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87화 (87/126)

인기인(1)

내가 무대에서 내려온 후로도 또 다른 부문의 시상들이 길게 이어졌다.

수상자들이 무대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이 몇 차례 반복되는 가운데 느낀 것이 있다면.

‘아까부터 유난히 나한테 시선이 쏟아지는 기분인데.’

그 생각에 슬쩍 뒤를 돌아보자.

“···!”

흠칫하며 나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는 사람들.

···이런 상황이 시작된 시점을 정확히 따져보면, 방금 전 단편 부문을 대표해 무대에 올라갔다 내려온 후였다.

아무래도 부문 대표로 상을 받아서 쳐다보는 것 같은데, 그런 거라면 크게 신경 안 써도 되지 않을까.

어쨌거나.

시상식은 굉장히 성대한 분위기 속에서 막을 내렸다.

어느 유명 재즈 보컬리스트가 나와서 축하 공연까지 펼쳐준, 무척이나 기분 좋은 시간.

시상식이 끝나고 나니 대강당 바로 옆의 홀에서 수상자 전용 리셉션 행사가 열렸다.

간단한 다과와 핑거푸드, 음료가 차려진 가운데, 다들 본인의 잔을 들고 돌아다니며 환담을 나누는 분위기.

“이런 것도 오랜만이네···.”

편집자 시절, 이런 자리에 지겨울 정도로 다닌 탓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데.

옆에 서 있던 레너드 선생님이 나를 놀란 눈으로 돌아본다.

“유진, 이런 행사도 다녀봤나 보구나.”

“네? 아, 그게-”

“아버님이 어릴 때부터 자식 교육을 굉장히 잘 시키셨어. 네게 회사를 물려주실 모양이신가 보구나.”

“네? 그건 잘 모르겠는데···.”

얼떨결에 후계자 조기교육을 받은 것이 돼버려 말을 흐리는데.

레너드 선생님이 웃는 낯으로 말을 받았다.

“하하, 난 학생들 중 유진 너처럼 출판업계 관련 상식에 빠삭한 경우는 처음 봤거든.”

“아, 그건 확실히··· 저희 아버지가 철저하게 알려주신 덕분이 맞습니다.”

···아버지가 동종업계 종사자인 덕을 이렇게 보는구나.

나는 웨이터에게 받아든 레모네이드를 기분 좋게 홀짝거렸다.

‘음, 상큼하고 좋네.’

이런 자리에서 와인이나 칵테일 대신 음료수를 마신다는 게 신선한 기분이긴 하지만.

어차피 회귀 이후로, 아예 술담배는 평생 입에도 대지 않기로 결심하지 않았던가.

···담배야 그렇다 쳐도, 퇴근 후 맥주 한 잔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건 많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건강이 최고이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레너드 선생님이 이곳에 오기 전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맞다, 선생님. 그때 얘기하셨던··· 레너드 선생님의 은사 분도 여기 온다고 하셨죠?”

“그래. 안 그래도 리셉션 행사 끝날 때쯤 같이 이동하기로 했는데, 괜찮니?”

“그럼요.”

아이오와대학의 문예창작학 교수로 재직 중이시라고 들었다.

‘은사님이 유진 너도 함께 봤으면 싶은 것 같은데, 괜찮겠니?’

거기에 이 은사님의 친우분도 같이 올 건데 부담스럽지 않겠냐는 물음에-

‘부담스럽긴요, 괜찮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흔쾌히 합석하겠다고 한 터였다.

편집자로 일할 때도 나이 많은 저자분들과 함께한 경험이 많다 보니, 오히려 가끔은 동년배보다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니.

‘그건 그렇고.’

잔을 들고 돌아다니던 내 눈에 벽에 붙은 수상자 명단이 들어왔다.

오늘 무대에 올라가 대표로 받은 학생들 말고도, 전국상 수상자 전원의 이름이 있는 버전.

“아, 이거. 아까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 이미 에이전트가 있거나, 기존에 출간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라더구나.”

“아···.”

레너드 선생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명단을 훑어보는데.

[줄리언 하츠]

[트레이시 코헨]

[보니 블리스]

···

‘···이 이름들, 왜 이렇게 익숙하지.’

출판계에서 일하면서 이름을 들어본 작가들, 혹은 동종업계 종사자들의 이름들이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심지어는-

‘어? 이건··· 내가 담당했던 작가 이름 같은데?’

나히드 파텔.

당시로서도 흔치 않은 이름이었으니 동명이인일 것 같지는 않다.

‘되게 신기하네.’

혹시 이 자리에서도 아는 얼굴을 만나지 않을까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아까, 단편 부문 대표로 수상한-”

“유진 권! 유진 맞죠?”

