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74화 (74/126)

첫 문장(1)

*

한편, 아이오와시티의 중심가에 위치한 어느 고급스러운 가정집 안.

“로완, 이 작품을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겠니?”

···유진의 문예창작클럽 친구, 로완은 이 시간이 제일 싫었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부모에게 글을 검사받는 시간 말이다.

“그래, 다양한 시도를 하는 건 좋지만 아버지가 보기에도 이번 작품은 그다지 가능성이 없어.”

“소설가에게 주관은 중요하지만, 주관이 아집이 돼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로완은 말하자면, 일종의 문학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그의 조부와 증조부는 유명한 문필가로 이름을 날렸고, 친척 중 꽤 많은 이들이 문학이나 출판업에 종사했으며 그의 부모 또한 이쪽 업계에 정통했다.

“지난주 <리터스클럽>에 나온 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로완 네가 쓴 이 <다중세계에서 들려온 멜로디>는 그 어느 장르로도 구분하기가 어려운···.”

로완의 아버지 또한 젊은 시절 잠깐 소설을 썼다가, 현재는 문예창작 전업 강사로 일하고 있으며.

“로완, 모름지기 소설이란 작가의 욕망만으로 끌고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내가 누누이 얘기했지만···.”

로완의 어머니 또한 시인을 지망했으나, 그 꿈을 접고 문학지 기자로 일한 케이스였다.

그래서일까, 이 둘은 본인들이 이루지 못한 문인의 꿈을 로완이 대신 이루길 바랐다.

“다 알아요, 그냥···.”

로완은 잠시 입술을 깨물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가 아직 미련이 남아서, 조금만 더 붙잡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신경쓰지 마시고-”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겠냐.”

아들의 말을 단칼에 자르고 들어오는 그의 아버지.

“물론, 네가 해야 할 것을 다 하면서 그러고 있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넌 이번 주에 써야 할 분량도 제대로 못 써냈잖아?”

“···.”

“지난번에 내가 골라준 공모전들, 거기엔 다 접수했고?”

“···네.”

마치 숙제 검사하듯, 로완은 일주일에 정해진 분량을 써낸 뒤 그것을 검사받아야 했다.

꾸준히 글을 쓰는 것만이 좋은 작가가 되는 지름길이라는 부모의 믿음 때문이었다.

“쯧, 애초 그 스콜라스틱 공모전에 붙었으면 이런 잡다한 공모전들에는 관심을 안 써도 됐을 텐데···.”

아버지의 중얼거림에 로완은 쓰게 웃었다.

스콜라스틱 공모전.

유진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응모했지만, 1차에서 떨어진 터였으니까.

‘유진은··· 당연히 붙었겠지.’

후우, 가볍게 심호흡한 소년이 용기를 내 말했다.

“그, 아버지 어머니. 그것 말고도 다른 것들도 준비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시고-”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로완.”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의 어머니.

“늘 그렇듯, 세상은 과정이 아닌 결과만을 알아준단다. 준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수상이나 출간을 해야지.”

“···.”

“네가 출판 에이전트랑 계약 맺었다는 거 다들 알고 있는데, 그 뒤로 제대로 된 책이 나오지 않으면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니.”

그런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어머니나 남의 시선을 신경 쓰겠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로완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는 언짢아하는 얼굴로 아내의 말을 받았다.

“그래, 남들 눈치 안 보고 네 맘대로 쓸 거면 소설은 네 취미 생활로 삼아라.”

“···.”

“그게 아니고 여기 아이오와대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겠다? 그러면 적어도 소설가라고 하기에 부끄럽지 않을 그런 글을 쓰란 말이야.”

남편의 직설적인 말에 로완의 어머니는 화제를 돌렸다.

“···어휴, 너희 아버지도 참. 맞다, 로완. 이것 한 번 볼래? 이번에 <더가제트>지에 실린 기사인데···.”

그래 봤자 이 고장을 빛낸, 유명한 베스트셀러에 관한 기사겠지- 라고 생각하는 한편.

로완은 문득 유진의 일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동화책 만든다는 건 어떻게 됐을까.’

···동생을 위해 오빠와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주는 책.

이야기만 들어도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 책 이야기를 할 때 유진이 정말 행복해 보였던 게 기억난다.

‘동생이 선물받고 엄청 좋아했겠지. 나도 그렇게 누군가를 위해서 즐겁게 글을 써보고 싶은데···.’

로완이 멍하니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완, 로완. 내 말 듣고 있니?”

“내가 그랬잖아, 소피아. 요즘 저 녀석 나사가 하나 빠져 있다고.”

“···.”

아버지의 차가운 눈빛과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르는 듯 했지만.

로완은 애써 무표정으로 그것을 감추며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로완, 방금 아동서 시장도 괜찮겠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단다.”

“아동서요···?”

“이것 보렴.”

그것은 지역신문에 실린 기사였다.

[<토끼 남작의 모험>, 여섯 자릿수로 계약된 자가출판계의 또 다른 신데렐라 스토리!]

그 같은 제목 아래, 이 책이 어떤 계기로 자가출판이 되었고, 어떻게 정식 출간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 설명돼 있는데···.

