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친구 아빠(2)
네뷸러 시상식까지 이틀이 남은 저녁, 동네의 어느 카페.
“음, 반갑구나. 이름이··· 유진이라고 했지?”
“네, 맞아요. 저도 반갑습니다 미스터 앤더슨.”
마리사의 아버지이자, 사이먼앤슈스터 산하 아동서 전문 출판사 원더테일의 수석 편집자 대니얼 앤더슨은 조금 긴장해 있었다.
“하하, 편하게 대니얼이라고 부르렴. 그건 그렇고···.”
원래는 클로이의 어머니인 케이트가 같이 오기로 했지만, 갑자기 생긴 사정 때문에 자리를 비우게 되었고.
‘저희 유진요? 후후, 걱정마세요. 저보다 훨씬 더 빈틈이 없을걸요.’
···클로이의 어머니는 그렇게 얘기했지만,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한 아이와 단둘이서 출간계약을 논하는 게 여전히 걱정되었으니 말이다.
“음, 이게 클로이 오빠한테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니까 좀 민망하긴 하지만···.”
대니얼 앤더슨이 꺼낸 용건.
그것은 유진이 케이트를 통해서 전달들은 대로, <토끼 남작의 모험>의 정식 출간 제의였다.
“···정식 출간이요.”
유진의 말에 대니얼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마 전 내가 마리사와 동생들에게 이 책을 읽어줬거든. 아이들의 반응을 보니 이 책에 확신이 생기더구나. ···내가 읽어도 재밌을 정도이고 말이지.”
그렇게 덧붙이고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명함을 꺼내 건넸다.
“사실, 나는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는데···.”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지 잠시 망설이는데.
명함을 가만히 살펴보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사이먼앤슈스터.”
“···응?”
“원더테일이면, 사이먼앤슈스터 임프린트 아닌가요?”
아동서 시장의 큰손 중 하나 아니냐, 라는 유진의 말에 대니얼은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놀라워하는 반응에 유진은 아버지와 케이트가 다 출판계에서 일하지 않냐, 라고 대꾸했다.
“그러다 보니 뭐, 자연스레 알게 됐죠.”
“어··· 그래.”
그럼 나중에 우리 마리사도 저렇게 되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던 대니얼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알고 있다니 얘기가 더 빠르겠구나. 그래, 우리 회사는 여기 임프린트야. 그 말은 곧, 우리가 이 <토끼 남작>을 좀 더 강력하게 마케팅할 수 있다는 거지.”
대니얼 앤더슨은 설명을 한참 이어나갔다.
미국 전역의 강력한 유통 네트워크.
다방면에 걸친 홍보 매체.
여태까지 쌓아온 아동서 전문 출판사로서의 저력···.
“음, 대니얼.”
그의 말을 듣던 유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설명은 잘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원더테일의 구체적인 계약 조건이 어떻게 될까요?”
“···응?”
대니얼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상대가 단도직입적으로 계약 조건을 물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아, 그래. 잠시만!”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미리 챙겨온 원더테일 측 계약 서류를 꺼내 보였다.
“자, 이게 우리 회사의 가장 기본적인 계약서 사본이다. 음, 일단 쉽게 설명을 하자면-”
“그냥, 일반 저자 대하듯이 설명해주셔도 됩니다.”
유진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아까 얘기했던 대로 부모님이 출판사에 계시다 보니, 이런 것도 어느 정도 알거든요.”
“아, 어··· 그렇구나. 그래, 그러면 얘기가 좀 더 쉽겠어.”
클로이네 부모님이 벌써부터 교육을 잘 시키셨네.
그런 생각을 하며 대니얼은 기본적인 인세율과 선인세 금액, 그 외의 자잘한 사항들을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 회사에서 제시하는 건, 해외 판권과 2차 저작권 등 이런 권리들을 통째로 묶어서 계약하자는 거야.”
“아하.”
“원더테일이 속한 사이먼슈스터 같은 경우는 저작권 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담당부서가 있거든.”
