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색(3)
꼭 출판사 편집자랑 미팅하러 온 기분이란 말이지- 라고 생각하던 로렌이 픽 헛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음료를 들고 자리로 돌아온 유진이 로렌의 앞에 잔을 놔줬다.
“드세요.”
“아, 고마워요.”
로렌은 쪼옥- 시럽을 잔뜩 넣은 프라푸치노를 들이켜며 맞은편 남학생을 살폈다.
‘···전혀 주눅들 거나 긴장한 느낌이 없네.’
그녀 자신도 교수들 사이에선 애송이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이 학생보단 한참 연상인 데다 교수가 아닌가.
그런 상대 앞에서 이렇게 여유롭게 군다는 것이 사뭇 놀라웠는데-
“이거.”
유진은 활짝 웃으며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에게 커다란 영예를 안겨다준 데뷔작 <루나 그래피티> 극본집.
“이 자리에 오기 전 급하게 구해봤는데··· 다행히 동네 서점에 재고가 있더군요. 괜찮으시다면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 그, 그래요. 물론이죠.”
연극계에선 상당한 유명인사이지만, 사인회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는 그녀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하자-
“여기.”
유진이 미리 준비해둔 마커를 건넸다. 로렌이 그것을 받아 극본집 면지 페이지에 어색하게 사인하는 가운데, 남학생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제가 교수님의 이 <루나 그래피티>를 굉장히 감명깊게 봤거든요.”
“어··· 그 공연을, 직접 봤어요?”
자신을 아는 학생은 많지만, 막상 연극을 관람한 학생은 그리 많지 않을 텐데.
“네, 제가 이런 쪽에도 관심이 있는 편이라. 그래서 ‘천재 극작가’라 불리며 연극계를 휩쓸고 계신 교수님이 제게 연락 주셨을 때, 이게 꿈인가 싶었습니다.”
그 말에 로렌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고.
“근데 사실··· 잘 모르겠네요. 그,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조금 긴장이 풀려버려서일까, 쓸데없는 말까지 꺼내고 말았다.
“지금까지 제가 쓴 작품은 단 두 개이고, 그 두 개가 모두 엄청나게 좋은 평을 받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걸 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라는 뒷말은 간신히 삼킬 수 있었으니.
‘소포모어 징크스까진 아니지만.’
분명, 재기 넘치는 젊은 천재 극작가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러운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유의 호칭에 따라붙는 특정한 기대감과 평가가 있지 않은가.
나이가 들어 더는 재기발랄함만으로 승부를 볼 수 없을 때, 내가 어떠한 작가로 남을 수 있을까- 같은 고민을 하게 된달까.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흠- 하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물론, 처음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창작자들 대부분이 그런 부담감에 시달리기 마련이죠.”
그런 속내를 한눈에 알아차린 듯 말을 이어나간다.
“그럼에도 저는 작가님이 롱런을 하시는 것은 물론,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는 작가가 될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떻게요?”
“글쎄요, 감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씩 웃으며 말을 잇는 유진.
“미래에서 보고 왔다고 하면 믿어주실런지 모르겠네요.”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저런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 로렌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말만 들어도 너무 감사하네요.”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들은 것도 그렇고, 자신의 열렬한 팬인 줄 알았으면 이렇게 긴장하며 기다리지도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
“그건 그렇고.”
유진의 분위기가 방금 전과 조금 달라졌다.
“이제, 얘기를 해볼까요.”
여전히 웃는 얼굴 그대로였지만, 아까는 순전한 한 명의 팬 같았다면.
지금은 대등한 관계에서 비즈니스를 논하는 느낌이다.
“일단 제가 루먼 교수님께 제일 먼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가 뜬 유진이 정면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매우 여유로운 표정. 거기에 몸은 살짝 뒤로 뺀 채, 테이블 위에 자연스레 두 팔을 올린-
“어떤 계기로 이 를 연극으로 만들어야겠다- 라고 생각하시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누가 봐도 거래에서 우위에 선 사람의 자세 같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일까. 면접에 임하고 있는 기분마저 드는 가운데, 로렌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음, 그게, 유진 학생이 쓴 이 는···.”
어머니와 딸 사이의 애틋함.
