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출판계의 신데렐라(1)
*
나를 기다리는 반가운 소식은 인세 입금뿐이 아니었다.
일단은 영화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포스트 프로덕션이 완료되었는데.
[막성스_라미 : 에곤 작가님! 드디어! 드디어 후작업이 끝나서 연락드립니다 :D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림이 나와서···]
흥분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막성스 감독의 메시지.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그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퀄리티가 상당하지 않을까.
두 달 뒤, 그러니까 9월 말에 시사회 일정이 잡혔다는 소식에-
“으, 얼른 보고 싶다.”
벌써부터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뭐, 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회귀 전 <잊혀진 성자들>의 영화 버전은 망작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때는 그냥 미련을 버렸지.’
그에 반해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는 진행 과정 하나 하나를 내가 속속들이 알고 있을 뿐더러.
“···막성스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눠서 그런가, 더 기대가 커지네.”
얼른 시사회에 가서 완성본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그것만큼이나 반가운 소식을 꼽아보자면-
“유우우쥐이이인—! 토끼 남작! 토끼 남작 정식 출간본이—!”
증정본을 받자마자 신이 나서 우리 집으로 달려온 네드의 말마따나, 원더테일 출판사 버전의 <토끼 남작의 모험> 1권이 정식 출간되었다는 것.
“유쥐인! 네드! 너희 이러다 진짜 슈퍼 베스트셀러 작가 되는 거 아냐?”
당연한 듯이 우리 집에 모인 아델의 말에 으흐흐 웃는 네드.
“아···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유진, 얼른 얼른. 아마존 접속해보자.”
2층의 내 방 안, 케이트가 가져다주신 과자와 견과류 따위를 오독오독 씹어먹으며-
“···와, 잠깐만.”
“이거 이거, 내 눈이 이상한 거 아닌 거 맞지?”
우리는 아마존 베스트셀러 페이지를 보며 연달아 탄성을 질러댔다.
“전체 순위 5위! 어린이책 부문은··· 1위야 1위!”
“와, 미쳤다···. 출간 이틀 만에 5위라고?”
“···.”
순위가 좋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건 경이로운 성적이 분명했다.
멍하니 고개만 절레절레 젓다가 문득 드는 생각.
‘···이거, 에곤 K로도 달성해보지 못한 순위잖아?’
그 사실이 어쩐지 재밌어 픽 웃음이 나오는 가운데.
‘오빠 오빠아~~ 너무 신나아~ 칭구들이 다 토끼 남작 들고 다닌다?’
클로이가 조잘거리던 얘기가 퍼뜩 떠올라 네드를 돌아보았다.
“근데 너, 진짜 9월까지 2권 삽화 다 그릴 수 있어? 분량이 상당한데.”
내 물음에 씩 웃는 네드.
“당연한 거 아니냐? 이미 절반은 그렸는데.”
“···진짜?”
“미친, 자본의 힘이 위대하긴 하네.”
나와 아델의 반응에 네드가 낄낄대며 좋아한다.
“돈 한 푼 안 나오는 클럽회지도 밤새서 그리는데, <토끼 남작>이야 말할 것도 없지. 근데 평소보단 속도가 좀 느리긴 해. ···잘 그려야 한다, 그런 생각 때문인가.”
“그거야 이해하지만, 그래도 절대 부담갖지 마라.”
나는 미소 띤 얼굴로 덧붙였다.
“아이들은 너의 그 에너지 넘치는 그림을 좋아하는 거니까.”
요컨대 너무 정제하려고 애쓰지 말라- 라는 내 조언을 네드는 곧바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오키도키. 아 맞다, 그, 우리 자가출판 버전은 절판한 거지?”
“아, 어.”
그게 바로 지난주의 일이었는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KDP의 판매현황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헛! 잠깐만, 이거, 어떻게···.”
“2만? 2만 부가 넘었다고?”
···<토끼 남작의 모험> 정식본이 출간되기 직전, 이 자가출판 버전의 판매가 치솟았다는 거야말로 재미난 일이라고 할까.
“진짜 어마어마하다···.”
“맞다 유쥔! 나 원더테일이랑 토끼남작 OST 계약 맺은 거 알지?”
“아, 어. 미스터 케빈한테 들었지.”
나는 흥분으로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아델을 보며 씩 웃었다.
“완전 축하해, 아델.”
“다 니 덕분임.”
“내가 무슨, 니 실력 덕분이지.”
“···흐으.”
나중에 몇 배로 갚겠다는 그녀의 말에 그저 웃기만 하는데.
지잉- 진동하는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마커스 스톤 작가가 메시지를 보낸 참이었다.
[마커스_스톤 : 에곤 작가님 잘 지내시죠? 다름이 아니고, 책을 한 권 보내드리고 싶어서···]
책을 보내준다고?