가만히 경청하는 유진을 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토끼 남작>과 관련된 모든 저작권이 최대의 효율을 낼 수 있도록, 담당 부서에서 총력을 기울일 것이며.
“작가에게 가는 수익이 극대화되는 것은 물론, 아무래도 아직 학생인 네 입장에서도 좀 더 편할 거다.”
거기까지 말한 대니얼이 앞에 놓인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는 일단 회사 입장이야.”
“회사 입장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머쓱하게 웃는 대니얼.
“어디 가서 내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꺼내지 말고.”
···나중에라도 회사에서 알면 난리나겠지만, 어쩔 수 없단 말이지.
“방금 말한 건 우리 회사의 방침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난 그런 식의 계약을 제안하고 싶진 않아.”
특히나, 마리사의 친구 클로이 오빠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어째서요.”
“그래, 물론 방금 내가 한 말은 거짓말은 아냐. 어떻게 보면 저자에게는 굉장히 편한 계약이기도 하지. 출판사에서 알아서 다해주니 신경 안 쓰고 집필에만 전념하면 돼.”
거기까지 말한 대니얼 앤더슨의 목소리가 조금 진지해졌다.
“하지만, 작가 몫으로 돌아오는 인세 비율이 너무 적어지거든.”
“···.”
“대신, 이 분야에 정통한 출판 에이전트를 고용하는 방법이 있지. 에이전트를 통해 저작권을 관리하면, 출판사에서 통째로 관리하는 거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어.”
“아.”
“이 부분은 네가 제대로 고민해보는 게 좋을 거다. 우리랑 하든, 우리랑 하지 않든 간에 말이야.”
믿을 만한 에이전트를 따로 구해서 계약하는 게, 결과적으로는 에이전트피(수수료)를 감당하더라도 훨씬 더 큰 수익을 낼 수 있다- 라고 설명하는 내내.
유진은 빙긋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내 말을 잘 따라오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설명이 부족하진 않았나 잠시 되짚어보는데, 드디어 입을 여는 유진.
“음, 지금 얘기해 주신 것만 들어보자면···.”
“안다, 알아. 물론, 지금은 굉장히 혼란스럽겠지. 나로서는 당연히 내가 직접 이 <토끼 남작> 시리즈를 작업하고 싶지만··· 이건 하나의 제안일 뿐이니, 너무 부담갖지는 말아주렴.”
부담 갖게끔 다 얘기해놓고 이제 와서, 라고 생각한 대니얼이 덧붙였다.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하는 부탁이라 더 그렇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정말로 신중하게 고민해보고, 아버지나 케이트와도 충분히 대화한 후에···.”
“부담스럽다니,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유진의 얼굴은 매우 여유로워 보였다.
···저런 표정이나 태도 때문일까, 어쩐지 점점 더 고등학생처럼 느껴지지 않는 가운데.
“오히려 감동받았는걸요.”
“어··· 감동?”
“네. 회사의 입장만 얘기하실 수도 있는 거였는데, 제 입장까지 생각해서 충고해주시는 게.”
“···하하, 그거야 당연하지.”
우리 마리사 친구 오빠인데, 대니얼이 민망해하며 중얼거리는데.
“그리고 에이전트 건은, 딱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음···?”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보며 씩 웃는 유진.
“이미 에이전트가 있거든요, 아주 잘 아는 에이전트가.”
“어···.”
알고 지내는 출판 에이전트가 있다고?
대니얼이 멍하니 두 눈을 껌벅이는데.
“그리고 최종적인 계약 결정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습니다.”
“어, 그래, 얼마든 여유를 갖고 생각해보렴.”
“그것도 그렇지만-”
조금 겸연쩍게 웃어 보이는 유진.
“원더테일 말고도, 열 개 넘는 곳에서 출간 제의를 해와서.”
“···!”
“그럼 일단, 계약서 조항부터 하나 하나 검토할까요?”
