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75화 (75/126)

첫 문장(2)

···거기까지 쓰던 나는 다시 첫 문장을 돌아보았다.

[성은 살아 있었다.]

‘첫 문장이 마음에 들게 나와서 다행이네.’

소설의 첫 문장이 지닌 중요성.

그에 관해 작가들의 의견은 크게 갈리는 편이다.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첫 인상, 정도라고 할까.’

초반부를 수없이 깎아대는 스타일은 분명 아니지만, 그 중요성만큼은 잘 알고 있다.

첫 문장은 독자들이 이 소설에서 느끼는 첫인상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첫 문장에 너무 힘이 없다면 기대감이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첫 문단을 더 중시하는 편이지.’

첫 문장이 첫인상이라면, 첫 문단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안내문’ 역할을 하는 셈이니까.

[성이 살아 있다는 건, 예컨대 이런 의미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담쟁이덩굴이 우거져 있던 돌담 위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든가.

북동쪽으로 나 있던 오솔길이 정북향으로 바뀌었다든가.

지하 계단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다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든가···.]

타닥, 타다닥-

나는 <캐슬>의 세계 속에 완벽하게 몰입한 채로 글을 이어나갔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서점의 2층 카페이고, 옆에 네드가 앉아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주민들은 이 성을 생명이 있는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이 으스스하고 기괴한 중세의 성.

그 안에서 평생토록 갇혀 지내온 무지몽매한 주민들···.

[그들 모두는 근면한 일꾼이자 영주에게 충성하는 농노였다.

···이들의 그 강력한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것은 단 한 명, 이 쇠락해가는 성 안에서 누구도 주시하지 않는-]

한순간 고민하다가, 이내 주인공의 이름을 결정했다.

[고아 소년 라이언이었다.]

거기까지 쓰고 탁, 엔터를 치고는 잠시 손을 멈췄다.

후우, 미뤄뒀던 숨을 토해내자 그제야 주변의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문득 옆을 돌아보자 언제부터 화면을 지켜봤는지, 네드가 의자를 내 바로 옆으로 끌고 와 앉아 있었다.

“괜찮냐?”

내 물음에 -멍하니 있다가- 한 박자 후에야 입을 여는 네드.

“···라이언, 이름 좋은데.”

“다행이네.”

“얘가 주인공?”

고개를 끄덕이자, 네드가 두 눈을 빛냈다.

“이거 도입부 죽여준다.”

“그래?”

“어어, 막··· 뭐라고 해야 하지? 눈앞에 영상이 펼쳐지는 기분이네.”

히죽히죽 웃으며 좋아하던 네드가 나를 돌아보았다.

“너 나중에라도 만약 이거, 그래픽노블로 낼 생각은 없어?”

“···그래픽노블?”

그래픽노블.

코믹스의 한 부류, 혹은 동의어로 치기도 하지만.

이렇게 소설을 만화화하는 식의 그래픽노블도 많다.

“어어, 이건··· 만화로 나와도 완전 대박일 것 같단 말이지.”

네드의 그 말에, 나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로 했다.

*

그 시각, 캘리포니아의 어느 고급스러운 카페.

통유리창 너머 테이블에는 머리를 짧게 친 건장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창 너머를 계속 흘긋거리기를 5분째 이어가던 와중.

“아이고, 작가님! 먼저 와 계셨군요.”

급하게 카페 안으로 들어선 누군가가 그의 테이블에 합석했다.

웃는 낯이 아니라면 상당히 무서워 보일 듯한, 거구의 남성은 바로-

“하하, 저도 방금 막 왔습니다 미스터 클레그.”

작가 마커스 스톤과 에이전트 계약을 맺은, 케빈 클레그였다.

“편하게 케빈이라고 부르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제가 그냥 이렇게 하는 게 편해서. ···그나저나 아이오와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그 말에 고개를 젓는 케빈.

“안 그래도 본사에서 처리할 게 쌓여 있었거든요, 그쪽 지점에 너무 오래 있기도 했고.”

라이터스홈의 본사는 캘리포니아이지만, 아이오와시티에도 큰 지점이 있다.

이는 라이터스홈이 아이오와대학과 산학협력을 오랫동안 유지해왔기 때문.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음료를 앞에 두고 본격적인 대화에 돌입했다.

“그건 그렇고, 요즘 작가님은 좀 어떠세요.”

케빈의 물음에 마커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음, 요즘 같이 자유로울 때가 없다고 해야 될까요?”

“자유롭다고요.”

“사실, 전에는 이런 곳에도 맘대로 못 가게 했거든요.”

“···에이전트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마커스.

“뭐, 제가 막 그렇게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그동안 여기저기서 얼굴이 좀 팔렸잖아요.”

그래, 그 말대로 그의 전 에이전트 캠벨은 마커스를 온갖 곳에 노출시키며 미디어용 작가로 만들어버렸다.