진한 감동이 느껴지는 가족애.
그 외에도 이 상황에 꺼내기에 적합한 대답이 수없이 있었지만-
그 대신,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문장들을 그대로 내뱉고 말았다.
“난··· 부모님이 없어요. 대신 위탁가정과 시설에서 컸죠.”
···이런, 왜 다짜고짜 이런 말을 했을까.
민망한 마음에 한순간 입을 다문 그때, 유진이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군요. 그러면 확실히 이 작품을 또 다른 관점으로 보셨을 수도 있겠어요.”
그 차분한 목소리가 꼭 격려처럼 들린 덕분일까.
“···어, 네, 맞아요. 그렇다 보니 보통은 이런 가족애라고 할까? 부모 자식 관계를 다룬 작품을 접하면 잘 공감이 안 되는데.”
로렌은 다시금 페이스를 되찾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 를 읽었을 땐, 이게, 이런 게 바로···.”
아주 잠깐 망설였다가, 머릿속에 떠오른 그대로를 입 밖으로 꺼냈다.
“어머니와 자식 간의 사랑이구나. 아니, 이런 게 바로··· 어머니라는 존재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녀 자신에게는 존재하지 않기에, 그 실체나 이미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어머니의 이미지가-
“처음으로, 내 머릿속에 생겨났죠.”
···그래, 바로 그거였다.
그렇게 유진의 앞에서 소리내어 말한 순간에야 로렌은 명확하게 이해했다.
‘왜 내가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어했는지 이제야 알겠어.’
뒤늦은 깨달음에 그녀가 두 눈을 빛내던 그때.
마주 앉은 유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고.
“···.”
그 순간에야 로렌은 깨달았다.
···면접에 임하러 온 ‘기분’이 아니고, 실제로 이 자리는 면접과 아주 유사한 것이었다는 걸.
그리고 이내, 유진은 활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씀을 들으니 저도 안심이 되네요. 사실, 이렇게 각색 제안을 받으면 기쁜 마음도 있지만 걱정도 조금 되는 법이라.”
“걱정···이요?”
“아,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만.”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홀짝거리고는 말을 잇는 유진.
“어떤 창작자들은 이 원작의 ‘스킨’만을 가져와서 본인의 이야기를 만들려고 하는 경우도 있어서요.”
···아.
로렌 또한 잘 아는 바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뿐이 아니고 영화나 드라마 등, 원작에 대한 존중 없이 함부로 각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물론 그런 식의 각색이 때로는 더 창의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제 작품의··· 그러니까 원작의 의미를 존중하되 그 형식을 달리 보여주는 식의 각색을 바랐거든요.”
그리고 이어지는 유진의 말에서, 자신이 그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로먼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에선, 제가 생각했던 이상의 그런 애정이 느껴졌어요. ···제 작품을 그렇게 의미 있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그녀가 곧바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던 그때, 유진이 한 박자 후에야 말을 이었다.
“···이 는 말하자면, 제 얘기나 다름없거든요.”
로렌은 마른침을 삼켰다가 조심스레 말을 받았다.
“유진 군의 이야기라고요.”
“네. ···제가 열 살 때,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유진은 그 짧고 단순한 문장을 몹시 천천히, 그리고 어색하게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 말을 정말 오랜만에 발음하는 사람처럼.
‘마치··· 방금 전의 나처럼.’
문장을 소리내어 말하고 나서야,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저도, 아버지도··· 굉장히 힘들어했거든요.”
그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워내려고도 했고, 현실을 부정해보려고도 했다.
그러다 어떤 것이 구체적인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도망치지 말자고, 아니 도망치더라도.”
유진은 여전히, 적절한 표현을 하나씩 찾아가며 말을 이었다.
“내 안에 남은 어머니의 기억을··· 변치 않는 형태로 보존해보자, 그런 생각을 했어요.”
몹시 차분한 목소리 너머에서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가 느껴진다.
“말하자면, 애도···인 셈이네요.”