유진이 지금껏 받은 출간 제안들을 마음속으로 저울질하며 원더테일의 계약서 사본을 살펴보는 가운데.
“···.”
잔뜩 벌어진 대니얼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
시간이 빠르게 흘러 네뷸러 시상식 당일.
어제 저녁 캘리포니아행 비행기를 타고 온 케빈은 그야말로 호화롭고도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오자마자 다양한 컨퍼런스에 참여한 것은 물론.
이런 데 외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작가들과 만나가며 네트워킹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각종 좌담회, 토론회, 그리고 지금은 세 가지 코스의 요리가 나오는 만찬을 즐기는 중.
슥슥, 사각사각.
분명 커다란 티본 스테이크이지만 그의 앞에 놓이니 어쩐지 손바닥만 해 보이는 스테이크를 잘라먹으며, 케빈은 생각했다.
‘이걸 우리 작가님이 드셔야 하는데.’
유진 작가님은 체격에 비해 늘 먹는 걸 절제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그 시기엔 뭐든 왕창 먹어야 되는 법인데···.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 리셉션장으로 이동하기 전.
“···흐흐.”
연회장 입구 한쪽에 어쩐지 사람들이 몰려 있다 싶더니, 스타워즈에 나오는 R2-D2 로봇과 함께 다들 사진을 찍고 있다.
‘SF 작가 행사라 그런가, 이런 분위기도 즐겁네.’
작가님도 여기 오시면 즐거워하셨을 것 같은데.
언제 한 번, 늘 여유롭고 태평한 얼굴이 기쁨으로 환하게 물드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그때.
지이잉-
때마침 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동해 전화를 받은 케빈은 간단히 상황을 보고했고.
“···다음 번엔 작가님이 직접 오시는 겁니다, 아셨죠?”
그러자 핸드폰 저편에서 들려오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
-다음번 기회가 주어진다면야, 그래야죠.
그가 담당하는 작가 권유진은 ‘대학에 간다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겠다고 했다.
앞서 말한 대로 조기진학한다고 쳐도, 대학 입학까지는 아직 1년이나 남았지만···.
‘뭐 그 정도야 충분히 기다릴 수 있지.’
그런 생각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데.
-아 그리고 미스터 케빈.
“네.”
-시상식 끝나는 대로 한 가지 문의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따 작품 링크를 보내놓을 테니 여유될 때 확인해달라는 것.
‘작품 링크라니?’
궁금하면서도 일단 알겠다 하자, 유진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럼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기분 좋게 통화를 마친 뒤 리셉션 행사장으로 나가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아주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저분은··· SF 거장 랜든 비숍!’
무엇보다도 우리 유진 작가님과 각별한 사이인 분이 아닌가.
케빈이 자석에 이끌리듯 그쪽으로 다가가자.
“그래, 오늘날의 SF씬이 고인물이라는 걸 누가 모르나··· 그래서 더더욱 스타 신인의 중요성이-”
한참 열띤 대화를 나누던 랜든 비숍은 케빈을 보고는 눈빛이 달라졌다.
그의 시선은 케빈의 명찰에 꽂혀 있었다.
“혹시, 케빈 클래그라면 에곤 K 작가의 에이전트···?”
“네 맞습니다.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비숍 작가님.”
“아닙니다, 나도 언제 한번 꼭 보고 싶었어요.”
“···저를요?”
눈을 크게 뜨는 케빈의 반응에 허허 웃는 비숍.
“그래. 내가 아끼는 우리 에곤 작가님의 에이전트이니, 언제 꼭 한 번 봐야겠다 생각했지요. ···아, 이쪽은 내 비서 팀.”
이런 영광이 있나.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 못하며 케빈은 팀과 통성명을 했고.
셋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그래, 그건 그렇고. 이 시상식 말인데, 우리 에곤 작가님도 잘 보고 계시겠지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비숍이 말한 순간, 케빈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랜든 비숍이야말로 에곤 K의 비밀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라는 것을.
