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선물(1)
*
미스터 케빈과 <토끼 남작> 관련해서 계약을 맺은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다.
케빈이 전달해준 네뷸러상 트로피는 내 방 책장 위에 고이 모셔져 있는데.
nebula(성운)라는 이름 그대로, 보라색 성운을 새겨넣은 상패를 볼 때마다 뿌듯함이 밀려온다.
그것도 그렇지만-
“뭔가 신기한 기분이네.”
노트북 화면 속, 라이터스홈 홈페이지 메인에 올라온 ‘우리의 새로운 작가’ 명단을 클릭해서 눌러보면-
[저자 - 베니 르 레푸스
베니 르 레푸스는 토끼 왕국의 변방에서 태어났다. 지금까지 수많은 모험을 해왔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남기고 있다.
*베니 르 레푸스는 각각 글과 그림, 편집 및 디자인을 맡은 유진 권, 네드 밀러, 케이트 권의 공동 필명이다.]
저자이자 주인공 ‘베니’의 소개에 웃음이 지어지던 그때.
“으으, 으어어···.”
2층 계단을 올라오는 아버지의 신음이 들려왔다.
···역시, 운동을 너무 열심히 하셔서 그런가.
노트북을 닫고는 방을 나가 아버지에게 슬쩍 말을 붙였다.
“많이 힘드세요, 아버지?”
“응, 아, 아니다아···. 그냥, 다리가 좀 뭉친 느낌이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신이 조금 나간 느낌.
방금 우리는 주말을 맞이해 제이든네 체육관, 그러니까 짐 관장님이 운영하시는 체육관에 다녀온 참이었다.
‘간만에 제대로 운동해봐요 아버지!’
‘하하, 그거 좋구나.’
오늘을 위해, 짐 관장님에게 미리 아버지의 상황을 얘기해놨는데.
‘고지혈증이라니···! 그러면 더더욱 운동을 열심히 하셔야겠구나.’
그래도 갑자기 무리하면 더 안 좋으니, 아버지의 컨디션에 맞춰서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짜보겠다는 것.
그리고 오늘 아침, 짐 관장님은 나와 아버지를 매우 반갑게 맞이했다.
‘유진네 아버님이시군요, 이거 반갑습니다!’
에너지 넘치는 관장님에게 붙들려 아버지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다.
최근 북콘 때문에 바빠져서 운동을 못 했다더니, 조금만 해도 숨이 차나 보다.
‘흐억, 후우···.’
‘아주 잘 오셨습니다, 유진네 아버님!’
‘흐으, 그냥, SJ라고 편하게···.’
‘좋아요 SJ, 워낙 운동량이 적은 편이었어서 처음엔 힘들겠지만, 기본적인 피지컬이 좋으니 조금만 하면 금방 근육이 붙으실 겁니다.’
짐 관장님은 말이 꽤 많은 편이었는데.
‘이제 보니 유진의 체격이 SJ를 닮았군요, 하하.’
‘그래, 유진! 역시 뭘 좀 아는구나. 그 기분 좋은 고통에서 모든 게 시작되는 법이지!’
‘하하! 아주 좋아요, SJ! 이 쇳소리! 운동할 때 나는 이 쇳소리가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 법이죠···.’
끊임없이 말하는 관장님과 달리, 아버지는 신음밖에 내지 못했고.
나는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신나게 풀었다.
그리고 기구를 정리하러 온 제이든도 잠깐 봤는데.
‘유진, 유진! 너 네뷸러 시상식 봤어? 완전 죽여주더라, 미친! 에곤 K 수상 소감 듣고 나 울었잖냐···.’
그 진심 어린 간증을 듣고 있자니 괜스레 민망해졌다고 할까.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 지 1시간이 지난 지금.
“···많이 힘드셨어요?”
얼굴 전체가 축 흘러내린 느낌의 아버지를 보며 묻자, 웃으며 고개를 저으신다.
“음, 힘들기는 엄청 힘들었는데··· 그래도 확실히 상쾌하고 좋구나.”