로렌의 표현에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
“네, 그렇죠. 사실 제가 이런 얘길 저희 아버지 외엔 누구한테도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그러셨거든요. 어쩌면 유진이 네가 이 글을 통해서 어머니를 잘 떠나보내는 것만이 아니고, 독자들의 마음속에 각인시키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어지는 유진의 말을, 로렌은 가만히 경청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루먼 교수님이 제 글 속에서 어머니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주시고. 더 나아가서는 이걸 무대 위에 올려주겠다 하시는 거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때 제가 꿈꿨던 것들이 다 이루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사실,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는 것.
유진이 내보인 의외의 속내에 로렌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유진 군은 전혀 긴장하지 않은 줄 알았어요.”
“설마요, 제가 얼굴에 티가 잘 안 나거든요 하하.”
지금 두 사람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유진은 어디서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어서 후련했고-
‘원작자에게서 듣는 작품 탄생의 비화라니.’
로렌으로서는 그것 자체도 참 좋았지만.
자신의 머릿속에 평면적으로만 존재하던 엘라와 데이지의 이미지가, 방금 유진의 그 진솔한 고백 덕분에 한층 더 입체적으로 태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
“이게 다 루먼 교수님 덕분입니다.”
“네? 제가 뭘···.”
“교수님이 먼저 개인적인 얘기를 해주셨잖아요.”
머쓱하게 웃는 유진.
“그런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와주신 덕분에.”
자신 또한, 웬만해서는 내보이지 않는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었다는 것.
···비록 그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실수였지만, 로렌은 아닌 척 미소 지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아 그리고 제가 극본도 아예 가져왔는데-”
“그건, 음··· 글쎄요. 나중에 완전히 확정이 되고 나면 그때 최종본으로 보내주셔도 좋고.”
극작가 로렌 루먼이 원고를 수없이 수정 및 가필하는 타입이라는 걸 잘 아는 듯 유진은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아니다, 아예··· 관객석에서 확인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어, 근데 무대에 올리기 전에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음, 저도 미리 확인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긴 한데··· 다른 분은 몰라도, 루먼 교수님 작품은 제게도 서프라이즈로 남겨놓고 싶네요.”
그게 무슨, 이라고 로렌이 중얼거리자.
“그러니까 원작자로서가 아니라··· 관객으로서의 유진을 배려하고 싶달까요? 무엇보다도, 교수님 작품은 극본 자체도 훌륭하지만 극의 ‘연출’이 차지하는 바가 상당하다고 생각해서.”
한마디로, 극본만 봐서는 제대로 평가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유진의 말에-
‘···와.’
로렌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늘 생각해온 그녀 자신의 집필 스타일에 대한, 너무도 정확한 평가가 방금 이 학생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아니지, 이젠 사실 유진을 ‘학생’이라고 칭하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자신은 그와 그저 대등한 관계로, 혹은 -각색을 허락받아야 하는- 원작자를 대하듯 이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까.
“그래요, 그럼··· 제가 최선을 다해서 작품을 준비해볼게요.”
“말만 들어도 좋습니다. 아, 맞다. 마지막으로···.”
그 순간, 유진이 이내 두툼한 서류를 꺼내 보였다.
“이제 2차 저작권 논의를 본격적으로 해볼까요?”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문의해서 받아온 2차 저작권 계약서라는 말에 로렌은 눈을 크게 떴다.
“아···.”
이 자리에서 당장 사인할 필요는 없고, 가져가서 여러 번 읽어본 후 법무적 검토까지 받은 후에 사인하라는 설명에-
‘정말, 이 학생이··· 고등학생이 맞긴 한 걸까?’
로렌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그때.
지잉- 유진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가 반가운 메시지에 웃고 말았다.
[케빈_클레그 : 작가님, 인터뷰 기사 잘 전달했습니다! 근데 1면! 1면 메인 확정이에요!]
···에곤 K의 인터뷰가 <뉴욕타임스> 북리뷰 1면 메인기사로 실릴 거라는 소식이었다.
그거 나 아님
*
이번 학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참여하는 문예창작 클럽활동날이 되었다.
“다들 잘 지냈어?”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데, 뭔가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클럽원들에게 잔뜩 축하를 받았다.
“유진! 스콜라스틱 전국상 탄 것 축하해!”
“<토끼 남작> 엄청 인기 많더라아~”
“너 대학 조기입학한다며? 벌써 여기저기 소문이···.”
