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선물(2)
*
아버지의 서재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고 난 뒤.
우리 두 사람은 빠르게 해외출장, 아니 여행 준비에 착수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내 몫의 비행기표 확보였는데, 다행히 남는 자리가 있어서 힘들지 않게 구하셨단다.
그리고 나는-
‘뭐, 노트북 말고는 특별히 챙길 게 있으려나.’
일주일간의 체류를 위한 옷가지나 세면도구 등 짐을 싸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어느덧, 출국하기 이틀 전.
여느 때처럼 아이오와 쪽 숙소에서 머물던 케빈이 또 한 번 우리 집을 방문했다.
“다들 많이 기다리셨나요, 흐흐!”
다름 아닌 <토끼 남작의 모험>의 최종 오퍼금액을 알려주기 위해서.
물론 직접 안 오고 메일로만 통보해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작가님만 괜찮으시다면, 직접 제가 가서 얼굴 뵙고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케빈은 굉장히 인간미가 있는 성격 같으니.
아무튼.
다 같이 식사를 마친 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에이전트.
“일단, 미국 전역에서 총 30곳 출판사가 오퍼에 참여했습니다.”
그중 마지막까지 응찰한 곳이 세 군데라는 것.
“그 세 곳을 소개드리자면···.”
후보 1. 빅파이브 중의 한 곳인 맥밀란 산하의 아동서 임프린트.
후보 2. 빅파이브는 아니지만, 20위권의 대형 아동서 전문 출판사.
그리고 마지막 후보 3이 바로-
‘마리사네 아버지가 계시는 곳.’
마찬가지로 빅파이브에 속하는, 사이먼앤슈스터의 아동서 임프린트 원더테일이었는데.
마음 한구석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차피 선인세 금액을 비롯해 다른 조건이 비슷하다면, 원더테일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나와 직접 만났을 때, 마리사네 아버지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여기까지는 회사 입장이야.’
‘방금 말한 건 우리 회사의 방침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난 그런 식의 계약을 제안하고 싶진 않아.’
‘아는 사람이 하는 부탁이라 부담스럽겠지만, 정말로 신중하게 고민해보렴.’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상대를 고려할 줄 아는 그런 어른이라면, 아이를 위한 책도 잘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 순간 이어지는 케빈의 목소리.
“그리고, <토끼 남작의 모험> 3권짜리 계약의 최종 선인세 금액은···.”
“오오오!”
네드가 두 눈을 반짝이는 가운데.
“15만 달러입니다.”
···한화로 2억에 상당하는 금액.
케빈의 말에 응접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잠깐만요.”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네드였는데.
“그러니까, 1만5천이 아니고 15만이··· 맞아요? 그, 미스터 케빈. 아무래도··· 다시 금액을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은데.”
상황이 믿기지 않는 나머지.
케빈이 자릿수를 잘못 읽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네드를 보며 케빈이 웃음짓는데.
“15만 달러···? 그러니까, 여섯 자릿수 거래(six-figure deal)라고요? 40페이지 남짓한 분량에, 이제 겨우 첫 작품인 신인한테···.”
새어머니의 반응도 네드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고모! 이게 지금 가능한 거 맞아?”
자신에겐 고모이자 업계 관계자인 케이트에게 던진 네드의 질문에.
한 박자 뒤에야 대답이 나왔다.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데뷔 작가가 여섯 자릿수의 딜을 받는 건, 거의 기사로 나올 정도의 대형 딜이라고 봐야 해. ···혹시 어린이책 시리즈 중에 <윔피키드>라고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역대 아동도서 시리즈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어마어마한 체급을 자랑하는 시리즈.
“그 작가도 출간 전에 받은 선인세 금액은 5만 파운드 정도였어.”
그리고 사실, 그 정도도 데뷔작가에겐 상당한 금액이라는 그녀의 설명에 거친 감탄사를 내뱉는 네드.
“와, 미친.”
그때까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던 나를 녀석이 뒤늦게 돌아봤다.
“잠깐만 유진, 넌 지금 전혀 안 놀란 것 같다?”