자연스럽게 나한테 다가와 말을 붙이는 학생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그리고 어느새, 정신 차려보니 여러 명의 여학생들에게 붙들린 상태.

“혹시 그, 셰익스피어 앤솔로지에 <6인의 고백> 쓴 권유진 맞아요?”

“아, 네 맞습니다만-”

“와, 미쳤어!”

“진짜 동일인물이었다니.”

“저, 사인 좀 해줄 수 있어요?”

“네? 그건 좀···.”

당황스럽기도, 민망하기도 해서 말을 흐리자.

“아 그럼 사진! 사진은 괜찮아요?”

“잘생겼어요~”

“여기 여기, 같이 찍어요!”

···그 기세에 휩쓸려버렸달까, 얼떨결에 같이 사진까지 찍게 되었다.

그런 나를 레너드 선생님이 히죽거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와, 저기 뭐야? 유명인인가?”

“신기하네···.”

이쪽으로 그 이상 시선이 쏟아지기 전.

나는 사진을 찍자마자 부리나케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난 유진 네가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 처음 봤다.”

레너드 선생님은 간만에 나를 놀릴 수 있다는 것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벌써 유명인이 다 됐는걸?”

“유명인은 좀.”

내 반응에 낄낄거리며 좋아하시는 선생님.

“천하의 유진도 여학생 팬 앞에선 쑥스러워하나 본데, 으하하.”

“···팬 아닌데요.”

“굳이 말을 걸어서 잘생겼다고 칭찬하고, 같이 사진 찍고 싶다 하는 게 팬이 아니면 대체 뭐겠냐 흐흐.”

음, 아까 그 학생이 <셰익스피어 앤솔로지>를 알고 있다는 것엔 좀 놀라긴 했지만.

어쨌든 여기엔 문예창작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모여 있는 자리 아닌가.

‘그러면 뭐, 그 작품을 아는 것도 이해가 되긴 하지.’

···말이 좋아 스콜라스틱 금메달리스트이지, 결국 이 상은 어디까지나 ‘고등학교 수준’의 문학상에 불과하다.

진짜 무대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이전에 스타트를 기분 좋게 끊었다 정도일까.’

이 상 하나 하나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되겠지만, 지금 이 자리를 기분 좋게 즐기자 정도로 결론을 내리던 그때.

“권유진 학생, 맞나요?”

···일부러 리셉션 공간의 구석에 서 있던 우리에게 대여섯 명 정도가 동시에 다가왔다.

“드디어 내가 유진 학생을 보는군요.”

“아까 무대에 올라가 상 받는 거 잘 봤습니다!”

“긴장 하나 안 되는지 떨지도 않던데, 허허.”

척 보기에도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장년의 무리.

레너드 선생님이 눈빛으로 무언의 신호를 보내는 것을 보고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분들은 아마도 내게 입학 제의를 해온 입학담당자들.’

그중에서도 스콜라스틱 공모전에서 심사를 담당했던 교수들일 것이었다.

“후후, 이렇게 얼굴 보게 된 것도 인연인데··· 유진 학생 우리 쪽 제안은 어떻게, 생각해봤어요?”

“아니, 우리 컬럼비아 대학이 먼저이지. 유진 학생, 이건 내 명함인데-”

“그래, 그 공문에 대해 학교 측에선 언제 제대로 된 답변을 해줄 건지···.”

나와 미스터 레너드가 어쩔 줄 몰라하는 가운데, 교수들 사이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아직 11학년인데 왜 벌써부터 이렇게 재촉을 해요? 그러면 부담스럽지.”

“아니, 부담스럽다는 사람이 왜 먼저 그 얘기를 꺼내는데?”

“그래요, 엘런 교수가 제일 먼저 말을 꺼내놓고 이제 와서-”

“잠시만, 다들 진정 좀 하시고.”

그때, 2미터는 족히 될 법한 장신에 건장한 체구.

험상 궂은 인상의 장년 남성이 그 안으로 끼어들었다.

‘···누구지.’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 문학 교수라기보다는 왕년의 액션 배우, 혹은 스턴트맨 같은 인상인데.

“아직 고등학생인 학생에게, 교수 여럿이 달려들어서 뭐 하자는 겁니까?”

배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동굴 목소리로 호통치듯 말하자, 교수들이 일순 움찔했지만.

“아니, 스탠리 교수님도 따지고 보면 유진 학생에게 접근하려던 것 아닙니까?”

“그래요, 우리가 언제 달려들었다고요.”

“무슨 표현을 그렇게···.”

그들이 얼른 침착을 되찾고 빠르게 반격에 나서려던 그때.

왕년의 액션 배우, 아니 ‘스탠리 교수’의 뒤에 가려져 있는지도 몰랐던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그런 게 아니고, 개인적인 약속이 있어서.”

가느다란 체구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온화한 인상의 교수.

