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이 다른(2)
결론만 말하자면, 그 자리는 생각보다 꽤 길어졌다.
계약 제안이 들어온 곳이 한두 곳이 아니기도 하지만.
“근데,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게···.”
네드는 기존에 자가출판한 책도 잘 되는데, 그걸 꼭 기존의 출판사에서 또 출간해야 하나- 라는 의문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단, 네드 작가님이 얘기하신 포인트가 뭔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리고 미스터 케빈은 나를 대신해 네드의 그런 의문을 깨끗하게 해소해줬다.
“제가 보기에도 이 책은 굉장히 완성도가 높아요. 표지와 타이포 모두 지금 그대로 가져가도, 아니지 오히려 그대로 살려서 출간을 하는 편이 훨씬 더 큰 인기를 끌 겁니다. 그럼에도 제가···.”
나를 돌아본 케빈이 말을 잇는다.
“저도 그렇고, 여기 유진 작가님도 그렇고 기존의 대형 출판사를 통해 재출간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건, 최대한 많은 유통망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마존의 덩치가 크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미국 전역의 수많은 서점들.
온라인 서점과 중대형 오프라인 서점들, 독립 서점들에 이르기까지-
출판사의 기존 거래처인지 아닌지에 따라 책의 최대 판매 볼륨이 달라지는 셈.
“그렇다 보니, 기본으로 미국의 빅파이브라 불리는 곳들은 그 출발 지점부터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 그뿐인가.
자사의 신간이 조금이라도 팔리는 기미가 보이면, 그때부터 엄청난 자본력을 바탕으로 폭발적인 마케팅과 대대적인 광고 집행에 나선다.
“그럼 그때부터는 새로운 독자층이 유입됩니다.”
“새로운 독자층요?”
“원래 책을 자주 읽진 않지만, 그래도 1년에 몇 권 정도는 사보는··· 라이트독자들이라고 하죠, 소위.”
그 사람들이 광고나 마케팅을 통해 유입되어 책을 구매하기 시작하고-
“바로 그런 식으로 슈퍼베스트셀러, 더 나아가서는 밀리언 셀러가 탄생하는 것이죠.”
“···.”
밀리언셀러, 라는 단어에 네드의 눈빛이 달라지는 가운데.
“그런 상황에서, 자가 출판으로 베스트셀러가 될 확률은··· 빅파이브 쪽의 확률에 비해 압도적으로 더 작다, 라는 겁니다.”
“···아.”
이제야 납득하는 네드.
내가 보기에도 이건, 순수한 확률의 문제가 맞긴 하다.
‘이 책을 정말 클로이의 생일선물로만 한정한다면 상관없겠지만.’
<토끼 남작>의 저변을 정말로 넓히고 싶다 한다면-
“당연히 큰 출판사를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새어머니 역시 내 말에 동의했고.
네드는 한 차례 머리를 긁적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그 말이 맞네.”
그렇게 깔끔한 합의를 본 뒤.
“기본적인 계약 조건 자체는 큰 차이가 없고, 관건은 역시 선인세가 될 것 같네요.”
케빈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나는 선인세를 받고 출간 계약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해외 판권 말고, 미국 내 출간 계약 말이다.
‘에이전트를 두는 이유가 바로 이 선인세 딜 때문이기도 하지.’
신인이든 기성이든, 원고를 종이책으로 출간하고 그것이 수익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 수입이 없을 때 최소한의 생활비를 보장하기 위해 선인세가 존재하는 셈.
‘그리고 때로는, 여러 출판사 사이의 경쟁에서 얼마나 더 큰 금액을 이끌어내느냐를 에이전트의 능력으로 보기도 하지.’
···이번에 미스터 케빈이 해외 출판시장에서 <피터 팬>으로 여섯 자리 숫자의 딜을 성사시킨 것처럼 말이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미 계약 제안을 준 곳들은 물론이고, 그 외의 중대형 아동서 출판사들에게도 쭉 뉴스레터를 돌려서, 어느 정도까지 선인세를 제시하는지 입찰을 받아보겠습니다.”
그렇게 미스터 케빈이 논의를 정리하는 가운데, 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슈퍼베스트셀러를 얘기하시니 생각난 건데··· 이런 방식은 어떨까요?”
이야기를 들은 케빈의 눈동자에 경탄의 빛이 떠올랐다.
*
그날 저녁, 새어머니와 아버지는 네드와 미스터 케빈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흐흐 잘 먹겠습니다!”
우리집에서 식사하는 게 익숙한 네드와 달리, 영 어색해하는 케빈.
“바로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죄송스럽게···.”
“죄송스럽다뇨, 멀리 다녀오느라 고생하셨는데 당연히 식사하고 가셔야죠.”
“아, 혹시 부담되시는 건 아니죠?”
케이트와 나의 말에 미스터 케빈이 고개를 저었다.
“부담이라뇨, 전혀. 사실, 여기서 혼자 지내면서 가정식이 엄청 그리웠는데···.”
