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슬(3)
*
브란 성을 다녀온 그날 저녁.
나는 내내 호텔 객실의 책상 앞에 붙어 있다시피했다.
···브란 성의 풍경에서 받은 영감을 고스란히 화면상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쨍하니 기분 좋은 햇살이 객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가운데.
타닥, 타다다닥-
나는 창 너머 인형 마을처럼 아기자기한 브란 마을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타이핑을 시작했다.
손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움직이는 동안, 내 머릿속의 뇌 또한 쉴새없이 돌아간다.
‘제목은, <캐슬>.’
소설을 쓰기 앞서 제목이 먼저 결정되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
이렇게 제목이 먼저 나오는 경우, 십중팔구는 집필 또한 순조롭게 진행되기 마련이다.
‘그 말은 곧, 소설의 주요 컨셉이 확정된 상태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니까.’
그리고 이 <캐슬>의 주요 줄거리는, 과거 병상에 누워 꼼짝 못 하던 시절에 떠올린 것인데.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당시의 나와 꽤 비슷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내가, 온종일 누워서 머릿속으로 공상하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사지가 온전하고 어디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그가 아는 세상이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그 한정된 공간이 전부이지.’
폐쇄된 곳에서 지내던 소년이 진실을 차츰 알게 되고, 거기서 탈출하고자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본질인데-
‘서부극의 무대를 우주로 옮겨본다면요?’
김하연 작가의 충고를 떠올리며, 나는 오랫동안 구상해온 그 이야기를 브란 성을 닮은 중세풍의 으스스한 고성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본질은 동일하지만, 그 외피(外皮)는 다르게.’
<캐슬>의 주민들은 이 높은 성벽 안쪽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성 안에서만 지내왔다.
그중 대부분이 제대로 된 학습도, 글자를 읽을 기회도 없이 온종일 일하고 먹고 자는···.
[가축과 다름 없는 생활을 하는 농노 계급]
그래, 그렇지.
나는 주인공 역시 농노 계급으로 설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주인공이 아는 세상 역시, 이 고성이 전부.’
높디높은 고성의 벽 너머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뿐더러, 거기에 뭔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조차 아예 해본 적이 없는 것.
주민 대부분은 애초 성 밖을 향한 열망도, 호기심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주인공만은 성벽 너머의 세계를 궁금해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할 것은-
[-주인공은 어째서 다른 농노들과 다른가?]
일단, 성 안의 주민들이 성 밖의 세계를 상상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부모가 아이에게, 그 아이가 또 자신의 아이에게 어떤 사실을 전달했으니까.
그것은 바로-
“일종의 괴물.”
그 누구도 넘어가본 적 없는 성벽 너머에는 괴물이 산다는 것.
그 이상은 알아서도 안 되고, 성 밖의 세계를 절대로 궁금해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성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하는 순간, ‘그 너머에 자리한 무언가’에게 홀려서 산 채로 잡아먹힌다]
···적어도 그것이 주민 모두가 믿고 있는 진실이다.
“말하자면 성 밖의 세계는 일종의 금기인 셈이지.”
하지만 주인공은 그 같은 금기를 잘 모른다.
아니, 머리로는 알지만 주민들처럼 뼛속 깊이 새겨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주인공-‘금기’를 되새겨줄 부모가 없음]
타다닥, 다다닥.
그 사실은 작품 초반부에만 해도 일종의 ‘결함’처럼 등장하지만.
결국은 주인공을 진정한 영웅으로 만들어주는 요소 중 하나가 되는 셈.
···그리고 주인공 소년이 금기를 무시하고 던지는 질문은 바로-
[-그렇다면 고성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
괴물이 아닌, 또 다른···]
너무 화면에만 신경을 집중했어서 그런 걸까.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는 기분에 나는 쓰던 손을 멈추고 잠시 호흡을 골랐다.
조금만 휴식을 취하다 쓸까, 생각하며 옆을 돌아본 순간.
어느샌가 호텔 객실에 들어와 있는 아버지를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 언제 오셨어요?”
“언제 오긴, 5분도 더 됐다. 유진이 네가 화면 속에 빠져 들어가는 줄 알았어, 하하.”
“아···.”
현실로 돌아온 듯한 내 표정을 보고 헛웃음을 짓는 아버지.
“안 그래도 신작 구상하겠다고 벼르더니, 벌써 이렇게 영감이 찾아온 거냐?”
“하하, 뭐 운이 좋았죠.”
사실, 영감이 ‘찾아왔다’기보다는 내가 멱살을 잡고 끌어온 것에 가까웠지만.