“···아, 응.”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놀라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왜냐. 애초 케빈에게 3권짜리 계약을 제안했을 때부터 이 정도 금액이 되지 않을까 예상했었으니까.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라이터스홈에서 3권짜리 계약을 선제시한다는 것부터가, 출판사들에겐 아 이거 대형 물건이구나- 라는 느낌을 줬을 거야.”
라이터스홈은 미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 에이전시.
그런 곳에서 이렇게 과감한 딜을 내건다는 건, 그만큼 이 콘텐츠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게다가 출판물 판권 오퍼는 공개 경쟁 방식이 기본이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예술품 경매처럼, 입찰가를 공개하면서 진행되는 방식이라는 거지.”
“아하.”
그렇다 보니 여러 곳에서 입찰할 경우 자연스레 선인세 경쟁이 치열해지기 마련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네드에게 KDP 저자 사이트를 보여줬다.
<토끼 남작의 모험> 판매 현황을 본 네드의 눈이 동그래진다.
“이건!”
1주 전만 해도 2천 부 정도였던 판매부수가 1만 5천 부로 치솟았다.
입술만 뻐끔거리는 네드를 보며 내가 덧붙였다.
“솔직히 말해, 자가출판으로 만 부를 넘긴다? 이건 기적이라고 봐야 해. 이 판매부수를 직접 보진 못해도, 리뷰와 별점 개수, 판매 순위만 봐도 출판사 입장에선 감이 오겠지.”
···이 책이 엄청난 가능성을 지녔다는 것 말이다.
“게다가 편집자들 입장에서는 수고도 덜 수 있는 상황이야. 왜? 케이트가 이미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하게 책을 제작해놨으니까.”
“아, 우리 고모가 좀 금손이지.”
“···내가 뭘.”
민망해하는 케이트를 보며 한마디했다.
“저는 이 <토끼 남작>이 이 정도 성공을 거둔 건, 1순위가 네드의 그림, 그다음이 케이트의 세련되고 팬시한 디자인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고맙구나, 유진.”
“내가 보기엔 베니한테 동생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던데?”
“푸흐.”
행복하게 웃고 있는 우리들을 보며 케빈이 함박미소를 지었다.
“와, 이거. 서로 이렇게 공을 돌리는 모습이 보기 좋은데요? 근데 말입니다 여러분, 이게 끝이 아니에요.”
그가 꺼내든 또 하나의 자료. 그것은 바로-
“이거··· 영국 출판사죠?
영국의 초대형 출판사, 맥밀란 산하의 임프린트 머핀북스가 제출한 최종 입찰제안서였다.
그리고 거기에 적힌 선인세 금액은-
“자, 잠깐만. 20만 파운드가 도대체 얼마야? 1파운드가 달러로 치면-”
“1.2~1.25달러 정도.”
“···왁, 미친!”
네드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흥분을 주체 못했다.
“으어, 그러면··· 내 몫이 이 중에서 3분의 1 정도 되는 거잖아.”
“그렇지.”
“아니 아니, 나 그럼 뭐부터 질러야 하는 거야, 어? 바로 차부터 뽑을까?”
도저히 앉아 있질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중얼대는 네드를 돌아보았다.
“잠깐, 네드. 흥분하지 말고. ···전에 내가 전에 뭐라고 했었지?”
“인생은 길다.”
“그렇지, 그리고 또?”
“그러니까··· 이제는 백 세 시대니까, 눈앞의 상황에 현혹돼서 플렉스니 뭐니 하며 막 지르기보다···.”
반쯤 이성이 사라진 와중에도, 네드는 내가 지겹도록 했던 얘기를 제 입으로 다시금 늘어놓았다.
“미래를 대비해서 차곡차곡 모아놓고, 사전에 계획을 세워놓고 그에 맞춰서 균형 잡힌 소비를 해야 된다고.”
“좋아, 그리고 또?”
“작가든 만화가든, 창작자는 다 불안정한 직업이니 더더욱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고. ···됐냐?”
“어, 완벽해.”
만족스럽게 웃으며 옆을 돌아보는데.
“···.”
