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82화 (82/126)

라이터스블록(2)

그건 그렇고, 랜든 비숍은 유진과 연락할 때면 늘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마음 맞는 선후배 작가들과 신나게 교류하던 시절이 떠오른달까.

그래서인지 요즘은 집필에 아주 불이 붙은 상태.

그러니까 지난 5월 도서전 때, 유진에게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동명의 단편을 기반으로 하는 신작 장편 <어둠 속의 방문자> 트릴로지(3부작)을 구상하고 있다고.

‘그때 말은 구상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이미 대략적인 구상을 끝낸 뒤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간 참이었다.

그로부터 넉 달이 지난 지금은 거의 3분의 2가 완성된 상황.

아무리 구상을 빡빡하게 해놨다고는 해도, 이 정도로 속도가 나오는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는데.

‘작가 생활 초기에나 가능하던 속도인데 말이지.’

갓 SF 문학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적 신인의 열정과 패기를 되찾은 기분.

그 덕에 랜든 비숍은 요즘 하루하루가 즐겁기 그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던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 팀이 들어왔다.

“저 왔습니다, 작가님. ···유진 작가님과 통화하셨나 보군요.”

“얼굴만 봐도 알겠나?”

“그럼요, 얼굴에 쓰여 있는데요. 너무 즐겁게 통화하셨다고.”

유진과 교류할 때면 표정부터가 다르다라는 비서의 말에 비숍이 멋쩍게 웃던 그때.

“근데, 유진 작가님이 산책 얘기는 안 꺼내던가요?”

“응? 뭐가, 무슨 말인가?”

말하자면 이 부분이 유일한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글을 쓰다 보면 운동할 짬이 안 난단 말일세.”

“짬이 안 나긴 뭘 안 나십니까, 제가 다 지켜보고 있는데.”

“아 맞다, 이 얘기를 한다는 걸 깜박했네.”

“무슨 얘기요?”

비서 팀이 노작가의 속내를 알면서도 짐짓 넘어가주자.

“그, 출간 계약 얘기 말일세.”

비숍이 쓰고 있는 이 <어둠 속의 방문자> 트릴로지를 두고 출판사들은 이미 물밑에서 선인세 경쟁을 시작했다.

일을 크게 벌릴 생각이 없어 기존에 작업했던 출판사들하고만 대외비로 진행했기에 기사는 아직 나지 않은 상태.

그중에서도 <스타라이트 크로니클>을 비롯한 장편 대표작을 낸 초대형 출판사 두 곳과, 오랜 전통의 장르전문 출판사 SFF프레스가 특히 격렬하게 경쟁 중이었는데.

누가 봐도 SFF프레스에게 불리한 이 싸움을 두고, 비숍은 -자신에게는 친정이나 다름없는 이 오랜 전통의 장르 전문 출판사를 위해- 한 가지 특이한 조건을 내건 터였다.

‘소장용 하드커버판은 가급적 SFF프레스에서 진행하고, 페이퍼백과 일반용 하드커버판, 그리고 이북 권한은 다른 출판사와 진행하고 싶군요.’

판본에 따라 출판사를 달리 하는 것은 굉장히 드문 경우였지만, 비숍 정도의 네임밸류가 되는 작가들은 가끔씩 쓰는 방식이기도 했다.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는 이 <어둠 속의 방문자> 트릴로지를 통해, SFF프레스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일 테니까.

그리고 랜든 비숍이, 이 얘기를 유진에게 해주고 싶었던 이유는-

“유진 작가님, 그러니까 에곤 K가 좀 더 큰 무대로 나갈 시점이 됐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래, 그 말이 맞네.”

제 머릿속을 정확하게 꿰뚫어본 듯한 비서의 말에 노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에곤 K’는 쭉 SFF프레스와 진행을 해왔는데, 이제는 조금 더 큰 곳에서 책을 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

‘물론 담당 에이전트도 실력 있는 사람 같고, 유진의 성향을 보면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업계 선배로서 그 정도 조언을 해주는 건 나쁘지 않겠지, 결론을 내린 것.

“뭐 그래도, 그건 집필을 마무리할 때쯤 말해줘도 되겠지.”

“···네?”

비숍 자신이 보기에, 지금 유진은 자신의 작품에 완전히 몰입해버린 것 같으니 말이다.

스마트폰 너머로도 느껴지던 그 열정을 떠올리며 노작가가 미소를 지었다.

*

···벽에 페인트를 뿌리는 식으로 작업하라.

결론만 말하자면, 비숍 작가님의 조언은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물론 한마디 조언으로 뭔가가 드라마틱하게 바뀌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때로는 한마디 말, 혹은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 많은 차이가 만들어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리고 비숍 작가님은 이 조언을 좀 더 상세하게 풀어서 설명해줬는데.