그런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해주기라도 하듯, 아주 잘 먹는 미스터 케빈.
“이야, 이거 진짜 맛있는데요? 진수성찬입니다, 진수성찬.”
그 앞에 놓인 접시가 어쩐지 손바닥만 하게 보이는 가운데.
아버지와 케이트는 복스럽게 잘먹는 케빈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고.
케빈이 엄청 크게 한 입 떠서 먹을 때마다, 클로이는 우와 우와 소리를 내며 좋아했다.
“그건 그렇고, 에곤 K에 이어 <토끼 남작> 책을 위해서도 수고해주시게 되었군요. 감사합니다.”
“뭘요, 저야말로 작가님이 절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아버지의 말에 그렇게 대꾸한 케빈이 이내 말을 잇는다.
“그러고 보니, 유진 작가님 아버님도 에이전시 대표이시라고 들었습니다.”
“하하, 뭐 그냥 한 가족 먹고 살기 어렵지 않게 운영하는 정도입니다.”
“한국 문학을 전문으로 하신다고 들었는데··· 그, KMC에서 관리하시는 저자분 중에 김하연 작가님 작품을 인상 깊게 읽었거든요.”
김하연, 이라는 이름에 아주 반가워하는 아버지.
“아, 혹시 <녹슨 검 끝>을.”
“네 맞습니다, <녹슨 검 끝>! 지난번에 세계환상문학상 번역작품 부문 후보에 올랐지 않습니까.”
한국 장르문학의 현주소이자 희망이라 불리는 김하연 작가.
그녀는 KMC 에이전시의 간판작가이자, 시작한 지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은 아버지의 에이전시가 미국에 자리 잡게 해준 일등공신이나 다름없었다.
“저도 김하연 작가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많은데.”
“아, 유진 작가님도.”
나이보다 조숙한 독서 취향을 자랑하던 5학년 때.
아버지의 서재에 꽂혀 있던 김하연 작가의 <시간의 수도원>을 읽고 판타지에 처음 눈을 뜨게 됐으니까.
‘아버지 말로는 김하연 작가님이 의외로 40대 후반 정도라고 했지.’
대여점 시절부터 활동한 까닭에 다들 나이 지긋한 작가로 생각하지만.
갓 스무 살에 <시간의 수도원>으로 데뷔한 이후, 지금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
···<녹슨 검 끝>은 그런 김하연 작가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소설.
영문판도 읽어봤는데, 번역가가 엄청 공을 들인 덕분인지 그 완성도와 감성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후후, 다들 소설 취향이 좋은걸요.”
거기에 케이트까지 합세해, 우리 넷은 잠시 김하연 작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 거실로 나오는데.
“엄청··· 커.”
자리에서 일어난 케빈을 처음 본 클로이가 감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늘에 닿을 것 같아, 중얼거리는 아이를 보며 웃음 짓는 케빈.
“와, 제가 드디어 ‘우리집 귀염둥이’를 다 보네요.”
“우리집··· 기염둥이?”
“네네, 반가워요 클로이 양.”
헤에, 웃은 클로이가 대꾸했다.
“케빈 아저씨, 곰 아저씨 같아.”
“곰 아저씨?”
“마샤와 곰에 나오는, 곰 아저씨.”
“···.”
순간 당황한 내가 슬쩍 옆을 돌아보자.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함박미소를 짓고 있는 케빈이 보였다.
“와, 이거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네요. 안 그래도 제 별명이 곰이었는데.”
“흐흐, 진짜요?”
네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케빈.
“사실, 제 전 여친이 저를 늘 ‘마이 러블리 그리즐리’라고 불렀는데···.”
그의 입에서 굳이 안 들어도 되는 TMI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그것 말고 ‘cute bookish(귀여운 책벌레)’라는 별명도 붙여줘서···.”
그래서 cute_bookish가 자신의 아이디가 되었다는 말에, 여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네드가 퍼뜩 놀랐다.
“자, 잠깐만. Cute_bookish요?”
“네.”
“그게, 미스터 케빈이었다고요? 그··· 설마 유튜브 아이디도?”
그 순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케빈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나와 케빈을 번갈아 돌아본 네드의 얼굴이 이내 허옇게 질렸다.
“···.”
···그러니까, 내가 귀여운 누나 아니라고 했잖아.
*
7월의 첫 주.
어마어마한 수의 참가자를 자랑하는 스콜라스틱 공모전은 1차 심사가 완벽하게 끝난 상태였다.
이제 2차 심사 또한 어느 정도 그 추이가 결정된 상황이었는데.
오늘은 3차 심사를 시작하기 앞서, 최종 심사작을 확정하기 위한 심사위원 회동이 이루어지는 날.
‘···앞으로 이런 회동이 몇 번은 더 있을 텐데.’
시카고 대학의 스탠리 미첼 교수는 회의장 안에 마련된 원탁에 둘러 앉으며 생각했다.
