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88화 (88/126)

인기인(2)

그리고 잠시 후.

우리 네 사람은 예약해둔 레스토랑으로 이동해 주문을 마쳤다.

‘처음엔 왜 굳이 미리 만나서 이동하자고 했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아까 리셉션장에서 여러 명의 교수들에게 둘러싸여 질문 공세에 시달리던 것을 떠올리니, 현명한 처사였다는 생각이 든다.

웨이터가 테이블을 떠나자마자 레너드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교수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레너드. 작년 초에 보고 처음이니···.”

다소 유약한 인상의 이 노교수가 바로, 말로만 듣던 레너드 선생님의 은사 해럴드 그린.

아이오와대학 작가워크샵을 이끄는 ‘명교수’로 유명하신 분이라고 들었다.

“유진 너도 인사하렴. 해럴드 교수님과, 시카고대학의 스탠리 교수님.”

나는 절친한 사이라는 두 분을 보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들. 유진 권이라고 합니다.”

“허허, 반가워요 유진 군. 우리 레너드의 제자라고.”

미소 지으며 가볍게 인사를 받는 해럴드 교수와 달리-

“···나도, 반갑습니다, 유진 군.”

···스탠리 교수는 어쩐지 눈빛이 조금 무서웠지만.

‘그나저나 원래 스콜라스틱 공모전이 이런 식인 건가.’

유수 공모전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학생을 사전에 스카웃해가려는 경우는 꽤 있다 듣기는 했지만.

그게 이렇게 열정적으로 이뤄지는 과정인 줄은 상상도 못 했는걸- 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늘의 경우는 좀, 이례적인 케이스에 가깝다고 해야겠지.”

마치 내 머릿속 생각이 들리기라도 한 듯, 해럴드 교수가 꺼낸 말에 레너드 선생님이 되물었다.

“이례적인 케이스요?”

“물론 이 스콜라스틱에서 수상한 학생을 대학에서 스카웃해가는 선례야 상당히 많지만.”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해럴드 교수.

“그걸 감안하더라도, 나는 한 명의 학생에게 이 정도로 몰리는 경우는 거의 처음 봤거든.”

“아···.”

탄성을 내뱉은 레너드 선생님만큼이나, 나 또한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보던 그때.

“으흐흐, 그래서 나와 해럴드가 나서서 이렇게 기선 제압을 한 거지!”

씩 웃으며 끼어드는 스탠리 교수.

“중간에 누가 잡아채갈지 모르니 미리 미리 선점해야 한다고. 내 말 듣길 잘하지 않았나, 해리!”

“아, 그거야··· 그렇지.”

“안 그랬으면 그 사기꾼 같은 교수 놈들에게 ‘우리 유진 군’이 꼼짝없이 붙들렸을 텐데, 으하하.”

우리 유진 군···.

지나치게 친숙한 표현에 조금 흠칫하는데.

“크흠, 스탠리. 자네 표현이 조금, 과격하구만.”

“과격하긴 뭐가 과격해?”

“···.”

때마침, 주문했던 요리가 나왔고.

우리 네 사람은 조금 어색하게 식사하기 시작했다.

*

“그나저나, 제자 얼굴을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반갑구먼.”

사실.

해럴드가 꼭 유진을 포섭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아니었다.

레너드 하인스는 그가 특별히 아끼는 제자이기도 했고, 졸업 후 매년 잊지 않고 그를 찾아와준 고마운 제자였으니까.

‘이렇게 제자와, 그리고 그 제자의 제자와 함께 식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해럴드 그린이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면-

‘내가 이 친구, 이럴 줄 뻔히 알았지.’

그런 제 친구의 속내가 빤히 보인다는 듯 스탠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까 보니까 뉴욕대도 그렇고, 콜롬비아대도 그렇고, 유진 학생에게 대놓고 눈독을 들이던데···.’

그들이 맹수처럼 눈을 빛내던 것을 떠올리던 스탠리 미첼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고.

“흠, 그건 그렇고.”

이내 사제 간의 추억으로 한도 끝도 없이 흘러가려던 화제를 바로잡았다.

“유진 군은, 좀 어떤가? 이번에 이 스콜라스틱 메달을 수상한 후로 변화가 있는지.”

여태 침묵을 지키던 유진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변화라면··· 상당히 있기는 했죠. 일단은 제가 쓴 글이 인정받았다는 것 자체가 고무적이었고.”

그때만 해도 지나치게 순진해 보이던 청년은-

“···무엇보다, 이번 금메달을 수상하게 되면서 여러 대학에서 아주 좋은 조건의 입학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냥 어리숙한 건지 직설적인 건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스탠리가 바라던 화제를 입 밖에 냈다.

“그래, 입학 제의를··· 많이 받았나 보군.”