“이야, 축하할 일이 너무 많은데?”
“유쥐이인—! 오랜만이야!”
샬롯과 미아, 제이든도 신이 나 내 곁으로 다가왔다.
샬롯은 이제 스마트폰을 쓰지 않고 말하는 게 제법 습관이 된 것 같았는데.
“근데, 유진 너어··· 키가, 큰 것··· 같아.”
“오, 진짜? 유쥐인~ 너 몸이 좀 좋아졌다?”
그녀의 말에 미아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돌아보자, 제이든이 나섰다.
“그게 다 우리 체육관에서 운동해서 그런 거야, 으하하!”
“아 그건 인정.”
제이든이 짜준 프로그램 덕분에 몸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하자.
어쩐지 방학 전보다 한층 더 강해 보이는 제이든을 보며 미아가 미간을 좁혔다.
“근데 제이든, 너도··· 근육 더 늘렸어?”
“와··· 어마어마하다.”
“팔이 돌덩이 같아.”
누가 봐도 문학지망생이라기보단 보디빌더 같은, 더 거대하고 단단해진 제이든의 모습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로완 빼고 다 왔네.’
방학이 끝난 후 처음 모이는 자리이다 보니, 오늘은 뭔가 대단한 걸 하기보단 밀린 얘기를 나누는 중.
“그나저나 벌써 개학이라니, 믿겨져? 난 아직도 방학 중인 것 같은데.”
미아의 투덜거림에 힘없이 고개를 젓는 샬롯과 제이든.
“학기 중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데, 방학 중엔 너무 빨리 가는 느낌이지.”
그들을 보며 나 또한 동의하자-
“흐, 웬일로 유진 니가 맞는 말을 한다?”
“그러게, 난 유진 너라면 ‘하하하, 나는 세 권 분량의 장편소설을 다 썼는데!’라고 할 줄 알았는데.”
···대체 이들의 머릿속에 있는 권유진의 이미지란 무엇일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대뜸 질문하는 제이든.
“새로 쓰고 있는 거 있어?”
“아, 있긴 한데···.”
“오오, 궁금하다!”
“나도, 유진의 글, 궁금해···.”
뜨거운 관심을 보이는 친구들에게 ‘에곤 K의 글’을 보여줄 수 없는 점이 좀 아쉽기는 했다.
‘그건 그렇고.’
방학을 맞이해 그간 못 쓴 글을 실컷 쓰겠다- 라고 다짐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나의 생산성은 그리 뛰어나진 않았다.
일단 <잊혀진 성자들>의 자잘한 설정과 세계관 개요를 빼곡하게 정리해놓은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고.
그다음으로 다행스러운 점을 꼽자면-
‘<캐슬>의 집필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
지난번, 네드를 만나 카페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주 정도 된 시점인데.
그 사이에 속도가 제법 붙어서 100페이지 가까이 썼다.
이대로 부지런히 써서 올해 안에 완결하는 게 목표이긴 한데 어떨지 모르겠다.
‘···<캐슬>을 먼저 출간하면, <잊혀진 성자들>이 이 <캐슬>의 프리퀄이 되는 셈이겠네.’
그렇게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푹 빠져 있던 찰나, 어깨를 짚는 손길에 옆을 돌아보니.
통통한 체격에 도수 높은 안경을 쓴 로완이 서 있었다.
“로완, 왔구나.”
“아, 수업이 늦게 끝나서. ···그나저나, 유진.”
나를 보며 미소짓는 로완.
“스콜라스틱 전국상 탄 거 축하한다.”
“아, 고마워.”
“흐흐, 우리 아까 이미 다 축하했지이~”
“그래 그래, 유진한테 축하할 일이 너무 많아.”
자연스레 화제는 나의 조기입학, 그리고 아이오와대 작가워크샵 프로그램으로 흘러갔는데.
“이야, 그건 진짜 부럽다아···.”
“나도 나도.”
“거긴 기성작가들도 들어가기 어렵다고 들었어.”
당연하겠지만, 다들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분위기였다.
‘나도 여기 워크샵은 꼭 한 번 참석하고 싶었으니까.’
