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고등학생(1)
*
네드의 그림 덕분에 <캐슬>의 첫 단추를 무사히 끼운 그날.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내내 노트북 앞에 앉은 채 집필을 이어나갔다.
[···이 거대한 고성을 경외시하는 가운데, 주민들은 자신들에게 허락된 공간만 다니기 시작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마치 저 성의 차가운 돌담 안에 갇힌 듯 느껴지는 가운데.
[그 공간이란 것이 비록, 숨 쉴 때마다 밭은 기침이 터져 나오는 채석장이라든가.
자칫 정신을 놓았다간 그 지독한 향에 기절하기 일쑤인 기괴한 작물을 키우는 너른 밭뿐이라고 해도.]
나는 식사할 생각조차 잊은 채로 글쓰기에만 몰두했다.
[반면, 고아 소년 라이언은 이 성 안에서 진리로 통용되는 상식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소년에게는···.
[가르쳐주는 이가 아무도 없기에, 스스로 모든 것을 터득하고 배워야만 했다.
이를테면 햇살 아래 서 있을 때, 그림자는 반드시 햇빛의 반대편으로 지기 마련이라든가.
아침에 뜬 해보다 한낮에 뜬 해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든가, 그 모든 건 소년이 관찰과 경험을 통해 알아낸 사실들이었다···]
그렇게 집필을 이어나가기를 몇 시간째.
이따금 눈이 피로해져 두 눈을 감으면, 어두운 시야 속에서 괴기스러운 성의 형체가 어른거리는 감각 속.
[어쨌거나 그 사실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라이언은 주변의 속살거림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의 머리로 파악하고 고민하여 얻어낸 해답만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저녁도 거른 채로 노트북 앞에 앉아 있던 나는, 1챕터를 끝내고 나서야 <캐슬> 속의 세계에서 깨어났고.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갑작스레 졸음이 밀려와, 10시도 안 된 시점에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기이한 꿈을 꾸게 되었다.
*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온몸을 누르는 압박감 속.
사지가 구속된 듯, 아무리 애를 써도 손끝 하나 움직이지가 않는다.
‘···가위에 눌린 건가?’
이런 끔찍한 상황을, 나는 이미 오래전에 지겹도록 겪은 바 있는데-
{에곤, 에곤. 제발··· 눈을 떠봐요.}
잘 떠지지도 않아 그저 흐릿하기만 한 시야 속.
누군가의 형체가 간절한 목소리로 나를 ‘에곤’이라 부르고 있다.
{···미스터 언윅에겐 안정이 필요합니다. 얼른 나가주셔야-}
[아니, 지금 에곤에게 꼭 이 말을 해야 해요.}
영어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 어쩐지 다 알아들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에곤이란, 병상에 누워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한 젊은 예술가 에곤 언윅인 듯했다.
그러니까, 언젠가 새어머니의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책의 저자 말이다.
{에곤. ···당신이 했던 그 모진 말들, 모두 거짓이란 거 알아요.}
에곤의 약혼녀로 보이는 여성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아마, 에곤은 일부러 그녀에게 상처주는 말들을 했던 모양인데.
에곤 언윅의 고통과 좌절감에 동화된 듯, 아니 내가 아예 에곤이 된 듯한 감각 속, 나는 나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지. 나도 병원에 온 그녀에게···.’
잠깐만, 나도라고?
그녀라는 건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걸까, 혼란스러워던 그때.
‘제발 나를 잊어.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
또다시 에곤의 자아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비통한 심정에 동화되던 그때, 머릿속 한구석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고.
[그대의 소원을 접수하···.]
그와 동시에 나를 덮치는 단말마의 고통.
‘컥—’
···언제 한 번 겪은 바 있는 죽음의 감각이다.
아니, 이럴 수는 없어.
소름끼치도록 비슷한 통증에 몸부림치던 그때-
“···빠, 오빠.”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더니.
이내 말캉하고 따뜻한 감촉의 손이 내 이마를 짚는다.
“···허억.”
그 온기에 힘입어 번뜩 눈을 뜬 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사랑스러운 얼굴.
“오빠아, 왜 그래에~ 무셔운 꿈 꿨또?”
···어느새 아침이 됐는지 방 안으로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하얀 찹쌀떡 같은 동그란 얼굴을 보며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꿈이었구나.’
나는, 살아 있구나.