‘잠깐만, 토끼 남작이라면··· 유진이 말했던 제목인데?’

잊었던 것을 떠올린 로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로완, 왜 그러니? 아는 책이야?”

“저, 이만··· 가볼게요.”

“잠깐만! 아직 내 말 안 끝났-”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고요.”

그의 말을 단칼에 자르는 아들의 모습에 아버지가 깜짝 놀란 것도 신경 쓰지 않으며, 로완은 그대로 서재에서 달려나왔다.

‘그때, 유진이 분명 그런 말을 했었지.’

···자가출판으로도 베스트셀러가 된 사례는 얼마든 있다고.

그리고 그것을 바로, 유진 자신이 몸소 입증해낸 것이 아닌가.

로완은 그 사실을 부러워한다거나 질투한다기보다는-

‘나도 도전해보고 싶어.’

구체적이고 선명한 희망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

네드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불과 이틀 뒤.

지금 우리는 아이오와시티의 랜드마크라 불리는 대형독립서점 ‘프레리라이트’에 와 있었다.

“유진, 넌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냐.”

오자마자 점장 마크 아저씨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캐슬>의 집필에 자료로 쓸 책들을 잔뜩 사서 2층의 카페로 올라온 참.

“딱히 침착한 건 아닌데?”

“흐, 거울이나 보고 말하든가. 아 맞다, 삽화 최종수정까지 마쳐서 고모한테 보내놨는데···.”

안 그래도 어제 오후, 케이트가 내내 작업용 PC 앞에 앉아서 열심히 디자인 작업을 하던 것이 떠오른다.

‘음, 2권에선 더 힘을 줘야 할 것 같은데···.’

1권이 생각지도 못하게 대성공했기 때문일까.

새어머니는 지난번보다 더 대단한 걸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는 듯했다.

‘그냥, 1권에서 했던 대로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그럴까?’

‘그 편안하고 소박한, 사랑스러운 분위기의 디자인에 어린이 독자들이 호감을 느낀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면서 덧붙이길-

‘그때처럼··· 우리 클로이한테 보여주기 위한 거다, 라는 마음으로 작업해보시는 건 어때요?’

‘···.’

그 말에 케이트는 두 눈을 빛내더니, 이내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 말이 정답인 것 같구나, 유진.’

···그 표정을 보니 안심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원고는 편집부에서 교정 중이라고 했나?”

네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동서의 경우, 아동서 전문 담당자가 교정하는 것이 중요하지.’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는 어휘 선택, 운율을 살리는 문장 수정 등, 일반도서와 달리 아동도서에 특화된 교정방식이 있기 때문.

‘1권에서야 아쉬운 대로 케이트가 교정해줬지만.’

본문 교정은 전문 분야가 아니기도 하고, 애초 그녀의 역할은 이 책의 표지 및 내지의 편집 디자인이니 말이다.

그렇다 보니, 이번 <토끼 남작> 2권의 대략적인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대니얼 담당자의 1교, 나의 저자교, 담당자의 2교.

거기까지 마친 버전을 케이트에게 보내면 케이트는 네드의 삽화와 원고를 함께 앉혀서 본문 편집을 완료하고-

‘마지막 3교가 진행되고 나면.’

···최종의 최종까지 수정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가제본 제작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

“그건 그렇고, <토끼 남작> 순위 여기저기서 계속 올라가는 거 알아?”

네드는 아마존을 비롯, 각종 서점 사이트에 접속해 순위를 확인하는 게 하루 일과가 된 모양이었다.

“그것뿐이 아냐, 기사도 전부 다 스크랩하고 있는데··· 아 맞다, 2권은 10월쯤에 출간된댔지?”

“어어, 듣기로는 그때 영국판도 출간되는 것 같던데.”

영국 출판사와 함께 합동으로 마케팅 이벤트를 준비 중인 듯하다- 라는 말에 네드가 크으, 소리를 냈다.

“으어, 상상만 해도 죽여주네. ···그건 그렇고 유진, 부탁하고 싶다는 게 뭐냐. 이거, 너 오늘 여기서 다 산 거 맞지?”

이제야 좀 제정신을 차린 녀석이 테이블에 높게 쌓아놓은 중세사와 중세 건축 서적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대체 무슨 역작을 쓰려고 이렇게 자료 조사까지 철저하게 하냐.”

“···충분한 자료 조사에서 좋은 글이 나오는 법이니까?”

구체적인 자료를 인용하거나 언급하기보다는, 내 머릿속의 세계를 탄탄하게 보강하기 위해서다- 라고 하니 그건 이해가 간다는 네드.

‘오늘 여기에 온 가장 큰 목적은, <캐슬>의 집필을 제대로 시작하기 위해서.’

집에서는 아무래도 들뜬 분위기 때문인지 집중이 잘 안 된다.

이럴 때는 집필 환경을 바꿔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네드, 프레리라이트 2층에서 보자.’

커피를 두 잔 시켜놓고 네드와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었던 것.

“너한테 부탁하려는 것도 이 신작, 그러니까 <캐슬> 관련인데.”