“네, 그리고 그중 스탠리 미첼 교수님이 주신 제안도 있는 걸로 아는데요.”

“···!”

설마, 자신의 이름이 여기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스탠리가 일순 당황했다.

그는 -다른 수많은 교수들처럼- 유진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는 하수 같은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입학처장이 메일을 보냈고, 그다음에는 학교 공문으로 연락했는데 어떻게 그걸.’

험상궂은 얼굴에 드물게 당황의 빛이 떠올랐지만.

“어, 스탠리 교수님이 주신 제안이 아니었나요?”

스탠리는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고.

“아니, 맞네. 사실 내가 자네의 공모전 작품, 그러니까 를 읽고 점 찍어둔 걸세.”

짧은 고민 끝, 에둘러 말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그걸 읽으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거든.”

진지하게 빛나는 유진의 눈을 보며 스탠리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다룬 작품은 수없이 많지만, 뭐랄까. 솔직히 나는··· 내가 학생의 작품을 심사하면서 그런 감정을 느껴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네.”

그리고 이 같은, 더할 나위 없는 교수의 극찬에 유진은 감격하거나 어쩔 줄 몰라하는 대신-

“정말 영광스러운 말이네요.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지극히 프로페셔널한 대답을 했다.

···이미 그 순간에도 스탠리는 ‘어라?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음, 그건 그렇고.”

제 친구의 눈치를 보던 해럴드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혹시 유진 군은, 그중 어느 곳으로 갈지 생각해둔 게 있나? 따로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한 마음에···.”

해럴드가 횡설수설하려던 그때, 스탠리가 쯧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아니 뭘 이 정도로 부담이 될 게 있나? 사적인 자리에서 학생의 의향이야 충분히 물어볼 수도 있는 거지.”

“맞습니다, 충분히 물어보실 수 있죠. 그리고 저는···.”

싱긋 웃은 유진이 스탠리와 해럴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이오와 대학에 갈 생각입니다.”

“···!”

헤럴드와 스탠리의 눈이 여러 가지 의미로 커지는데.

먼저 정신을 차린 스탠리가 어버버거리며 그 말을 받았다.

“아니 아니, 잠깐만. 그걸 벌써 확정했단 말인가? 그냥, 의향을 슬쩍 물어본 거지 고민은 내년 3월까지 충분히 해봐도···.”

그러면서 덧붙이길.

자네를 본 대학 담당자들이 또 어떤 제안을 해올지 모르는 일 아니냐 하자.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제안들이라 해도 상한선이 있지 않나요?”

“어, 그게-”

“4년 장학금에 학업 보조금, 그 외의 이런 저런 혜택이 전부일 텐데.”

유진은 유명 대학의 교수들과 마주 앉아 있는 것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지극히 편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제게는 사실상 판도를 뒤바꿀 만한 영향은 주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요.”

“···.”

스탠리는 한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고, 해럴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벌써, 확고하게 결정을 내렸다는 의미인가?”

“네, 말하자면···.”

이내 한쪽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는 청년.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이지만요.”

개인적인 이유, 라는 말에 두 장년의 교수들은 그 이상 캐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 다음 요리가 나왔네요. 식기 전에 얼른 드시죠.”

해럴드의 제자, 레너드 하인스가 부드럽게 화제를 전환한 덕분에.

네 사람의 대화는 다시금 원래의 궤도를 되찾았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유진 군이 아이오와대학으로 마음을 결정했다고.’

그러한 결정이 해럴드는 진심으로 반가우면서도, 오늘 이 자리를 몹시나 기대했던 제 친구가 조금은 신경쓰였고.

‘그 개인적인 이유라는 게 대체 뭘까.’

스탠리는 유진이 입 밖에 냈던 그 이유가 너무도 궁금해, 고기가 목으로 제대로 넘어가지 않는 기분이었다.

*

식사를 마치고 나온 일행의 발걸음은 어느 샌가 근처 대형서점으로 향했다.

그건 마치 참새가 방앗간을, 혹은 고양이가 생선을 지나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는데.

“으흐흐, 책 좋아하는 사람은 서점에 들어가보지 않고 못 배기는 법이지.”

스탠리의 말마따나, 약속이라도 한듯 서점에 들어간 일행은 소설 신간 코너에서 멈춰 섰다.

“세상에, 비숍 작가의 새 단편이 나왔다니. 까맣게 모르고 있었구만.”

“오, 교수님들도 랜든 비숍을 좋아하세요?”

“그럼 물론이지, 우리 세대에게 비숍은 그야말로 스타 작가이거든.”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사이언스앤드판타지> 특별호.