-접근 방식을 바꿔보게나. 초장편이라면 등장하는 캐릭터가 제법 많지 않나? 주인공의 시선으로 진행되던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의 시점으로 전개해보란 말이지.

그게 아니라면, 이 세계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나갈 수도 있다는 것.

-자네 작품의 제목이 <캐슬>이라며. 그렇다면 이 캐슬은 아주 특별한 공간일 거야, 안 그런가?

그러니 이 공간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 챕터를 써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며.

-가지를 그쪽에서 뻗쳐보게. 그렇게 따라가며 쓰다 보면, 자네가 이미 구상해놓은 장면이 자연스레 나올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그보다 훨씬 좋은 장면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

그리하여 나는 비숍 작가님이 알려준 대로 뭐가 됐든 전부 던져보았다.

내 머릿속에 완벽하게 짜둔 장면을, 100퍼센트 그대로 재현해내려고 애쓰기보다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는 식.’

시점을 바꾼다든가, 시간을 거슬러가는 식의 서술을 해나간다든가.

별로인 것은 쳐내버리고, 엑기스만 쏙쏙 뽑아내는 식으로 장면을 축약하기도 했고.

그리고 그렇게 자유롭게 던지다 보니 어느샌가 조금씩 더 <캐슬>의 세계에 몰입하게 된 것은 물론.

“어? 이거··· 생각보다 너무 좋은데?”

손끝에서 저절로 피어난 새로운 장면을 보고 전율을 느끼는 순간마저 찾아왔다.

이전에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글을 쓴 적이 없어서 몰랐지만, 이것 또한 생각 외로 좋은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으니.

···마치, 무기를 하나만 쓸 수 있었던 전사에게 또 하나의 무기가 생겨난 기분이라고 할까.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간, 정말로 쉴 새 없이 글을 썼다.

쓰다가 벽에 막히거나 장애물이 등장한다 싶으면, 그것을 무지막지하게 힘으로 부숴버리거나 벽에다가 머리를 쿵쿵 찧는 대신-

‘다른 길로 돌아가거나, 아예 건너 뛰는 식.’

덕분에 집필 속도가 상당히 붙어 진도가 빨라졌고, 정신차려 보니 어느새 9월 하순이 되었다.

*

지금 이곳은 대형서점 프레리라이트 2층의 카페.

맞은편 자리에 앉은 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음, 유진.”

그것은 덩치가 있는 체격에 도수 높은 안경과 폴로 셔츠를 애용하는 로완.

“안 그래도 바쁠 텐데 내가 괜히 귀찮게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평일 오후라 실내가 한산하기 그지없는 가운데, 테이블에 로완의 노트북을 펼쳐놓은 참.

“바쁘긴 뭘. 내가 전에 그랬잖아, 자가출판해본 담에 경험을 공유하겠다고.”

“···그래.”

내가 로완과 둘이서 이곳에 있는 이유.

그건 얼마 전, 나를 통해 아마존 KDP 사이트의 존재를 알게 된 로완이 본인의 중편소설을 전자책으로 만들어보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는데-

‘음, 내가 프로그램을 못 다뤄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만들긴 했는데 영 모양새가 안 나는 것 같아서.’

그 말에 내가 -출판사에서 이펍 제작 프로그램을 다뤄본 적이 있는 만큼- 한번 봐주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기 앞서.

‘만나기 전에 미리 읽어보게 원고 좀 보내줄래?’

‘어? 내, 내 원고를···.’

‘응. 그래야 어떤 식으로 만들지 감을 잡지.’

로완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원고를 보내줬고, 나는 이 자리에 오기 전 모두 정독하고 온 터였다.

“로완.”

“응?”

“내가 보기에 이 책, 전문가한테 의뢰해서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

“···뭐?”

순간 당황한 로완에게 나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일단, 인터넷에는 자가출판 도서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디자이너들이 아주 많고.”

물론 새어머니에게 부탁하는 것도 방법이긴 하지만, 그녀는 아동서 전문인 데다 내가 이런 부탁을 하면 십중팔구-

‘유진 네 친구에게서 돈을 받을 수는 없지. 내가 만들어줄게.’

···라며 무료 봉사를 자처하실 것 같기 때문이다.

그건 케이트를 위해서도, 로완을 위해서도 딱히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다가.

“어? 생각보다 비용이··· 별로 많이 안 드네.”

나는 이런 프리랜서 디자이너들과 직접 컨택할 수 있는 사이트를 알려줬는데, 그곳을 살펴보던 로완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어, 요즘은 워낙 북디자인 프리랜서가 많기도 하고, 소설책은 손이 덜 가는 편이다 보니 가격이 괜찮거든.”

“그러게, 이 정도면 용돈으로도 충분히 의뢰할 수 있겠어.”

그리고 로완 자신도 공들여 쓴 글인 만큼 좀 그럴싸한 형태로 만들고 싶었다는 것.

