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회(1)
*
9월 마지막 주의 월요일 오후.
미스터 케빈에게 반가운 연락을 받은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난 지금, 나는 익숙한 대형 카페 2층의 미팅룸에서 각종 보고를 듣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의 영상화 옵션 계약이 최종 체결되었습니다 작가님.”
미스터 케빈이나 나나, <피터팬>은 급하게 계약하기보다는 적절한 시기를 봐가며 옥션을 여는 것이 좋을 거라는 것에 동의했는데.
‘여기에 조금 까다로운 특약을 추가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영화 제작사가 판권을 취득한 이후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기까지의 유예기간을 뜻하는 ‘옵션 기간’.
이 옵션 기간이 짧을 수록, 원작이 실제적으로 스크린으로 옮겨질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봐도 무방한 만큼-
‘옵션 기간을 1년으로 한정해보겠습니다, 작가님.’
···그리고 이달 초, 영화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시사회가 눈앞으로 다가온 지금이 바로 그 적기라고 판단한 케빈은 <피터팬>의 판권 옥션을 오픈했다.
제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경쟁에 뛰어들었고, 그리하여 현재까지 MGM, 라이온스게이트, 뉴라인시네마 같은 걸출한 중대형 제작사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최종 낙찰사는 유서 깊은 영화제작사 MGM, 옵션 비용은-
“85만 달러입니다.”
“···.”
85만 달러라면 한화로는 11억을 상회하는 금액.
···애초 기대치가 높아져 있던 내게도, 85만 달러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엄청난데요?”
“하하, 이게 아무래도 박빙의 경쟁이 펼쳐지다 보니.”
앞서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때와 달리, <피터팬>은 블록버스터 영화에 어울리는 서사인 만큼 덩치 큰 제작사들이 탐을 낸 덕분이었다는 것.
“···.”
옵션 딜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차근차근 들은 후에도, 놀라움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좀 얼얼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회귀 이전에 <잊혀진 성자들> 당시 천문학적 단위의 금액이 쉴 새 없이 찍힐 때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통장 속의 금액이 금새 덩치를 불려나가는 건,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리고 이처럼, <피터팬>의 옵션 계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발표되자마자 다양한 곳에서 기사가 쏟아지는 중이었는데.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에곤 K, MGM과 여섯자릿수 무비딜 체결]
[네뷸러상 수상부터 대규모 무비딜까지··· 파죽지세의 SF신인, 에곤 K의 다음 행보는?]
[대형 제작사 MGM,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스크린으로 옮긴다]
···
그 덕분일까.
기존의 일간지나 문학, 출판 관련 전문지는 말할 것도 없고, 온갖 매체에서 기사 인터뷰 요청이 쏟아져 들어온 상황이었지만.
“늘 하던 대로 정중히 거절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아 그리고···.”
헤벌쭉 웃은 미스터 케빈은 또 하나의 좋은 소식을 들려줬다.
“자, 이게 바로 ‘토끼 남작 베니’의 봉제인형 디자인 초안인데.”
“···!”
해즈브로에서 이 <토끼 남작>의 캐릭터 상품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했던가.
덕분에 빠른 속도로 나온 디자인 초안은, 네드가 그린 ‘베니’와 똑 닮은 동시에-
“으흐흐, 너무 귀엽지 않나요 작가님.”
“···진짜 귀엽네요.”
하얀 털이 보송보송한 토끼가 검은 코트와 바지를 갖춰입고 당근 검을 든 모습이라니.
케빈의 말마따나 정말 귀엽기도 하고, 만지면 따뜻하고 부드러울 것 같달까.
‘아 얼른 클로이한테도 하나 사주고 싶다···.’
이걸 안고 있는 동생의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
그로부터 다시 꼬박 한 주간, 나는 <캐슬>의 집필에만 푹 빠져서 지냈다.
···쓰다가 막히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비숍 작가님의 충고를 떠올려가며 계속해나갔고.
덕분에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써나가던 시점-
-혹시 이거 봤니 유진! 그, SF거장이라 불리는 랜든 비숍 작가님이!
<토끼 남작의 모험>을 담당하는 마리사네 아버지, 대니얼 앤더슨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와 계약을 맺은 뒤, 마리사네 아버지는 갑자기 ‘작가님’이라며 극존칭을 쓰려 했지만.
‘그럼 내가 불편하단 말이지.’
클로이 절친의 아버지이니만큼 나는 원래대로 편하게 대해달라고 요청한 터였다.