“클로이···.”
지독하리만치 생생한 꿈이었지만, 눈앞의 어린 동생 덕분에 그 소름끼치는 잔상이 금세 사라져가는 가운데.
클로이가 내 얼굴을 보더니 울상을 짓는다.
“이잉, 오빠가 무셔운 꿈 꿔서 울었구나.”
“어? 뭐? 오빠 안 울었는데.”
“울었쟈나~”
클로이가 내 눈가를 짚자, 정말로 흥건히 젖어 있다.
‘꿈을 꾸다 눈물을 다 흘리고, 민망해라.’
흠흠, 헛기침 소리를 낸 내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운 게 아니고, 그냥··· 가끔 꿈을 꾸다 보면 그런 경우가 있어. 자연스러운 현상인-”
“갠차나, 오빠.”
킥킥 웃으며 말을 잇는 클로이.
“나도 맨날 울어. 근데 우는 거 부끄러운 거 아니야~ 선생님이 그랬어. 슬프면 눈물이 나는 거래애~”
“···.”
그 말대로 꿈속의 나는, 아니 ‘에곤 언윅’은 지독하리만치 비통해했으니.
그리고 나 또한···.
‘뭔가를 놓친 기분인데.’
기억을 더듬다보니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던 그때.
고사리 같은 동생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빠아~ 무리하면 안 대. 엄마가 그랬어, 무리하면 안 댄다고.”
···그 사랑스러운 온기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기분.
“고마워, 클로이.”
“헤헤.”
활짝 웃는 아이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했다.
*
좋은 시간은 금방 흐른다고 하던가.
두 달 반에 걸친 여름방학이 끝나고, 어느덧 11학년 1학기의 첫날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 나는 <캐슬>의 집필에만 골몰했는데.
‘···유진,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끼니를 거르면 안 되지.’
새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고자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먹었고.
하루 30분 정도는 클로이와 열심히 놀아줬다.
나머지 시간에는 모두 <캐슬>의 초고에 집중한 덕분에, 벌써 상당한 분량의 원고가 생겨난 상황.
‘그건 그렇고.’
그때 꿨던 그 기이한 꿈.
···에곤 언윅의 생애 마지막 순간을 경험했던 그 꿈에 관해 고민한 바로, 이런 결론을 내린 터였다.
‘내가 이 작가에게 과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 아니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도 모르게 이 비운의 예술가를 늘 머릿속 한구석에 담아뒀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내가 쓰는 필명이 에곤이잖아.’
같은 퍼스트네임을 지닌 작가.
···나의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으며-
‘심지어 증상도, 시기도 비슷했지.’
바로 어제 무심코 인터넷을 뒤져봤다가, 에곤 언윅에 관한 논문을 찾아냈는데.
···그 또한 반신불수였으며 죽은 나이 또한 35세 무렵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어찌나 소름이 돋았는지 모른다.
그 탓에 여전히 그 꿈의 잔상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데.
지잉, 지이잉-
[아이오와출판부_셜리맥그로우]
···셜리 담당자님이 웬일로 연락을 다하셨지.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받은 나는-
“잠깐만요, 방금 뭐라고···.”
이내 스마트폰 저편에서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
유진의 새 학기 첫날 감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새로 짠 시간표의 첫 수업인 화학 수업을 들으러 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제법 보였고.
“오, 유진!”
“힐크레스트 지니어스! 나 <토끼 남작> 소식 들었다!”
“야, 우리 사촌동생이 <토끼 남작> 얘기하던데···.”
유진과 네드.
그 둘을 알아본 학생들이 ‘토끼 남작’ 얘기를 종종 꺼냈다.
“크으, 유진. 너 평소에 늘 이런 느낌으로 지냈던 거냐?”
잔뜩 흥분한 네드의 물음에 유진은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그게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는데.”
수업을 몇 개 듣고 나자 어느새 점심 시간.
아델까지 셋이서 카페테리아로 움직이려던 그때-
-11학년 유진 권, 유진 권 학생은 즉시 교장실로 오세요.
복도에서 울려퍼진 교내 방송에, 네드와 아델이 깜짝 놀라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유진, 너 무슨 사고 쳤냐?”
“유진이 그럴 리가. 근데 무슨 일이지?”
두 사람과 달리, 유진은 짚이는 구석이 있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금방 다녀올게.”
