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81화 (81/126)

라이터스블록(1)

*

늘 그렇듯 정신 없는 한 주를 보낸 뒤 주말.

“···아, 이제야 좀 살겠네.”

나는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코랄빌 호수에 도착한 참이었다.

짐을 대충 내려놓고 천천히 심호흡하자 느껴지는 축축한 흙 내음과 은은한 물 냄새.

머리 위로 떨어지는 9월의 햇살은 따사롭고, 탁 트인 호수의 전경에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자리를 세팅해볼까.’

아버지에게서 빌려온 낚시의자와 간이테이블을 펼친 뒤 미리 충전해온 노트북을 올려놓는 것만으로 준비 끝.

“좋아, 어디 그럼···.”

나는 바로 전날 저녁까지 쓰던 <캐슬> 파일을 불러냈고.

이전에 쓴 부분부터 다시 한 번 훑어보기 시작했다.

[···고아 소년 라이언이 세상을 향해 내보이는 호기심과 지식욕은 확실히 성내에서는 보기 드문 종류의 것이었다.

예컨대, 그는 글자 몇 개를 읽을 줄 알았다.

흔히 ‘서쪽 문’이라고 부르는 대문 위에 그려진 어떠한 문양과, ‘서쪽 정원’ 근처에 세워진 팻말에 그려진 문양이 일치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문양이 ‘서쪽 방향을 의미하는구나’라고 짐작해가며 배워나가는 식이었다.

이후로도 라이언은 그런 유의 문양을 찾아다녔지만, 성 안에서 그런 것을 찾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물론 그 순간에도 라이언은 ‘문자’라는 것의 개념조차 알지 못했지만.

[소년을 제외한 주민 중 누구도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그날의 노동량을 빨리 달성하여 안락한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그리하여 해가 진 후에는 절대로 집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이 성이 어둠에 잠긴 모습을 보길 두려워하는 이들처럼 말이다.]

그것이 성의 주민들과 라이언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두 번째 차이점은 ‘허기’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의 영주는 할당된 노동량을 채우면 매일 빵 한 덩어리씩을 나눠주었다.

말이 빵이지 돌처럼 단단해 앞니를 이용해 조금씩 갉아먹어야 했고, 그마저도 다 먹고 나면 소년은 여전히 허기가 졌지만···]

이곳 주민들은 그 빵 한 덩어리로도 충분히 배불러하며 온종일 쉴 틈 없이 일할 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내, 고아 소년 라이언의 과거가 좀 더 등장한 뒤-

“···비밀 도서관.”

그래, 그것이 바로 내가 어제 쓰다가 멈췄던 부분.

라이언이 성 안의 비밀통로를 통해 ‘비밀 도서관’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이 비밀 도서관은 라이언이 성에서 탈출해 거대한 세계로 나아가는 데 가장 핵심적인 계기가 되는 장소.

150페이지를 바라보는 대목인데, 남들이 들으면 꽤 많이 썼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단 말이지.’

미리 짜둔 시놉시스상으로는 기승전결 중 ‘승’에 불과한 단계이니, 총 분량은 500~600페이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첫 장편인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가 250페이지 정도였음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수준.

그리고 예전에 <잊혀진 성자들>을 쓸 때도 그랬지만, 이렇게 방대한 분량의 장편을 쓸 때는-

‘필연적으로 슬럼프에 부딪히기 마련이지.’

여기 호수까지 차를 끌고 나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작가가 종종 마주하게 되는 슬럼프, 혹은 집필의 벽을 영어로는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 라고 하는데.

‘어떤 이야기를 쓸지는 다 구상해놨으니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지금 겪는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그러니까, 내 머릿속의 ‘라이언이 비밀도서관을 발견하는 장면’은 무척이나 근사하고 생생하며, 보는 이의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긴장감이 살아 있는데.

“막상 글로 표현해놓고 보니 그 맛이 제대로 살아나지가 않는단 말이지.”

그 장면을 쓰고 지우길 반복하다 보니 진이 다 빠져버렸고.

주말을 맞이해 조금 여유가 생긴 지금 여기까지 나온 것이었다.

‘이럴 때는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

그런 마음으로 첫 문장부터 <캐슬>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30분이 지났으려나.

“후우.”

하도 집중해서 그런지 눈이 살짝 뻑뻑하다. 읽던 것을 멈추고 가볍게 고개를 돌려가며 스트레칭을 해줬다.

‘요즘 자꾸만 스트레칭하는 걸 잊게 되네.’

독자들에게는 10페이지 읽을 때마다 한 번씩 하라고 해놓고, 막상 나는 지키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법.

낚시용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풀고 있으려니, 주변의 낚시꾼 아저씨들이 내 쪽을 흘긋거린다.

‘신기한가 보네.’

다들 낚시에 열을 올리는 와중 어린애 하나가 와서 노트북을 붙들고 있으니.