···설마, 그 사이에 신간이 나온 건 아닐 테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마커스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마커스_스톤 : 작가님께 선물하고 싶은 책을 발견해서요, 하하. 미스터 클레그에게 전달 부탁하겠습니다!]
[에곤_K : 하하 이거 말만 들어도 감사하군요. 근데 혹시 무슨 책일까요]
내 물음에 마커스의 답이 왔다.
[마커스_스톤 : <토끼 남작의 모험>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요즘 화제인 동화책인데, 작가님 댁의 귀염둥이에게 선물하고 싶어서···]
“···어.”
당황한 탓에 육성으로 튀어나온 소리에, 네드와 아델이 나를 돌아보았고.
“왜 그래?”
“음, 그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답을 보냈다.
[에곤_K : 아! 그 책 저희 집에도 있습니다.]
[에곤_K : 안 그래도 참 좋아하던데, 이렇게 마음 써주셔서 감사하군요]
그러자 신이 나 <토끼 남작>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는 마커스 작가.
[마커스_스톤 : 와, 이미 갖고 계셨군요. 사실 저는 동화책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편인데···]
그렇게 잠시 메시지로 대화를 나눈 뒤.
“토끼 남작이··· 진짜 베스트셀러가 맞긴 맞는 것 같아.”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두 친구를 돌아보며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 싱거운 소리는 대체 뭐야?”
“그래 그래, 베스트셀러가 아님 대체 뭔데.”
어이없어하던 아델과 네드는-
“···와우.”
“크으.”
내 설명을 듣고 나서야 탄성을 내뱉었다.
*
<토끼 남작의 모험> 1권이 정식 출간된 지 2주 정도 지났을 즈음.
3차까지 이루어지는 스콜라스틱 공모전 심사가 드디어 끝났다.
그리고 이 최종심까지 참여한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아이오와대학의 해럴드 그린 교수.
그는 이 아이오와시티의 어느 명물 식당에서 오랜 친구와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진짜로 여기까지 온 게 그 권유진이라는 학생 때문이다, 이 말이야?”
남들보다 배는 넓은 어깨에 두꺼운 몸통.
스티븐 시걸을 연상시키는 부리부리한 눈매와 무시무시한 눈빛.
···영문학 교수라기보단 은퇴한 액션 배우처럼 보이는 스탠리 미첼이 펄쩍 뛰었다.
“아니 결론이 왜 그렇게 되나! 그냥, 자네를 보러 오는 김에 그 학생 생각이 난 거다, 이 말이지!”
“···.”
해럴드는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제 친우 스탠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저런 외양과는 달리 엄청난 문학적 열정의 소유자이며.
섬세한 감성과,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눈물샘으로도 유명한 친구가 아닌가.
“푸흐, 그래. 그런 걸로 치자고.”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말에 해럴드가 웃음을 터뜨리자, 겸연쩍어하며 옛날 얘기를 꺼내는 스탠리.
“그래도, 여기 오니 우리 대학 시절이 생각나는구만.”
스탠리 또한 중서부 출신으로, 아이오와대학이 그의 모교였다.
해럴드와는 대학 동창이자 함께 문학의 길을 걷던 사이로, 한 명은 시카고대 교수, 또 한 명은 모교의 문예창작 교수로 재직하는 중.
···대학 때부터 영문학 교수가 되고 싶어했던 스탠리와 달리, 해럴드는 원래 소설가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소설만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 방법을 찾을 수 없던 터-
‘해럴드 자네, 강의를 하나 맡아보지 않겠나?’
자신이 누군가를 문학의 세계로 이끌고, 그의 숨겨진 재능을 이끌어내는 데 상당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래, 내가 여기 대학 정교수가 되다니, 사람 일은 참 알 수 없는 거란 말이지.”
그리고 그가 여태 키워낸 수많은 제자 중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걷는 제자 또한 있었는데.
“레너드 그 친구는 잘 있으려나.”
“아, 자네 수제자 말이지.”
“그래, 듣기로는 어느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분명 지난번에 만났을 때 레너드가 얘기해줬는데 기억이 안 나네- 해럴드가 중얼거리는데.
“설마, 힐크레스트의 교사는 아니겠지?”
두 눈을 빛내는 스탠리를 보며 해럴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모르는 일이지.’
왜냐하면 아이오와대학에 오는 학생 대부분이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경우 파격적인 학비 혜택을 받는 만큼- 이 아이오와주 거주자이고.
레너드 또한 그랬으니 이 동네에서 학교 선생을 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나중에 여유될 때 제자 녀석에게 연락이나 해볼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해럴드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스탠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 자네는 아주 얼굴에 여유가 넘치는구만.”
“뭐가.”
“아니 아니, 자네도 이 유진 학생 쟁탈전에 참가하겠다며?”
“···.”
아무리 그래도 쟁탈전이라는 표현은 좀- 이라고 생각하는데.