그리고 이내, 교장실에 노크하고 들어가자.
“오, 금방 왔구나.”
“반가워요 유진 학생.”
힐크레스트 고등학교의 교장과 영문학 담당 교사 레너드가 함께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게 맞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교장실에 이렇게 와본 것은 처음이구나- 라고 유진이 생각하던 그때.
두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축하한다, 유진!”
“스콜라스틱 3차 심사에 합격한 것, 축하합니다!”
···역시 그랬구나.
유진 또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지금쯤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붙어서 다행이네요.”
“···그냥 붙기만 한 게 아닙니다 유진 학생! 무려 전국상입니다, 전국상!”
퉁퉁한 볼이 축 늘어진 교장은 얼굴이 벌개진 채 잔뜩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래, 유진. 전국상의 경쟁률은 130대1 수준이란다. 그건 그렇고, 시상식에는 전국상 수상자만 참가하는 것 알지? 10월에 진행될 예정인데···.”
애써 기쁨을 감추며 차분하게 말하는 레너드 하인스와 달리, 교장은 잔뜩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진은 흐뭇한 기분으로 말하길.
“아, 정말 잘됐네요.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런 좋은 결과가 나오다니.”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현과는 달리, 얼굴은 백 퍼센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여유로움으로 가득했다.
‘역시, 예상했던 그대로이군.’
레너드가 입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는데.
“···.”
유진을 처음 보는 교장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입만 벌리는 것이 아닌가.
“음, 교장선생님. 이 학생이··· 원래 좀 그런 성격입니다.”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교장.
···오히려 유진이 진심으로 눈을 빛내며 기뻐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낯설어 보였을 것이다.
여하튼.
레너드는 이 스콜라스틱 전국상에 따른 각종 혜택을 하나 하나 설명해줬고.
“···이제 자격 조건이 확실히 되는 만큼, 슬슬 벅스바움 스콜라십에도 지원해보면 될 것 같은데.”
벅스바움 스콜라십.
아이오와대학에서 제공하는 파격적인 장학금 프로그램의 이름을 꺼내자, 유진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는다.
“아, 안 그래도 그 얘길 드리려고 했는데.”
“그래, 서류 준비는 미리 하는 편이-”
“그 프로그램은 지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뭐?”
단호한 학생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미스터 레너드와 교장.
“아니, 유진 군. 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그건 아주 좋은 기회예요.”
“그래, 지원만 하면 충분히 될 것 같은데···.”
어떻게든 설득하려 하는 두 사람을 보며 유진은 뚱딴지 같은 말을 했다.
“음, 아마 곧 학교에도 연락이 갈 것 같긴 한데.”
“···그게 무슨.”
두 어른을 마주 본 유진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깃들었다.
“이미, 이 벅스바움 스콜라십 이상으로 좋은 조건들을 아이오와대학에서 제안해왔거든요.”
“···!”
교장과 문학교사 레너드가 아무 말도 못 하던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직원의 목소리가 교장실 문 너머에서 들렸다.
“교장 선생님, 잠시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는데.”
교장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문을 살짝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중요한 얘기를 하는 중이라-”
“아 그게··· 어머, 권유진 학생이 여기 있었군요.”
“음? 권유진 학생은 왜. 아, 혹시 대학 조기입학 건 때문에.”
“네 그렇긴 한데··· 이것 좀 보시죠, 교장 선생님.”
행정실 직원이 건넨 것은 다름 아닌 각종 대학의 공식 인장이 찍힌 공문 서류들.
척 봐도 한두 개가 아닌, 열 개가 훌쩍 넘어가는 개수에 교장은 한순간 당황했다.
“잠깐만, 아이오와대학뿐이 아니고-”
“네, 총 15개 대학 입학처에서 보내왔네요.”
“···!”
서로를 돌아보며 눈을 크게 뜨는 교장과 레너드 하인스.
이내, 직원에게서 황급히 서류들을 받아든 교장이 그 내용을 살펴보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한편.
“···.”
레너드 하인스는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로-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을 발견하고는 머쓱하게 웃는 유진.
‘참, 무엇을 상상하든 늘 그 이상이란 말이지.’
힐크레스트의 문학 교사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는 가운데.
오히려 유진 본인은 이 상황에 조금 놀라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음, 이거··· 타이밍이 너무 완벽한데?’
···그가 공문을 요청한 것은 맞지만,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