“캐슬이라면··· 중세풍의 성? 흐으, 제목만 들어도 기대되는데?”

“호들갑은.”

“아니 아니, 봐봐. 에곤 K가 보여주는, 중세풍 판타지다? 이건 못 참지, 크크.”

네드의 너스레에 피식 웃고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어쨌든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니가 이 신작에 등장하는 성의 구조를 좀 그려줄 수 있을까? 약간 설정집에 등장하는 느낌으로.”

내가 뼈대는 대충 그려놓았으니, 그걸 보고 그럴싸하게 완성시켜주면 좋겠다- 라는 말에 흔쾌히 승낙하는 네드.

“그거야 내 전공 분야지, 걱정 마셔! 그려온 것 좀 보자.”

“자, 여기.”

내가 노트에 그려서 가져온 그림을 보여주자, 네드가 한순간 조용해졌다.

“···.”

“봐봐, 여기가 아성(牙城)이고 여기가 내벽, 그 바깥쪽을 둘러싼 게 성의 외벽인데···.”

“잠깐, 잠깐만. 이거 니가 그린 거라고?”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묻는 네드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진짜로 니가 그렸다고?”

“···어.”

왜 그러는데- 라고 물으려던 그때.

“···클로이가 그린 게 아니라고? 진짜 니가 그렸단 말야?”

“야 잠깐, 너무한 거 아니냐.”

내가 어이가 없어서 대꾸하자.

푸훗-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는 네드.

“크크크, 진짜 너무 웃긴다.”

“웃기긴 뭐가 웃겨.”

“아니 아니, 유진 너 웬만한 거 다 잘하잖냐. 체육도 쫌 하고, 공부도 적당히 하고, 이놈은 대체 부족한 게 뭐지 했는데-”

웃음 섞인 말을 잇는 네드.

“야, 신이 너에게 다른 건 다 줬어도 그림 실력만큼은 주지 않았구나.”

“···시끄러워.”

내 그림이··· 정말 그 정도인가?

나름 심혈을 기울여 꼼꼼하게 그린 그림을 보고 배를 잡고 웃어대는 걸 보니 조금 부아가 치밀었지만.

‘뭐 어쩌겠어, 부탁하는 쪽이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거지.’

간만에 날 놀릴 수 있어서 아주 신이 난 네드를 보며 픽 웃고 말았다.

어쨌거나.

네드는 내 그림을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는지 이런저런 설명을 요구했다.

“오케이, 여기가 식량 저장소, 여기가··· 아, 장원이 이런 구조라는 거지. 오, 좋네.”

각종 중세풍 창작물을 사랑하는 녀석답게, 중세의 성과 장원의 구조, 영지의 개념 등에 전반적으로 빠삭했다.

“잘 알고 있으니 설명하기가 편하네.”

“그럼, 그럼. 이런 거 아주 중요하지. 아! 기왕 그리는 김에 아예 채색까지 해줄까?”

“그래주면 나야 좋지만, 손이 너무 많이 가지 않겠어?”

“전혀! 요즘에는 AI 채색도 가능하거든.”

몇 가지만 간단히 지적해주면 만들어놓은 패턴대로 자동 채색이 된다는 것.

“와, 엄청나네.”

“그걸 내가 살짝만 손보면 되니, 얼마 안 걸릴 거야.”

“완전 고맙다.”

내 말에 어깨를 으쓱하는 녀석.

“뭘 이 정도 가지고. 나를, 어? 이렇게 엄청난 슈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줬는데, 이 정도야 얼마든 서비스로 해드려야지 크크.”

녀석의 말에 그저 픽 웃기만 하는데.

슥슥, 사사삭—

네드가 늘 갖고 다니는 2B 연필을 꺼내 자신의 미술용 노트에다가 가볍게 그리기 시작했다.

‘···.’

사각사각, 슥슥-

기분 좋은 연필 소리와 함께 힘 있는 검은색 선들이 빠르게 가지를 뻗쳐나간다.

네드가 거침없이 그리는 선들이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갈수록, 안개에 가려진 듯한 캐슬의 모습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흡사 마법에 홀린 기분인걸.’

하얀색과 검은색의 노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그때.

어느새 거대한 성 한 채가 우뚝 생겨나 있는 것이 아닌가.

“···아.”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하나의 문장.

나는 그대로 노트북을 펼쳐 워드프로그램을 실행시켰고-

[캐슬_초고.docx]

···제목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화면 속.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생겨나는 텍스트들을 그대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성은 살아 있었다(The Castle was alive).]

···

타닥, 타다닥-

[그것은 주민 모두가 공유하는, 돌처럼 단단하고도 강력한 믿음이었다···.]

어느새 네드의 연필 소리가 끊겼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운 가운데.

[이 거대한 성은 스스로 움직이고, 자라나며 또 때로는]

숨도 못 쉴 것 같은 기분으로, 내 머릿속을 꽉 채운 다음 문장을 토해냈다.

아마도 그것이-

[···그들을, 성 안의 주민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캐슬>이라는 나의 새 작품에 푹 빠져버린 순간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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