-본인 블로그에 <토끼 남작의 모험> 리뷰를 올리셨어!
마리사네 아버지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경험 많은 어른처럼 조언해주시더니.
이제는 연락할 때마다 목소리 톤이 한 톤은 더 높아지는 느낌이었다.
“아, 네. 안 그래도 저도 그거 보고 너무 반가웠는데.”
-반갑다 정도가 아니지! 비숍 작가님은 SF&판타지 장르에선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분인데···.
나와 비숍 작가님 사이의 친분을 전혀 알 리가 없는 마리사네 아버지의 말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흘 전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비숍 작가님이 <토끼 남작> 리뷰를 써주시기로 한 걸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작가님, 작가님! SF서브레딧 혹시 보셨나요!’
미스터 케빈의 메시지를 받고 SF서브레딧에 들어가보니, “랜든 비숍과 토끼 남작이라니”라는 식의 반응이 쏟아져 나오는 중이 아닌가.
그리하여 완성된 블로그 포스팅의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본격적이었고-
‘와, 작가님 이거 진짜··· 너무 영광인데요?’
‘하하, 영광은 무슨. 책이 좋으니 절로 글이 써지더군.’
그 길로 비숍 작가님께 연락드려 감상을 얘기했으니까 말이다.
이 <토끼 남작> 리뷰를 작성하겠다고 내게 얘기하신 게 한참도 더 전이라는 걸 떠올리면, 이 글에 생각 외로 꽤 공을 들이신 듯했다.
마리사네 아버지의 신난 목소리가 스마트폰 저편에서 이어졌다.
-하하, 덕분에 새로운 독자가 잔뜩 유입되고 있는 분위기야. 장르 독자팬들은 비숍 작가님이 이 책을 읽었다며 다들 놀라는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우리의 <토끼 남작>도 큰 의미로 보면 판타지 장르가 아니냐며 껄껄 웃는 마리사네 아버지.
-이번에 2권 원고를 읽는데, 브론토사우르스가 떠오르더구나···.
자신 또한 어릴 적 공룡박사였는데, 브론토가 이제는 쓰이지 않는 학명이 됐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는 그의 말에-
“이제 브론토 다시 등장할걸요? 언제였더라, 아파토랑 브론토가 완전히 다른 공룡이라는 게 밝혀져서···.”
이른바 백 년 만에 이름을 되찾았다는 얘기를 들려주자, 마리사네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셨다.
-이젠 우리 마리사에게도 브론토 얘기를 들려줘도 되겠구나 하하하. 아, 그건 그렇고 오늘 연락한 건.
···<토끼 남작의 모험 2권 : 공룡 왕국>의 출간일이 10월 중순으로 잡혔다고 알려주기 위해서라는 것.
더불어 영국의 맥밀란 산하 머핀북스 또한 비슷한 시기에 1권과 2권을 동시 출간한단다.
-그쪽과 협력해서 합동 이벤트를 진행 중인데, 혹시···.
곧바로 이어진 그의 제안에, 나는 한순간 눈을 크게 떴다.
“사인회요?”
-그래, 보통 저자 사인회를 많이 하잖니? 특히 아동도서 사인회는 음, 뭐라고 할까. 약간 어린이날 행사 하듯 이벤트처럼 재미나게 진행하거든.
지금껏 어떤 식의 이벤트를 해왔는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은 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그 부분은 저도 네드랑 케이트랑 같이 의논해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탁-.
그것을 끝으로 전화를 끊자, 네드와 아델이 나를 돌아보았다.
“유진, 갈 준비는 다 됐어?”
“나 다 챙겼음!”
나보다 더 신이 난 둘을 보며 픽 웃었다.
“그래, 가자.”
*
가을이 완연해진 토요일 낮.
우리 셋은 차를 타고 출발한 참이다.
목적지는 아이오와시티 중심가에 위치한 잉글러트 극장.
오래된 극장을 개조한 곳으로, 다양한 인디영화의 프리미어 상영회가 열리기도 하는 상징적인 장소인데.
‘아이오와시티에서··· 시사회가 열린다고요?’
영화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프리미어 상영회.
기자와 평론가를 중심으로 하는 전문가 시사회는 이미 며칠 전 LA에서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으며.
‘네. 관객 시사회는 특별히 아이오와시티에서 하기로 했는데.’
이 영화를 코랄빌 호수에서 촬영한 만큼, 아이오와주당국이 이 코랄빌 호수 홍보를 위해 이 아이오와시티에서 특별 시사회를 하자고 제안해왔단다.