‘그건 그렇고.’

처음부터 다시 죽 읽어봤음에도, 여전히 이 문제의 장면을 어떻게 이어나갈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영감이란 건 원래 간절히 원할 때 더 오지 않는 법이니까.’

그런 생각에 후, 한숨을 쉬고는 집에서 가져온 레모네이드를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새어머니가 직접 담그신 거라 그런가, 청량하고 맛있네.’

친정 어머니 그러니까 브리짓 할머니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만들었다는 레모네이드.

탄산음료를 아예 끊지는 못하겠다는 새어머니가 콜라 대용으로 생각해낸 것이었다.

“크, 좋다.”

새콤한 청량감을 온몸으로 만끽하던 그때, 문득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비숍 작가님께 연락해볼까.’

그리고 잠시 후.

전화를 건 지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노작가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오, 이게 누구인가.

“비숍 작가님! 잘 지내셨어요? 제가 혹시 바쁠 때 방해한 건 아닐지.”

-방해라니, 오히려 반대인걸! 안 그래도 내가 조만간 연락하려고 했는데 잘됐구만. 그건 그렇고, 어쩐 일인가?

창작자들이 한 번씩 마주하게 된다는 벽 앞에 선 내게는, 구세주 같은 인물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나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자, 비숍 작가님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

-흐음, 그래. ‘라이터스 블록’이야 내 전문분야이지. 솔직히 말하면, 나도 <스타라이트 크로니클>을 쓸 때 그런 상황을 수없이 맞닥뜨렸네.

“작가님도··· 벽에 부딪힐 때가 있으시다고요?”

-그럼. 백 번은 족히 저 지긋지긋한 벽을 마주했을 거야.

“···.”

-그것만큼은 내가, 해리슨의 배틀스타 갤럭티카 피규어를 두고 맹세할 수 있네.

해리슨 편집장의 피규어가 왜 여기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일단 집필 환경을 바꾸는 건데. 자네는 그걸 이미 했는데도 잘 안 된다니 그건 제쳐두고.

집필 환경, 집필 도구, 아니면 집필 파트너···.

이런 저런 걸 다 해봤는데도 안 된다, 그럴 때 제일 좋은 것은-

-벽에, 페인트를 뿌려보게나.

“···네?”

갑자기 튀어나온 엉뚱한 말에 멍하니 반문하고 말았다.

그러자 스마트폰 저편에서 들려오는 껄껄 웃음소리.

-놀라기는. 아직 노망난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자네, 니콜라스 후퍼라는 작곡가를 아나?

<해리 포터> 시리즈의 음악 감독으로 유명한 영화음악 작곡가.

그의 어느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속편을 작업할 때, 관객들의 높은 기대 때문에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고 하더군. 그때 그가 택한 방법이 바로-

“벽에, 페인트를 흩뿌리듯이 작업했다는 거로군요.”

-그렇지.

거대한 벽에 가로막혔을 때 좌절하여 그대로 멈춰버리는 것이 아니라.

-페인트를 뿌리듯 머릿속의 생각을 비워낸 채 가벼운 마음으로,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고. ···생각할 수 있는 온갖 방법으로 곡을 만들어봤다고 하더군.

그래서 잘려나간 B컷들이 폴더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것.

-나도 어떤 의미로는 이 후퍼와 비슷하네. 다양한 방식으로 다 집필해보고, 그중 마음에 드는 것만 고르고 나머지는 싹 다 버려버리지.

“···정말요?”

-그래, 내가 이래 봬도 주변 작가들 사이에서는 ‘라이터스 블록 전문가’라고 불리거든.

껄껄 웃은 비숍 작가님이 말을 잇는다.

-사실, 꽤 많은 작가들이 벽에 부딪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미리 짜놓은 경로를 너무 고집하기 때문이야. 자네도 시놉시스를 빡빡하게 짜는 스타일이지?

“와, 소름인데요.”

-흐흐, 척하면 척이지. 작품만 읽어봐도 그게 보이기도 하고, 사실은 나도 비슷한 타입이라 잘 알거든. 근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장 실수할 수 있는 부분이 뭐나면.

등장인물들이 움직이는 대로 이야기를 굴려 나가기보다, 내가 이 이야기의 ‘설계자’라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내 인물들을 내가 짜놓은 대로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한다는 거지.

“···.”

-그러면, 글이 한순간에 생명력을 잃기 마련이야. 그러면 문득 쓰는 나 자신도 왜 이렇게 재미가 없지? 라며 반문하게 되는 거고.

···바로 거기서부터 벽에 부딪히고 슬럼프를 겪게 된다는 것.

“···확실히, 짚이는 바가 있네요.”

-흐흐,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구만. 그건 그렇고, 나도 언제 한 번 중서부에 자네를 보러 가야 하는데.

