하는 고야? 삐익, 삐익-”
두 아이의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그렇게 책을 계속해서 읽어나가다가.
“마침내 돌아온 토끼 굴에선 맛있는 당근 수프 냄새가 났다.
‘으음, 바로 이 맛이야!’
토끼 남작 베니는 수프를 배불리 먹고는 포근한 잠자리에서 잠들었다.
···곧 다가올 근사한 모험을 꿈꾸며.”
그렇게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고 나니.
대니얼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다음 얘기는 없나?’
자신도 모르게 다음 권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순간, 깨달았다.
듣는 이의 마음에 잔잔히 스며들어 미소가 지어지고.
아이들이 저절로 깔깔거리게 하는 책.
‘···그런 책이야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책이 아닐까.’
진정한 이야기의 힘.
그것이야말로 -수많은 자극에 노출된 아이들조차도- 손에 잡히지 않는 환상 속으로, 책 속의 세계로 안내하는 법이니까.
정답을 찾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표지를 살펴보자.
“···?”
[지은이 - 베니 르 레푸스]
베니 르 레푸스라면 이 책의 주인공 아닌가.
앞장과 뒷장을 펼쳐봤지만 그 어디에도 저자 약력은커녕 서지정보도 나와 있지 않다.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는 책.
그에 반해 인쇄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은걸 보니 자가출판한 건가?
‘···그렇다면!’
저자를 찾아내서 정식으로 출간 계약을 맺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대감에 심장이 쿵쿵거리는 가운데, 대니얼은 황급히 ‘토끼 남작’으로 아마존에 검색해봤다.
‘···있다!’
<토끼 남작의 모험 : 제1권 레푸스 가문을 벗어난 베니>.
상세페이지를 들어가자, 역시나 저자 소개란엔 아무것도 안 적혀 있었고.
‘출판사는··· 독립출판!’
좋아,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데.
가만히 보니 리뷰가 제법 많이 달려 있었다.
“리뷰 8개에··· 별점이 23개?”
물론 둘 다 객관적으로 보면 절대 많은 수는 아니지만.
출간한 지 불과 몇 주밖에 지나지 않은, 그것도 KDP 시스템으로 출간한 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한 성과였다.
‘이거 이거, 한눈 팔고 있으면 금방 다른 데서 채가겠는걸.’
그런 생각에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던 그때.
“아빠, 이 책 재밌찌? 그거 유진 오빠가 지은 거다?”
“응? 유진 오빠?”
“아니, 아니다. 유진 오빠가아~ 베니한테 들은 얘기래~”
“유진 오빠가··· 누군데?”
“클로이, 클로이네 오빠아~”
클로이라면 마리사의 제일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아닌가.
이번에 생일 파티에 갔다고 들었는데-
“파티에서, 클로이네 오빠가 준 거야 헤헤.”
···잠깐, 그렇다면 설마.
“마리사, 그 얘기 좀 자세히 해봐.”
딸의 어깨를 붙든 다니엘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