내 대답에 아버지가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그래도 그런 모습을 보니까 좀 반가운걸.”
“반갑다고요?”
“그냥, 나도 에곤 K의 독자 중 한 명이기도 하지 않냐.”
혹여라도 부담을 줄까 봐 말은 잘 안 했지만-
“나도 은근히 차기작은 어떤 내용일지 정말로 궁금했거든.”
“···.”
아버지의 보기 드물게 솔직한 말에 잠시 두 눈을 껌벅거리다가.
이내 활짝 미소를 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가 내 글을 좋아하고 나의 새 글을 손꼽아 기다리는 독자라는 것.’
···그것만큼 기쁘고 보람찬 일도 없을 테니까.
*
“···자, 그럼 다시 집필에 집중하려므나.”
“하하, 네.”
부자 간의 짤막한 대화가 기분 좋게 끝난 후.
유진의 시선은 다시금 노트북 화면으로 향했다.
‘신작의 제목이··· <캐슬>이라.”
유진이 신작의 대략적인 얼개를 짜는 동안,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객실 안에 울려퍼졌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계에 이미 몰입한 듯, 아들의 두 눈이 생동감으로 빛나고 있다.
타닥, 타다닥—
손가락은 아주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기를 반복하며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는 가운데.
“···.”
자신 또한 바쁜 일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돌아와 지친 몸으로 소파에 걸터앉은 권상준은-
‘그저··· 놀랍단 말이지.’
유진이 그렇게 집필하는 장면을 경외심 가득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저 작은 머릿속에 마르지 않는 창작의 샘이라도 있는 것일까.
두 손이 쉴새 없이 움직이며 화면 위로 새로운 단어를 쏟아내는 장면에는 사람을 매혹시키는 데가 있었다.
화가가 근사한 그림을 그리거나, 발레리나가 유연하게 턴을 도는 장면처럼.
‘어쩌면 저런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천재의 모습이 아닐까.’
부모는 흔히 자식의 재능을 과장되게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 아들 유진을 향해 자신이 내린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김하연 작가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지.’
오늘 마지막 공식일정을 마친 뒤 그녀를 호텔로 데려다주는 길에 들은 얘기에 따르면-
‘글쎄요, 대표님. 아드님은··· 그냥 영특한 수준을 넘어선 정도라고 봐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같이 브란 성을 돌아보러 가는 길에 유진과 단둘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는데.
그때부터도 이미, 자신이 조언을 주기보단 동료 작가와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느낌이었다고.
‘그게, 작은 힌트 하나에도 곧바로 영감을 떠올리는 작가들이 있잖아요? ···브란 성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유진 군이 제게 신작 아이디어라며 들려주는데.’
‘···.’
‘제가 대수롭지 않게 던져준 한마디를 활용해, 금세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 느낌이더군요.’
감탄을 금치 못하던 김하연의 얼굴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한 가운데.
권상준은 가슴 한구석에 아들 유진을 향한 자부심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아버지로서, 아이의 재능을 끝까지 지원하고 지지해주는 것이 나의 의무이겠지.’
아들 유진의 첫 번째 옹호자이자 보호자인 동시에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주자.
권상준은 -유진이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와중- 그 같은 다짐을 마음속으로 곱씹었다.
*
일주일의 휴가는 생각보다 굉장히 빨리 지나갔다.
아이오와시티에서 루마니아로 향할 때처럼, 똑같이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집으로 돌아오고 나니 벌써 7월 셋째주.
‘막상 루마니아에서 체류한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은 것 같은데.’
가고 오는 데에만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 같다.
그럼에도 이번 여행이 유난히 뜻깊게 느껴지는 것은-
‘김하연 작가님!’
판타지를 향한 나의 사랑을 일깨워준 작가님을 직접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눴을 뿐더러.
브란 성에서 떠올린 영감으로 <캐슬>의 초기 구상을 완성했으니.
‘···최고로 만족스러운 생일 선물이었어요, 아버지.’
그런 내 감상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입 밖에 내었더니.
아버지는 무척이나 뿌듯해했다.
‘하하, 그것 참 보람이 느껴지는 말이로구나.’
···그리고 마침내 귀국하고 나니,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의 첫 달 인세가 입금돼 있었다.
“유진아, SFF프레스에서 정산금을 입금했다고 메일을 보냈구나.”
아버지의 말에 20만 달러가 들어왔겠거니 생각하며 뱅킹앱을 확인하자.
총 70만 달러에 이르는 금액이 들어온 것이 아닌가.
“···!”