출판계에서 이 아이오와 작가워크샵의 명성이 워낙 상당한 데다.
회귀 전의 나도 누군가에게서 이 워크샵에 관한 얘기를 꽤 많이 들어 관심을 가졌던 터였다.
‘근데 그게 누구였더라.’
나랑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그때, 로완이 <토끼 남작> 얘기를 꺼냈다.
“유진, 근데 그··· <토끼 남작> 책 말이야. 처음에는 동생 선물로 만들었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책이 입소문을 타게 되었는지 궁금하다는 것.
그러고 보니 전에 로완이 자가출판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봤었지.
“로완, 너 전에 말했던 그 소설, 자가출판해보게?”
“어? 음, 그게···.”
조금 망설이는 녀석을 보며 나는 스마트폰으로 아마존 KDP 사이트에 접속해 보였다.
“다른 게 부담된다면 이런 방식은 어떨까.”
이펍 파일만 만들어서 업로드하면 아마존 측에서 종이책 제작까지 진행해준다는 설명에-
“···!”
로완의 눈이 희망으로 반짝거렸다.
*
클럽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니 네드와 아델이 먼저 와 있었다.
“오늘은 메밀국수 먹는 거 맞지?”
“배고파, 빨리 먹자.”
예전에는 모여서 라면을 끓여먹었다면.
이제는 건강을 위해 메밀국수를 비롯해 다양한 면요리를 돌아가며 먹기로 했는데.
후룩, 후루룩-
얼음이 동동 뜬 국물에 담긴 메밀국수를 먹으며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고.
“아 맞다, 나도 좋은 소식이 있는데. 이것 좀 들어봐.”
아델은 활짝 웃으며 핸드폰으로 노래 하나를 재생시켰다.
-In the labyrinth of his mind···.
속삭이듯 시작되는, 허스키하면서도 매력 있는 음색.
내게는 익숙한 아델의 목소리로 시작되는 걸 보니 그녀가 직접 쓴 노래인 듯했다.
“···.”
상당히 은유적인 가사와 거친 질감의 사운드가 이어지는 가운데.
나와 네드는 -젓가락을 잠시 멈춘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 노래에 홀린 것처럼 완전히 빠져들어 듣고만 있을 뿐.
“···.”
그러는 중간 중간, 아델은 우리의 눈치를 살피듯 열심히 눈알을 굴렸지만.
-that is the whisper of despair···.
노래가 다 끝난 후에야 우리 둘은 밀린 숨을 몰아 쉴 수 있었다.
“후우.”
“후와···.”
“어때 어때, 얘기 좀 해봐~”
반응을 궁금해하는 아델을 돌아보는 네드.
“이거, 진짜 니가 쓴 거야?”
“어어, 당연하지.”
“솔직히, 니가 전에 쓴 것들도 다 좋았거든? 근데 이건···.”
아델이 고개를 열렬히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진짜 미쳤음.”
“왁! 진짜? 진짜 진짜?”
이번엔 나도 말을 보탰다.
“어어, 나도 네드 말에 동의. ···지난 곡들은 이것보다 훨씬 대중적이지만, 너만의 색깔이 덜 드러난 느낌이었는데.”
“나만의 색?”
“응. 근데 이번 곡은 자기 색깔이 되게 강한데. 그게 묘하게 신선하면서도 귀에 쫙쫙 달라붙어.”
적당한 그루브에 파격적인 리듬.
거기에 묘하게 재즈 창법이 섞인 허스키한 목소리가 굉장히 중독성이 있다고 하자, 뛸 듯이 기뻐하는 아델.
“근데 이거 제목은 뭐야?”
네드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답하길-
“E.G.O.N.K.”
“···에곤 K라고?”
“아니 아니, 알파벳으로 읽어야지.”
“음, 근데 제목은 왜 그렇게-”
“진짜 모르겠어? 내가 전에 그랬잖아, 에곤 K 팬송 만들겠다고.”
그 말에 나와 네드의 눈이 커졌고.
“뭐? 잠깐만.”
“그럼 이게-”
멍한 눈빛으로 서로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그때 말했던 팬송이라고?”
“응응, 이미 사운드클라우드에도 올렸어!”