“물론입니다.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계시고 있죠.”
두 사람이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들 특유의 눈빛을 주고받던 그때-
“오랜만이야, 랜든.”
우아한 목소리와 함께, 동글동글한 체구의 은발 여성이 다가왔다.
“아, 오랜만이구먼 에바.”
에바 스털링.
랜든 비숍과는 동시대의 작가로, 비숍이 SF 거장이라면 그녀는 SF 장르의 대모라 불리는 존재다.
그리고 참고로 말하자면-
“에곤 K 작가님의 에이전트라고 했죠? 반가워요, 미스터 클레그.”
“만나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후후, 그래요. 그리고 에곤 작가님 만나면, 꼭 이 말 좀 전해줘요.”
“무슨···.”
“우리 SFWA 협회에 꼭 좀 가입하라고.”
···SFWA 협회의 협회장이기도 했으니.
케빈이 네,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생긋 미소를 짓는 에바.
“알았죠? 언제든 환영이라고요.”
“아아, 맞다. 엠마 당신이 아직도 그 고대 유물 같은 협회의 장을 맡고 있었지.”
“고대 유물이라니 그 표현은 대체 뭐야? 듣기가 좀 그렇네.”
에바의 말에 장난스레 대꾸하는 랜든.
“아니, 당신이야 뭐 예전부터 감투 쓰는 걸 좋아했잖아.”
“어머, 자긴 꼭 아닌 것처럼 말하네.”
그 사이에서 웃던 케빈은 문득 이 두 분이 젊은 시절 연인 사이였음을 기억해냈고.
그 일을 언급하는 것이 금기라는 사실도 금방 떠올려냈다.
‘근데 뭐랄까, 이렇게 놓고 보니···.’
두 분 성격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어쩐지 외모까지 닮은 느낌- 이라고 생각하던 케빈은 한 가지 사실을 더 떠올렸다.
‘서로 닮았다는 말을··· 둘 다 진저리치며 싫어한다고 했던가.’
···이거 왠지 재밌는걸.
그렇게 SF의 양대산맥 같은 작가들과 환담을 나누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고 나자.
“이 자리에 와주신 귀빈 여러분, 그리고 이 시상식을 지켜보고 계실 SF&판타지 팬 여러분. 우리 SFWA협회가 주최하는 제59회 네뷸러 시상식에···.”
SFWA 협회장 에바 스털링의 사회로, 모두가 고대하던 네뷸러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수상 소감
한 시대를 풍미한, SF의 대모라 불리는 작가답게.
시상대에 올라선 에바 스털링의 작은 체구에서 무대 전체를 장악하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오늘 밤, 우리는 지난해 출간된 최고의 SF&판타지 소설을 축하하고,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획기적인 작품을 기리며, 이러한 이야기를 탄생시킨 놀라운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에바 스털링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설을 이어나갔다.
“상상력의 힘, 미지의 경이로움, 인간 정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향한 흥미진진한 여정에 함께 해주셔서···.”
그때, 맨 앞줄 그러니까 VIP석에 앉은 랜든 비숍이 사설이 너무 긴데- 라며 농담을 했고.
그러자 그 말을 듣기라도 하듯 에바가 말했다.
“저기, 지방 라디오는 좀 꺼주시죠. ···좋습니다, 그러면 바로 발표로 들어가죠. 먼저 단편 부문 후보작으로는···.”
단편, 중단편, 청소년 부문의 시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케빈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상을 받는 것도 아닌데.’
아니지, 어쩌면 자신이 담당하는 작가가 상을 받기 때문에 더더욱 두근거리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겨우 3년 차 에이전트.
그동안 발에 땀이 나도록 뛰었지만, 이렇게 빛나는 재능의 작가를 만난 것은 에곤 K가 처음이었으니까.
겉으로 티는 안 나지만, 손에 땀이 찰 정도로 긴장해 있던 그때-
“에곤 K 작가님의 에이전트 되시죠? 이쪽으로.”