“뭐, 그거야 상관없어. 근데, 내 눈에는 자네가 ‘아무리 그래도 이곳 학생이니까 아이오와대학에 올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딱 보인단 말이지.”
“어···.”
사실, 해럴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물론 를 다 읽었고, 그 놀라운 작품에 매혹되었으며, 그것을 쓴 학생이 아이오와대학에 왔으면 하는 마음에 파격적인 입학 제의를 하려고 마음을 굳혔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닐세, 스탠리. 내가 하는 건 어디까지나 제의일 뿐이고, 그다음은 그 학생이 선택할 일이지.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들어올 제안에 머리가 복잡할 텐데-”
“하, 내가 자네의 그 고고한 성격이야 잘 알지. 하지만!”
가슴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부라리는 스탠리.
“그런 식으로 해서는 곤란하다고. ···제일 먼저 나서는 자가 뛰어난 학생을 데려오는 법이다, 라는 말 못 들어봤나?”
···처음 들어보는데.
해럴드가 눈만 멀뚱멀뚱 뜨자 스탠리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요는, 그렇게 맘 편히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지. 그, 예일대 극작과의 루먼 교수 알지?”
“아아, 알지.”
로렌 루먼.
여태 어느 학생의 작품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녀가 2차 심사 때 유진을 엄청나게 눈여겨봤다는 것은 모두들 주지하고 있는 사실.
다른 곳도 아닌, 예일대 극작과라면 -스탠리가 늘 말하던 대로- 너무 강력한 상대이긴 하지만···.
“뭐 어떡해, 학생이 그쪽으로 가겠다고 하면 가는 거지.”
“아니, 해리, 자네 진짜 이럴 거야? 학교에서도 이렇게 태만하게 구는 거 알고 있나?”
온몸으로 열정을 뿜어내는 스탠리를 보며 그는 풋 웃고 말았다.
“하하 그래, 내가 자네 말대로 맘 편히 생각하는 게 있나 보군.”
“흥, 알았으면 자네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컬럼비아대의 홉스 교수 아나? 그이는 아예···.”
스탠리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일화들을 즐겁게 듣다 보니 어느새 식사가 끝난 가운데.
만족스럽게 식당을 나와 거리를 거닐다, 신문 가판대를 지나치던 두 사람의 눈이 지역 일간지 <더가제트>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헤드라인에.
[<토끼 남작의 모험>, 자가출판계의 새로운 신데렐라가 되다!]
흥미가 생긴 해럴드는 곧바로 신문을 사서 기사를 읽기 시작했고.
“아, 나도 그 제목 들어본 것 같군. 최근에 문학 에이전시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던 것 같은데, 여섯 자릿수 딜이랬나?”
“그러게, 아마존 순위가··· 아동서 부문 1위인데?”
뒤늦게 찾아보고 깜짝 놀란 해럴드의 말에, 스탠리의 눈 또한 휘둥그레졌다.
“어디 어디, 나도 신문 좀 줘봐!”
기사의 내용은 간단했다.
···10대 청소년들이 어린 동생의 생일 선물로 어머니와 함께 만든 동화책이, 대단한 화제를 일으키며 베스트셀러 1위로 등극했으며.
“원래는 이 아이오와시티의 어느 자가 출판업체에서 제작됐던 거라고···.”
중얼중얼거리던 스탠리는 저 또한 핸드폰으로 ‘베니 르 레푸스’를 검색해보았고-
“오, 라이터스홈 소속이구만.”
“라이터스홈, 거긴 유명하지.”
“그래 그래, 에곤 K인가, 엄청난 SF 신예작가가 있는 에이전시 아닌가? 여기서 베니 르 레푸스랑도 계약했나 본데···.”
노안 때문에 미간을 좁히며 ‘베니 르 레푸스’의 링크를 누르자, 작가 소개 페이지가 떴다.
[*베니 르 레푸스는 각각 글과 그림, 편집 및 디자인을 맡은 유진 권, 네드 밀러, 케이트 권의 공동 필명···]
“어···.”
열심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스탠리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자네 왜 갑자기 말이 없나-”
“해리, 이것 좀 봐. 이거 이거, 유진 권···이라고 쓰인 거 맞지? 어? 내 눈이 틀린 거 아니지?”
“···!”
해럴드 또한 깜짝 놀란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 둘이···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아시아인 비율이 지극히 낮은 이 도시에서 권유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이 두 명이나 될 확률은-
“아무래도 이 둘이··· 동일인 같지?”
헤럴드가 생각만 하고 있던 말이, 스탠리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아, 어, 그런 것 같은데.”
“정말로··· 탐나는구만.”
옆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기운에 그쪽을 돌아본 순간.
‘···지금 설마, 입맛을 다신 거야?’
스탠리 미첼의 무시무시한 표정을 본 헤럴드가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