문학 관련 매체는 말할 것도 없고, 소설과는 아무 상관 없는 패션지며 라디오 방송, 케이블 채널의 TV 토크쇼 등에 이르기까지.

“···이미지가 깎이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말이구나 싶어요.”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너른 카페 안을 슥 둘러보는 마커스.

“이렇게 앉아 있어도 누구 하나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데.”

“···.”

그 말에 케빈이 괜히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는데.

마커스의 선량한 눈동자가 케빈 클레그를 향했다.

“이게 다, 에곤 작가님과 미스터 클레그 덕분입니다.”

“에이, 제가 뭘 했다고요. 저는  그냥 에곤 작가님 덕분에 이런 재능 있는 작가님과 거저 계약하게 된 건데.”

말은 저렇게 해도, 마커스는 케빈 클레그가 자신을 위해 굉장히 손이 많이 가는 일들을 전부 처리해줬다는 걸 잘 알았다.

“···이제 집필을 조금씩 시도해보고 계시다고요.”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레 글 이야기로 옮겨갔는데.

“네,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인 느낌이네요. 본격적인 소설이라기보단, 에세이를 써볼까 해요.”

“그것도 좋은데요? 저는 작가님의 소설도 좋아하지만, 작풍이나 문체가 그쪽에도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서···.”

신이 나 말하는 케빈의 모습에, 마커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간 정말로 지독한 슬럼프에 시달렸지.’

슬럼프라기보단, 아예 문장을 단 한 줄도 쓰지 못할 정도의 좌절감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번에 라이터스홈과 계약을 맺기 전, 그런 상황을 털어놓자-

‘그 부분은 걱정마시죠, 작가님. 지금은 그냥 휴가 중이라고 생각하세요. 지난번 작품 출간된 지도 얼마 안 됐잖아요?’

작가들 대부분이 1~2년 정도 몸을 추스려가며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고 말한 케빈은, 고맙게도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까지의 타이틀들도 저희 라이터스홈으로 무사히 잘 이관됐으니, 해외 판권 계약도 최대한 열심히 성사시켜보겠습니다!’

경제적인 부분에 어려움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 말대로 케빈은 지금까지 이런 저런 자잘한 2차 저작권의 계약을 성사시켰고, 덕분에 마커스는 한동안 생활고에 시달릴 걱정은 덜게 된 상태였다.

‘그리고 작가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런 것도 고려해보시면 어떨까요.’

작품 홍보를 위한 스케줄이 아닌, 정식으로 강의료를 받는 강의나 강연까지 알아봐준 것.

그래서 지금 마커스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주1회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느낀 건-

“미스터 클레그.”

“네, 작가님.”

“제가 요즘··· 강의를 하며 느낀 건데,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게 참 좋더라고요.”

“···.”

케빈이 진지하게 경청하는 가운데, 마커스의 말이 이어졌다.

“마주 앉아서 문학에 관한 토론도 하고, 수업 끝나고는 시시콜콜한 얘기도 하고. ···가끔은 맥주도 한 잔씩 하러 가고.”

그런 인간적인 교류를 나누는 순간, 순간에서-

“제가··· 굉장히 많은 에너지와 온기를 얻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말인데.”

마커스는 최근에 어느 대학에서 받은 제안을 입에 올렸다.

“문예창작학 MFA(Master of Fine Arts in Creative Writing) 프로그램이요?”

말하자면 문예창작학 석사 과정인 셈인데, 학비도 전액 장학금으로 해주고 그 외 다양한 활동비도 지급해준다고.

“네, 찾아보니 그런 것들이 있더라고요.”

기성작가가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도 대학에는 상당한 홍보가 되는 만큼, 이런 조건을 내거는 대학원들이 꽤 있었다.

마커스 입장에서는 이미 문학상도 타고 유명세가 상당한 만큼, MFA 학위를 따기 위해서라기보단-

“사람과··· 접촉할 기회를 늘리기 위해서라고 할까요.”

마커스의 진솔한 말에 케빈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저는, 전에 그렇게 생각했어요. 고독이야말로 창작의 친구이고, 홀로 있는 시간 속에서 창의성이 탄생하기 마련이라고. 그래서···.”

가족이 사는 캔자스시티에서 벗어나 -에이전트 캠벨의 조언을 따라- 무리하게 캘리포니아에 집을 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은 그 자체로도 환상적이었지만···.

“화려함은 한순간이더군요.”

“···.”

일상처럼 불면에 시달리던 어느 날 밤,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니-

사면의 벽에 가로막힌 듯, 숨이 멎는 듯한 압박감이 그를 휘감았다는 것.

“그런 걸 공황장애라고 부른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누구 하나 마음 털어놓을 사람도 없는 생활이 원인이 된 것 같아요.”

유일하게 의지하던 에이전트 캠벨은 그의 스케줄 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누구와 마주치든 당연스레 인사를 건네는 고향 마을과는 달리, 대도시의 삶은 너무도 삭막하기 그지없었다고 말이다.