케이트와 케빈이 두 눈을 끔뻑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특히 케이트는-
“유진, 지금부터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아버지 에이전시도 잘되고 있고, 나도 열심히 벌고 있잖니. 유진 네가 바라는 거라면 우리가 최대한 서포트할 테니까, 미리 걱정하지 말고···.”
음, 아무래도 새어머니는 내가 우리 집 경제사정을 걱정해서 저런 얘기를 한 줄 아는 것 같은데.
‘아니 이건 그냥 내 개인적인 성향일 뿐인데.’
그 한가운데서, 전후사정을 다 아는 케빈은 간신히 웃음을 참는 중이었다.
*
그로부터 10분 만에 우리는 최종 선택을 마쳤다.
그것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미스터 케빈.
“좋습니다, 영국 및 영연방 판권은 영국 맥밀란과 진행하는 걸로 하고.”
미국 내 판권의 경우, 후보 세 곳을 두고 마지막까지 조금 고민했지만.
우리는 결국 마리사의 아버지가 속한 원더테일과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딱히 아는 사람이라서라기보단.’
대면 미팅에서 봤던 마리사 아버지의 태도라든가.
그간 원더테일이 자사의 책들을 마케팅해온 방식들.
그리고 미스터 케빈이 직접 정리해온 이 세 출판사의 여러 지표를 비교해볼 때, 원더테일이 최선이라는 데 모두 동의했기 때문.
“좋습니다. 그럼, 원더테일의 대니얼 앤더슨 수석편집자에게 연락해 계약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논의가 끝난 뒤.
캐빈과 케이트가 응접실에 마주 앉아 잠시 출판계 근황을 나누는 동안.
“···난 찬바람 좀 쐬고 올게.”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겠다며 뒷마당으로 나간 네드를 찾아 나섰다.
어디 있지, 대충 둘러보니.
저쪽 구석의 벤치에 앉아 허공에 시선을 둔 녀석이 보였다.
“야, 진정은 좀 됐냐?”
슬쩍 다가가 말을 붙이자,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드는 네드.
녀석은 아직도 방금 전의 선인세 금액이 준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게··· 뭐라고 해야 하지? 숫자가, 상상했던 것보다 너무 커서.”
“···.”
예상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기쁜 일이다.
하지만 그 범위를 너무 아득하게 뛰어넘는 경우, 사람은 오롯한 기쁨을 느끼기보단 충격을 먼저 받기 마련.
지금의 네드 또한 그런 케이스인 듯했다.
“유진, 되게 웃긴 게 뭔지 알아?”
“뭔데.”
“이제 진짜로 큰 돈이 생길 거고, 그래서 그동안 갖고 싶어했던 걸 살 수 있다- 라고 생각하니까··· 뭘 질러야 할지 전혀 모르겠더라.”
“···.”
네드가 지금 하는 저 말.
저건 꽤 오래전, 내가 <잊혀진 성자들>로 초대박이 났을 때 했던 생각이었다.
그 전에는 늘 이놈의 회사 내가 슈퍼볼 당첨만 되면 때려친다든가.
돈만 생기면 당장 해외여행을 떠날 거라든가, 그런 유의 말을 습관처럼 하곤 했는데.
‘막상 정말로 천문학적 금액의 돈이 눈앞에 생기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대혼란에 빠져버렸으니까.
여전히 얼얼해 보이는 네드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 쓸 데야 많잖아.”
“뭐?”
“대학 학자금.”
“···.”
“조셉 아저씨한테 부담 드리기 싫다고, 어떻게든 방법 알아보겠다며. 이번에 코믹스 공모전 나간 것도 사실 장학금 때문 아니야?”
네드가 한순간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씩 웃는다.
“들켰네 흐흐.”
맨날 히어로 얘기나 코믹스 얘기만 하는 네드는 흔히 ‘꿈속에 산다’거나, ‘현실에 발을 붙이지 않는다’는 식으로 평가받곤 하지만.
겉보기에나 그렇지 사실은 굉장히 속이 깊은 녀석이다.
‘조셉 아저씨가 이혼하신 게··· 10년 전쯤이랬나.’
안 좋게 헤어진 탓에 사이는 지금도 좋지 않지만, 그래도 네드를 위해서 아내분과 연락을 이어오고 계신다고 들었다.