진행 요원이 그를 무대 뒤쪽으로 데려갔다.
한편 무대에서는 시상이 계속되는 중.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다음은 중편 부문입니다! 먼저 후보작으로는 S.T. 우즈 <검은 달>, 탈라비 왈코 <내가 알지 못했던 진실들>···.”
후보작 다섯 개의 이름이 차례로 나오다, 맨 마지막에야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이 호명되자-
“와아아—!”
관객석에서 뜨거운 호응이 일었다.
“중편 부문 수상자는 바로···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의 에곤 K!”
우와아아—
방금 전보다 더 큰 환호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무대 위로 거대한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
저벅저벅, 걸어서 나타난 케빈 클레그의 모습에 관객들의 눈이 한순간 커진다.
“안녕하십니까, 에곤 K 작가님의 출판 에이전트 케빈 클레그입니다. 작가님께서 이곳에서 오실 수 없어서 제가 대리 수상을 하게 되었지만.”
희미한 미소를 짓는 케빈.
“에곤 작가님께서 수상 소감을 동영상으로 남기셨습니다. 모두 함께 보시죠.”
오오오—
드디어 에곤 K의 얼굴을 보는 건가, 관객들이 기대감에 가득 차 있던 그때.
무대 위 대형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고-
[중편 부문 수상|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의 에곤 K]
창백한 피부에 폭탄 맞은 보라색 머리, 광기로 빛나는 눈동자.
에곤 K 캐릭터의 -의자에 앉아 있는 듯한- 바스트샷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아···.”
놀라면서도 아쉬워하는, 관객들의 복잡한 표정이 카메라에 잡힌 그때.
에곤 K의 입이 열리며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에곤 K입니다.
*
바로 그 시각.
나는 집에서 우리 가족, 그리고 네드, 아델과 함께 거실 스마트 TV로 시상식 생중계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아, 왜 내가 다 떨리는지 모르겠어.”
“흐, 나도 나도.”
“너도? 난 또 나만 그런 줄 알았지···.”
“너희들도 참.”
케이트는 후후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내 친구들만큼이나 잔뜩 신이 난 표정이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하는 클로이.
“오빠아, 상 받아?”
“응, 그래.”
“근데에, 저기 저 하부지는 뭐야.”
할아버지···.
클로이의 말에 다같이 웃음이 빵 터진 와중.
-먼저, 이 자리에 제가 설 수 있도록 <피터 팬>에 투표해주신 SFWA 협회 회원분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을 진심을 다해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네뷸러 수상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에곤 K의 수상 소감이 계속되었다.
AI 보이스로 만든 목소리가 제법 자연스러운 가운데, 담담한 소회가 이어진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도 놔버리지 않기를 참 잘했구나. ···깊은 절망의 골짜기에 있을 때도,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기를 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설령 그게 헛되고 맹목적인 희망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그 시절의 저는 <피터 팬>의 피터 팬딧과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그래요, 어쩌면 이 상은 그때의 제게 독자님들이 주시는 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의 자신을 잊지 않으며, 꾸준히 좋은 글을 쓰고자 노력하겠다는 것.
-오늘의 이 영광을 제 곁을 변함 없이 지켜준 저의 가족과 친구들, <피터 팬>이 나오기까지 온 정성을 쏟아주신 출판사 관계자 분들과 저의 에이전트에게 돌립니다.
상당히 긴 멘트가 이어지는 동안, 우리 집 거실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늘 재잘거리는 클로이마저도 이 순간만큼은 동그란 눈을 TV 속의 에곤 K에게 고정한 채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내 가슴속은 복잡한 감정으로 요동쳤다.
케빈에게도 말한 적 있지만, 네뷸러상을 탔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그간의 진심을 모두의 앞에서 이렇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뭉클했으니까.
그리고 또 한 번 다짐하게 된다.
‘그 시절의 나.’
···병상에 누운 채,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싶어 몸부림치던 그때의 나를 잊지 말자고.