처음이 힘들지 꾸준히 하다 보면 재미가 붙을 것 같다는 것.
“역시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내일 또 같이 가요, 아버지.”
“어, 그··· 내일은··· 바쁠 것 같은데, 일도 많고.”
“내일 일요일인데요?”
“···.”
아버지의 낯빛이 파래진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라고 생각하던 그때.
“아빠아~ 나 왔쪄~”
새어머니와 함께 놀이터에서 놀다 온 클로이가 아버지에게 달려와 폭 안겼다.
“어이구 우리 귀염둥이.”
“나 비행기! 비행기 태워죠.”
허허 웃으며 다리에 클로이를 올려놓고 비행기를 태워주는 아버지.
그렇게 한 5분 정도 열심히 놀아주시던 그때.
“웅, 아빠.”
“응?”
“아빠는, 왜애, 목이 꾸겨졌어?”
“구겨져···?”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며 아버지가 되묻자.
천진난만하게 -아버지의 다리를 타고 공중에 떠오른 채로- 아버지의 목 주름을 짚어 보이는 클로이.
“여기 여기, 꾸겨졌어, 신기해.”
“···.”
“목도리 같아, 이히히.”
그 말에 아버지의 눈꼬리가 아래로 확 처진 가운데.
“그, 클로이··· 아빠는··· 목이 길어서 그래.”
“우와, 그렇구나~~”
내가 애써 변명해줬지만, 아버지의 슬픈 눈빛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
유진 작가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온 지 1주가 흘렀다.
그 사이, 케빈은 굉장히 바쁘게 일을 처리했는데.
‘제일 먼저 할 일은··· 라이터스홈의 전 회원사에게 대대적으로 돌릴 뉴스레터를 작성하는 것!’
누가 봐도 흥미진진해 보이는 <토끼 남작의 모험> 뉴스레터를 돌리자마자, ‘전화통에 불이 나다’라는 표현이 체감될 정도로 전화 연락과 메일이 쏟아졌다.
케빈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 아예 몇 명이 이 <토끼 남작>의 문의 응대에 투입됐을 정도.
“···네, 맞습니다. 베니 르 레푸스는 필명이고, 레터에 명시된 대로 총 세 명이···.”
에곤 K처럼 정체를 꼭꼭 감추기보다는, 유진과 네드, 케이트 세 명이 함께하는 일종의 팀 컨셉으로 가보자는 전략이 괜찮았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만 해도 아예 익명으로 할지 고민했지만.’
유진과 네드가 아직 고등학생이래도, 공동 저자이니 어느 한 사람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것도 덜할 뿐더러.
‘타이틀을 소개하는 포인트를 이런 쪽에 둬보면 어떨까요?’
···오빠가 어린 여동생의 생일 선물로 쓴 글에, 오빠 친구가 그림을 그리고, 어머니가 편집과 디자인, 제작을 한 책.
감동적인 인상을 줄 뿐더러, 화제의 방향이 그쪽에 쏠릴 거라는 케빈의 의견에 모두 동의한 바였다.
‘그건 그렇고, 아동서 분야에서는 이런 식의 필명을 사용하는 케이스가 제법 흔한 편이지.’
지금껏 150권 이상의 책이 나왔으며, 아동 판타지 문학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제로니모 스틸턴>은 이탈리아 작가 엘리자베타 다미가 ‘제로니모 스틸턴’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하는 시리즈다.
그녀가 제로니모 스틸턴의 작가라는 사실은 공개돼 있지만, 책 속의 저자 소개 페이지에는 어디까지나 주인공인 제로니모의 약력만이 적혀 있는데.
‘어린이 독자들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한 배려인 셈.’
<토끼 남작의 모험> 또한, 베니 본인이 겪은 모험을 조카에게 들려주는 형식이니만큼 저자명을 ‘베니 르 레푸스’로 한 것은 굉장히 좋은 선택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던 그때.
“케빈, 지금까지 들어온 문의들을 정리해봤는데.”
“오, 고마워.”