네드는 방학 때만 어머니를 보러 가는 상황.
‘게다가, 전에 케이트한테 듣기로 조셉 아저씨네 코믹북스토어 사정이 그리 좋지 않댔지.’
동네서점의 매출이야 사실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 보니 -어떻게든 그림쪽 공부를 더 하고 싶어하는- 네드는 최대한 아버지에게 부담이 안 될 만한 방법을 찾는 중인 듯했다.
“그래, 학자금 그거 괜찮네.”
“거기에 이런 식의 플렉스는 어때.”
“플렉스? 무슨?”
“너희 어머니.”
“···.”
생각도 못한 대답이었는지 눈을 크게 뜨는 네드.
“애틀랜타에 계시다며. ···이제 비행기값 정도야 크게 무리가 안 될 테니 좀 더 자주 보러 가도 되잖아?”
“···완전 좋은 생각이네.”
픽 웃으며 대꾸한 네드가 나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유진.”
“어.”
“고맙다.”
“뭔 소리야, 내가 고맙지.”
방금 그 말은 나의 순전한 진심이었다.
‘지금 저놈은 까맣게 모르고 있지만.’
근 10년 뒤부터 이름을 날리기 시작해, 코믹스 업계에서 손꼽히는 유명 작가가 될 네드 밀러의 초기 작품이 바로 이 <토끼 남작>이 된 셈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병상에 누운 나를, 아델과 함께 마지막까지 꼬박꼬박 찾아와준 친구.’
네드는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할 귀중한 친구 중 한 명이니까.
“진심이라니까? 내가 더 고맙다고.”
내 말에 크크 웃은 네드는 주먹을 내밀었고.
나는 녀석의 주먹을 가볍게 내 주먹으로 쳤다.
뺨을 스치는 밤바람이 기분 좋던 그때, 지잉- 하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내자.
비숍 작가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랜든_비숍 : 2권!]
[랜든_비숍 : 토끼 남작 2권은 언제 나오나]
···아, 읽어보셨나 보네.
비숍 작가님의 호들갑스러운 메시지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얼마 전 나는 비숍 작가님께 <토끼 남작의 모험> 1권을 보내드렸는데.
‘흐흐, 시상식 잘 봤네! 에곤 K는 거의 내 동년배처럼 보이던데?’
‘에이, 그래도 동년배까진 아니죠. 최소 열 살 이상 차이나는-’
‘그건 그렇고, 자네집 귀염둥이는 잘 지내고 있나.’
영상 속의 귀여운 아이를 보니 생각났다며 클로이의 안부를 궁금해하시길래.
생일파티를 위해 만든 책이라며 보내드렸던 것.
···그때만 해도 별 관심 없어 보이던 그가-
[랜든_비숍 : 요즘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 토끼 남작 책을 한 번씩 읽고 있네. 뭔가 심장 건강에 좋은 느낌이랄까]
[랜든_비숍 : 그러니 내가 오래도록 건강하길 바란다면, 하루빨리 2권을 출간하는 게 좋을 것이야]
“···작가님도 참.”
그 협박 섞인 요구를 보며 메시지에 답을 보냈다.
[에곤_K : 하하 작가님 농담도 참]
[에곤_K : 건강 얘기 하시니 말인데, 산책은 꾸준히 하고 계신 거 맞나요?]
그러자 ‘랜든_비숍’ 프로필 옆에 뜨는 ‘···’ 표시.
[에곤_K : 미스터 팀 말로는 작가님이 어제는 영 걸을 기분이 아니었고, 그저께는 발가락이 아파서 못 걷는다 하셨다던데]
[랜든_비숍 : 음 그게, 음···]
···방금 전까진 빛의 속도로 날아오던 답장 속도가 눈에 띄게 늦어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뒤인 7월 10일.
“잘 다녀와요~ 유진, 즐겁게 보내다 오렴.”
“아빠아, 오빠아~ 빠빠이~”
나와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클로이의 배웅을 받으며 시카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아버지는 KMC에이전시 출장차, 나는-
‘<잊혀진 성자들>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을 써보는 건 어때?’
···에곤 K의 신작 장편소설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