“그러게요, 안 그래도 저희 클로이가 비숍 할아버지 꼭 보고 싶다 하던데.”

언젠가, 내가 아주 존경하는 작가님이라며 비숍 작가님의 사진을 보여줬더니.

‘우와~ 싱기하다.’

‘뭐가 신기해?’

‘아니 아니, 이 하부지 말이야~’

내가 애지중지하는, <스타라이트 크로니클> 소장판의 책날개에 실린 비숍 작가님 사진을 손으로 짚은 클로이가 해맑게 웃었다.

‘왜 산타하부지가 여기 있어? 싱기해~’

‘···.’

그 같은 일화를 전해주자-

-으하하하, 산타할아버지···. 이거 이거, 언제 한 번 자네 집의 귀염둥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러 가야겠는데?

비숍 작가님은 지금껏 들은 중 가장 시원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좋아했다.

···그로부터 5분 후, 즐겁게 통화를 마친 뒤.

나는 다시금 호수를 돌아보았다.

숲의 그림자가 너울거려 이지러지는 수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안개에 휩싸인 거대한 성이 문득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 희미한 그림자가 이 호수 위로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 비밀통로의 끝에 자리한 곳은, 퀴퀴한 책 냄새가 나는 골방에 가까운 공간.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고서적들이 발끝부터 천장에 이르기까지 빼곡히 꽂힌 거대한 서가 앞에서 라이언은 우뚝 서고 말았다.

읽을 수 있는 글자는 한정적이었지만···.]

타닥, 타다다닥- 키보드의 타이핑을 이어나갔다.

*

호숫가에서 유진이 다시금 집필에 몰두할 즈음, 비숍은 방금 전의 통화가 남긴 여운을 곱씹는 중이었다.

“···도움이 되면 좋으련만.”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작업실 3층.

책상 위에 인쇄본 원고와 펜, 키보드 따위가 어지러이 놓인 가운데, 비숍은 유진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그래, 자네 집 귀염둥이에게 안부 좀 전해주게. 여기, 캘리포니아의 산타 할아버지도 잘 지내고 있다고.’

유진이 <토끼 남작>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라는 막내동생 클로이.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토끼 남작 얘기를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더군요.’

‘허허, 어린애들도 덕질은 함께하는 게 더 즐겁다는 걸 알기 마련이지.’

그리고 또 하나 꺼낸 제안이 있었는데-

‘아 맞다, 내가 블로그에다 <토끼 남작> 얘기 좀 써도 되겠나? 이미 지금도 너무 잘 되고 있는 책이지만, 가끔은 우리 판타지 SF 독자들도 이런 걸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물론이죠! 이거 새로운 독자들이 잔뜩 유입되겠는데요? 너무 치트키 아닌가 모르겠는데요, 하하.’

‘치트키는 내가 아니라 자네가 쓰는 것 같던데? 어쩌면 그렇게 재밌는 아이디어가 샘솟는지 모르겠군.’

농담처럼 말했지만, 노작가는 <토끼 남작>을 읽으며 내내 감탄했던 터였다.

‘그나저나, 이거 캐릭터 상품 같은 건 안 나오나?’

‘아, 안 그래도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 담담한 대답에 비숍은 놀라면서도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것 봐. 내가 몇 십 년 만에 이룬 걸 자네는 벌써 이뤘구만.’

‘에이, 분야가 다르잖아요.’

그러면서 말하길, 베니 인형이 나오면 제일 먼저 그에게 보내주겠다는 것.

비숍이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 그런데 작가님, 요즘··· 걷기는 계속하고 계신 거 맞나요? 미스터 팀 말로는 하루 걸음수가 자꾸 줄어들어서 걱정이라던데-’

‘어어, 그럼 물론이지! 걱정 말게나! 아, 이런. 에이전트가 연락을 해왔군··· 미안하지만 다음에 또 통화하지.’

‘어? 그, 작가님-’

‘자네도 건강 잘 챙기고, 허허허!’

그렇지, 그렇게 얼렁뚱땅 전화를 끊었더랬다.

회상을 마친 노작가의 시야에, 책상에 올려둔 화사한 그림책 한 권이 들어왔다.

‘···<토끼 남작의 모험>.’

이 책을 읽고서,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유진이 지닌 다채로운 재능에 놀랐던 터다.

한 명의 작가가 한 가지 스타일의 글을 꾸준히 쓰는 것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여러 가지 스타일의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놀라운 재능이니까.

‘알면 알수록, 새로운 면모에 감탄하게 되는구만.’

노작가는 후,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모니터로 시선을 향하며 자세를 고쳐앉았고.

이내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곧이어 다각다각, 들려오는 타건음.

[세상에 맹세하건대, 나는 결단코 토끼가 작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유진에게 말했듯.

자신의 블로그 ‘어느 노인의 낙서장’에 올리기 위한 <토끼 남작의 모험> 리뷰의 첫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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