올린 지 벌써 일주일쯤 됐다는 것.
“오, 잘했네.”
“이번 건 잘될 것 같은 느낌이 팍 오는데?”
우리 둘이 신이 나 말을 쏟아내자, 아델은 의외로 차분하게 고개를 젓는다.
“너희들의 응원은 고맙지만, 이제는 너무 큰 기대를 하진 않으려고.”
“어? 아니 왜···.”
“벌써 포기하려고?”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가슴 앞에서 팔짱을 끼며 씩 웃어 보이는 아델.
“한 번에 잘 안 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겠다는 거지.”
“오, 멋진데.”
“그러게.”
“그치? 그리고 사실, 이제 겨우 몇 곡 쓴 게 전부인데.”
그 정도의 노력으로 대박이 나길 바라는 건, 순전한 요행을 바라는 것 아니겠냐고.
“사운드클라우드에 매일 얼마나 많은 곡이 올라오는데. 그래도 누군가가 내 노래를 꾸준히 들어주고, 코멘트를 남겨준단 것 자체가 너무 기쁘고 감사하더라고.”
그리고 언젠가, 그중 한 명이 이런 코멘트를 적어줬단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래.”
“꺾이지 않는 마음?”
“으응. 한국의 어느 연예인이 방송에서 한 말이라는데.”
케이팝과 한국방송을 좋아하는 사람 같다고 덧붙이는 아델.
“그 말이 엄청 인상깊어서 내가 책상 앞에도 붙여놨거든. 결과가 어떻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보려고.”
“멋있네.”
한마디하자, 나를 돌아보며 아델이 흥 웃는다.
“물론 유진처럼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나도 회귀자의 특권일 뿐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데.
아델의 표정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그냥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려고. ···그러니까, 유진은 멀티버스에서 작가로 만렙을 찍은 각성자인 거야.”
“멀티버스? 니가 멀티버스를 알아?”
“네드, 니 옆에 붙어 있다 보면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되거든?”
“이야 훌륭한데. 야 근데, 이 경우는 각성자가 아니고 회귀자라고 보는 게··· 잠깐만, 잠깐.”
뭔가 떠올랐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네드.
“이거 괜찮은데? 천재 작가 히어로!”
“뭐래.”
“노트북으로 뭔가를 쓸 때마다 그 능력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거지!”
“···."
“유진 디 어웨이큰, 이거 나중에 내 만화의 히어로로 등장시켜도 되냐?”
네드의 황당한 요구에 나는 혀를 찼다.
“맘대로 하든가.”
“너 지금 승낙한 거지? 나중 가서 딴 얘기 하기 없기다.”
“···그래.”
그건 그렇고, 아델이 은근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한순간 뜨끔했던 것을 떠올리며 남은 국수를 후루룩 먹는데,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뭐 좀 어이없는 얘기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한테 없는 재능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거나 질투하는 것보다 낫잖아?”
그 말에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아델. 너는 재능이 있어.”
아델의 30대 모습을 직접 보고 온 나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을 뿐더러.
“그래 그래, 애초에 혼자서 노래부터 작곡, 프로듀싱까지 다 할 줄 아는 고등학생이 얼마나 되냐?”
네드가 꺼낸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에 아델은 민망한지 말을 살짝 흐렸다.
“···뭐래.”
그리고 잠시 후.
-제일 먼저 국수를 다 먹어버린- 네드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돌연 새된 소리로 묻는다.
“야, 아델 너··· 사운드클라우드 확인해봤어?”
“응? 최근에 안 들어가봤는데.”
“봐봐.”
네드가 식탁 위로 올려놓은 핸드폰 화면을 보고 나 또한 눈을 크게 떴고.
“어? 이거 지금···.”
“왜, 왜 그러는데.”
뒤늦게 그것을 확인한 아델이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E.G.O.N.K (1 week ago) | 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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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댓글이 엄청나게 달린 것은 물론, 재생 횟수가 2만을 넘긴 것이 아닌가.
“왁! 말도 안 돼!”
아델의 입에서 즐거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
한편, 유진의 손에서 케빈 클레그의 손으로, 이내 <뉴욕타임스>로 넘어간 에곤 K의 인터뷰 기사는 빠르게 지면에 실렸다.