랜든 비숍의 <어둠 속의 방문자> 신작 단편과 에곤 K의 피터팬 중편 시리즈 등 그간의 인기 단편들만 따로 묶어서 기획한 ‘베스트 선집’이었다.

‘안 그래도 두 달 전엔가, 마크 담당자한테 얘기를 전해들었는데.’

이렇게 타이밍 좋게 서점에 나온 걸 보게 되는구나, 흐뭇하게 웃던 그때.

“아, 에곤 K. 이 신인 작가도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함께 여기에 실렸구만.”

그 말에 유진이 한순간 움찔하는데, 스탠리가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친구의 말을 받았다.

“이봐 이봐, 이거 말은 똑바로 해야지. 에곤 K는 내가 자네한테 먼저 발견해서 알려주지 않았나.”

“하하, 그건 맞아. 사실은 나를 SF의 세계로 이끌어준 것도 바로 이 스탠리이거든.”

“스탠리 교수님이요?”

SF문학을 좋아하는 영문학자라니, 참 의외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내가 셰익스피어 학회 정회원이고, 고전문학 매니아인 건 맞네. ···그래서 <셰익스피어 앤솔로지>에 실린, 자네의 <6인의 고백>도 아주 인상깊게 읽었고.”

“···아.”

그 말에 유진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기분 좋게 보던 스탠리가 말을 잇는다.

“그렇지만 내가 고전문학과 순문학만 읽는, 그런 고리타분한 노인네는 아니거든.”

넓고 다양하게,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는다는 스탠리 미첼의 말에 유진이 히죽 웃었다.

“저랑 비슷하신걸요.”

“그래?”

“저도, 재미만 있으면 가리지 않고 읽는 편이라.”

“허허, 어린 친구가 뭘 좀 아는구만.”

“그, 예전에··· 비숍 작가님의 인터뷰에서였나. 소설의 세계에서 장르라는 건 결국 가구에 불과하다는 말이 인상적이더라고요.”

“···.”

어떤 가구를 배치하냐에 따라.

하나의 이야기가 스팀펑크가 될 수도, 판타지가 될 수도, 혹은-

“현대 배경의 호러물이 될 수도 있는 거라고요.”

“···그렇지, 바로 그거야. 장르에 따라 어울리는 이야기와, 특유의 색채는 달라질 수 있을지언정-”

스탠리가 맞장구를 치자, 해럴드가 자연스레 그 말을 받았다.

“결국, 사람이 중심이 되는 것이야말로 문학이라는 건··· 어느 장르건 차이가 없다, 이 말인가?”

“네, 바로 그겁니다.”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

이처럼 세 사람의 의견이 기분 좋게 합치한 가운데, 해럴드는 옆에 선 레너드를 돌아보며 이런 눈빛을 보냈다.

‘우리 제자가 제자 한 번 참 기깔나게 키워냈구만.’

···그리고 그 눈빛을 대충 알아들은 레너드는 괜히 멋쩍은 기분이었다.

‘음, 교수님, 그 친구는 그냥··· 원래부터 그랬는데요.’

서점 나들이를 마치고 나와 센트럴파크를 가로질러 가던 길목.

“조금 힘든데, 잠시만 앉았다가 가지.”

이 중 제일 고령인 해럴드 교수의 말에 일행은 근처의 어느 벤치에 앉았다.

붉게 노을진 하늘에서 로빈새와 집참새, 찌르레기 따위가 활공하는 모습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이런 곳이 바로 천국이 아닐까 싶네요.”

유진이 멍하니 입 밖에 낸 한 마디에, 두 명의 노교수가 풋 터지고 말았다.

“자네는 무슨 말하는 게 나보다 더 노인네 같구만.”

“에이, 그건 그래도 좀 그렇지-”

“하하, 아녜요. 평소에도 그런 말을 많이 듣거든요.”

피식 웃던 유진이 문득 이런 얘기를 꺼냈다.

“음, 제가 조금···. 뭐라고 할까요, 건강 염려증 정도는 아니지만 늘 불안해하는 편입니다. 미리 걱정하는 타입이라고 할까요.”

“그래? 자네를 보면 전혀 그럴 거 같지 않은데.”

“그럼 그럼, 강심장이던데? 무대 위에 올라가서도 하나도 안 떨고.”

그 말에 하하 웃는 유진의 모습이 꽤 어른스러워 보였다.

“제가 얼굴에 티가 잘 안 나기도 하고, 그런 쪽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인데··· 뭐라고 해야 하나.”

이내 자세를 고치고 앉은 청년의 얼굴이 더없이 진지하다.

“아까 제가,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말씀드린 거 있잖습니까.”

그 순간.

두 노교수, 거기에 담당교사 레너드까지 내심 궁금해하던 이야기가 유진의 입에서 나오자-

“···.”

세 사람은 일순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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