그리고 이내, 입금 상세 내역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외 선인세도 금방 입금이 됐네.”
여섯 자릿수의 선인세 딜에 성공한 나의 에이전트에 힘입은 덕분.
그 와중에, 차를 산 것 빼고는 쓴 돈이 그리 많지가 않다 보니 통장 속 금액은 점점 더 증식하고 있었다.
“···.”
그간의 모바일 뱅킹 내역을 잠시 살펴보던 나는, 짧은 고민 끝에 아버지의 서재로 향했고-
아버지는 대번에 내 제안을 거절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 마라, 유진아. 그건 니 돈이지, 우리 가족 돈이 아냐.”
“하지만 아버지, 이번에 새 작품들 계약하신다고 했잖아요.”
최근 한국 작품들이 세계시장에서 인정받게 되면서, 선인세 경쟁에 부쩍 불이 붙었고.
“가능성 있는 작품을 선점하려면 투자할 자본이 필요하니-”
“유진아.”
내 말을 단칼에 자르고 들어오는 아버지.
“네 마음이 뭔지는 잘 안다. 아버지가 여태 고생해가며 어떻게든 계약을 성사시켜보려고 애쓰는 모습에 때론 걱정도 되고, 답답해 보이기도 하겠지. ···그렇지만.”
아버지는 처음 보는 단호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건, 오롯이 내 힘으로 해야 하는 부분이야.”
“···.”
“물론 실제로 그런 부모들도 있지.”
자신의 자녀가 놀라운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 것.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임을 모르고, 어느 순간부터 어린 자녀의 재능에 기대어 사는 걸 당연시하는 부모들 말이다.
“나는, 그 부모들이 처음부터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조금씩 그런 삶에 익숙해졌을 것이고 나중에는-
“아이가 힘겹게 버는 돈을, 제 돈으로 착각하는 인간이 되었겠지. ···나는 그런 가능성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진아.”
내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통장 안에 든 돈은, 유진이 네 돈이야. 네가 스스로 너의 재능으로 번 돈이니 이 아버지와는 상관이 없는 거다.”
“···네.”
한 박자 후에야 그렇게 대답하자, 그제야 비로소 아버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돈을 어떻게 쓸지는 너의 자유이지만, 가급적 건실하게 쓰길 바라마. 뭐 내가 아는 유진이 너라면, 알아서 워낙 잘하겠지만.”
더불어.
아버지의 KMC 에이전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으며, 케이트의 서점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클로이 학자금이라든가, 그 외 모든 생활비는 나와 케이트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거라.”
“···든든하네요.”
“그럼 그럼. 우린 네가 네 힘으로 돈을 벌고, 대학부터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만으로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일이라 생각하니···.”
그런 얘기는 앞으로 두 번 다시 꺼내지 말라는, 아버지의 웃음기 섞인 말.
‘···어째서일까.’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고, 목이 살짝 메여오는 와중에도.
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쩔 수가 없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돌리던 그때, 아버지의 책상 위에 놓인 몇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습관이 나를 바꾼다>, <생산성을 높이는 비밀>, <인생 후반부에 명심해야 하는 것들>···.
“어, 아버지가 자기계발서도 읽으시는 줄 몰랐는데.”
농담기 섞인 말에 아버지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낸다.
“그래, 내가 확실히 예전엔 문학 책과 인문서밖엔 안 봤지. ···이런 자기계발서를 조금 얕잡아보던 시절도 있었는데.”
확실히, 문학이나 출판계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엔 그런 분위기가 있긴 하다.
당장 나도 과거엔 그랬고.
“하지만··· 나이를 먹다 보니, 이런 책이 필요한 시점이 오더구나.”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과 본격적으로 맞서서 힘겨루기를 하는 시점 말이다.
나도 어릴 때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우리 집에 경제적으로 별다른 문제가 없을 때만 해도 ‘그런 책이 대체 왜 필요한데?’라고 되묻곤 했으니까.
그렇지만-
‘대학교 2학년 때였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후, 나는 혼자서 필사적이었던 새어머니를 돕고자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내 삶은, 부모님이 온 힘을 들여 마련해준 튜토리얼이었다는 것을.
본 게임은 진정한 독립 이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이다.
“···아버지.”
“응?”
회귀 전의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토록 원망하고 미워했던 그가 우리 가족에게는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였다는 걸.
그리고 지금 나는-
“감사해요.”
“갑자기 무슨.”
“그냥, 생일선물도 그렇고요.”
“녀석, 싱겁기는.”
그 방파제가 여전히 내 눈앞에 건재하는 모습에, 매순간 감사와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