스콜라스틱 심사위원들 대부분이 대학교수나 유명 소설가, 평론가 등 쟁쟁한 문학 관련 종사자들.
안 그래도 바쁜 이들이 여기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순수하게 공모전 수상자를 가려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미래의 문학 유망주를 사전에 선별하기 위해서이지.’
그 유망주를 각자의 대학으로 영입하려는, 굳이 따지자면 FA시장의 에이전트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
스탠리 자신도 얼마 전 어느 작품을 읽고 그 참가자를 눈여겨봐 두지 않았던가.
“···아이오와시티의 권유진 학생.”
<셰익스피어 패러디 앤솔로지>에 냈던 작품도 훌륭했지만.
이번의 는 모든 면에서 전작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놀라운 작품이었으니까.
읽은 지 꽤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해져올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
“일찍 왔군, 스탠리.”
“오랜만이에요 미첼 교수님.”
“···다들 간만입니다.”
시간에 맞춰서 심사위원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미시건대, 시카고대, 아이오와대, 뉴욕대, 컬럼비아대 등···.
문예창작으로 유명한 대학들의 문학교수들, 거기에 일부 아이비리그 교수들까지 한자리에 모인 것에 스탠리는 내심 감탄했다.
‘올해도 다들 데려가고 싶은 인재가 있나 보군.’
그리고 잠시 후.
심사위원장의 코멘트로 본격적인 회동이 시작되었다.
“좋습니다, 이미 대략적인 결과는 나온 것 같지만··· 3차 심사에서 지역상과 전국상을 결정하기 앞서, 단편소설 부문의 고득점작들 몇 개에 관해 잠시 논의할 예정인데.”
3차 심사가 자신이 택한 작품에 한 표씩을 행사하는 형식이라면.
2차 심사는 100점을 만점으로 삼아 점수를 매기는 형식이다.
그리고 스탠리 자신은 권유진의 에 95점이라는, 여태 이 스콜라스틱 공모전 심사위원으로 지내며 단 한 번도 준 적 없는 높은 점수를 매겼는데.
“···!”
이내 진행요원이 가져다준 점수 현황표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만, 의 점수가··· 94.7이라고?’
그 말은 즉, 자신 말고도 심사위원들 대부분이 이 작품에 엄청난 고점을 주었다는 사실.
그것을 발견한 건 자신뿐이 아니었다.
“이야, 역시 에 다들 좋은 점수를 주셨네요.”
“이 학생이··· 아이오와시티 출신 맞죠? 힐크레스트 고등학교.”
“후우, 이 친구 진짜 탐이 납니다.”
···이 권유진 학생이 어느 학교에 갈지를 두고 벌써부터 신경전을 벌이는 분위기.
“흠, 이 정도 실력이면 당연히 조기진학을 고려하고 있지 않을까요?”
“문예창작 클럽 소속이라니, 거기 담당교사가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이미 제안을 했을 겁니다.”
안 그래도 자신이 했던 생각을, 여기 있는 교수들 모두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면 안 되는데.’
스탠리가 저도 모르게 이를 갈던 그때, 에 어느 한 명의 심사위원이 세 자리 점수를 준 것을 발견했다.
“어머, 잠깐 이것 좀 봐. 루먼 교수님은··· 무려 100점, 만점을 주셨네요?”
그러자.
30대 초반의 여성 교수가 볼펜 끝을 씹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 네.”
예일대 드라마스쿨의 극작과 교수 로렌 루먼.
멍한 첫인상과는 달리, 천재 극본가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냥··· 만점을 안 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디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가 한 말에, 교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설마, 루먼 교수가 이 학생을 점찍은 건가?’
예일대 드라마스쿨도 모자라, 작품마다 연극계에 돌풍을 일으키는 로렌 루먼이라니.
상대가 너무 강하다- 라고 스탠리를 비롯해 모두가 생각하던 그때.
“근데.”
루먼 교수가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 이··· 권유진 학생한테 연락을 취하려면-”
“어허! 지금은 그러면 안 되지요.”
“맞아요. 심사 기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개인적인 연락이라뇨?”
“그래요, 참가자에게 심사위원이 연락하는 건 공모 규정 위반입니다. 민감한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대수롭지 않게 던진 질문에 아주 심각하게, 아니 험악하게 반응하는 다른 심사위원들의 모습에-
“아, 아··· 죄송합니다.”
루먼 교수는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속내는 다른 교수들과는 조금 달랐는데.
‘권유진 이 학생이 원작자가 되는 셈이니까··· 얼른 연락해서 허락을 구해야 하는데.’
로렌 루먼.
데뷔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내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이 천재 극작가는 를 읽으며 강렬한 영감을 받은 터였다.
‘···이걸, 무대 위로 옮겨보고 싶다.’
그리고 지금은 를 단막극 형태로 각색한 극본을 구상하는 중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원작자와 2차 저작물 계약을 맺어야 하는 상황.
‘역시, 공모전 심사 발표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것이 바로 그녀가 유진에게 연락하려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