지금까지 총 50여 곳에서 문의가 들어왔고, 그중 30여 개가 입찰을 해왔다.
···그중에는 아마존 KDP의 저자 페이지로 계약 의사를 전달해온 곳들도 포함돼 있었는데.
“아니, 이거 금액이···.”
“내 눈이 잘못된 거 아니지?”
“이야, 미쳤네.”
지금껏 접수된 선인세 오퍼 금액을 보고 눈이 튀어나올 듯 놀란 다른 에이전트들과는 달리.
케빈은 생각보다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역시, 유진 작가님의 전략이 주효했군!’
···이 정도까지 올라가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유진은 케빈에게 이런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슈퍼베스트셀러를 얘기하시니 생각난 건데··· 이런 방식은 어떨까요?’
‘아까 미스터 케빈이 그러셨죠, 이 책은 처음부터 스포트라이트 아래서 화려하게 데뷔시키고 싶다고.’
그걸 위해서라면, 압도적인 액수의 선인세 딜 자체가 도움이 될 거라는 것.
‘책이 시장에 출간되기 전부터 그만큼 화제를 몰 수 있다면, 각종 언론에서 관심을 갖게 될 거고. 그렇게 작성된 기사를 읽어본 독자들이 유입이 될 거고···.’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아는, 슈퍼베스트셀러가 만들어지는 가장 흔한 과정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 <토끼 남작의 모험>은 아예 3권짜리 계약(three-book deal)으로 가보죠.’
단권 계약이 아닌, 여러 권의 책을 한 번에 묶어서 계약하는 형식을 말한다.
작가에게는 시리즈의 장편화를 보장해주는 동시에, 선인세 금액을 몇 배로 올려주는 역할을 하며.
출판사 입장에서도 만일 정말로 대박이 난다면, 선인세를 확 올려서 후속권을 계약하지 않아도 되니 안정적으로 3권까지 출간을 담보할 수 있는 셈.
‘아, 한 가지 덧붙이자면.’
유진이 제시한 것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제가 라이터스홈 회원사들을 좀 살펴봤는데, 확실히 Top 10 에이전시답게 거래처가 굉장히 많더군요.’
‘하하, 맞습니다.’
‘영국 쪽 출판사들과도 직거래를 하고.’
‘그렇···죠?”
언제 그런 걸 다 알아봤을까.
역시 빈틈이 없다니까- 라고 생각하는데.
‘좋아요, 그럼··· 영국 쪽 대형출판사와도 거래를 하되- 아예 영국 판권과 영연방 판권을 한데 묶어서 금액을 올려보죠.’
‘···!’
케빈 자신도 그런 식의 거래가 가능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번 케이스에 곧바로 연결시키지 못했던 터.
깜짝 놀란 동시에 민망함과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에이전트로서 먼저 제시했어야 했는데.’
지난번 <피터 팬>의 해외 판권 거래를 대대적으로 성사시키며 에이전트로서의 능력을 보여줬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권유진은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기분이었다.
‘···이제 겨우 17, 아니 곧 생일이라 했으니 곧 18살인데.’
젊다 못해 어린 작가에게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함께한 시간이 늘어갈수록 더더욱 알 수 없는 상대, 라는 생각이 드는 건 유진이 처음이다.
“···페블퍼블리싱, 매직타워프레스, 레인보우리즈···.”
총 30곳에서 보내온 선인세 금액들을 쭉 살펴보는 가운데.
“어, 영국 쪽에서도 연락이 왔네.”
영국 출판사들은 현재 다섯 군데 정도가 치열하게 경합을 벌이는 상황.
그리고 이 중 한 곳이 압도적으로 높은 금액을 불렀고, 나머지 출판사에도 이 금액에 응찰하실 수 있냐-라고 메일을 보내놨는데, 거기서 모두 답이 온 참이었다.
“···.”
메일을 하나씩 열어보던 케빈의 눈이 조금씩 커졌고.
어느새 마지막 메일을 확인하고 나자 경악으로 가득 찼다.
이 다섯 곳 중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는 영국 맥밀란에서-
‘정말로, 이 금액을 부른다고?’