“이 유진 학생의 담당 교사가 내 제자라서 말입니다, 허허.”

그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꺼낸 말에 레너드 선생님이 반갑게 외쳤다.

“해럴드 교수님!”

“그래, 오랜만이구나 레너드.”

그러자 우리 주변을 둘러쌌던 교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저 유진 학생의 지도교사가-”

“해럴드 교수님 제자라고요?”

“이, 이건 반칙이야-”

···대체 뭐가 반칙인지는 모르겠지만.

“하하, 그럼 우리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해럴드 교수의 그 말에 이어, 무시무시한 인상의 스탠리 교수 또한 씩 웃으며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

<토끼 남작의 모험> 2권 출간을 1주 반 정도 앞둔 시점.

이 책의 미국판과 영국판을 각각 담당하는 원더테일과 머핀북스는 일제히 예약 판매를 개시했다.

“사전예약 페이지 오픈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토끼 남작> 담당자 대니얼 앤더슨 수석편집자는 물론, 원더테일의 직원들 모두가 잔뜩 신이 나 있는 상황.

“아니, 이거 예약판매 수치가 이렇게 빨리 올라가는 건 처음 보는데요?”

“새로고침만 해도 숫자가 막···.”

“이게 바로 대형 베스트셀러의 위엄이로군요!”

지난 몇 년간, 제대로 된 베스트셀러가 나온 적이 없는 원더테일은 이 <토끼 남작>의 성공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물론, 영국판을 담당하는 머핀북스의 기대도 이보다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던 터.

한편, 이처럼 급격히 인기를 얻은 신규 베스트셀러를 시기하는 세력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었는데.

“이것 좀 봐, 또 이런 식의 기사가 났어.”

방금 전만 해도 예약 판매창을 즐겁게 지켜보던 편집자 한 명이 인터넷 기사를 스크롤하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왜, 어디 봐봐.”

“아, 이거 <인디북리뷰>잖아.”

“여기라면 지난번에도···.”

그의 자리를 둘러싼 채, 화면 속의 기사 제목을 본 직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토끼 남작의 모험>, ‘요행으로 써낸’ 동화의 반짝 인기가 어디까지 이어질까···]

제목부터 뻔히 의도가 보이는 부정적인 리뷰의 기사들은, 이것 외에도 꽤 많았다.

‘동생에게 주기 위한 생일선물’이라는 뻔하디뻔한 감동 마케팅이 통한 거라든가.

막상 펼쳐보면 깊이가 얕은, 알맹이 없는 이야기라든가.

지적하는 바는 각자 조금씩 달랐지만, 이 <토끼 남작> 1권의 성공이 거품에 불과하며 2권이 나오면 그 바닥이 드러날 거라는 것이 주된 요지였다.

“일부러 2권 출간 직전에 맞춰서 내놓다니···.”

“아주 저주를 퍼붓는구만, 저주를 퍼부어.”

“부러우면 부럽다고 얘길하지 재를 뿌리네요 진짜.”

이 기사들은 대부분 원더테일의 경쟁업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대형 어린이책 출판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 중인 곳.

그러나 막상, <토끼 남작>의 담당자 대니얼 앤더슨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뭐, 이 업계에서 이런 거 어디 한두 번 보나? 그건 됐으니까, 다들 와서 이거나 봐봐.”

“어 그건!”

방금 전 원더테일 사무실에 도착한 택배.

···거기에는 미국 최대의 완구업체 해즈브로의 마크가 떡하니 붙어 있었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린 사무실 직원들의 눈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자, 한 번 뜯어볼까?”

그리고 이내.

상자 안에서 나온 ‘남작 베니’ 키링 인형, 그러니까 초판 한정 스페셜 굿즈의 모습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열쇠고리 인형 ‘베니’였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에 3을 옆으로 기울여놓은 모양의 입, 금방이라도 쫑긋거릴 듯한 기다란 귀.

망토를 걸치고 당근 검을 든 인형에 ‘해즈브로’ 정품 택이 붙은 모습이 완벽하다.

“와, 이거라면-”

“그렇지, 저런 기사 따위 하나도 신경 쓸 거 없다니까?”

크기는 작지만 그 귀여움만큼은 심장을 직격할 정도로 강력하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에 진심 어린 웃음이 지어지는 가운데.

‘우리의 카드는 이 굿즈뿐이 아니지.’

대니얼 앤더슨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 들어온 것은 책상 위에 올려진 세 개의 인형탈.

···각각 베니, 버터컵, 안킬로 백작의 인형탈로, 그림 작가 네드의 일러스트를 완벽에 가깝게 재현해냈다.

‘이걸 쓰고 사인회를 진행한다면!’

분명 반응이 어마어마할 것이라고, 대니얼 앤더슨은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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