‘물론, 막성스 라미 감독님도 그 제안을 굉장히 반기셨고요. 그 이유야 작가님도 아시겠지만-’
‘저, 아니 에곤 K가 이 아이오와시티에 거주 중이란 걸 감독님도 알고 있으니까.’
‘하하, 맞습니다.’
···라미 감독님의 그런 배려가 몹시 고마운 가운데, 두 친구들을 데리고 시사회장으로 가게 된 것이다.
“우와, 특별 시사회라니!”
“흐으, 나 이런 거 처음이야.”
“나도 나도. 흐흐흐,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우리가 다 두근거리냐.”
부우웅-
극장으로 향하는 와중 네드와 아델은 내게 <캐슬>의 진행 상황을 물었는데.
“뭐? 그새 반이나 썼다고?”
네드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아델은 그 이상으로 놀란 모양이었다.
“세상에, 너··· 인간 맞아?”
“말이 심한걸.”
“아니 아니, 나 진짜 소름 끼쳤단 말야. 이 정도면 그냥 글 쓰는 기계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그게 무슨 말이야.”
“주7일 내내 단 하루도 쉬지 않으면서 글만 쓰는.”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냐- 라는 말에 아델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그리고 애초에 그 말은 틀렸어.”
“틀리다니, 뭐가.”
“그러니까, 내가 말한 절반이라는 건 완벽하게 썼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운전대를 잡은 채 나는 이제 겨우 초고의 절반가량 썼을 뿐이라고 설명했지만, 둘은 딱히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
“진짜 날것 그대로의 원고라니까? 이걸 독자들이 읽을 만한 수준으로 만들려면 또 한참 걸린다는 거지.”
“그래 봤자 넉넉잡아 한 달, 뭐 이러는 거 아냐?”
“그러게, 너 전에도 1주, 2주 만에 퇴고했었잖아.”
“···그때랑 지금이랑 페이지 수가 같냐.”
아무리 속도가 빨라도 550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을 그렇게 단기간에 퇴고할 수 없다, 라고 했지만.
“···.”
네드와 아델은 딱히 설득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어쨌거나, 글이 빨리 잘 써진다는 건 여러모로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영화 포스터와 스틸컷, 티저 이미지 따위로 장식된 시사회장에 들어섰다.
극장은 벌써부터 많은 관객으로 북적거렸는데.
“으어어어--”
“대박, 멋지다···.”
네드와 아델이 탄성을 지르는 가운데.
나 또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영화 포스터를 눈에 담았다.
[Something lives in the Lake]
[막성스 라미 감독| 빈스 싱클레어, 노아 데보로 주연]
검푸른 호수를 배경으로 선 소년의 뒷모습이 시선을 확 끈다.
···그리고 포스터 아래쪽에 작게 적힌, 또 한 줄의 문구 또한.
[Based on Egon K’s Novel of Same Title(에곤 K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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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영화 타이틀이 나타났다 사라지며 시작되는 첫 장면은-
‘저 배우가··· 미친 연기력의 아역이라는 노아 데보로.’
예쁘장하지만 어딘가 창백한 느낌을 주는, 소년 일라이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시작된다.
소년의 자취를 따라가며 진행되는 영화는 -앞서 막성스 감독이 내게 얘기했던 대로- 기본적으로 파운드푸티지 형식을 띠고 있다.
소설에서는 소년과 수사관의 서사가 차례로 진행된다면.
영화에서는 CCTV 기록, 소년이 주변과 주고받은 메시지나 통화 내역, 그 외 다양한 인터넷 기록 따위를 제시해나가며-
‘마치, 실제 있었던 사건을 다루는 듯한 착각을 주는 식이지.’
하지만 그런 장르가 주는 서사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중간중간 ‘소년’과 ‘수사관’의 시점 또한 번갈아 등장하는데.
이 둘을 외부에서 비추기보다는, 그 둘의 시각으로 영화가 진행되는 식.
-안 돼, 하지마- 아파! 아프단 말이야!
비명과 외침이 터져 나오고, 마음속의 독백은 자막으로 흘러나오는 연출 속.
화면 한가득 동급생들의 주먹과 신발, 발길질이 무수히 쏟아지더니.
‘···!’
화면의 색조가 점차 흐려지다가 어느새 ‘수사관’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연출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아는 내용인데도 손에 땀을 쥐게 되는 건, 역시 연출의 힘이 아닐까.’
그때부터 나는 그저 한 명의 관객이 되어 스크린 속의 세계에 완벽하게 몰입한 채 감상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