···입찰 최고액의 2배가 되는 금액을 불렀기 때문이다.
순간 머리가 아찔해지는 기분에 케빈은 눈앞을 두 손으로 가리고 말았다.
*
월요일 저녁.
평소처럼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웬일로 나를 서재로 부르셨다.
“그, 다른 게 아니고···.”
탁상용 달력을 흘긋 본 아버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곧 있으면 유진이 네 생일이지.”
···그러고 보니 정말이었다.
내 생일은 7월 12일.
생일이 벌써 다음 주로 다가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음, 이걸 생일선물이라고 하긴 좀 뭣하겠지만.”
아버지의 뜬금없는 말에 눈을 깜박이는데.
두꺼운 파일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건네는 아버지.
“다음 주, 네 생일이 있는 주에 아버지랑 같이 유럽에 가보지 않겠냐.”
“네? 유럽이요?”
···갑자기?
아무리 내 생일이라도 아버지가 둘이서 해외여행을 가자고 하실 분이 아닌데, 생각하던 그때.
서류 맨 앞장에 적힌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트란실바니아대학 - 루마니아 환상문학상 수상작가 김하연 초청강연]
···김하연.
김하연 작가가 루마니아 환상문학상을 수상했다고?
눈을 크게 뜨자, 아버지가 설명했다.
“김하연 작가님이 이번에 루마니아 문화원을 통해 정식 초청을 받았거든.”
김하연 작가는 언제나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장르문학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혔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미국 시장에서 해외 판권 계약을 성사시킨 이후로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오더니.
‘이제 곧 유럽 쪽으로 수출을 앞두고 있다고 했지.’
마침내 지난해, 세계환상문학상 번역 부문 후보작에 오르면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터였다.
그리고 여기에 루마니아환상문학상까지 수상하게 됐으니-
“김하연 작가님 말로, 요즘은 연예인이 다 된 기분이라시더구나.”
“푸흐, 그럴 만하죠.”
루마니아 환상문학상은 루마니아의 종교사학자이자 작가인 미르체아 엘리아데를 기념하여 만든 상.
비록 상금 규모는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문학상을 우리나라 작가가 받게 됐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며.
“그,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대학에서 이 루마니아 환상문학상의 시상식과 김하연 작가의 강연이 진행되는데.”
거기에 아버지네 에이전시도 김하연 작가와 함께 공식 초청받았고, 루마니아 문화원에서 항공권과 체류비를 지원해준다는 것.
“아버지가 여태 뭐 변변하게 생일 선물을 해준 적도 없고, 너만 괜찮다면 표를 끊어서 같이 해외로 나가보는 게 어떨까.”
나도 모르게 두 눈을 반짝였다.
“당연히 가야죠! 김하연 작가님을 직접 뵙고, 강연도 들을 수 있는 기회인데.”
“아하하, 녀석.”
···내가 판타지라는 장르에 눈을 뜨게 해준 작가 아닌가.
전부터도 늘 만나보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던 차에 이런 기회라니!
게다가.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브란 성도 있고.”
“브란 성?”
“아, 중세의 성이나 건축물을 직접 보고 싶었거든요.”
“중세 건축물은 왜.”
···그거야 중세풍 세계관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였지만.
나는 차마 <잊혀진 성자들> 얘기는 꺼내지 못한 채 다른 핑계를 댔다.
“뭐, 새로운 작품 구상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벌써 또 차기작을 구상한다고?”
“네. 새로운 곳에서 영감을 받고, 그걸 또 글에다 쏟아부어야죠.”
태연히 말하는 나를 멍하니 보던 아버지가 이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녀석, 너도 참 쉬지를 않는구나.”
“그게 아마, 권씨 성을 가진 누군가를 닮아서 그럴걸요.”
내 너스레에 피식 웃는 아버지.
···그건 그렇고.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에서 김하연 작가를 만나다니.’
브램 스토커에게 <드라큘라>의 영감을 안겨준 지역에서, 한국 판타지 문학의 거장을 만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