그리고 이내, 에곤 K의 마지막 멘트가 이어졌다.
-···만약 내년에도 또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이 자리에 몸소 나올 수 있으면 좋겠군요.
‘몸소 나온다’는 표현에 객석에서 잠시 술렁임이 인 순간.
에곤 K를 담은 카메라가 점점 멀어지더니, 바스트샷에서 미디엄샷으로, 미디엄샷에서 웨이스트샷으로.
이내 풀샷으로 이 미치광이 박사의 전신을 담았고.
“···!”
에곤 K가 호숫가에서 낚시의자에 앉아 낚싯대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에 관객석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오던 찰나.
-안뇽~
마지막 순간, 다섯 살짜리로 보이는 귀여운 여자아이가 잠깐 나타나 손을 흔들고 사라진다.
···그리고 곧바로 끝나는 동영상.
-우와아아—
-꺄아아, 귀여워.
-아하하하.
관객석에서 환호성과 탄성,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이 들린다.
그런 반응에 몹시 만족스러워하는 네드.
“흐흐흐, 이거 아주 뿌듯한걸.”
“어, 다 니 덕분이다.”
씩 웃으며 감사의 말을 전하던 그때, 내 어깨를 짚는 손길에 옆을 돌아보자.
“유진, 축하한다.”
“그래, 우리 아들 정말 대견하구나.”
눈시울이 조금 붉어진 케이트와, 목소리가 살짝 잠긴 아버지.
심지어 아델은 -어째선지- 코를 훌쩍이는 것이 아닌가.
“흐으, 너무··· 감동적이야.”
뭐지··· 생각하며 다시 옆을 돌아보자, 네드 녀석의 눈도 조금 빨개져 있었다.
“야, 유진.”
“응?”
“너, 대체 언제 저렇게 힘들었냐?”
“···.”
아, 잠깐만.
“니가 한때 사춘기를 엄청 심하게 겪은 건 나도 잘 알았는데-”
“맞아, 나도 그랬는데··· 유진 니가 저 정도로 힘들어한 줄은, 훌쩍, 몰랐어.”
“우리가 좀 더 알아줬어야 했는데.”
“그러게, 너무, 흑, 무심했네.”
죽이 척척 맞는 네드와 아델.
···방금 전의 저 수상 소감을, 다들 조금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듯하다.
그때, 가만히 있던 클로이가 싱긋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근데에~ 오빠 차례는 언제야?”
“응?”
“아니 아니~ 저 하부지 말고. 오빠는 언제 받아? 오빠가 상 받는 거 아냐?”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던 그때.
아델이 훌쩍이던 걸 멈추고 입을 열었다.
“응, 맞아. 저기 있는 저 에곤 K는 오빠랑 다른 사람이야.”
“···?”
“클로이, 저 할아버지, 아니 에곤 K 넘 멋있지 않아? 난 앞으로 유진 말고, 에곤 K의 팬이 되겠어···.”
그건 대체 뭐지, 어이없어서 혀를 차자.
낄낄 웃으며 말하는 네드.
“그러고 보니 에곤 K 캐릭터가 아델 취향이긴 하네.”
“음?”
“아니 아니, 아델이 원래 멋진 할아버지 배우들 좋아하잖아. 리암 니슨이라든가, 해리슨 포드 같은.”
생각해보니 그렇네.
···아델은 회귀 후에도 소나무 같은 취향을 자랑했으니 말이다.
“흐흐, 내가 에곤 K 만들면서 <더로드> 주인공 느낌을 참고해봤거든.”
네드가 신이 나 애니메이션 제작 비화를 늘어놓는 한편, 아델은-
“으으, 수상 소감 너무 멋있어··· 영상 따로 저장해놔야지.”
···뭔가 포인트가 엇나간 느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지잉- 진동과 함께 케빈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스터 케빈, 고생 많으셨어요.”
-하하 고생이라뇨! 꿈에 그리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흥분과 들뜸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미소가 지어지는데.