“음, 그런 얘기를 하시니 말인데.”

잠시 머뭇거리던 케빈이 단어를 골라가며 말을 이었다.

“전에··· 에곤 작가님께 그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거든요. 어째서 가족과 함께하는 것을 고집하시냐, 작가님이라면 독립하셔서 따로 본인만의 공간을 두어도 충분할 텐데.”

물론, 이는 권유진의 대학 진학에 관해 얘기하다 나온 말이었는데.

‘대학요? 저는 아이오와대학 외엔 생각이 없는데.’

‘어··· 물론 아이오와대도 좋은 선택이긴 합니다만, 왜 그렇게 확고하게-’

‘다른 데 가면 집에서 통학하기 어렵잖아요?’

유진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꾸했더랬다.

‘저는 기숙사나, 따로 나가서 살 생각은 요만큼도 없거든요.’

대체 왜···라고 궁금해하자 그에 유진이 내놓은 대답을, 케빈은 마커스에게 들려주는 중이었다.

“에곤 작가님이 그러시더군요. 본인 또한 창작에 있어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하다는 건 잘 알지만.”

‘고독은, 선택사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택··· 사항이요?’

‘네. 내가 원할 때, 내가 혼자 있고 싶을 때 혼자가 되는 것이 진정한 고독이지-’

그렇게 말하는 유진의 눈빛은 -아무리 봐도 열여덟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노회한 느낌을 주었다.

‘원치 않는 순간에도 혼자가 되는 건··· 그저 지독하게 외로울 뿐인, 고독이 아니라 고립이라고 생각해서요.’

그 말을 고스란히 전하고 나자.

“고립···.”

마커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창작을 위한 고독이란 건, 능동적인 선택이 돼야 한다는 거로군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케빈의 그 말 덕분에, 마커스는 대학원 수업을 들으며 다른 이들과 교류해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그래서, 어디 좀 눈여겨보신 곳은 있으세요?”

마커스에게 제안해온 곳은 한두 곳이 아니었는데, 다양한 대학에서 보내온 서류를 눈에 담던 마커스가 말했다.

“글쎄요, 디모인에 저희 형네 부부가 사는데 거기서 멀지 않은 곳으로 알아볼까 생각 중이에요.”

“오, 디모인이라면 제가 지금 지내는 아이오와시티 바로 근처인데요?”

“정말 그렇네요.”

미스터 클레그를 좀 더 자주 볼 수 있다면 확실히 좋을 것 같네- 라고 생각하던 마커스의 생각이 에곤 K에게로 향했다.

‘에곤 작가님도 언제 한 번 꼭 만나뵈면 좋을 텐데.’

제게는 진정한 인생의 선배나 다름없는 장년의 작가를 떠올리던 그가 아- 소리를 내더니.

“맞다, 잠시만요.”

실실 웃으면서 핸드폰을 꺼내 인스타그램 앱을 실행시켰다.

“오늘이 에곤 K 작가님이 데뷔하신 지 300일이 되는 날이거든요.”

“데뷔··· 300일이요?”

담당 에이전트인 케빈조차 몰랐던 사실을 마커스가 알고 있는 것은-

“하하, 사실 제가 에곤 K 서브레딧에 상주하다시피해서.”

···에곤 K의 팬포럼 격인 서브레딧이 새로이 생겼고, 그곳에서 ‘에곤 K 데뷔 3백일 축하 이벤트’를 하기 때문이란다.

“···아.”

케빈도 그런 이름의 소규모 서브레딧이 생겨났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마커스가 그곳의 열렬한 이용자였을 줄은.

“잠시, 축하 메시지 좀 올릴게요.”

토도도독-

마커스가 부지런히 스마트폰을 붙잡고 메시지를 작성하더니.

이내 띠링, 하며 새로운 피드가 올라갔다.

[@marcus_stone|

에곤 K 작가님의 데뷔 300일을 축하드립니다!

#멸망한세계의피터팬 #에곤K #팬심

———————

띠링, 띠링 띠리링—

평소 팔로워 수가 상당한 덕분에 좋아요가 쉴 새 없이 눌리는 한편.

└우왓 마커스 작가님이 에곤 K 팬이셨구나!

└에곤K가 누군가요

└SF쪽 대박 신인작가예요! 이번에 네뷸러도 수상함

└오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아니 마커스 스톤과 에곤 K라니 뭔가 신기한 조합이다

···

댓글 또한 빠르게 달리는 광경에 마커스가 흐뭇하게 웃던 그때.

‘···.’

그 모습을 케빈 클레그는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커스 작가님께는 미리 알려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러다 나중에 유진 작가 본인을 직접 만나면, 마커스 스톤이 심한 충격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언제 한 번 유진 작가님과 얘기해봐야지.’

케빈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kevin_cleg 님이 ‘좋아요’를 눌렀습니다]

···마커스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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