···온라인판과 오프라인판 1면, 그것도 메인기사로 실린 것이 그주 수요일의 일.
[에곤 K,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 무엇도 나의 본 모습과는 거리가 멀 겁니다 - 더뉴욕타임스]
이 오랜만의 인터뷰 기사 발표에 각종 SF팬포럼 및 SF서브레딧, 그리고 신설된 에곤 K 서브레딧은 그야말로 난리였다.
[1.3k 드디어!!!! 에곤k 인터뷰 기사 떴다!!!!!]
[그것도 심지어 NYT 인터뷰임
https://www.nytimes.com/2024/09/11/egon-k-interview.html]
└우와우와
└이게 얼마 만의 인터뷰 기사인가
└귀하다 귀해
···
작년에 단 한 건의 인터뷰 이후로, 처음 나온 인터뷰 기사에 팬들은 당연한 듯이 환호했는데.
그 내용을 읽고 난 반응은 둘로 갈렸다.
└흐으 기사 읽으니 영화판도 기대된다
└솔직히 난 <호수괴물>이 영상화가 되게 어려운 작품이라 생각해서 회의적이긴 한데···
└막성스 라미 감독이라면 믿을 만하지 않냐
└ㅇㅇ 에곤 작가님이 이렇게 얘기하실 정도면
···
영화 <호수괴물>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절반.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더 줘
└흐으 감질난다···
└다른 작가들은 인터뷰 들어오는 족족 다 하고 강연도 나가고 사인회도 하고 온갖 곳에 얼굴 다 비치는데 우리 작가는 왜케 보기 힘드냐
└근데 원래부터 신상 공개 안 하는 조건으로 s&f문학상 받은 거잖아
└그건 아는데 그래도 궁금함
···
그보다는 작가 에곤 K 개인에게 더 관심이 많은 부류였다.
이들은 그간 은연중 에곤 K의 모습을 -네드 밀러가 그린- 캐릭터 형태로 상상하고 있었는데.
└뭘 궁금해 난 이미 머릿속에 있는데
└ㅇㅇ 산전수전 다 겪고 손녀와 함께 호숫가에서 낚시하며 사는 인생 만렙 노인
└ㅋㅋㅋ 본인 피셜 그거 나 아니라잖냐
···
웬일로 작가가 나서서 ‘내 모습은 캐릭터와 다르다’하니 그동안 억눌러둔 호기심이 폭발해버린 것.
그리고 그 같은 발언을, 독자들은 -작가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받아들였다.
└본인이야 그렇게 생각하겠지
└근데 친구분은 닮게 그렸다고 생각할걸 XD
└ㅋㅋㅋㅋㅋ
└이거네 이거 ㅋㅋㅋㅋ
···
훗날 독자들에게 닥칠 충격을 최소화하고자, 오해를 줄여보려고 했던 유진의 시도가 무색하도록.
서브레딧에서는 에곤 K의 인터뷰 답변을 전혀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였다.
어쨌거나.
간만에 새로 나타난 떡밥에 다들 흥분해 신나하던 그때, 누군가가 이런 코멘트를 달았다.
└근데, 이 에곤 K 캐릭터를 에곤 작가 친구가 그려줬다며. 이거··· 그림체가 그 <토끼 남작>이랑 좀 비슷하지 않아?
└그게 뭐임
└토끼 남작이 뭔데
···
<토끼 남작의 모험>은 아동서 시장에서는 어마어마한 열풍을 일으키는 중인 베스트셀러이지만.
SF&판타지의 장르 독자를 비롯해, 대부분의 성인 독자층에게는 덜 알려진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이 수많은 코멘트 중 유일하게 맞는 말을 한 코멘트임에도-
└토끼가 남작이래 ㅋㅋㅋ 되게 귀엽다
└우리집 귀염둥이가 보면 좋아할 듯
└귀염둥이 굿즈는 안 나오냐 누가 좀 만들어봐라
└이미 있을걸?
└https://www.etsy.com/listing/119028/cute-egonk-granddaughter···]
└오 땡큐
아주 자연스럽게, 흔적도 없이 묻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