그 말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사실 나도, 공들여 쓴 글이라는 게 확 느껴져서 그런 제안을 한 거라.”

“어, 뭐라고?”

“니가 쓴 <다중세계에서 들려오는 멜로디> 말야.”

“···.”

그 말에 로완이 숨을 흡 들이켰다.

···마치 온갖 종류의 비판에 미리 대비하는 사람처럼.

‘그러고 보면 전에 문예창작 클럽에서 합평할 때도 유난히 긴장하는 것 같던데.’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재밌더라.”

“어··· 어?”

재밌다는 말이 의외인지, 멍하니 소리 내는 로완.

“재밌다니까. 감동적이기도 하고. 물론 장르는 좀 불분명하긴 한데, 오히려 그게 더 매력포인트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 진짜로?”

“응. 일단, 이게 중심소재가 ‘멀티버스’인 거잖아? 히어로물이나 SF에서 흔히 쓰일 법한 소재를, 이런 식으로 풀어낼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서···.”

눈을 크게 뜨고 내 말을 경청하는 로완의 표정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듯한 모습이랄까.

“주인공이 만들어놓은 가짜 세계가 무너지고, 주인공의 어린 딸이 치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그 순간이 클라이맥스잖아. 거기서 전율이 쫙 느껴지더라고.”

“정말로, 재밌었다고?”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간절한 표정으로 듣던 로완은, 그 말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왜, 그냥 하는 말 같아서?”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마치, 자신에게 그런 글을 쓸 재능이 있을 거라고 믿지 못하는 사람처럼.

‘음, 로완은··· 부모님이 많이 엄격하시다고 들었어.’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언젠가 제이든에게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본인이 쓴 글을 부모님에게 검사받아야 한다더라고.’

‘글을··· 검사받는다고?’

‘응, 어릴 때부터 그랬다던데? 근데 막 문장 단위로, 단어 단위로 꼬투리를 잡아서 뭐라 뭐라 하는 것 같더라. 으으, 나 같으면 벌써 집을 나가버렸을걸.’

로완이 클럽활동에서 그런 식으로 감평하는 것도 아마 부모님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라고 제이든은 조금 걱정스러워했더랬다.

나는 일부러 더 힘주어 말했다.

“로완, 난 니가 굉장히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

“그리고 사실.”

굳이 아마존 KDP 사이트니, 표지 제작 프리랜서를 알아봐주겠다며 오지랖을 부린 것도-

“나는··· 이상한 병이 있거든.”

“병?”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는 병.”

“···.”

가만히 내 말을 듣던 로완은 한 박자 늦게 풋, 웃음을 터뜨리더니.

“유진.”

“응?”

“진짜 고맙다.”

“이 정도로 뭘.”

“아니, 이것뿐이 아니고···.”

늘 무표정하던 통통한 얼굴에 희미한 기쁨의 빛이 떠오른 가운데.

로완은 조금 머쓱해하며 제이든의 글을 합평하던 때 얘기를 꺼냈다.

“내가, 음, 합평할 때··· 듣는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서 지적했었잖냐.”

“요즘은 많이 달라졌던데?”

내 말에 픽 웃으며 안경을 치켜올리는 로완.

“뭐, 노력하고 있으니까.”

“보기 좋네.”

“그래. 여튼···.”

로완은 괜찮은 프리랜서 디자이너에게 이 <다중세계에서 들려온 멜로디>의 데이터 제작 의뢰를 맡겨보겠다 했다.

그런 친구 녀석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드는 생각.

‘언제였더라, 아버지가 그러셨나.’

네드나 아델도 그렇고, 내 문예창작 클럽 친구들도 그렇고.

유진 네 주변엔 참 재능 있는 친구들이 많구나- 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맞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의 삶이란, 평생토록 그 재능의 정체를 찾아 헤매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 재능이 무엇인지 찾아낸 후에도, 그것을 제대로 키워내기까지는 참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말이다.

‘마치, 꽃이 피기 위해서는 적절한 토양에 충분한 물과 햇빛이 공급돼야 하는 것처럼.’

로완 또한 그만의 뛰어난 재능을 온전히 피워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던 그때.

핸드폰이 지잉- 진동하더니 익숙한 이름에게서 온 메시지가 떴다.

[케빈_클레그 : 유진 작가님! <멸망한 세계의 피터팬> 영상화 옵션 진행상황 보고드립니다]

내 소설 <멸망한 세계의 피터팬>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의 판권.

그 판권의 옵션을 두고 여러 중대형 제작사들이 경쟁에 뛰어들었다고 들었는데.

[케빈_클레그 :  지금 분위기로는 상당한 금액의 여섯 자릿수 딜이 성사될 것 같습니다!]

···여섯 자릿수 딜이라니.

반가운 소식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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