-트로피도 잘 전달받았고요, 내일 아침 비행기로 바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오는 길에 내게 들러 전달하겠다는 것.
“언제든 좋습니다, 저야 지금 방학이니까요. 아 그건 그렇고, 아까 통화로 얘기했던 것 메시지로 보내놨으니 여유되실 때-”
-아, 안 그래도 이미 봤습니다. <토끼 남작의 모험> 맞죠? 근데 이 책은 대체 왜···.
내가 아까 보내놓은 아마존 서지정보 링크를 벌써 확인했다는 케빈 클레그.
“좋네요. 돌아오시는 일정에 맞춰서 라이터스홈 사무실로 책 한 권 보내놓을게요.”
-어 작가님, 안 그러셔도 됩니다! 저 이 책 이미 있어요.
“···네?”
의외의 말에 눈이 커지는데.
-저희 라이터스홈의 아동서 전문 에이전트들이 적극 검토 중인 타이틀이거든요. 근데 갑자기 작가님이 이 책 얘기를 꺼내셔서 좀 놀랐습니다. 대체 왜···.
라이터스홈뿐이 아니고, 여러 에이전시 사이에서 얘기가 돌고 있다는 것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
한편, 에곤 K의 수상 소감을 보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유진네 가족들뿐이 아니었다.
[SFWA| 제59회 네뷸러 시상식 LIVE]
-19.4k 시청 중
제법 많은 수의 SF 장르 독자들이 네뷸러 시상식을 생중계로 지켜봤으니까.
특히 SF팬포럼과 SF서브레딧은 그 얘기로 시끌시끌했다.
[5.7k 네뷸러 에곤 k 수상소감 영상 본 사람]
-나!
└나도 나도
└넘 좋다···
-소감이 넘 길지 않았냐 그래 봤자 중편 부문이면서
└? 중편인 거랑 길이가 뭔 상관
└아니 네뷸러의 꽃은 장편 아니냐고 주인공도 아니면서
└뭔;; 네뷸러의 주인공 ㅇㅈㄹ
└ㅋㅋㅋㅋ 이젠 별 어그로가 다 붙네
어느새 화제는 ‘에곤 K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흘러갔는데.
-흑 진짜 얼굴 보는 줄 알고 엄청 기대했는데
└근데 애니메이션 넘 고퀄이던데ㅋㅋㅋ
└호숫가+낚시의자+낚시대 = 완벽
└우리집 귀염둥이는 왜 빼놓냐
└LOL(크크크)
└마지막에 귀염둥이 보고 비명 질렀다
작가의 실물과 얼마나 비슷할지 궁금해하는 것은 물론.
-이 캐릭터는 실제 에곤 작가님과 싱크로율 100퍼센트일 거라 확신함
└ㅇㅇ 나도
└그게 아니면 이런 생동감이 나올 수가 없음
└글에서도 그게 딱 느껴지지 않냐
└세월에서 느껴지는 뭔가가 있어
에곤 K 캐릭터 일러스트를 누가 그렸는지에도 관심이 많았다.
-(경)에곤 K 버츄얼유튜버 데뷔 (축)
└버튜버 ㅋㅋㅋㅋ
└누가 그린 걸까
└ㅇㅇ 매우 궁금함···
└약간 코믹스 작가 같은? 마블 느낌이 좀 나더라
└ㄴㄴ 마블보다는 에밀 프랭클과지
···
그렇지만, 이들이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따로 있었으니.
-이 수상 소감에서 젤 중요한 건 마지막 문장임
└마지막에 이랬잖아 : 내년에도 또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이 자리에 몸소 나올 수 있으면 좋겠군요
└내년에도 탈 자신이 있다는 거네
└크으 멋지다
└아니 다들 포인트를 못 잡네
└담번에 또 수상하게 되면 얼굴 공개하겠다 이 말이잖아
└와 미친
└쩐다
···
에곤 K의 정체에 대한 기대감은 날로 커지기만 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